14화 빌려 달라는 게 아니야. (2)
아멜리아는 기가 찼다.
다짜고짜 돈을 내놓으라니, 감히 자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은 지셀이 처음이었다.
거기다 ‘우리 사이’라니?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었다.
그녀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공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할 말은 해야겠군요. 레이폴드는 거지 같은 페르디움에 이미 많은 지원을 하고 있어요.”
“거지라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우리 아버지가 들으면 섭섭해하시겠어. 시아버지 될 사람한테 거지라니.”
“다짜고짜 찾아와서 돈을 달라는 게 구걸이 아니면 뭔가요? 이것도 페르디움 백작님의 뜻인가요?”
아멜리아의 말에 지셀은 다리까지 꼬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가 북부를 틀어막지 않으면 왕국은 상당히 피곤해지겠지. 누군가가 해야만 하는 일을 우리가 나서서 해 주고 있는 거야. 너희는 그런 우리를 지원하는 거고. 그건 거래지, 구걸이라고 하지 않잖아?”
그의 말은 정론이었다.
누군가는 북방의 야만인들을 막아야 한다. 그게 페르디움이 척박한 변경에서 허구한 날 전쟁을 하고 있는 이유였다.
페르디움이 대신 싸워 주고 있으니, 그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왕실과 다른 영지들이 나누어 부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말에 아멜리아는 우습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래서 공자님이 야만인과 싸우고 있나요? 북방을 막는 건 페르디움 백작님이고 제 아버지는 이미 페르디움에 넘치도록 지원하고 있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레이폴드는 이미 페르디움에 많은 지원금을 보내고 있었다.
지셀이 그걸 따지면서 돈을 달라고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흠, 지금 당장은 내가 막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미래를 생각하면 그쪽이 나한테 돈을 주는 게 딱히 틀린 것도 아니야.”
“무슨 미래요?”
아멜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지셀은 입꼬리만 살짝 끌어올리며 답했다. 그의 눈에는 웃음기 한 점 없었다.
“미래에는 내가 페르디움을 물려받을 테니까. 그러면 미래의 레이폴드 백작이 될 그쪽이 나한테 지원해 주는 건 당연하잖아. 그걸 미리 좀 받아 가겠다는 말이지.”
“……!”
아멜리아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누군가 들으면 목이 날아갈 만한 발언이었다.
이게 지금 뭘 알고 던지는 건지, 아니면 원래 미친놈이라 그냥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싸늘한 침묵이 맴돌았다.
아멜리아가 살짝 심호흡을 하고는, 침묵을 깨고 말했다.
“공자님…… 아무리 장난이라도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랍니다. 저는 여자고 레이폴드의 후계자도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레이폴드 백작이 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아, 그런 자리는 관심이 없다?”
“관심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에요. 어차피 저는 페르디움으로 시집갈 몸이 아닌가요? 누가 들으면 비웃겠어요.”
“나랑 결혼 안 할 거잖아?”
“…….”
아멜리아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너 같은 망나니하고 결혼하겠어!’
선대에 맺었던 약속만 아니라면, 지셀 따위는 감히 아멜리아와 약혼하기는커녕 마주 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아멜리아의 표정을 본 지셀이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여기 오래 있고 싶지 않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그쪽이 백작 자리에 관심이 있건 없건 사실 신경 안 써. 난 돈만 받아 가면 돼.”
“당신에게 돈을 줄 이유도 없지만, 애초에 제게는 그만한 돈도 없어요. 뭘 보고 제게 돈을 달라는 거죠?”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악티움 상단 잘 크고 있잖아? 돈 많잖아?”
악티움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아멜리아는 순식간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셀을 노려보는 눈에서 살기가 묻어났다.
하지만 분노로 동요를 감추었을 뿐, 겉모습과 달리 그녀의 마음속은 혼란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긴가민가했는데, 방금 그 말로 확신할 수 있었다. 지셀은 그녀의 약점과 야망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표면적으로는 악티움 상단과 어떤 연관도 없다.
현재 상단의 주인도 그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고, 일부러 그 사람과 최대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지셀은 콕 집어 악티움 상단을 거론했다. 대체 지셀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지셀은 여유롭다 못해 평온한 얼굴로 덧붙였다.
“길게 말 안 할게. 소문내지 않을 테니 1만 골드를 내놔. 그 정도면 저렴하잖아? 나를 못 믿겠으면 돈의 무게를 믿으라고.”
그녀는 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비밀이 들키면, 아멜리아는 모든 것을 잃게 될 테니까. 어쩌면 목숨까지도 말이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걸린 것이다.
지셀도 그걸 잘 알기에 뻔뻔하게 밀어붙였다.
‘아직 가문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겠지. 이 협박이 통하는 것도 지금뿐이야.’
아멜리아 레이폴드.
상냥하고 우아한 성품과 높은 학식으로 유명한, 귀족 중의 귀족이라 불리는 여자.
그리고 훗날 다른 귀족들에게 ‘북부의 마녀’라 불리는 악녀 중의 악녀.
지셀의 전생에 그녀는 아버지인 레이폴드 백작을 탑에 감금하고 이복형제들을 모두 죽인 뒤, 가문과 영지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델파인 공작가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녀가 백작위를 차지하는 데 가장 큰 기반이 되어 준 것은 악티움 상단이었다.
호위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사병을 키워 낸 악티움은, 단순한 상단이 아니라 재력과 무력을 모두 갖춘 집단이었다.
‘다른 단체도 여럿 거느렸던 모양이지만…… 역시 악티움 상단이 가장 규모가 컸어.’
백작위를 차지하고 악티움을 거대 상단으로 키워낸 뒤, 아멜리아의 칼끝은 페르디움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것은 훗날의 일.
‘지금은 세력을 숨기는 데만도 벅찬 상태일 거다.’
레이폴드 백작은 자식이 많았다.
자식들 사이에 나이나 역량도 크게 차이 나지 않아, 후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그녀가 야심을 품고 몰래 세력을 키우는 사실이 탄로 난다면 형제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를 갈며 지셀을 노려보았다.
‘망나니 놈 따위가 대체 어떻게…… 설마 델파인 공작가와 손을 잡았다는 것도 아는 건가?’
그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레이폴드 백작은 델파인 공작가에 적대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아멜리아가 델파인 공작가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자금과 병력까지 지원받고 있다는 걸 알면 백작도 딸과 연을 끊을 것이다.
‘지금은 의혹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이 되는 상황이야.’
물론 지셀에게 뚜렷한 증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지셀이 꺼낸 이야기를 듣고 의심하게 되면 위험해진다.
어쩌면 증거를 없애기 위해 델파인 공작가에서 자신을 제거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 요소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자님.”
“왜? 이제 생각이 바뀌었어? 돈 줄 거야?”
“공자님은 선을 너무 많이 넘으셨어요. 아쉽지만 이만 헤어지도록 하지요.”
“벌써? 돈도 안 받았는데?”
아멜리아는 지셀의 말을 무시한 채 허공에 대고 입을 열었다.
“처리해.”
그 한마디에, 큰 책장이 있던 벽이 뒤집히며 검을 든 사내가 걸어 나왔다.
하지만 지셀은 놀란 기색 없이 피식 웃었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영지전이 벌어질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
“페르디움 백작님을 믿으셨나 본데, 안됐지만 그분은 여기 안 계세요. 공자님과 일행들은 여기에 온 적이 없는 걸로 처리될 겁니다.”
“냉정하기는. 그래, 뭐…… 그런 여자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
지셀은 예상했다는 듯 덤덤히 일어나 검을 뽑았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코웃음만 쳤다. 지셀의 실력이 형편없다는 건 근방에서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녀는 턱을 쳐들고 우아하게 명령했다.
“빨리 치워. 꼴도 보기 싫으니까. 가자, 바스테트.”
냐앙.
그녀는 더 볼 것도 없이 몸을 돌렸다.
이대로 밖으로 나가 지셀과 같이 온 일행들도 죽이라 명할 셈이었다.
카아앙!
뒤에서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한 번.
“커억!”
그리고 짧은 비명이 한 번 울려 퍼졌다.
아멜리아는 덜컥 표정을 굳히고 걸음을 멈췄다.
그 비명이 지셀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돌아본 곳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쓰러진 남자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의 카펫을 적셔 갔다.
“숨겨 놓은 패치고는 너무 약한 거 아니야? 돈도 많으면서 실력 좋은 사람 좀 쓰지 그랬어.”
남자 옆에서는 지셀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검에 묻은 피를 털고 있었다.
“대, 대체 당신이 어떻게…….”
죽은 남자는 상당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지셀 같은 애송이는 한 수에 제압하고도 남는다.
그런 사람이 지셀 따위에게 당해 쓰러져 있다니. 아멜리아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콰앙!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문 앞을 지키던 기사 두 명이 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왔다.
“헉!”
그들은 시체 앞에 검을 들고 서 있는 지셀을 발견하고는 놀라, 바로 검을 뽑아 들고 포위했다.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아멜리아가 크게 외쳤다.
“죽여! 당장 저놈을 죽여!”
“고, 공자님을 말입니까?”
“빨리! 누가 오기 전에 빨리 죽이란 말이야!”
기사들은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지셀에게 다가갔다.
타 영지의 후계자를 죽이면 일어날 후폭풍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명령을 무시했다간 당장 자신들이 죽을 것이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요, 기사님들. 더 움직이시면 아가씨가 위험해져요.”
어느새 나타났는지, 벨린다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아멜리아의 목에 단검을 들이민 채 서 있었다.
그 뒤에서는 그녀와 같이 있던 네 명의 기사들이 문 앞을 막아섰다.
“사랑싸움이라기엔 좀 과격한데요, 도련님. 무슨 일이세요?”
벨린다가 지셀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그는 별거 아니란 듯이 답했다.
“그냥 조금 의견 차이가 있었어. 여자 마음은 참 어렵단 말이지.”
“젊을 때는 다들 그래요. 서로 양보할 줄 모르거든요.”
“그래도 이제는 대화가 좀 통할 거 같아. 그렇지, 아멜리아?”
지셀이 아멜리아에게 다가섰지만, 기사들은 벨린다가 그녀에게 상처라도 입힐까 봐 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분노로 가득 찬 아멜리아의 눈을 보고 지셀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줬으면 좋았잖아. 너한테는 푼돈일 텐데. 왜 굳이 상황을 험악하게 만들어?”
“당신…….”
“일이 이렇게 됐으니 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어차피 지셀도 아멜리아가 쉽게 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오히려 기대한 대로 일이 진행되어서 재미있기도 했다.
지셀은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띠고 말을 이었다.
“안타까운 소식 하나 알려 줄게. 이제 2만 골드로 올랐어. 아멜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