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빌려 달라는 게 아니야. (1)
레이폴드로 향하는 길에 벨린다가 물었다.
“그런데 정말 선물은 안 사요? 이대로 그냥 가는 거예요?”
“……뭐, 꽃이나 한 송이 사 가지.”
“오랜만에 보는 건데 그걸로 되겠어요? 별로 안 좋아할 거 같은데요.”
“상관없어. 잘 보이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흐음…….”
지셀은 진심이었다.
전생에 아무것도 모를 때는 예쁜 아멜리아가 마음에 들어 잘 보이려고 늘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지금은 미래의 적이 될 게 뻔한 여자한테 잘 보이고 싶은 생각도, 그녀와 약혼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번에는 그 돈지랄을 못 하게 해 주마.’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면 아무리 군사력이 강해도 말짱 헛것이다.
전쟁에는 막대한 돈과 물자가 소모된다. 군대를 유지할 자금이 없다면 군대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전생에 왕국의 끊임없는 물량 공세를 상대하며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병사들을 제대로 먹이고 무장시킬 돈도 없어서야 뭘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해.’
과거로 돌아온 건 좋지만 지금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 시기는에 델파인 공작가가 이미 대부분의 영지에 손을 쓰고, 북부에 본격적으로 손을 뻗치기 시작하는 때였다.
엘레나를 죽이는 것도 그 계획의 일환이었다.
지셀은 자꾸만 조급해지는 마음을 억눌렀다.
‘아멜리아,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두둑하게 내놔야 할 거다.’
그를 태운 말이 쉬지 않고 레이폴드 영지를 향해 달렸다.
아멜리아에게서 얼마를 뜯어낼까 상상하니, 불안감에 무겁던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했다.
* * *
일행은 무사히 레이폴드 성에 도착했다.
며칠 동안 말을 달리느라 흙먼지를 뒤집어썼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곧바로 성의 정문을 향해 가는 지셀을 벨린다가 붙잡았다.
“아니, 씻지도 않고 가요? 지금 먼지투성이에 이렇게 더러운데? 아멜리아 아가씨가 싫어할 거예요.”
“잘 보일 필요 없다니까.”
“허, 갑자기 왜 이렇게 변하셨을까?”
벨린다는 어리둥절해서 앞서가는 지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몇 달 전만 해도 아멜리아 얘기만 나오면 얼굴을 붉히던 지셀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쁜 남자 느낌으로 가시려고요? 이건 그냥 더러운 남자인데…….”
“됐다니까. 뭐, 그래도 오랜만에 왔으니 방문 선물은 사 갈까.”
지셀은 상점가에서 산 꽃다발 하나만 달랑 들고 레이폴드 성으로 향했다.
“멈추십시오. 무슨 일이십니까.”
경비병들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셀을 제지했다.
수행 인원도 적고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어 귀족임을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바로 벨린다가 앞으로 나섰다.
평소 장난기 있는 모습과 다르게 진중하고 절도 있는 태도였다.
“페르디움 영지의 대공자 지셀 님이십니다. 약혼녀인 아멜리아 공녀님을 만나러 왔으니 전해 주세요.”
수행원이 있을 때 귀족은 직접 나서지 않는 것이 관습이다.
지셀은 일단 벨린다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지, 지셀 공자님이요?”
경비병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도 아멜리아의 약혼자가 얼마나 형편없는 놈인지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모습에 벨린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뭐 하세요, 어서 안에 전하지 않고.”
“아, 알겠습니다.”
경비병 중 하나가 돌아서서 성안으로 들어가며 소리 없이 욕을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병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나왔다.
“저기…… 아가씨께서 현재 몸이 좋지 않으니 죄송하지만 이대로 돌아가시라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벨린다가 눈에 쌍심지를 켜며 경비병에게 다가갔다.
“대공자님께서 직접 오셨는데 만나 보지도 않고, 숙소를 내주지도 않고 이대로 돌아가라고요? 우리 페르디움 영지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요?”
경비병은 우물우물 답했다. 솔직히 우습게 보는 건 맞지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게 아니라…… 아가씨가…….”
“이봐요!”
벨린다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자, 경비병이 희게 질린 얼굴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뭐, 뭐지? 옷차림은 그냥 하녀인데 분위기가…… 비밀 호위 같은 건가?’
쏟아져 오는 압박감에 경비병이 몸을 떨었다. 지셀이 그제야 앞으로 나섰다.
“그만, 벨린다.”
“하지만, 도련님…….”
“괜찮아. 이제 내가 얘기하지.”
지셀은 벨린다를 물린 뒤 경비병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상단에 관해 상의할 게 있다고 전해라. 이대로 돌아간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보다 입이 가벼운 사람이거든.”
“네, 네. 알겠습니다.”
경비병은 도망치듯 도로 성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헐레벌떡 뛰어나온 경비병이 지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께서 안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갑자기 바뀐 대응에 벨린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셀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했기에 저렇게 순순히 마음을 바꿨는지 궁금했다.
지셀은 피식 웃으며 벨린다에게 속삭였다.
“내가 좋은가 봐. 어휴, 이놈의 인기란.”
“어머, 갑자기 웬 자신감이에요?”
벨린다는 갈수록 능글맞아진다며 지셀을 타박했다. 그래도 온종일 성질을 부리던 예전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일행은 화려한 접견실로 안내되었다. 지셀은 접견실까지 오는 내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탄했다.
‘와, 역시 부자네. 오길 잘했어. 발전 기금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레이폴드 성은 투박한 페르디움 성과 다르게 사방이 매우 비싼 자재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확실히 돈이 많은 영지다웠다.
벨린다와 기사들은 옆방에서 대기하고, 지셀 혼자 아멜리아를 기다렸다.
‘늦는군. 뭐, 내 말 때문에 생각이 무척 복잡하겠지.’
아멜리아는 상당히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셀이 찻잔을 비우고도 한참을 기다리다 지루함을 느낄 즈음, 접견실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 위로 탐스럽게 흘러내렸다. 살짝 내리깐 눈과 치켜든 턱이 오만하면서도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지셀의 약혼녀, 아멜리아 레이폴드였다.
냐앙.
고양이 한 마리가 꼬리를 꼿꼿이 세우고 그녀를 뒤따라 들어왔다.
푸른빛이 감도는 짧은 회색 털에 유연한 체형이 돋보이는, ‘바스테트’라고 불리는 고양이다.
주인인 아멜리아를 닮았는지 표정에서부터 걸음걸이 하나하나까지 우아하고 도도한 분위기를 풍겼다.
“오랜만이야, 아멜리아. 나 보고 싶었어? 저 고양이도 오랜만이네. 이름이 뭐였더라?”
능청스러운 인사에 아멜리아는 대답 없이 눈썹만 치켜올렸다.
‘지가 뭐라고 내 이름을 막 부르고 난리야? 보고 싶었냐고? 변방이나 지키는 한심한 놈 주제에……. 미친 거 아냐?’
처음 지셀이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멜리아는 코웃음 치며 돌려보내라고 했다.
멋대로 찾아와 만나 달란다고 만나 줄 필요도 없고, 지셀같이 덜떨어진 놈은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절대 만나 주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지셀이 전해 온 한마디에 결국 성안으로 들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거지?’
아멜리아가 상단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은 극비였다. 단순히 상단 하나를 만들었다 정도가 아니었다.
아멜리아가 속으로 불안해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셀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곧 생일이지? 이건 선물이야.”
지셀이 꽃다발을 건네자, 아멜리아의 얼굴에 경멸하는 빛이 스쳤다.
‘지금 저딴 걸 선물이라고 가져온 거야? 감히 나, 아멜리아 레이폴드에게?’
저런 선물은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다. 누구도 자신에게 저런 허접한 선물을 건넨 적이 없었다.
애초에 선물의 가치를 따지는 성격은 아니지만, 주는 사람이 지셀이라 그냥 꼴 보기가 싫었다.
냐앙!
바스테트마저 아주 불쾌하다는 듯 울음소리를 냈다.
아멜리아는 우아하게 걸어가 지셀이 건네는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아름다운 꽃이군요. 하지만 이런 건 금세 시들고 말지요. 굳이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겠네요.”
아멜리아는 꽃다발을 접견실 구석으로 휙 던져 버렸다.
선물한 상대가 치욕스럽게 느낄 행동이었다. 그 상대가 명예에 목숨 거는 귀족이라면 더욱.
본래라면 해서는 안 될 행동이고, 하지도 않을 대응이었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일부러 보란 듯이 꽃다발을 내던졌다.
지셀을 흥분시켜 실수를 유발하려는 의도였지만, 그는 얼굴을 붉히기는커녕 앉아 있던 소파에 등을 기대며 어깨만 으쓱거렸다.
“우리 영지가 돈이 없어서 비싼 선물은 못 해 줘. 선물은 마음이 중요하지! 마음이!”
얼굴빛 하나 안 바뀌고 능청을 떠는 태도에 아멜리아는 입가에 비웃음을 띠고 말했다.
“영지가 가난하다고 한들 그게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할 일은 아니잖아요. 수치스럽지도 않나요? 그리고 마음을 표현하려면 선물의 가치 역시 중요하답니다. 진심은 쓰레기로 표현할 수 없는 법이죠.”
아멜리아는 어떻게든 지셀을 격동시키려 심한 말을 내뱉었다.
평소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그녀의 성정을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당장 아멜리아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떠보려면 감정적으로라도 흔들어야 했다.
하지만 지셀은 대놓고 모욕을 당하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지.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하는 거라면 모를까. 나도 산적단 같은 걸 만들어 볼까 잠깐 고민한 적이 있는데, 역시 남부끄러운 짓은 안 하기로 했어.”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아멜리아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의 말투며 행동이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외치는 듯했다.
‘예전과는 태도가 달라. 이렇게 기묘한 자신감을 내보인 적은 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셀은 자신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 앞에 서면 항상 부끄러워하고, 감히 먼저 말을 걸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서는 그런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잘 보이려고 하기는커녕, 자신을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다.
지셀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지니 오히려 경계심이 치솟았다.
“뭐, 좋아요.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죠? 본론만 빠르게 얘기했으면 좋겠는데요.”
“얘기가 빨라서 좋군. 돈이 좀 필요해. 내가 지금 좀 어려운 상황이거든.”
지셀이 윙크하며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보였다.
예상조차 못 했던 발언에 아멜리아는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이렇게 당당하고 건방지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하, 고작 그런 이유로 절 찾아왔나요? 약혼녀에게 돈을 빌려 달라니, 공자님은 자존심도 없나 보군요.”
그러자 지셀이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야. 내 말을 잘못 이해했군. 돈을 빌려 달라는 게 아니야.”
“그럼 뭐죠?”
지셀이 허리를 살짝 굽혀 아멜리아 쪽으로 고개를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그냥 달라는 거지.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
“해 줄 거지?”
지셀의 말을 들으며 아멜리아는 진지하게 결심했다.
이놈이랑은 오늘 당장 파혼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