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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2화 (12/269)

12화 팬다, 안 팬다, 팬다. (3)

“케에엑!”

케인이 입을 감싸 쥐고 바닥을 굴렀다.

‘뭐지? 왜 이렇게 싸움을 잘해? 원래 잘했나? 아니지, 그런 거면 지금까지 나한테 얻어터졌을 리가 없잖아!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의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지셀이 무지막지한 구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퍼억! 퍼억!

주먹다짐이 이어질수록 주변의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어 갔다.

앞서는 지셀의 화려한 움직임에 감탄했다면, 이제는 너무 과격한 구타에 케인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저러다 죽는 거 아냐?”

“말려야 할 거 같은데?”

구경꾼들이 당황해서 수군거렸다.

“껙, 케엑…… 제발…… 멈…… 춰…….”

쉴 새 없이 얻어터지던 케인이 겨우겨우 입을 열었지만, 지셀은 멈추지 않았다.

한번 시작하면 어설프게 끝내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를 드러낸 적은 쉽게 용서하지 않는다.

용병왕 시절부터 지켜 온 그의 철칙이었다.

“공자님, 그만하십시오!”

보다 못한 케인의 호위 기사가 달려와 지셀의 앞을 막았다.

챙!

그 순간, 언제 뽑아 들었는지 지셀의 검 끝이 호위 기사의 목울대에 닿았다.

지셀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감히 신성한 결투를 방해하다니, 네가 주인 대신 나를 상대할 건가?”

케인이 이기고 있었다면 호위 기사도 똑같은 말을 하면서 지셀을 방치했을 것이다.

결투라는 건 항상, 내가 이기고 있을 때만 신성한 법이다.

호위 기사는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이, 이미 승부는 났습니다. 제발 손을 멈춰 주십시오.”

과연 케인은 바닥에 쓰러져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셀은 그를 흘긋 내려다보고는 혀를 찼다.

“이 정도도 못 버티고 말이야. 요즘 것들은 나약해 빠졌다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러면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고…….”

그러고는 호위 기사를 돌아보며 차갑게 고했다.

“나한테 빌려 간 돈은 언제 갚을 거냐?”

“고, 공자님도 그 정도로 큰돈은 당장 수중에 없습니다. 영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언제까지?”

“이, 이번 달 내로 보내도록 보고하겠습니다.”

실제로 케인이 뜯어 간 돈은 백 골드가 되지 않았다. 더 뜯고 싶어도 지셀이 돈이 없어서 그 이상은 무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자네 뭐네 하면서 천 골드를 내놓으란다.

기사는 억울했지만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여기서 따지고 들면 저 망나니 놈이 정말 케인을 죽여 버릴 거 같았다.

하지만 지셀의 요구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해라. 그 정도 여비는 가지고 왔겠지? 천 골드에서 빼는 거 아니야. 그건 본래 갚아야 할 돈이고, 이건 결투에서 진 값이지.”

‘그런 게 어디 있어! 이기면 네가 산다며! 왜 우리가 사야 하냐고!’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문 호위 기사에게 지셀이 빈정거렸다.

“뭐 해? 대답 안 해? 싫어? 혹시 아까워서 그러냐? 지금까지 우리 영지 사람들 괴롭혔으면 양심상 먼저 나서서 사야 하는 거 아니야?”

영지 사람들을 같이 괴롭힌 놈이 정의의 사도인 양 이런 말을 하니까 더 열이 뻗친다.

하지만 선택권이 없는 기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네놈이 승부를 인정한 거니 책임지고 확실히 마무리해.”

지셀은 검을 다시 집어넣고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케인의 뒷덜미를 잡았다.

케인은 결투가 끝난 줄도 모르고 혼미한 상태로 중얼거렸다.

“사, 살려 줘…….”

그러자 지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 죽여. 너를 왜 죽이니? 넌 내 돈 갚기 전에는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 알았어?”

“으…… 악…… 마…….”

“악마는 무슨. 이 정도에 끝낸 걸 다행으로 알아라. 교육 차원에서 봐준 거야. 어이, 데리고 가서 치료해.”

호위 기사는 케인을 잽싸게 업고 바로 연무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긴장감에 숨죽이고 있다가, 케인이 나가자 다시 하나둘씩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멋진 결투를 보여 준 대공자에게 감탄했고, 보기 싫은 케인을 박살 낸 것도 속이 시원했다.

“와! 대공자님 최고다!”

“저렇게 강하실 줄은 몰랐어!”

“술과 고기다! 새로운 축제다!”

환호하는 분위기 속에서 기사들은 굳은 얼굴로 스코반을 돌아보았다.

“진짜였다고?”

“스코반 너…….”

스코반은 남은 술을 모두 털어 마시며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옆에 앉아 있는 엘레나도 보란 듯이 턱을 치켜들었다.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와아아아아!”

지셀이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까지도 사람들은 환호를 멈추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던 지셀은 스코반과 눈이 마주쳤다.

스코반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술병을 들어 올렸다.

지셀도 씨익 웃으며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었다.

“봐, 내 말 맞았지?”

엘레나는 옆에 있는 하녀에게 속삭이고는 황급히 지셀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다.

“오빠, 오빠! 잠깐만!”

그녀는 잽싸게 뛰어가 지셀에게 팔짱을 꼈다.

축제 날 있었던 사건 뒤로, 엘레나는 이렇게 지셀을 전보다 훨씬 거리낌 없이 대하곤 했다.

“오빠, 그 큰돈을 어디에 쓰려고 결투에 내건 거야?”

엘레나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지셀을 올려다보았다. 침울하던 이전과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워낙 가난한 영지라 엘레나도 또래에 비해 화려한 옷이나 장신구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무도회나 연회에서 다른 영지의 영애들을 보고 부러움에 고개를 숙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셀에게 큰돈이 생기니 은근히 기대감이 들 만도 했다.

“쓸데가 있어.”

지셀이 가볍게 웃으며 팔을 빼려 했지만, 또 빠지지 않았다.

“아니, 너 진짜 운동하니? 뭔 힘이 이렇게 세.”

“아이, 말 돌리지 말고! 내가 맞혀 볼까? 아멜리아 언니 선물 사 주려는 거지? 오빠 항상 그 언니한테 잘 보이려고 애썼잖아.”

“뭐?”

“오빠 약혼자 말이야. 곧 그 언니 생일이니까 선물 사 주려는 거 아냐? 엄청 비싼 보석 같은 거! 이왕 사는 거 나도 하나 사 주면 안 돼?”

지셀은 머리를 세게 맞은 듯 큰 충격을 받았다.

아멜리아는 레이폴드 백작가의 영애였다.

페르디움이 변경을 지키는 대신 북부 영주들이 페르디움을 지원해 주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긴 하지만, 레이폴드는 그 이상으로 페르디움을 지원하고 있었다.

아멜리아와 지셀의 약혼도 두 가문의 동맹을 증명하는 의미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생에는 지셀이 가출하자 약혼도 자연스럽게 취소되었다.

레이폴드 쪽에서도 약혼한 내내 지셀을 탐탁지 않아 했으니, 파혼하게 되어 엄청나게 기뻐했을 것이다.

‘그렇군! 그 방법이 있었어!’

지셀은 화색을 띠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장 그가 원하는 사업을 시작하려면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다.

돈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골치 아팠는데, 아멜리아의 이름을 듣자 번뜩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돈 벌 방법이 없으면 있는 사람한테 받아 오면 되잖아!’

산적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지만, 상대가 아멜리아니까 괜찮다.

‘그 배신자한테 한번 제대로 뜯어내야겠군.’

용병왕 시절 지셀은 왕국을 공격하기 전, 가문이 망한 이유를 꼼꼼하게 알아보았다.

시간이 오래 흘러 지워지거나 왜곡된 것이 많아 조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큰 흐름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레이폴드에 대한 자료도 있었다.

‘우리 영지를 돈으로 괴롭혔다지.’

다른 영지가 페르디움을 힘으로 괴롭혔다면, 레이폴드 영지는 갑자기 지원을 끊는 방식으로 괴롭혔다.

페르디움 측에서도 어떻게든 위기를 돌파해 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레이폴드가 가장 열심히 방해했다.

‘모두 아멜리아의 지시였지.’

아멜리아는 훗날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레이폴드 백작의 자리에 오른다.

내막을 알게 된 지셀은 레이폴드 영지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었지만, 정작 그 원흉인 아멜리아를 놓치고 말았다.

그 뒤 그녀는 일 년 전쟁이 이어지는 내내 끊임없이 지셀을 괴롭혔다.

잡아 죽이려고 해도 교활하게 잘 도망쳐 다니니 지셀도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차피 쓸어 버리려고 했지만…….’

그저 공격에 대비하고 적을 박살 낼 생각밖에 없었는데, 생각을 조금 달리해야 할 것 같다.

아직 레이폴드 영지는 공식적으로 적도 아니고, 공격할 명분도 없었다.

그렇다면 완전한 적이 되기 전에, 최대한 뜯어낼 수 있는 건 뜯어내는 편이 이득이었다.

“엘레나.”

“왜?”

엘레나의 눈망울이 기대감으로 초롱초롱했다. 지셀은 그녀의 머리를 헝클이며 웃었다.

‘선물 정도는 줘야겠네.’

한동안 침울해하던 엘레나가 겨우 괜찮아졌으니 기분 전환 정도는 시켜 줘도 될 거 같았다.

잊고 있던 아멜리아를 상기시켜 준 게 고맙기도 하고.

“갖고 싶은 옷과 장신구를 골라 봐라.”

“진짜? 얼마까지?”

“5골드.”

“애걔…….”

“싫으면 관두고.”

“아니야! 아니야! 알았어. 고마워, 오빠!”

엘레나는 그의 마음이 바뀔까 얼른 표정을 바꾸고 아양을 떨었다.

지셀은 쓴웃음을 지으며 엘레나를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방금 떠오른 생각이 흐려지기 전에 급하게 벨린다를 찾았다.

“벨린다, 아버지는 언제 돌아오시지?”

“영주님이요? 아가씨 일을 전달받자마자 철군을 준비하신다고 생각하면…… 일주일 정도는 더 걸리실 거 같네요.”

“충분하군. 갔다 와도 되겠어.”

“어디를요?”

“레이폴드 영지.”

벨린다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곧 아멜리아 아가씨의 생일이네요. 어차피 연회를 열 텐데 벌써 가 보시게요?”

“뭐…….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아멜리아는 만나 볼 생각이야. 겸사겸사 볼일도 있고.”

“어휴, 아멜리아 아가씨가 그렇게 좋으세요? 로맨틱하시긴.”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 말을 이어 봐야 놀림만 당할 것 같았다.

“아무튼 갔다 올게. 그렇게 알고 있어.”

바로 성을 나가려고 준비하는 지셀을 보고 벨린다가 의아해했다.

“아니, 왜 그렇게 급하게 가세요?”

“시간이 촉박하니까. 아버지 돌아오시기 전에 다녀와야 해. 아버지랑 할 얘기가 있거든.”

대충 둘러대며 방을 나서는 그를 벨린다가 급히 잡았다.

“그럼 누구랑 가시게요? 설마 혼자 가세요?”

“당연하지. 쉬지 않고 말을 달리면 금방 도착할 테니, 혼자 가도 괜찮아.”

“그러시면 안 되죠. 요새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혼자 다니려고 하세요.”

“괜찮아. 내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어.”

“그래도 안 돼요. 제가 같이 갈게요.”

“벨린다가?”

“네, 그래도 레이폴드 백작가에 가는 건데 최소한의 구색은 갖추셔야죠. 호위도 몇 명 준비할게요.”

“흠…… 알겠어.”

구색은 갖춰야 한다는 벨린다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전생의 자신이야 워낙 강했으니 혼자 다녀도 괜찮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현저히 약한 상태다.

호위를 둘 수 있는데 굳이 안 둘 필요도 없었다.

‘그렇지. 지금은 전생의 내가 아니지.’

아무 생각 없이 혼자 적진으로 갈 뻔했다는 생각에 지셀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한동안은 전생과 현생의 괴리감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잠시 기다리자 벨린다가 검은 로브를 몸에 두르고 나타났다.

일하기 편한 옷이 최고라면서 언제나 비슷하게 입고 다니던 그녀가 다른 복장을 한 걸 보니 나름 신선했다.

“가시죠.”

“그렇게 가리니까 다른 사람처럼 보이네.”

“안에는 똑같이 입고 있는걸요?”

벨린다가 로브 자락을 확 펼쳤다.

안에 입은 옷은 평소 옷차림 그대로였지만, 로브 안쪽에는 단검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지셀은 그걸 보고 고개를 저었다.

‘굳이 호위를 더 데려갈 필요 없이 벨린다 하나로도 충분한 거 아냐?’

지셀의 가정 교사이자 하녀장인 벨린다는 그 정체가 불분명했다.

벨린다가 페르디움에 들어왔을 때, 몇몇 기사들이 그녀를 건드린 적이 있었다.

외지에서 들어온 젊은 하녀라고 만만하게 여긴 것이다.

그런데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집적대던 기사들이 다음 날부터 벨린다를 슬슬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성내에는 벨린다가 사실 기사들을 다 때려눕힐 정도로 엄청난 실력자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 뒤로는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말이지.’

전생에도 얘기는 들었지만 믿지 않았는데, 확실히 지금 보니 어지간한 기사는 상대하고도 남을 정도의 기도가 느껴졌다.

그런 실력자가 어째서 변경 영지에서 하녀로 지내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페르디움에 시집올 때, 하녀로서 같이 왔다는 사실 외에는 밝혀진 게 없었다.

“똑바로 걸쳐. 말 위에서 험하게 달릴 건데 조심해야지.”

지셀은 벨린다의 로브를 단단하게 여며 주었다.

벨린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매사에 짜증만 내던 지셀이 변한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우리 도련님이 갑자기 이렇게 의젓해질 줄 누가 알았겠어. 역시 한때의 방황이었던 거야. 지금도 가끔 이상하지만, 예전보다는 낫지.’

지셀은 행동과 말투만 달라진 게 아니라, 케인을 때려잡을 정도로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셀을 보살펴 온 벨린다로서는 너무나 기꺼운 일이었다.

‘신경질적이었던 것도 남몰래 수련하느라 힘들어서 그랬을 거야. 이게 다 내가 잘 가르친 덕이지.’

실상 지셀이 그녀에게 배운 건 괴상한 잡기와 이상한 상식뿐이었지만, 벨린다는 문제를 깨닫지 못했다.

명색이 가정 교사인 벨린다는 사실 누굴 가르치는 데 재능이 없었다. 사고방식이 독특하기도 했고.

그동안 벨린다가 해 온 일은 교사라기보다는 유모의 일에 가까웠다.

“준비 다 됐으면 가자.”

“퍼거스 경도 부를까요? 그래도 전속 호위 기사인데.”

“됐어. 빨리 달리면 영감님 심장에 무리 간다. 엊그제는 나하고 얘기하다 갑자기 쓰러졌다고.”

“알겠어요. 출발하시죠.”

지셀과 벨린다, 그리고 호위를 맡은 기사 네 명이 빠르게 성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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