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팬다, 안 팬다, 팬다. (1)
케인 로게스는 지셀보다 한 살 어린 사촌 동생으로, 페르디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로게스 백작령의 후계자다.
덩치도 상당히 크고 힘이 제법 좋아, 로게스 영지에서는 그에게 꽤나 기대를 걸고 있었다.
지셀에게는 이 시기의 유일한 친구이자…… 그를 가장 괴롭히던 원수라고 할 수 있었다.
본래도 페르디움에 자주 오는 편인데, 축제까지 벌어졌으니 놀기 좋아하는 이놈이 안 올 리가 없었다.
‘그래! 이놈을 잊고 있었네?’
비열하게 웃는 케인을 보고 있자니 예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두 사람은 똑같은 사고뭉치지만 평가는 조금 달랐다.
케인은 오만하고 폭력적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당당했기에 오히려 기개가 넘친다고 좋게 평가될 때도 있었다.
그에 반해 지셀은 항상 쪼잔하고 열등감 넘치는 놈으로 취급당했다.
‘이놈 때문에 내가 더 욕을 먹었었지.’
언제나 뺀질거리며 자신의 자존심을 깔아뭉개고 괴롭히는 이놈 때문에 수치스러운 꼴을 당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뿐인가? 같이 어울리면서도 케인은 지셀을 언제나 부하처럼 취급했다.
심부름을 시키는 건 당연하고, 술에 취해 자제력을 잃으면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주먹을 휘두르곤 했다.
그런 꼴을 당할수록 지셀은 속에 더 분노가 쌓이고, 영지의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사고를 쳤다.
‘하아, 생각만 해도 부끄럽네.’
지셀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이마를 짚었다.
이 시절 자신은 케인에게 덤빌 수가 없으니 엉뚱한 데다가 화를 풀었다.
밖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안에서만 큰소리치니 ‘방구석 폭군’, ‘방구석 소드마스터’ 따위의 별명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에휴, 내가 왜 그랬을까.’
지셀은 쭈그려 앉은 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꽃잎만 푹푹 뜯었다.
그 모습을 보고 케인은 눈을 찌푸렸다.
“뭐야, 내 말 안 들려? 요새 맛이 갔다는 소문이 많이 들리더니 진짜 맛이 간 거야?”
케인이 이죽거렸다. 지셀은 바지를 털며 일어나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케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내가 전에 말한 거 준비 안 해 놨어? 오랜만에 재밌게 놀려고 찾아왔는데 오늘 좀 반응이 이상하네. 뭐 혼자 약 같은 거라도 한 거야?”
“아…… 준비.”
케인의 말에 그제야 지셀은 기억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이놈은 올 때마다 술과 여자를 준비하라고 시켰었다.
명분이야 같이 노는 거지만 그게 어디 친구 사이인가? 케인에게 지셀은 그냥 이용해 먹기 좋은 호구였을 뿐이다.
케인은 지셀의 볼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래, 오랜만에 술도 마시고 끝내주게 놀자고. 우리가 그런 쪽으로는 또 정말 마음이 잘 맞잖아? 진정한 친구라는 게 이런 거지.”
저 말은 즉,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괴롭히겠다는 뜻이었다.
케인도 지셀 못지않게 안하무인이라 사고를 많이 쳤다.
하녀들을 강제로 희롱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이유 없이 병사들을 패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페르디움 백작이 원정으로 거의 항상 자리를 비우고 있으니, 친척이라는 명분으로 마음껏 페르디움 성을 휘젓고 다닌 것이다.
영지의 후계자인 지셀이 부하나 마찬가지였으니 거리낄 게 전혀 없었다.
지셀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케인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 오늘 왜 이래! 어? 왜 이렇게 반응이 느리냐고!”
“…….”
“야, 대답 안 해? 갑자기 미쳤어? 너 뭐 잘 못 먹었어?”
“…….”
“야! 지셀! 정신 안 차리냐?”
케인이 지셀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며 으르렁거렸다. 그의 호위 기사들이 황급히 그를 말리며 속삭였다.
“공자님, 보는 눈이 많습니다. 여기서는 조금 진정하시지요.”
“지셀 공자님과는 따로 조용한 곳에서 얘기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여기는 페르디움 영지다. 괴롭히는 게 소문나서 좋을 게 없으니 일단은 말리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다.
화풀이야 어디 으슥한 곳에서 하면 되는 거니까.
기사들은 그런 속뜻을 숨기는 척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겪으니 참으로 난감해져서 지셀은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어떡하지?’
애송이가 시비 건다고 잘근잘근 패기에는 급이 너무 맞지 않았다.
그래도 용병왕이라고 나름대로 체면을 차리며 지낸 지 오래되어서 애송이에게 직접 손을 쓰기가 어쩐지 민망했다.
애초에 그에게 시비 거는 놈들이 사라진 지도 오래되었다. 생기더라도 수하들 선에서 정리되곤 했다.
‘조만간 쓸 만한 수하 하나 거둬야겠네.’
애송이의 도발에 하나하나 반응하기도 민망하지만,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도 용병왕으로서 체면이 떨어지는 일이다.
‘사람을 구하는 건 구하는 거고…….’
지셀은 티 나지 않게 케인을 슬쩍 노려보았다.
‘이걸 패 버려? 아니면 그냥 둬?’
그는 잠시 고민하다 요새 재미 들인 꽃잎 점이나 쳐 보기로 했다. 이 점은 결과가 확실해서 가끔 애용한다.
지셀은 꽃을 하나 주워 꽃잎을 뜯으며 케인의 미래를 점치기 시작했다.
‘팬다, 안 팬다, 팬다, 안 팬다. 팬다. 안 팬다?’
기묘한 표정을 지은 채 꽃잎을 뜯는 지셀을 보고 케인이 인상을 썼다.
“이 새끼 너 지금 뭐 하는…….”
“하, 너 운 좋다?”
“뭐?”
지셀은 꽃잎이 다 떨어져 앙상해진 꽃대를 뒤로 던져 버리며 말을 이었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손님으로 왔으니 이번 한 번은 용서해 준다. 꽃잎에 감사해라.”
“뭐, 뭐?”
케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거리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사람들이 미쳤다 미쳤다 하니까 이게 진짜 미쳤나……. 넌 그냥 너보다 약한 놈한테 화풀이나 하는 등신일 뿐이야. 안 그래?”
케인의 말이 갈수록 심해졌다. 지나가던 사용인들까지 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구경했다.
화가 바짝 오른 케인은 사람들이 구경하는 데도 독설을 멈추지 않았다.
“눈 안 깔아? 기사를 이겼다고 거짓말하고 다니니 정말 네가 세진 거 같아?”
“…….”
“내가 소문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참을 웃었다. 그딴 거짓말로 누가 널 인정해 줄 거 같냐? 다시 네 주제를 알게 해 줘?”
“…….”
지셀은 새삼 자신이 달라졌음을 실감했다.
‘예전 같았으면 등신 어쩌고 할 때 바로 시원하게 팼을 텐데. 한 번 죽었다 깨어나더니 나도 이제 어른이 다 됐구나.’
“야, 뭐하냐. 대답 안 해? 주둥이를 찢어 줄까?”
‘참자, 나는 어른이니까. 이런 애송이의 도발에 넘어갈 필요가 없…….’
“야, 이 등신 새끼야!”
순간 지셀의 오른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퍼억!
“어억!”
갑자기 눈을 얻어맞은 케인이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지셀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새삼 감탄했다.
‘그냥 때리고 싶다고 생각만 했을 뿐인데 손이 저절로 나가네?’
케인은 얼굴을 부여잡으며 외쳤다.
“이 미친 새끼가!”
퍼억!
“어억!”
“공자님!”
케인이 다시 비틀거리자 호위 기사들이 기겁하며 달려왔다.
그 와중에 지셀은 자신의 왼손을 보며 또다시 감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케인은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한 발자국 물러나 검을 뽑았다.
“죽여 버리겠다!”
“안 됩니다! 공자님!”
호위 기사가 바로 케인의 앞을 막으며 작게 속삭였다.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습니다.”
이미 주변에 하인과 하녀, 병사들이 모여 웅성거리며 사태를 구경하고 있었다.
케인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를 갈았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맞은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나한테 참으라는 거냐?”
“결투, 결투를 신청하십시오. 그러면 될 겁니다. 일단 먼저 공격한 건 저쪽 아닙니까.”
호위 기사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케인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결투…… 그래, 좋아. 그게 낫겠네.”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다면 저 열등감 덩어리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덤으로 어디 한군데쯤 작살을 내서 병신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고.
케인은 바로 장갑을 꺼내 지셀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휙.
지셀이 장갑을 가볍게 피해 내자, 케인은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결투다! 네놈이 쟈말과 필립을 이겼다면서 거짓말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성안에 자자해! 너는 귀족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감히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는 나를 공격했다!”
갑작스러운 선언에 지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결투? 나랑? 진심으로?”
“그래! 이제 와서 겁먹고 내빼지는 않겠지? 이미 많은 사람이 보고 있다!”
“와…….”
지셀은 무척이나 생소한 감정을 느꼈다.
결투라니! 마지막으로 결투를 한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심지어 같은 대륙 7강인 아이던조차 마지막 전투에서는 안전하게 협공을 취했다.
대륙 7강이란 그런 존재다. 누구도 일대일로 싸워서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존재.
그런데 이런 애송이 중의 애송이에게 결투 신청을 받을 줄이야.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자. 갑자기 돌아오니 미래 계획 때문에 생각이 너무 많았나? 영 적응하기 힘드네.’
전생의 기억과 현생의 몸이 합쳐진 괴리감 탓일지도 모른다.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한데 너무 조급하게 굴었다.
‘저놈이 미래에 어떻게 됐더라?’
로게스 백작령은 영지전이 계속되던 시절에 페르디움을 편들다가 같이 망해 버렸다.
그 뒤 케인은 행방불명.
전생에 지셀은 거기까지 정보를 취합하고는 관심을 끊었다.
어렸을 적의 안 좋은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기엔 그의 그릇이 너무 컸으니까.
어쨌든 아들은 싹수가 없지만 로게스 백작은 의리가 있었다.
‘그래, 뭐. 로게스 백작을 봐서라도 이번에 교육을 좀 해 줘야겠네. 이 나이 때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아야 깨달음을 얻는 법이지. 나도 철이 없어서 고생 많이 했잖아?’
결정을 내린 지셀은 케인의 얼굴을 향해 장갑을 휙 던졌다.
케인은 코웃음을 치며 그것을 피하려고 했지만, 장갑이 날아오는 방향이 바뀌면서 결국 얼굴을 얻어맞고 말았다.
“어?”
주변에 선 사람들이 키득대며 소리 죽여 웃었다.
“이, 이 새끼가…….”
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다시 발작하려는 찰나, 지셀이 덤덤하게 말했다.
“좋아, 결투를 받아 주지. 내가 요새 자금 계획 때문에 생각이 많아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어라, 잠깐.”
지셀은 깜박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고 화색을 띠었다.
“야, 너 나한테 빌린 돈 갚아라.”
“뭐? 내가 언제 너한테 돈을 빌렸는데?”
“나한테 야금야금 돈 빌려 갔잖아.”
케인은 지셀에게 툭하면 돈도 뜯어 갔었다.
지셀은 가난한 영지에서 그나마 후계자에게 챙겨 주던 푼돈마저도 그렇게 뺏기며 살았었다.
“그거 다 합하면 천 골드는 될걸.”
하지만 천 골드라는 거액을 듣자마자 케인은 깜짝 놀라며 크게 외쳤다.
“무슨 천 골드야! 내가 너한테 받아 간 게 백 골드도 안 되는데!”
“아, 그랬나? 뭐 어쨌든 빌려는 갔다는 거잖아. 이자 붙이면 천 골드 맞네. 빨리 갚아라. 나 지금 돈이 좀 많이 필요하거든.”
사실 지셀이 계획한 일들을 시도하기에는 천 골드도 부족했다. 적어도 1만 골드 이상은 있어야 그나마 일부라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인에게 그만한 돈이 있을 리가 없으니 일단 천 골드만 받기로 했다.
‘쥐꼬리만 한 돈이지만, 돈이야 불리면 되니까. 뭐든 시작이라도 하는 게 중요한 거지.’
지셀의 속마음을 모르는 케인은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으로 외쳤다.
“이 미친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네가 돈 필요한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아니 애초에 그 돈도 그냥 친하게 지내 줘서 고맙다고 나한테 준 거잖아! 친구비 모르냐, 친구비!”
세상에, 요새는 친구 사귀려면 돈도 내야 하나 보다.
‘친구비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그냥 호구 노릇 한 거지.’
지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얘기하다 보니 확실히 기억났다. 솔직히 돈 주기 싫었는데, 케인이 주먹을 들이대서 어쩔 수 없이 내주었었다.
“강제로 뺏어 간 애들이 꼭 그렇게 말하더라. 뭐, 그거야 결투가 끝나면 갚기 싫어도 갚게 될 거야.”
지셀은 주먹을 들어 올리며 씨익 웃었다.
“몇 대 맞고 나면 없던 돈도 다 생기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