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함부로 마음이 마음에게-16화 (16/16)

16. 함부로 마음이 마음에게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를 걸었다. 처음이었다, 서은이 주혁에게 전화를 거는 건. 신호음은 들리지 않아 액정을 바라보았다. 전화가 연결 중이라며 화면에 물결 같은 무늬가 인다. 받지 않는다. 행여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기 전에 서은은 짧게 전화를 끊었다. 다시 걸었다. 다시 끊고, 다시 걸었다. 다시 물결이 이고, 마침내 전화가 연결되었다는 표시가 뜬다.

핸드폰을 귀에 댔다. 그러나 장난감을 귀에 댄 양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노력했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비 갠 후 평온한 하늘 위로 구름들이 날아다닌다. 보며 덤덤히 입술을 열었다.

“보고 싶어.”

그 한마디를 하고 서은은 전화를 끊었다.

* * * * *

강의를 다 마치고 홍은동으로 돌아왔을 땐 밤이었다. 폭염도 열대야도 사라진 팔월의 마지막 날. 버스에서 내려 빌라 골목으로 걸어가며 서은은 사라진 소리를 상상해 보았다.

솨아, 머리카락을 흩트리는 바람소리와, 야옹, 길고양이의 울음소리, 시간감을 잃고 뛰노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그 아이들을 부르는 어른들의 소리가 우렁우렁 울릴테지. 들리지 않지만 소리에 대한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매사 사물을 볼땐 의성어를 붙이는 연습을 했다.

문득 서은은 자신의 목소리엔 어떤 의성어를 붙여야 할지 궁금해진다. 바람 소리, 고양이 소리, 아이들의 소리, 어른들의 소리는 여러 책에서 묘사되어 상상할 수 있는데, 서은의 소리는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서은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 너무도 오래전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뻐.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해 줘요.

햇살 같아. 물방울 같아. 천사 같아. 구름 같아.

그게 뭐야. 귀찮아서 대충 답한거죠?

진짠데.

말하며 남자는 곤란하게 웃었던가.

네온이 꺼진 홍은슈퍼가 보이고 벽돌로 세워진 갈림길에서 발을 멈추었다.

계절의 변화를 앞둔 밤바람이 가볍게 머리를 날린다. 어둑하고 인적없는 골목은 어딘가 그림 속의 세상 같다. 그 가운데 서 있는 남자 역시.

키가 크고 어깨가 넓고 머리가 작고 팔다리가 긴, 완벽한 실루엣을 가진 남자였다.

쿵, 내려앉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심장인가 세상인가 마음인가.

장신의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가로등의 불빛이 은은하여 남자의 얼굴이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인영뿐임에도 오랜만에 보는 모습에 서은은 명치가 더럭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하여 심장은 매섭게 박동하고 숨을 쉬는 게 답답했다.

실은 두려웠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우리가 한 선택은 결국 이별이었는데. 결국 남자는 날 떠나갔는데. 어쩌면 미련이 남은 것은 나뿐이고 남자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던 건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그 모든 두려움이 남자를 본 찰나의 순간 사라진다. 우습고도 무색하다. 그럼에도 차오르는 벅찬 안도가 선명하여 순식간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흐린 남자를 향해 서은은 한 발짝, 두 발짝 다가갔다. 남자의 입술을 읽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시선이 맞물리고 남자의 동공이 어울리지 않게 미동을 했다. 어스름한 빛 아래에서도 남자의 얼굴은 메말라 있었다.

그 형편없는 얼굴에 서은은 불쑥 화가 솟았다.

“이렇게 말 한마디에 흔들릴 거면 왜 그렇게 떠났어?”

“.......”

주혁은 답하지 않는다. 눌려 있던 감정들이 솟아 나와 서은의 목구멍을 흔들었다. 원망이 실린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고작 이렇게 돌아올 거면서. 왜 그렇게 떠났어.”

서은의 물음에 주혁은 잠시 웃었다. 아득하지만 조잡한 미소를 만드는 눈매에는 동요와 고통만이 선명했다. 절실한 열망에 휩싸여 들끓는 눈이며, 애타는 갈망을 버티지 못해 진동하는 눈이었다.

“내가, 개자식이라.”

“.......”

“정서은 말 하나에 꼬리 치며 달려오는 나는, 정말 개자식인가보다.”

말을 마치고 주혁은 짧은 숨을 뱉으며 웃었다. 막막한 웃음이 허공에 흩어진다.

“나는. 안 돼.”

주혁은 턱, 턱 목소리를 끊어 뱉었다. 잠시 괴로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기도 하였다.

“널 잊는 게 나는, 안돼.”

잊으라 했지만 나는 그게 안 돼, 서은아.

주혁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못 해 먹겠어.”

주혁은 무언가 견딜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참고, 참고 견디다 더는 버틸 수 없는 얼굴. 그는 곧 둑이 터져 토해 내듯 말을 뱉었다.

“너 위해서 널 놓아준다느니 하는 그따위 안 어울리는 짓 못 해 먹겠어. 내가 잘못했어. 그냥 내 옆에 있어. 내가 더 잘할게. 내가 더 강해질게. 감히 누구도 너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할게. 아니, 혹시 나 때문에 나쁜 말을 들어도 그래도 내 옆에 있어. 내가 더 사랑해 줄게. 더 잘해 줄게. 진창에 굴러도, 그래도 나랑 있어. 이런 말을 하는 난 개자식이지만. 싫어. 못해. 나는. 내가 죽을 것 같으니까. 네가 포기해. 네가, 나를 살려 줘. 제발.”

말을 끝냈을 때 주혁의 눈 밑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이 괴로워 서은이 고개를 떨구었다. 뜨거운 울음덩어리가 가슴에 맺혀 서은의 눈에도 순식간 눈물이 차올랐다.

이토록 형편없는 얼굴로, 차림새로 하는 말들을, 누가 바랐다고.

이를 물었다. 서은은 주먹으로 툭, 주혁의 가슴을 쳤다. 툭툭, 힘없이 치는 주먹을 맞으며 서 있던 남자가 어느 순간 서은의 주먹을 잡았다.

시선을 올렸다.

“내가 잘못했어.”

들리지 않음에도 남자의 음성엔 갈급함이 흘러넘쳤다.

주혁은 흔들리는 목구멍과 입술을 다잡기 위해 온 힘을 썼다.

행여 서은이 읽지 못하면 안 되니까. 읽지 못해서 주혁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면 안 되니까. 이 간절하고 간절하고, 또 간절한 이 마음을 알아주어야 하니까. 그래서,

나를.

“잡아 줘.”

잡아 주어야 하니까.

“제발.”

목이 메어 서은이 답을 하지 않자 주혁은 애달프고 초조하게 말을 붙였다.

“사랑해.”

결국, 고작, 한낱, 그 따위의 말을 빌미 삼아서라도 서은을 잡고 싶었다. 잡아야 했다. 그는 다시 애타게 말을 반복했다.

“사랑해.”

아이처럼 막막한 눈으로 하는 고백에 서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양팔을 벌려 힘껏 주혁을 안았다. 얼굴을 묻은 남자의 몸이 뜨거웠다. 주혁의 팔이 서은을 안았다. 서은을 가두는 남자의 힘을 느끼며 서은은 뒤늦게 그가 원하던 말들을 해 주었다.

* * * * *

꼴이 엉망이야.

오늘만 봐줘. 내일은 근사하게 차려입을게.

머리도 부스스하고.

그것도 자를게.

미워.

미안해.

나빠.

맞아.

아니, 아니야. 내가 미안해. 내가 나빠.

아냐. 울지 마.

.......

그냥 내가 널 사랑한 거야.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한 거야. 나쁜 건 나야.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거거든. 가볍게 연애를 하자 했지. 겁 없이. 넌 언젠가 후회할 거야. 난 아주 무겁게 질척일 예정이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난 개자식이라 염치는 없고 욕심은 많고 이기적이거든. 넌 그런 내가 아주 많이 사랑하는 여자일 뿐이야. 네 잘못은 없어.

......눈물 때문에 말을 제대로 못 읽었어.

괜찮아. 그냥, 널 사랑한다는 이야기야.

* * * * *

창문 틈새로 바람이 불어왔다. 빛 한 줄기 없이 고요한 밤이었다. 빛과 소리가 없어도 괜찮았다. 어둠에 익은 눈으로 남자를 보았고 들리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깊은 바다에, 검은 동굴에, 벼랑 밑의 구렁에 잠겨 들어가듯 남자의 눈에 서은을 담았다. 빛나지만 외롭고 아름답지만 애처로운 남자의 얼굴이었다.

남자의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슬고, 결이 거친 뺨을 어루만지고, 넓고 단단한 등을 안았다. 팔에 잔뜩 힘을 주었다가 천천히 주혁의 등을 쓸어내렸다. 밤의 몽환에 홀리는 기분으로 그의 옷을 벗기고 눈과 코와 뺨과 입술과 턱에 입을 맞췄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손길은 어느새 대담해져 남자의 몸을 쓰다듬고 문지르고 주물렀다.

한껏 얼굴을 찌푸린 주혁이 더운 숨을 뱉었다. 그 온도가 최음제처럼 서은의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곧장 숨이 얽히고 몸에 몸을 감았다. 남자의 것을 몸 안 깊숙이 채웠다. 저 끝에서부터 벅찬 안도가 치밀어 올랐다.

미안함과 죄책과 원망과 슬픔과 미움과 그리움이 사라지고, 무모하지만 황홀한 감정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쿵쿵 들어오는 남자의 몸을 받으며 서은은 켜켜이 쌓아 온 소리들을 토해 냈다. 때론 신음을, 때론 고백을, 때론 맹세를.

몸에 힘을 주었다. 주혁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흐린 얼굴을 한다. 무너질 듯, 말 듯 하던 남자가 결국 뜨겁게 파정하였다. 그러나 곧 다시 일어나 밑을 채워 왔다. 힘들지만 벗어날 수 없는 쾌감에 눈물이 흘렀다. 끝없이 서로를 원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영원, 함께, 사랑, 평생, 전부 따위의 것들.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평생 내 전부를 맡기고 함께하고 싶다는 무모한 감정과 다짐들. 훗날 변색되어 이 순간의 맹세가 거짓으로 전락해도 상관없었다. 그 순간마저도 함께할 것이라는 맹랑한 확신이 있다면 충분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를 걸겠다는, 무모하고 황홀한, 순간의 약속.

해가 밝아 올 때까지 쉼 없이 몸을 섞었다. 나락 같은 쾌락 속에서 서은과 주혁은 그런 약속들을 나누었다.

비로소 편안해졌다.

* * * * *

태일이 묻혔다는 나무 앞에서 서은은 때늦은 인사를 했다. 후에, 승혁을 통해 받은 편지에서 태일은 서은과 주혁을 허락해 주었다.

아니, 자신에게는 허락할 자격이 없다 했다. 살아가는 것은 너희들의 몫이고 태일은 다만 산처럼 해처럼 바다처럼 너희들의 뒤에 버티어 서 지켜 주고 싶다 했다. 주혁에겐 늙은이의 심술을 봐주어 고맙다 했고, 서은에게는 언젠가 불편하지 않다면, 마음이 내키는 때가 온다면, 그때에 식사를 함께해 주면 고마울 것이라 했다.

또한 사는 게 별거겠냐는 말도 했다. 서로 부족한 게 있다면 채워 주고, 힘든 일이 있다면 보듬아 주고, 때로 화나고 슬픈 일이 있어 싸울지언정 잘 싸우고 잘 화해하고 잘 살아가면 된다고도 했다. 정작 스스로는 그러지 못했으면서 너희들에게 바라는 이 못된 마음을 용서해 주길 바란다는 말도 마지막에 덧붙여 있었다.

그 마지막 문장에서 전해 오는 진심에 서은은 미소를 지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그 집에서 외로웠을 주혁이 태일을 미워하지 못한 마음을, 그 문장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니.

편지에 쓰인 대로 함께 식사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긴장했겠지만 결국은 웃었을 것이다. 무서웠겠지만 결국은 따듯해졌을 것이다.

상상하며, 산과 해와 바다 대신 나무가 된 태일에게 서은은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빌었다.

그러니까, 주혁이 편안해지길. 무너지지 않길. 윤철이 서은에게 그러했듯, 태일이 주혁에게 그러했듯, 서은이 주혁에게 뿌리 깊은 버팀목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소원을 빌고 눈을 떴을 때, 주혁도 옆에서 서은을 따라 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돌아오며 무엇을 빌었느냐 물었다. 보수와 진보의 대통합, 이라는 어이없는 답이 따라왔다.

* * * * *

노을의 긴 햇살이 캔버스 위로 깔린다. 눈가를 찌푸린 채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서향으로 지는 해가 불타듯 강렬한 기세로 세상을 물들인다. 누군가에겐 서정적인 감상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풍경일지 모르겠으나, 지금 서은에겐 성가신 방해물일 뿐이었다.

그때, 마뜩찮은 서은의 시야로 주혁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주혁이 창가로 가 커튼을 쳤다. 해가 가리고 서은의 붓질을 방해하는 빛이 사라진다. 돌아온 주혁은 맞은편 책상에 앉아 신문을 펴들었다. 그는 시선을 느리게 움직이며 다시 신문을 탐독했다.

서은은 오후 강의가 끝나고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다음 달, 하반기 그림장에 전시할 작품이었다. 강의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서교동에 온 주혁은 얌전히 책상에 앉아 서은을 기다렸다. 다시 눈을 옮겨 붓을 드는데, 별안간 사소한 궁금증 하나가 인다.

“재벌들은 돈이 얼마나 많아?”

말로 뱉고 보니 어딘가 우습고 유치하다. 그러나 내심 궁금했다. 언젠가 신문에서 국내 재계 자산 순위 명단에 오른 서태일 회장을 본 것 같기도 한데. 정확한 숫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조 단위였던 것은 기억했다. 그 직계 손자이면 조부만큼은 아니어도 돈이 산처럼 바다처럼 쌓여 있겠지. 그래서 매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서은의 셔터맨 노릇을 해도 문제가 없을 만큼.

요즈음 주혁은 정말 하는 일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서은에게 아침을 먹이고 화실에 데려다주고, 홍은동에서 주욱 쉬다가 오후가 되면 다시 서은을 데리러 온다. 집에 돌아가면 식탁엔 맛깔스러운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차는 언제 그렇게 사들였는지 서은을 데리러 올 때마다 타고 오는 차도 달랐다.

서은이 질문을 한 지는 좀 되었는데, 주혁은 아직까지 답이 없다.

“본인도 잘 모를 만큼이야?”

“......그건 아니고.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 싶어서. 내 명의의 자산만 묻는 거야, 아님 차명 계좌 포함해서? 해외 은닉 자산도 함께 묻는 건가?”

예상 못 한 단어들을 이해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뜻을 이해했을 때 서은은 겸연쩍어졌다.

“......그거 불법 아냐?”

주혁이 가벼이 웃는다.

“농담이야.”

“.......”

“돈 필요해?”

그러고 보니 부자가 되는 게 꿈이랬던가. 그건 종종 서은이 장난처럼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서은은 고개를 저었다.

“돈이야 늘 많지.”

서은의 눈이 심상히 깜빡인다.

“사람 두어 명 거부 만들어 주는 거야 충분하고.”

어딘가 묘하게 사람을 유혹하는 투였지만, 서은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신의 착각이라 생각했다.

“필요하면 말해.”

너도 그렇게 만들어 줄게. 하는 뜻을 서은은 읽었을까. 대신 곁에 있어, 라는 의도 역시. 그것들을 말로 하지 않은 건 가치관이 모럴하고 보편적인 여자에게 불순한 의도처럼 비칠까 봐서였다. 이를테면 화대나 거래 그런 것들.

애초에 그런 게 서은에게 통했다면 차라리 쉬웠을 것이다. 그럴 수 있었다면 그는 흔쾌히 전 재산을 들였을 것이다. 또한 그랬다면 관계의 약자로서의 불안도 보다 덜하였을까.

그러나 그것들은 서은에게 통하지 않으니 오랜 시간을 들여 익숙해지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주혁이 은밀히 조성한 환경과 그 안의 사물들에 익숙해져 그것들이 당연해지고 습관이 되어 결국 벗어나지 못하게.

주혁은 서은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미동으로 스스로를 조소했다. 다분히 의도가 불결한 생각이, 타고 난 비열한 피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싶었다.

“지루하진 않아?”

의도가 모호한 질문에 주혁은 눈썹을 들었다. 그러자 서은이 또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렇게 백수놀음 하는 거, 안 지겨워?”

줄곧 바쁘게 살아온 남자였다.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며 무의미하게 보내는 하루들이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엔 그 여유가 반갑겠지만, 언젠가 이 생활이 지겨워지는 날이 분명 올 것이다. 서은은 언젠가의 그날이 염려됐다. 주혁이 자신 때문에 포기하게 된 것들에 대한 죄책도 갖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주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이다.

"별로. 누가 지겹지 않게 예뻐서.”

그렇게 낯 뜨거운 말을 저런 담백한 얼굴로 하다니.

“선수 같아.”

서은은 작게 웃었다. 서은이 다시 붓질을 시작하고 주혁도 고개를 내렸다. 또 하나의 평온한 하루가 유유히 저문다.

실은 서은도 어렴풋이 느끼는 게 있었다. 주혁은 여전히 세간의 시선에 조심스러웠다. 주혁과 서은이 함께하는 한 언젠가 서은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고 서은에게 무수한 말들이 쏟아지겠지만, 주혁은 가능한 그 시기를 늦추고 싶어 하는 듯했다. 서은에게 무탈한 하루들을 할 수 있는 한 연장하고 서은의 세계를 지키고 싶어 하는 듯했다.

서은은 그녀에게 쏟아질 것들에 대해 준비가 된 상태였지만, 남자의 과보호와 애정이 새삼 따듯하고 좋아서, 그런 주혁을 가만 놔두었다.

1차 채색을 끝냈을 땐 하늘이 어둑한 밤이었다. 붓질을 하고 있노라면 시간감을 잃기 일쑤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서은은 더욱 그러했다. 눈을 돌리자 맞은편의 주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주혁은 손가락을 굽혀 턱을 괸 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딱히, 형언할 만한 감정이 비치는 눈은 아니었다. 언젠가 공허하고 서늘하다 생각했던 눈에 웃음이 차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 미소가 새삼스레 마음을 적신다.

돌연 서은은 그 눈의 남자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여행 갈까?”

충동적인 제안이었는데 주혁은 심상한 낯으로 눈매를 접고는,

“좋지.”

마땅히 답했다.

* * * * *

앵글 속 남자는 풍경과 무척 잘 어울렸다. 능선이 아름다운 산처럼 솟아 있는 무덤과 그 사이를 비추는 조명이 운치를 더하고, 키가 높은 나무들 아래 고개를 기울여 연못을 보는 남자는 그 모든 것들의 주인처럼 서 있었다. 이곳을 떠나도 이곳의 풍경이 도려져 남자를 따라다닐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순간을 놓칠 수 없어 서은은 카메라를 들었다.

셔터를 누르자 남자가 몸을 돌린다. 하얀 티에 체크무늬 남방을 걸치고 청바지를 입은 주혁이 성큼성큼 서은에게 다가왔다. 남자의 몸짓을 따라 선선한 공기가 밀려온다. 여행사와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국내의 여행지를 그림으로 담아 여행사의 SNS에 올리기로 되어 있었고, 첫 여행지가 경주였다.

“추워?”

주혁이 물었다. 바람에 묻은 더위도 사라지고 밤이 되자 제법 선선하니 가을 같았다.

“괜찮아.”

답하며 잡는 남자의 손이 따듯하다. 현재 시 각은 저녁 아홉 시 사십구분. 열 시면 문을 닫는다 하니 슬슬 나가야 했다. 그런데 서은의 손을 잡은 주혁은 가만히 서 무덤을 응시했다. 서은은 그런 주혁을 기다려 주었다.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본다.

공원 같은 무덤의 한 켠에는 붉은 꽃송이들이 앙증맞은 크기로 군데군데 나있었다. 동백이었다. 곧 있으면 동백의 계절이 시작된다. 가을에 수 줍게 피어나 당당히 겨울을 즐기고 시드는 법을 몰라봄에 그저 툭, 떨어지는 동백의 질긴 생명력을 닮고 싶다. 그토록 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혁의 곁에 남고 싶다.

“무슨 생각 해?”

서은의 물음에 시선이 내려왔다. 언제나처럼 서은을 낱낱이 살피는 시선이 이제는 익숙하다. 짧은 순간 남자의 깊은 눈빛에 무언가 일렁이는 걸 본 듯도 할 때.

“아무것도.”

서은은 눈을 흘겼다. 거짓을 말하지 말라는 고요한 경고였다. 주혁이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다시 무덤에 한 번 시선을 주었다가 덤덤히 말한다.

"언젠가 너도 죽는 순간이 오겠지.”

“.......”

“그게 두려워.”

뜻밖의 답에 서은은 잠시 당황했다.

“미리 순장 신청이라도 해야 하나.”

순간 가라앉은 서은을 위해 주혁은 농담으로 진심을 가렸다. 예상대로 서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주혁은 진실로 없던 강박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들은 젊고, 앞으로 함께할 날은 많았다. 긴긴 날들에서 서은과 주혁은 이제 겨우 시작점일 뿐이다. 그 시간의 시작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도 필시 정상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주혁은 분명 두려웠다. 죽음의 앞에서 괴로워할 서은이, 서은이 겪을 아픔이, 서은이 없는 날들이, 서은이 없는 세상이, 홀로 남을 그가. 견딜 수 없이 두려워진다.

천년의 무덤 앞에서 주혁은 이따위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생각을 했다. 혼 없이 몸이 굳은 서은을 상상했고, 불에 타 재가 된 서은을, 혹은 무명천으로 감싸진 서은을 상상했다. 그 서은의 위를 덮는 흙과 풀을 생각했고, 그 위로 매일 반복될 낮과 밤을 생각했다.

그러나 흙과 풀도, 낮과 밤도, 모두 서은이 없다면 무의미하고 무소용한 것들이었다. 그 앞에서 그는 매일 좌절하고 괴로워하며 세상과 신을 원망할 것이다.

결국 두려움에 명치가 틀어막히고 심장이 사납게 뛰었다.

주혁은 걸쳐 입은 남방을 벗어 서은의 몸에 둘러 주었다. 서은의 손을 단단히 잡아 힘을 준다. 서은의 의아한 시선이 따라올 땐 그저 예사로운 척 눈웃음을 지었을 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 입을 맞추었다.

아프지 마, 라는 당부와 아프지 않게 해 줄게, 라는 맹세를 담아.

경주에 온 김에 부산에 들렀다. 여름이 되면 부산 바다에 가자는 약속을 뒤늦게 지켰다. 올라가는 길에는 경산에 들렀다. 도착하기 전, 백화점에 들러 서은의 할머니에게 어울릴 만한 옷과 할머니가 좋아할 만한 단 과자들을 샀다.

할머니 댁에 도착했을 때 대문은 열려 있지만 할머닌 없었다. 노인정에 화투를 치러 가셨을 거였다. 서은의 조모, 판실은 동네에서 알아주는 타짜였다. 마당의 작은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이건 상추, 이건 깻잎, 이건 고추 따위의 것들을 알려 주다 뒤늦게 선물 가방을 놓고 온 걸 깨달았다.

그걸 가지러 주혁이 차에 갔을 때, 판실이 들어왔다. 뜻밖의 손녀의 방문에 판실은 무신 일로 왔노, 딱딱하게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침 식혜를 만들어 올려 보낼 참이었다며 식혜와 사발을 가져왔다. 쇠 그릇에 담겨 입안에 들어가는 식혜가 머리가 어찔할 만큼 차가웠다. 입안에 굴러다니는 얼음 알갱이들을 깨 먹으며 소개할 사람이 있다 했다. 판실이 누고, 묻기도 전에 대문을 열고 주혁이 들어왔다.

주름에 파묻힌 눈이 휘둥그레 져주혁을 향했다. 그런 할머니를 향해 주혁은 ‘손녀사위입니다.’ 넉살 좋게 인사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라는 말이 무색하게, 판실은 눈살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남자가 어디 기생집 기둥서방처럼 생겨서는 얼굴값 할 놈이라며 못마땅해했다. 그걸 주혁의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바람에 서은은 당황하였다.

주혁이 건네는 선물도 마뜩찮게 받은 판실이 영 못 미더운 눈으로 물었다.

“자네는 남들 쌔가 빠지게 일할 시간에 와 여깄노.”

“아. 지금 딱히 하는 일은 없고, 쉬는 중입니다.”

주혁이 그렇게 답했을 때, 판실의 희번덕대는 시선이 먼저 서은에게 날아와 꽂혔고 그다음으로 매운 손바닥이 서은의 등을 향하였다. 뒤늦게 주혁이 기함을 하며 서은의 앞을 막아섰다.

삼자대면을 위한 주안상이 차려졌다. 꽃무늬가 화려한, 작고 동그란 양은 밥상 위에 김치전과 매실주, 막걸리가 올라왔다. 판실은 사발째 막걸리를 들이켰다. 그 주량에 주혁은 잠시 놀란 듯 보였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로 윤철을 키웠다는 판실은 동네의 알아주는 타짜이면서 동시에 누구도 함부로 못 하는 여장부이기도 했다.

서은은 판실의 옆에서 매실주를 마시고 김치전을 찢어 먹었다. 판실에 기가 눌려 긴장을 한 건지, 예의를 차리는 건지, 주혁은 다소 굳은 자세로 앉아 판실이 따르는 잔을 비울 뿐이었다. 판실이 전은 와 안 먹노, 삐딱하게 물을 때에야 주혁은 젓가락을 들 수 있었다.

주혁을 앞에 두고 판실은 허공에 삿대질을 하다가 침을 튀기다가 양손을 번쩍 들다가, 빠르게 말을 하였다. 태어나 한 번도 경상도를 벗어난 적이 없는 할머니인지라 말이 빠르고 사투리가 심해 서은은 판실의 말은 이해하지 못했다. 기쁠 때나 슬플때나 화날 때나 표정 변화 없이 매사 다소 툭한 얼굴의 판실이어서 지금하는 말들의 내용과 느낌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앞에서 주혁은 난처한 듯, 때론 결의에 찬 듯, 때론 반성하듯,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같은 말들을 하였다.

취기가 올랐다. 판실과 주혁의 대화에 서은이 낄 자리는 없었다. 장르가 코미디인 무성 영화 같은 장면을 앞에 두고 서은은 눈이 감겼다. 점점 몸이 기울다 결국엔 판실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웠다. 깜빡대는 시야에서 남자는 제법 진지한 얼굴을 하고 출전을 앞둔 신참 장수의 꼴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 피식 콧바람을 불었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 서은은 답답한 숨을 토해 냈다. 몸이 불편하여 눈을 뜨니 주혁이 서은을 안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주혁의 옷자락에서 달큼한 매실 향이 풍겼다. 서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할머닌 얼마나 먹인 거야. 술도 약한 남자한테. 몸을 틀어 주혁의 얼굴이 보이게 자세를 바꿨다. 얕은 숨을 뱉으며 잠든 남자의 얼굴이 새삼 연하고 고단해 보인다.

문득 주혁이 품고 살았을 외로움의 깊이를 헤아려 본다. 남자의 몸을 꼭꼭 끌어안아 따뜻하게 품어 주고 싶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에 호, 입김을 불고 가만가만 어루만져 주고 싶다. 주혁이 서은의 결핍을 채워주듯 서은도 주혁의 빈약한 부분을 채워 주고 싶었다.

내가 지켜 줄게.

작게 다짐하며 주혁의 가슴에 얼굴을 비빌 때였다. 주혁의 입술이 서은의 머리를 묵직하게 눌러 왔다. 고개를 드니 잠에 취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주혁이 보였다. 내리뜬 눈 사이로 희미한 빛이 감돌았다.

“깼어?”

묻지만 주혁은 답하지 않는다. 술에, 잠에, 온전히 정신을 맡긴 듯했다. 그럼에도 눈이 마주치자 습관처럼 자연스레 입을 맞추었다. 입안으로 혀가 들어오고 얇은 티 아래로 손이 들어왔다.

남자의 몸이 서은의 몸을 누르며 위로 올라온다. 익숙한 예감에 서은의 밑이 달아오르고 서은은 주혁의 목을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닿는 호흡이 뜨겁다. 다리로 남자의 몸을 감았다. 곧 아래 속옷이 벗겨지고 맨살에 공기가 닿았다. 양팔로 남자를 안았다.

조용조용, 느리게 몸을 움직였다.

아침이 되어 다시 본 판실은 전날보다 화가 누그러진 상태였다. 주혁에게 물으니, 차 있고 집 있고 건물이 있다는 대목에서 할머니의 화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한다. 그래도 탱자 탱자 노는 기둥서방보단 번듯하고 멀쩡한 직장 있는, 내실이 단단한 놈이 되라 했다고도 한다.

올라가는 차 안에서 주혁은 자못 진지하게 일을 구할 거라 했다. 말을하며 주혁의 한 손은 핸들을 잡고, 다른 손은 서은의 손을 잡았다.

창문을 내렸다. 한갓진 시골의 풍경이 고즈넉하다. 바람이 불지만 소리는 없다. 차들이 움직이지만 이 역시 소리가 없다. 익숙한 세상이었다. 고개를 올렸다. 바다를 담은 듯 닮은 새파란 하늘을, 비늘구름이 이불처럼 덮고 있다.

그 아래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이며, 도로변에 나 있는 꽃무릇이며, 깍지를 만들며 얽히는 손가락이며, 모든 것이 당연한 듯 자연스러웠다.

* * * * *

“자리 하나 마련해 줘.”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동생이었다. 정장도 아니고, 캐주얼 니트와 데님 팬츠, 스니커즈를 신고 온 녀석은 긴 다리를 꼬아 당당하고 태연하게 요구했다.

“무슨 자리?”

마땅한 설명을 생각하며 주혁은 경산에서 판실에게 들은 말들을 떠올렸다.

“매달 월급 착실하게 나오고, 남들 눈에 책 안 잡히고, 같이 있는 사람 고생 안 시킬 만큼 번듯한 자리.”

말을 하다 오래전 서은이 주혁에게 연애를 제안하며 했던 말이 떠오른다. 매달 착실하게 월급을 벌어 오는 남편을 바랐던 건 조모에게 배운 가치관이었나 보다.

“워라밸 지켜지면서 고소득에, 사람들 눈에 띄지는 않지만 권력 좀 부릴 수 있는 곳.”

이건 판실과 상관없이 주혁이 추가하는 조건이다. 승혁이 못마땅한 듯 눈썹을 세웠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심보가 아주 도둑놈이야?”

주혁은 피식 웃었다.

“옛정을 생각해 부탁드립니다, 서승혁 사장님.”

부탁하는 입장치고 낯이 두껍다. 조금 배는 아프지만.

“통신, 네가 맡아.”

해야 할 말은 해야겠지. 문으로 향하던 주혁이 다시 몸을 돌렸다.

“유진 리 교수, 스카웃 오케이 했어. 너 보고 싶어 하더라. 식사 같이 하자네. 네가 맡은 일 끝까지 책임져야지.”

몇 달을 지지부진 끌어오던 교수였다. 그 유진 리가 마침내 온다는 건, 단순히 한 사람의 존재 이상을 의미했다. MIT의 기술들과 인재들과 미래가 온다는 것이었다.

주혁이 고개를 모로 튼다. 계산을하는 얼굴이다. 녀석이 말하는 워라밸과 소득의 정도, 권력의 위치 따위를 생각하고 있겠지. 어림없는 일이었다.

“딱 네 자리야. 그 자리 아님 줄 자리 없고. 그리고 앞으론 네 꾐에 넘어가는 일은 없을 거야.”

승혁이 자못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러니까, 또다시 자신도 모르게 팔려 가거나, 네 말에 속아 널 놓아주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주혁은 답하지 않고 생긋 미소 지었다.

* * * * *

승혁의 비서가 붙여 따라오는 기사에게 거절을 표했다. 곧 서은을 만나기로 했다. 만나면 해 줄 말이 많겠다. 일을 시작하면 지금보다 배는 바빠질 것이다. 지금처럼 매일 셔터맨 노릇은 해 줄 수 없겠지만 매달 착실하게 월급을 받아 오는 남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 다시 경산에 내려가 판실의 허락을 받아야겠다. 허락만 받고 일을 그만두는 건 너무 염치가 없나 하는 이기적인 의문이 솟았다. 그는 지금의 생활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서은으로 하루를 시작해 서은으로 하루를 보내고, 결국 서은으로 하루를 끝내는. 그 생활을 포기하는 게 몹시 아까웠다.

빌딩을 나올 때, 주혁은 버릇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찾다가 아연하게 손짓을 멈추었다.

다시 연애를 시작하며 서은은 조건을 걸었다. 전에 걸었던 조건은 지우고 자질구레하고 유치한 것들이 늘어났다. 몸 혹사시키지 않기, 폭음하지 않기, 담배 끊기, 힘들어도 함께하기, 연락 자주 하기 같은 것들.

전과 다르게 종종 서은에게 전화도 온다. 서은은 제 할 말만 하고 끊었지만 그것만으로 주혁은 좋았다. 전화 너머 서은은 기쁜 듯 재잘대며 떠들다가 짜증을 내기도 하고 힘없이 한숨을 쉬다가 보고 싶어, 고백을 하기도 했다.

무엇이든, 주혁은 좋았다.

약속 시간까진 오 분 남짓한 시간이 남았다. 서은이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 했다. 주혁은 걸음을 빨리했다. 만나기로 한 건물의 앞에 도착했을 때 맞은편의 대로에서 서은을 보았다. 보았다. 바람이 서은의 머리카락을 날리고, 서은은 주혁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결혼할래? 하는 물음이 앞에 대상도 없이 솟았다. 어쩌면 서은이 아직은 이르다 거절을 할지도 모르겠다. 괜찮았다. 시간은 많으니까. 오늘 묻고 안 되면 내일 묻고. 내일 또 거절당하면 그다음에 물을 것이다. 인내심이 부족하고 이기적인 그로서는 참지 못할 말이었다. 언젠가 나랑 사귈래? 물었던 것처럼.

그때에도 아무렇지 않게 물었지만 실은 거절당하는 것이 누구보다 두렵고 아팠던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차마 견딜 수 없고, 참을 수 없었던 욕망들. 너를 원하는 마음들. 시작이 언제였는지도 모르는 이 욕심은 그 끝도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이번엔 너무 애태우지 말고 넘어와 줘.

마침내 눈이 마주쳤다.

서은이 웃었다. 주혁도 웃었다.

서은이 손을 흔들었다. 주혁도 손을 흔들었다.

서은이 기뻐하여 주혁도 기뻤다.

서은이 거리의 꽃들을 예뻐해서 주혁도 예뻐했다.

서은이 영화를 좋아해서 주혁도 좋았다.

서은이 밥을 맛있게 먹어서 주혁도 맛있었고, 서은이 버려진 강아지를 보고 슬퍼하여 주혁도 슬펐다.

서은의 손이 따뜻해서 주혁도 따뜻했다.

서은이 행복하여 주혁도 행복했다.

그러다 문득 주혁은 함부로 마음이 마음에게 전하는 것들을 생각한다.

함부로 그리움이 번지고 사랑이 피어나고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는 일들.

그게 서은이라면 기꺼이, 라는 생각을 한다.

그게 서은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게 서은이라서, 하는 일들은 점점 더 늘어나겠지.

그게 서은이라서 그는 행복하다.

함부로 마음이 마음에게 전하는 모든 것들을, 그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그게 서은이라면.

부디 이런 나의 마음이 너에게도 전해지길,

함부로 바라 본다.

그게 너이기에.

epilogue

사위에게.

서은인 귀한 딸이네.

내가 많이 사랑하는 딸이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만큼만 자네도 내 딸을 사랑하고 아끼길 바라네. 내가 배움이 짧고 글재주가 없어서 이렇게밖에 못 쓰니 이해해 주게.

내 딸이 어릴 때부터 나를 보고 자라 눈이 높아. 게다가 서은인 내가 할아버지가 되는 모습을 보지 못할테니, 자넨 평생 잘생긴 얼굴로 살다간 나와 비교당할 거야. 그 점에 대해 선 미안해. 그래도 우리 똑똑한 서은이가 평생 같이하겠다 선택한 남자라면 인성 하나는 좋을 거라 생각하네.

그러니 서은일 아끼고 사랑하고 위하는 건 당연하고. 그런 자네에게 마지막으로 더 부탁하는 건, 건강하게. 잠 잘 자고 푹 쉬고 몸에 좋은 것 많이 챙겨 먹고, 자네는 오래오래 살아 나 대신 서은이와 백년해로해 주어야 해. 내가 서은이와 못 해 본 것 들도 함께하고.

자네 얼굴을 못 보고 먼저 가는게 미안해서. 해 줄 건 없고 자네에게 이 편지라도 쓰는 거야. 특별히 제일 먼저 볼 수 있도록 서은이랑 약속해놓음세. 이 편지는 나중에 결혼할 사람이 생겼을 때, 그 사람한테 꼭 먼저 보여 주라고. 혹시 서은이가 몰래 뜯어보지 못하게 내가 꼼꼼하게 물풀로 붙여 놓음세. 우리 서은인 착한 딸이니 약속을 지켰을 거야. 그래도 혹시 봉투가 찢어져 있어도 어쩌겠나.

내 딸이 보고 싶어서 본 걸 텐데, 자네가 참아야지.

어쨌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건강하게. 내 딸을 잘 부탁하네.

함께 행복하게.

서은아. 언젠가 이 편지를 보거든.

서은이, 예쁜 내 딸. 아빠가 많이 사랑한다.

건강할 적 좀 더 많이 말해 줄걸, 못난 아빠라 미안하다. 이런 아빠 밑에서 그렇게 예쁘고 바르게 자라 주어 너무 고맙고 또 미안하다.

아빠가 더 있어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많이 미안하다.

그래도 너무나 사랑한다.

* * * * *

기사가 났다.

서주혁이 서정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기사가 하나, 서주혁에 대한 온갖 추문과 소문을 일축하는 서정의 공식 입장이 하나, 서주혁이 고등 동창과 연애 중이라는 기사가 여럿, 그 열애 상대를 소개하는 기사가 여럿, 서주혁과 그 고등 동창의 결혼이 임박하였다는 기사가 여럿, 그들에 대한 악의적인 댓글과 찌라시를 가만 묵인하지 않겠다는 서정가의 입장이 담긴 기사가 하나. 송선미와 서재형은 이혼을 하고, 송선미는 외국으로 이민을 갔다는 글들도 인터넷에 올라왔다. 별로 서은과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우후죽순 쏟아지는 기사와 사람들의 말들에 서은은 잠시 활동을 관두어야 했다. 괜찮았다. 주혁이 서은을 더 많이 사랑해 주었다.

시간이 지나 사람들의 관심이 잠잠해졌을 때에서야 서은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서은의 SNS 팔로워 수가 몇 곱절이 더 늘어났다. 글들에 달리는 댓글들의 수도 몇 곱절 더 늘었다.

그중엔 나쁜 말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것들은 진실이 아니었기에 서은은 상관하지 않았다. 간혹 진실과 마음과 서은을 비꼬는 말들에도 서은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보다 서은의 그림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서은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서은의 진심을 알아주었다. 서은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꿈을 이뤄 가며 즐거워했다.

곁에는 늘 주혁이 있었다.

서정의 투자 아래 청각 장애인들도 실시간 통화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어플이 개발됐다. 말을 하면 실시간으로 문자로 변환되어 상대에게 보내진다. 그 어플을 통해 서은과 주혁은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일을 시작한 주혁은 다시 바빠졌다. 그러나 전처럼 불안하지 않았다. 주혁이 출장을 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일이 바빠 한동안 보지 못해도 마음은 늘 함께였다.

한강이 가깝고 넓은 마당이 있는 새로운 집에서 주혁이 청혼을 했다. 네다섯 명의 식구가 몸을 누일 수 있고, 강아지 한 마리도 키울 수 있고, 마당과 정원이 있는 이 집에서 그는 매달 착실히 월급을 벌어 오겠다 했다. 원한다면 아들과 딸도 낳겠다 했다.

서은은 울고, 웃었다.

판실의 팔순에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동네에 길이길이 남을 잔치를 벌여 준 주혁을, 판실은 손녀사위라며 온 동네에 자랑을 하고 인사시켰다.

마침내 그해 가을, 식을 올렸다.

더없이 아름다웠다.

Fin

각주

1) 이석원,『 언제 들어도 좋은 말」, 그책,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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