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소리 없이
소리 없이 비가 내렸다. 툭툭 떨어지는 빗소리를 상상했다. 여러 개의 물감을 짜 섞으며 연두와 보라, 파랑과 회색의 물감을 만들었다. 파란점의 빗방울이 떨어져 연두와 보라의 물방울이 튀었다. 붓에 힘 조절을 달리하며 물이 튀기는 모습을 표현하고, 그림 속 걷는 사람들 뒤로 회색의 동그란 무늬들을 그려 넣었다.
그림이 다 완성되었을 때, 서은의 시야로 종이컵이 하나 들어온다. 고개를 들었다. 하이. 입 모양으로 인사하는 여자는 유명 포털 사이트의 김유라 에디터다.
“뭘 그린 거예요?”
“톡톡 튀는 자연의 소리.”
“아하. 이 회색 동그라미는, 사람들의 지루한 말소리인가?”
언제나처럼 더해지는 해석에 서은은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해석은 보는 사람의 몫이니까. 여자가 건넨 인스턴트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입안으로 시고 쓴맛이 진하게 번진다.
“비가 내려서인지, 오늘은 사람이 별로 없네요. 그저께 왔을 땐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그땐 주말이어서 데이트하러 온 사람들이 많았죠.”
“오늘은 나도 엽서 그림 받을 수 있어요?”
“그럼요.”
유라가 환하게 웃으며 서은의 맞은편에 앉았다. 서은의 첫 전시회였다. 경복궁역 근처의 갤러리에서 영란과 전시회를 열었다. 지난겨울 제작을 맡았던 인디밴드의 앨범이 롱런 히트를 하고 서은이 강의를 시작하며 서은의 SNS 팔로워 수가 더 늘어났다. 강의를 시작하며 서은이 청각 장애인임을 알렸고 여러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도 들어왔다.
김유라 에디터는 그 인연으로 알게 되었다. 김유라 에디터의 글을 통해 서은은 일상의 환상을 그리는 작가로 소개되었다.
서은은 빈 엽서를 꺼내 유라의 실루엣을 그렸다. 유라의 웨이브 진 머리와 단정한 블라우스를 그리고 그 안에 채색을 한다. 머릿속으로 다른 장면들이 떠오르지만 유라에겐 내색하지 않는다.
‘못생겼어.’
‘이게 너고, 이게 나야.’
툭, 튀어나온 슬픔이 도르르 구르기 시작했다. 슬픔은 곧 기억을 끄집어 와 서은의 시공간을 흩트린다.
언제였더라. 그날도 비가 내려 나가지 못하고 죽 방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주혁은 침대에 엎드려 있었고, 서은은 옆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 좋아, 내가 좋아?’
서은의 허리를 지분대던 주혁이 돌연 허리를 끌어당기며 그를 보게 했다. 순식간 색연필을 놓치고 침대에 눕혀졌다. 말을 제대로 못 읽은 서은에게 주혁이 다시 물었다. 말을 이해했을 때 서은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 유치해라. 몇 살이세요, 서주혁씨.’
‘답을 회피하시네.’
‘서정이 좋아, 내가 좋아?’
‘네가 좋아.’
웃음기 없이 덤덤한 얼굴로 전해지는 답이 쑥스러워 서은은 괜한 투정을 부렸다.
‘거짓말. 매일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서?’
‘서정은, 그냥 약속이지. 의무고.’
‘......그림은 내 꿈이에요. 아빠랑 함께 찾은 내 새로운 꿈. 봄 되면 강의도 열 거야. 소리가 안 들려도 사람들이랑 소통하며 살고 싶어.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사람들에게 보여 줄 거야. 강의 열려면 실력도 많이 쌓아야지. 지금 그 연습 하는 거예요.’
‘그래서 방해하지 말라?'
‘왜 대화가 그렇게 가지?'
‘내가 좀 급해서.’
계속 추근덕대는데, 눈치도 없으시고. 말하며 입술을 내리는 남자를 두 손으로 밀어 냈다. 서은의 고집에 남자는 눈썹을 세웠다.
‘응원해 달라는 거죠.’
‘......그래. 해. 응원. 파이팅.’
건성건성 하는 대꾸였다. 자, 만세 해야지. 손 들고. 파이팅. 얼렁뚱땅 말하며 옷을 벗기는 남자에 살짝 기분이 나빠지려는 찰나.
‘작업실 만들어 줄게.’
단어를 못 읽어 눈을 동그랗게 뜨니 남자는 다시 시선을 맞추고 입술을 움직였다.
‘작업실.’
그러니까 미리 칭찬해 줘. 남자는 서은의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게 하고 서은의 어깨를 깊게 빨았다.
‘진짜지? 약속했어.’
남자의 입술이 서은의 몸을 타고 내려가 답을 듣지 못했지만 남자는 약속을 지켰다. 남자가 만들어 준 작업실에서 서은은 꿈을 꾸었다.
단계별로, 테마별로 이런 내용의 강의를 해야지. 언젠가 인터뷰도 하고 전시회도 열 거야. 내 그림이 TV 광고에 나오는 날도 올 수 있게.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음을 숨기지 않고, 정서은으로서 당당히 살아갈거야. 정말로 내 그림이 광고에 나오면 주혁과 함께 축하 파티를 열어야지.
종이 위로 물방울이 번졌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것은 더 이상 빗방울이 아니었다.
잠시 고개를 드니, 겹겹이 번져보이는 유라가 어느새 다가와 말을 한다. 보이지 않지만 아마 괜찮으냐 물은 거겠지.
“괜찮아요. 그냥, 그냥 갑자기.”
비가, 와서.
여름과 가을의 사이여서. 날씨가, 계절이, 모호해서. 그러고 보니 홍은동의 면옥집에서 남자를 본 것도 이시기였던가.
꿈은 현실이 되어 가는데, 내 옆에 당신은 없어. 현재였던 당신은 꿈이 되었네.
괜찮아. 나는.
괜찮아.
그러 니까 당신도 괜찮아야 해.
걱정하는 얼굴의 유라에게 서은은 괜찮아요, 괜찮아. 말하였다. 유라에게 번진 엽서를 줄 수 없어 다시 그려 주기로 했다. 유라와 근처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여행사에서 협업 제의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축하를 건네는 유라에게 서은은 욕심이 많고 꿈이 커서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말도 해 주었다.
그날 밤 문자 한 통이 왔다. 문자는 서승혁입니다, 라는 간결한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 * * * *
공기가 무겁고 텁텁했다. 어제부터 내린 비가 오늘 점심에서야 그친 탓이다. 주혁과 눈매가 닮은 남자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화실을 죽 둘러보았다. 따라온 수행원들은 모두 자리를 비키고 화실엔 승혁과 서은, 둘뿐이었다.
“서승혁 씨.”
책상 위 작은 이젤을 바라보던 승혁이 아차 하는 얼굴로 시선을 틀었다.
“아, 미안해요. 화실 장면이 익숙해서. 이젤들도 오랜만이고.”
“......그림 좋아하세요?”
“설마. 오히려 싫어하죠.”
그릴 줄도 모르고 보는 것도 싫고. 가라앉은 눈으로 중얼이던 승혁이 뒤늦게 불친절한 설명을 보충했다.
“사이 나쁜 아버지가 좋아했거든요. 배운 게 없어 그림도 볼 줄 모른다고 어머 니께 타박 놓는 걸 종종 봤으니.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죠.”
말을 이해했을 때 서은은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주혁 씨도 싫어하나요? 이제 와 소용없는 질문은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마음의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가라앉은 그것이 묵직하게 가슴을 누르지만 결코 내색은 하지 못한다.
결국 뭍 위에 떠올라 남을 수 있도록 허용되는 건, 피상적인 궁금증뿐이었다.
“절 어떻게 아셨어요?”
“회장님이, 할아버지가 먼저 아셨습니다.”
서은이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하자 승혁은 다시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연희동에서 일하는 사람이 서재를 정리하다가 책 사이에 꽂아진 편지를 발견했어요. 동생에게 주시고 자 했던 편지였나 봐요. 거기에 정서은 씨 이야기도 써 있더군요. 그래서 알았죠. 그리고 별도로 좀 알아도 봤고.”
그리고 잠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지만 서은은 되묻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한가득 품고 온 얼굴의 승혁이다.
간밤, 승혁의 문자를 받고 서은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주혁에 대한 것일 테지. 어떤 말이든, 서은을 아프게 할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말로 전달하기 어려운 내용이 될 것 같아 노트북을 준비해 왔다는 승혁은 곧 키보드를 두드렸다.
-기자들의 타깃이 되어 대중들에게 씹히고 먹히고 찢겨 본 적 있어요?
“.......”
-내 잘못이 아닌데도, 때론 잘못된 사실이나 만들어진 진실에 오해받아서.
“......서승혁 씨와 주혁 씨에 대한 설명인가요?”
승혁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그 기분이 참 엿 같아요. 이만하면 익숙해졌다 생각하는데도 겪을 때마다, 수치스럽고 더럽죠. 그래도 난 좀 덜한 편이었어요. 되도록 좋은 쪽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더 많았으니까. 그런데 내 동생은 아니었죠. 특히 내 동생은 가만있어도 시선을 끄는 녀석이라.
시선을 떨어뜨리며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서은을 본다.
정윤철의 딸. 주혁의 동창. 홍보팀 직원. 청각 장애인. 삽화가. 청각장애인 여자가 그리는 소리와 일상이 화제가 되어 최근 SNS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했다. 청각 장애인임을 밝히지 않다가 최근에서야 밝힌 여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 그 여자에 대한 보고를 받았을 때 승혁은 기가 막혔다. 듣기로 주혁은 매일 연희동에 들러 태일을 설득하였다 한다.
어쩌면 오랜 시간 주혁이 마음에 품고 있었을 여자.
-그런 녀석의 숨겨진 여자라.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를 두고 그런 일을 벌인 놈이 사랑하는 청각 장애인 여자. 기자들이 얼마나 군침을 흘릴 소재인지.
“.......”
-기자들 시선이 홍은동에 가는 걸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더군요. 자기를 내치라고 당당히 요구하던 걸, 난 녀석이 날 지키려는 건 줄 알았지. 그런데 내가 아니라 정서은 씨를 지키려 했던 거였어요.
그리고 승혁은 잠시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홍은동은 안전하게. 그곳에 사는 정서은은 무탈하게. 주혁이 정말로 지키고 싶어 했던 건 그도 서정도, 집안도 아니라 서은이었다.
“설마, 서주혁이 나를 팔 줄이야.”
정서은을 가리기 위해 주혁은 더 큰 쇼를 벌이고 정보를 넘기고, 스스로와 승혁을 팔았다.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싶으면서도 여자의 인생에 티 하나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언젠가의 승혁이 했던 선택이었으니까.
-본인 때문에 정서은 씨가 함께 조롱받는 걸 원하지 않았고, 소리를 듣지 못하는 정서은 씨에게 쏠릴 기자들과 사람들의 말들이 싫었고. 그로 인해 정서은 씨가 괴로워하지 않길 바랐겠죠. 또 정서은 씨의 꿈을 지켜 주고 싶었고. 이 화실이 사람들에게 짓밟히지 않길 바랐고. 정서은이 란 사람이 정서은으로서 행복하게 살길 바랐을 겁니다.
그 문단을 시작으로 한 페이지의 화면이 까만 글자로 채워졌다.
한 페이지의 화면에는 한 남자의 노력들과 마음들과 절망들이 담겨있다.
검은 글자들의 위로 남자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서은아. 미안해. 지켜야 할 게 많아서.
심장이 서걱, 베였다.
화면 속 글자의 끝에서 커서가 깜빡거린다. 일정한 간격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검은 막대를 따라 서은의 마음도 깜빡깜빡 꺼지다 켜지기를 반복한다.
그리움이, 막막함이, 슬픔이, 야속함이, 망설임이, 서은아, 부르는 남자의 얼굴이, 말이, 마음이, 끊어졌다 나타나고, 다시 끊어졌다 나타나고.
시야가, 세상이 점차 흐려졌다.
때늦게 맨몸으로 마주한 마음의 앞에서 서은은 속수무책 무너지기 시작한다.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고 번지는 시야를 다잡아 물었다.
“제게 와 말씀해 주시는 건, 제가 주혁 씨를 잡길 원해서 인가요?”
“......나의 후회입니다.”
“.......”
“내가 동생에게 진 빚이 많거든요.”
승혁은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오랫동안 키보드를 두드렸다. 승혁의 마음이 온전히 화면에 담길 때까지 서은은 가만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수많은 감정들이 폭우가 되어 내리고 파도를 일으켜 이성과 감정의 선을 범람했다. 그 파란을 담은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 버티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기다렸다. 기다려야 했다. 남자의 노력에 비해 서은의 노력은 고작 그뿐이었다.
-많이 미워했고 또 많이 사랑하는 동생이에요. 그건 아마 내 어머니도 마찬가지셨겠죠. 어릴 적 그 앤 내 유일한 동생이며 친구이고 기사였습니다. 늘 먼저 다가와 줬어요. 지금도 어릴 때 그 애가 형, 하며 달려오던 모습이 눈에 훤해요. 그게 실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였단 걸 알았어요. 그게 나는 또 싫어서 한창 같이 놀다가도 심술을 부리고 괴롭혔죠. 그래도 그 애는 기죽는 법 없이 잘못했어, 하며 돌아와요.
말도 많고 힘도 좋던 그 애는 어머니가 나타나면 조용해졌어요. 내 옆에서 가만히 어머니의 관심을 기다렸죠. 어머니가 그 애에게 착하네, 말 한마디 해 준 날이면 그 애 입이 귀에 걸렸어요. 그 말 한마디 듣겠다고 온갖 예쁜 짓을 다 했어요. 그게 미우면서도 그 기뻐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맘껏 미워하지 못했어요.
끝까지 어머닌 그 애에게 사랑 한 번 제대로 준 적이 없었지만 그 앤 늘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 애가 가여웠어요. 나를 두고, 그 애에게 어머니의 사랑이 가는 일이 없을 거란 걸 알았죠. 그 앤, 죄였거든요.
나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어머닌 평생 그 애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는데. 어느 날 제게 말씀하셨죠.
승혁아, 나를 용서하렴. 엄마한텐 여전히 승혁이가 최고야. 그 애는 너를 위해 받아 준 거야. 승혁이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기에 삶은 너무 고단하니, 승혁이 동생으로 삼으라고, 승혁이한테 좋은 말동무가 되어 주라고, 그래서 받아 준 거야.
그때 난 사실 내가 말해야 하는 정답을 알았어요. 아뇨, 엄마. 엄마는 이미 주혁일 아들로 생각하고 계시잖아요. 실은 그 앨 사랑해 주고 싶으신 거잖아요. 그래도 돼요. 나는 괜찮아요.
그런데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땐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다고만 생각했거든요.
아, 이렇게만 쓰면 서주혁, 되게 착한 애 같은데, 아니에요. 욕심도 많고 못될 때는 한없이 못된 애죠. 어릴때에도 우릴 괴롭힌 사람들에게는 배로 갚아 주고, 그 앤 얄미울 정도로 본인 스스로 자기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애라, 갖고 싶은 게 생기면 무엇이든 이용해서 결국 가져갔어요.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 위해 날 이용했던 것처럼.
잠시 멈추고 승혁은 서은과 눈을 마주쳤다. 엷게 웃는다.
“그런데 정서은 씨는 놓아주었네요.”
승혁이 웃으며 뱉은 숨이 바람이 되어 마음을 건드린다.
-역설적으로 어쩌면 주혁이 살며 제일 갖고 싶었던, 함께하고 싶었던 존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애가 그토록 사랑을 갈구하면서 지키고 싶었던 우리의 어머니는 우리의 곁에서 늘 괴로워하셨어요. 말로 뱉지는 않았지만 늘 자유로워지고 싶으셨단 걸 알았죠. 하지만 우린 어머닐 놓아드리지 못했습니다. 이 집에서 끝없이 괴로워하는 걸 알지만, 우릴 떠나길 원하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괴로워도, 우리의 곁에 있어야 한다고. 당신은 내 엄마니까. 나는 그 아들이니까. 난 엄마가 좋으니까, 필요하니까. 우리 때문에 참고 견디시는 걸 알았지만 알고도 외면하고 오히려 이용했죠.
그런데 이 나이가 되고, 내 자식이 생겨 보니. 내 불쌍한 어머니는, 어쩌면 그런 우리의 마음을 알고도 이용당해 주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그렇게 돌아가시고,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자란 우리는, 은연중 지키고 싶은 게 생겼을 때, 그걸 지키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우리의 곁에서 벗어나도록 놓아주는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처럼 만들어선 안 된다고.
난 내 아내를 그렇게 보냈어요. 그런데 그렇게 보내 놓고, 뼈저린 후회 속에서 알았어요. 그것만이 방법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함께 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거라고.
내 아들에겐, 내 동생에겐, 그런 방법 말고도 다른 길이 있단 걸 알려줘야겠다 싶었어요. 그러니까, 정서은 씨에게 이렇게 찾아온 건.
거기서 글은 멈추었다. 서은이 글을 다 읽고 시선을 올렸을 때, 승혁이 말하였다.
“내 동생을 지켜 달라, 부탁하고 싶어서요.”
“.......”
“그 불쌍한 어머니에게도 사랑 한 번 듬뿍 받아 보지 못한 동생이에요.”
“.......”
“서정이, 우리 집안이 서은 씨를 얽매거나 괴롭게 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염치없지만 정서은 씨가 내 불쌍한 동생을 지켜 달라, 부탁하려고 왔습 니다.”
말을 마쳤을 때, 붉은 눈을 한 승혁은 고개를 숙였다.
숙이고 한참을 일어나지 않았다.
숙인 승혁의 위로, 세상이 흐릿흐릿 허물어진다.
넌, 내가 싫지?
나랑 사귈래?
이렇게라도 해야 환심을 사지.
섹스를 하다가 사과를 하는 건 무슨 의미야?
정서은에 환장한 미친놈이지.
사랑, 해 줄게. 넌 하고 싶은 걸 해. 더 바라지 않을게.
말해 줘. 사랑한다고.
넌 그런 거 하지 마. 앞으론 가지 마.
흔적 좀 남겨 봐. 한눈 못 팔게, 정서은 것이라고.
......지켜야 할 게 많아서.
잡아,
볼걸.
나는 괜찮다고, 말 한마디 해 볼걸. 내가 잡아 줄걸. 나는 괜찮으니까, 나는 그래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고 말해 볼걸. 왜 난 그 흔한 붙잡는 말 하나 하지 못했나. 나는 오부 당신은, 왜. 어떡하지. 그 미련한 사람을. 그 불쌍한 남자를. 나는 어떡하지. 어떡하지, 아빠.
뒤늦게 전해지는 마음들이.
남자가 서은에게 바랐을 마음들이.
서은이 맘껏 주지 못한 마음들이 터져 나와.
소리 없이, 목놓아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