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뫼비우스의 시간
해가 길고 질겼다. 버스에서 내려 식이 열리는 호텔까지 걷는데 원피스 천 안쪽으로 땀이 주룩 흐르는 걸 느꼈다. 저녁 예식이란 말이 무색할만큼 사위가 훤하였다. 원규진 교수의 딸 민정의 결혼식 날이었다.
신랑 신부 모두 바빠 남들보다 늦게 식 준비를 시작하였는데 이미 마땅한 호텔의 좋은 시간대는 다 나가고 없어 저녁 예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토요일 저녁이라 하객들이 적을 것 같다며 식 바로 전날까지 집안 어른들이 걱정을 했다 한다. 모두 경희가 해 준 말들이다. 민정과는 속 깊은 대화 한번 나눈 적 없는 서슴서슴한 사이였다.
서먹한 사이였지만 신부 대기실에 들어가 눈도장을 찍고 웃으며 사진 한 장도 남겼다. ‘결혼 축하해, 잘살아.’ 하는 식상한 인사말도 두어 번 건넸다. 대기실을 나오기 전 민정의 절친으로 보이는 여자가 민정에게 무슨 사이야?’ 묻는 입술을 읽었지만 민정의 답은 알지 못한다. 들리지 않았으므로.
민정의 결혼식은 서은이 원규진 교수의 친척들에게 처음 인사를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제 경희네 호적에 들어갈 필요는 없어졌지만, 서은은 경희가 시키는 것을 고분고분 따랐다. 어색한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사진을 남기고 생판 모르는 친척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하는 모든 것들은 실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넘치는 시간을 어떻게든 소모시켜야 했다.
주례가 멀어 내용을 알 수 없다. 벽을 채운 커다란 스크린은 긴장한 신랑과 고운 신부의 얼굴을 비칠 뿐이다. 서은은 멍한 눈으로 다만 앞에 놓인 것들을 보았다. 보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척하였고 듣되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듣는 척했다. 잠시 정신을 놓으면 순식간 어득해지는 세상이다. 어득한 세상에 존재를 명료히 하며 떠오르는 건 오직 하나였다. 그 존재를 떨치기 위해 서은은 시선을 틀었다. 시시콜콜히 떠드는 사람들의 입술을 읽었다.
호텔이라 그런가, 천장이 높다.
이 샐러드 맛있어. 더 달라 해도 되나?
신랑이 키가 커서 보기 좋네.
사람들의 입술을 읽어 내는 데 집중을 하던 중 맞은편 테이블에서 역정을 내는 노중년의 사내를 보았다.
귀가 안 들린다고?
허, 참. 별일이 다 있구만 그래. 귀도 안 들리는데 다 큰 처녀를 뒤늦게 입적해서 무얼 하게. 재산 노리는 거 아냐?
아, 듣긴! 귀가 안 들린다는데 내가 하는 얘길 무슨 수로 듣는다고. 식 끝나면 민정 어멈한테 내가 말 한번 해야겠구만. 이 집안 식구들이 다 점잖으니까 어멈이 제 자식 덕 보게 하겠다고 설치는 거 아냐! 나라도 말을 해야지, 원.
끝에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못마땅한 기색의 사내는 입을 다시며 피하듯 시선을 틀었다. 사내가 하는 말을 통해 이 집안에서 경희의 위치와 처지를 짐작해 본다. 바등거리며 애를 써야만 인정받는 자리. 그 자리를 지키려는 경희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 마음이 낯설지 않고 익숙하다.
맥락 없이,
서은이 겪은 부당한 일에 화를 내던 주혁이 떠오른다.
이곳 천장만큼은 아니어도 홍은동의 언덕 집도 천장이 높았다.
이곳의 샐러드보다 남자의 음식이 더 맛있었다.
이곳의 신랑보다 남자의 키가 더 컸다.
이어 ‘완벽한 실루엣을 가지셨군요.’ 감탄을 했던 노을의 순간이 떠오른다.
영종도의 바다와 식물이 말라비틀어진 텃밭과 거품이 날리는 욕실 같은 것들도 함께.
뒤이어 조금이라도 남자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애를 썼던 노력들과 마음들이.
참았던 것들이 물밀 듯 밀려와 서은은 버틸 수 없었다.
식장을 나왔다. 그러나 갈 데가 없었다. 막막한 심정으로 표류하듯 주위를 걸었다.
걸어도 걸어도 갈 데가 없다.
결국 찾은 곳이 영란의 화실이었다.
“선생님.”
영란은 무작정 들이닥친 서은의 등장에 놀라고 얼굴에 범벅이 된 눈물을 보고 놀란다. 무슨 일 있어? 물어 오는 영란의 얼굴에 걱정과 염려가 가득했다. 그 다심한 얼굴에 마음이 풀려 서은은 울컥하고 만다.
“저 차였어요.”
두서없이 말하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다. 마음 깊은 곳, 기척 없이 도사리고 있던 서글픔과 억울함이 왈칵 솟구쳤다. 고삐가 풀린 서은은 그저 떠오르는 말들을 내뱉었다.
“지켜야 할 게 많은 남자래요. 그 지켜야 할 대상에 나는 없었나 봐요. 사랑해 달라 할 땐 언제고. 이렇게 찰 거였음 애 셋 낳고 손주 열 명 보자는 말은 왜 했어. 집안일 좀 힘들다고, 회사 좀 힘들다고 이렇게 헤어질 거였음. 왜 그런 눈으로 날 보고 왜 날 그렇게 안아 줬어. 왜 그렇게 다정하고 왜 그렇게 영원할 것처럼 굴었어. 왜, 왜애! 내가 얼마나 애를 쓰고 노력했는데. 내가, 얼마나, 얼마나 노력했는데. 얼마나 사랑했는데!”
말을 쏟아 내고, 서은은 울음을 터뜨렸다. 목구멍을 긁어 나오는 소리가 심장을 긁는 소리처럼 들려와 영란은 사정도 모르고 그저 가슴이 저몄다. 영란은 쏟아지는 말들과 서은의 울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종국엔 서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눈물이 멎고 정신이 돌아오자 조금 창피해졌다. 서은의 못 볼 꼴을 묵묵히 다 받아 준 영란이 고마웠다. 서은이 뒤늦게 물색없는 사과를 건네자 영란은 웃으며 짓궂게 말했다.
“나 몰래 어디서 지독한 사랑을 하고 오셨나 봐.”
서은은 속없는 얼굴로 무구히 웃었다. 그러나 얼굴에 깊게 내려 있는 파리한 빛은 숨길 수 없다. 영란은 서은의 조잡한 미소의 이면에 감추어진 감정을 눈치챘다.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다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렇게 좋아했음 잡아라도 보지.”
시간 차를 두고 서은이 덤덤히 대꾸했다.
“힘들어서요.”
막막히 바라보는 영란을 향해 서은은 미소를 지어냈다.
“선생님, 저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나 버리고 간 엄마한테 찾아가서 자존심도 없이 뒤늦게 받아 달라고 비위 맞추고, 그 남자네 집 사람들한테 부끄럽지 않게, 조금이라도 당당하고 싶어서 일도 진짜 열심히 하고. 언젠가라도 그 집 사람들 만났을 때, 그분들이 하는 말 내가 못 알아들으면 안 되니까, 드라마 대본 같은 거 찾아서 드라마 보면서 구화 연습하구. 일부러 어려운 말들 있는 드라마들로요.”
눈 끝에 위태로이 매달려 있던 눈물이 조용히 떨어진다. 턱 끝에 눈물방울들을 매달고 서은은 웃으며 말하였다.
“나는 그렇게 노력했는데. 그런데, 그 사람이 힘들어하더라구요. 나한텐 말도 않고 혼자. 그러니까 나도 막 지치는 거 있죠? 그렇게 애쓰는 내가, 그 사람이, 가엾고 힘들어서. 감히 붙잡지 못했어요. 어차피 안 될 사이였는데.”
"……."
“우리가 만나는 동안은 평생 그렇게 애를 써야 하는 거잖아요. 어떻게 그래요. 나 그렇게 못 살아. 내가,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살게 해요.”
결국 나의 최선은 이 정도였던 건가 봐.
잠시 말을 멈추고 서은은 눈물을 벅벅 닦아 냈다.
“그래서, 더는 힘들어서 관뒀어요.”
최선을 다했고 결국 힘이 들었다는 서은에게 영란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해 주지 못한다. 서은도 어떤 말을 바라고 속내를 털어놓는 건 아니었다. 다만 아무도 모르는 사랑과 이 별의 증인 하나쯤은 세상에 남겨 두고 싶었다. 결국, 고작 이렇게 끝이 났을 지라도 한때 우리가 그토록 열심이었고 사랑했음을.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 추억 하나 곱씹을 사람이 없는 건 너무 슬프고 내 사랑이 가여우니까.
영란의 침대 옆에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까맣고 고요한 하늘이 아무렇지 않아 서은은 눈을 감았다. 어차피 안 될 사이였다는 말이 마음에 금을 긋는다. 힘들어서 관뒀다는 말이 너무도 간단하고 가벼워 허망했다. 자신이 내뱉고도 이해하지 못한 말들이다.
어차피 안 될 사이였다니. 끝은 없을 것처럼 굴었던 남자를 기억한다. 힘들어서 관뒀다니. 그보다 더 행복했던 나날들이 선명했다. 생각을하면 다시 또 왈칵 쏟아지는 감정들이 버거워 이를 물고 버티었다. 그래도 나아가야지, 살아가야지. 하는 생각들로 버티었다.
슬픔은 서은의 안에서 눈처럼 구르며 몸집을 키웠다. 데굴데굴 구르다 마음 어딘가 묻은 기억에 맞닿으면 왈칵 그리움과 원망을 터뜨렸다. 터지는 그것들을 홀로 감당했다. 터지는 마음의 부피가 크고 밀도가 높아, 혼자 가누지 못하고 휘우청 세상이 기울 때면 서은은 아빠를 떠올렸다.
아빠.
무너질 수 없었다.
하여 무너지지 않았다.
* * * * *
서정가의 이야기는 권선징악으로 끝을 맺었다. 서승혁은 서정의 사장이 되었고 송선미와 서재형은 일정한 유산을 받고 물러났으며 세력을 잃은 서주혁은 한직으로 좌천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서은은 점차 슬픔에 무뎌졌다. 미국 시트콤을 보다가 웃고 수강생들과 시시콜콜한 농담을 따 먹다가 웃고 코를 흘리며 달리는 아이를 보고 웃었다. 때때로 목이 조이고 가슴이 저미고 내리는 빛이 무거워 주저앉았지만 다시 일어났다. 때때로 그 사람도 많이 아플까 생각했지만 무용하여 관두었다.
서은의 강의엔 수강생이 더 늘어났다. 서은이 SNS에 올린 그림들과 짧은 수필들을 모아 책을 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서은은 강의를 더 늘렸다. 들어오는 수입이 더 늘었다.
서은은 이제 인터넷에 서주혁을 검색하지 않는다. 누군가 서정의 이야기를 하여도 남의 이야기인 것마냥 감흥 없이 앉아 있는다. 언덕 집이 보이는 홍은슈퍼에도 아무렇지 않게 들락거린다. 주인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언덕 집 앞에 찾아가 서성이지 않는다.
그 집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한때의 일이었다. 한때의 일은 한때에 덮어 두었다. 서은이 놓치는 소리들을 잡아 주는 사람이 이제는 없지만 애초 흐르는 소리를 굳이 잡을 필요가 없었다. 불가능한 것을 욕심냈던 과거를 깊이 묻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고 이별이었다. 그런 미욱한 사랑 하나가 끝났다 하여 세상에 별일은 없었다. 그만큼 그들의 이별은 특별할 것이 아니었다. 때가 되면 해가 뜨고 배가 고프고 졸음이 몰려왔다. 그러므로 살아갔다.
다만 그뿐이다.
* * * * *
꿈을 꿨다. 꿈에서 난영은 울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난영의 표정이 삽시간 변하였다. 주혁은 다만 말을 걸고 싶었다. 울지 마세요. 그러나 난영의 앞에 서면 그 흔한 어줍은 한 마디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어린 주혁은 몸을 움츠리고 공간을 벗어났다. 그 집에서 그렇게 사라지는 아이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꿈에선 난영이 주혁을 불렀다. 주혁아. 다정한 음성이었다. 도망치듯 달리는 발을 멈추었다. 그 다정에 마음이 들떠 마침내 뒤를 돌아보았을 때.
눈을 떴다.
형광의 불빛이 환해 눈살을 찌푸렸다. 불을 켠 채 잠들었나 보다. 짧은 숨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탁상시계의 LED 불빛이 오후 한 시 사십일 분을 표시한다. 그 숫자의 감각이 주혁에겐 온전히 와닿지 않는다. 쉴틈 없이 울리는 현관의 벨 소리도, 그에게 닿지 않는다. 주혁은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젖혔다. 자고 일어났음에도 눈이 뻐근했다.
몇 주 전까지 그는 서정의 지배구조 재편과 관련하여 법적 문제들을 검토했다. 준비된 시나리오의 단계마다 필요한 근거법과 이어지는 상위법, 실제 판례 자료를 모조리 살폈다. 생소한 한자어와 장문이 많아 이해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이앤장에 맡겨 돌아온 자료이니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싶다마는, 당사자가 내용을 숙지해 놓는 것과 하지 않는 것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완벽한 준비를 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꼬투리가 될 여지를 만들어 놓는다면 두고두고 언론의 먹잇감이 될 것이고, 대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인들이 재계 길들이기의 본보기로 이 일을 물고 늘어질 거였다. 그러니 애초 틈을 만들어 두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
마침내 그 일을 마무리한 후부터 그는 더 이상 서정에 나가지 않았다. 모든 일은 홍 실장과 승혁에게 맡겨두었다. 그런 주혁을 향해 홍 실장이 자질구레한 번설을 늘어놓았으나 주혁은 개의치 않았다. 이제는 모두 상관없는 일이었다. 서정에 충과 효와 열을 바치게 한 관성은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다.
이용하기에 이용당해 주었다. 대가로 주혁은 흐르고 넘치는 돈을 쥐고 생의 목표를 얻었다. 태일과 그는 그렇게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였다. 어느 날 돌연, 그를 그렇게 이용해 먹던 태일이 훌훌 털듯 재가 되어 나무 아래 묻혔을 때. 주혁은 태일이 묻힌 세계를 상상해 보았다.
슬픔도 기쁨도 분노도 그리움도 없이 안식만이 가득한 그곳에서 태일은 비로소 평안해졌으리라. 상상이 끝났을 때, 주혁에게 서정은 무의미해졌다. 설정된 목표가 주는 의지도 일말의 재미와 성취감도 모두 한 톨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귀찮아. 피곤해. 내가 왜. 돈은 이미 차고 넘치는데. 세상의 어떤 말들도 더 이상 그에게 와닿지 않았다.
아득한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어 테라스로 나갔다. 불을 붙이고 담배를 입에 물며 아래를 내려 본다.
기자로 보이는 몇몇이 빌라를 둘러싼 담벼락 주위에 서성이는 듯했다. 보이는 게 저 정도니 보이지 않는 곳에도 여럿 포진해 있겠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워 길게 빨아들였다. 곧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단 몇 분 테라스에 나왔을 뿐인데 푹푹찌는 열기가 그를 덮쳤다.
매미는 미친 듯이 울어 대고, 날은 빌어먹게 덥다.
폭염이다. 입추가 지났다는데, 퍼부어 내리는 불볕은 약해질 기미 없이 살아 있는 것들의 생기를 무자비하게 앗아 간다. 빛줄기가 닿는 곳곳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열감이 뻗쳤다. 하여 가을은 요원해 보였다.
불쾌하고 짜증이 나,
차라리 모두 불타 버리길.
작열 속에서 찰나 전부 증발해 버리길.
잔인한 저주를 감정 없이 퍼붓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그의 저주를 제지한다. 허락 없이 그를 점령한 사념에 주도권을 잃고 초점이 무너지며 시공간이 토막 난다. 괴로운 예감이 들었다. 예감대로 이어 떠오르는 음성과 풍경을, 가만 놔두었다. 그것들이 그의 마음을 할퀴어 상처를 내도 가만 놔두었다.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천천히 담배를 쥔 손가락을 내리고 난간에 담배를 짓이긴다.
내가 죽어도, 세상이 끝나도, 서은아.
너는 살아야지.
저주를 멈추게 한 생각 속에서 그는 여전히 다정히 서은의 이름을 불렀다. 상상 속에서 서은의 세상은 여전히 무탈하였다.
테라스를 나왔다. 침대에 몸을 누였다. 아직 해가 중천이다. 에어컨의 온도를 겨울에 가까운 정도까지 낮추고 이불을 덮었다. 눈을 감고 그를 죽이는 생각을 죽인다. 현관의 벨 소리가 끈질기게 울어 대지만 그는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해가 지고 밤이 내렸다. 정해진 시간이 되었을 때, 주혁은 비척대며 일어나 물을 들이켰다. 열쇠 수납함에서 손에 잡히는 아무 키를 쥐고 현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의 주차장에 내려가 폴딩키의 버튼을 눌렀다.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검정의 국산 중형 세단이 전조등을 밝히며 존재를 알린다. 그 옆에 주룩 서 있는 차들 모두 주혁의 것이었다.
열한 대의 차를 샀다. 모두 클래스를 달리해서. 낮은 급에서, 너무 눈에 띄지 않을 최상위 직전의 높은 급까지 회사별로, 모델별로. 모두 선팅은 짙게 하였다.
그는 운전석에 올라 액셀을 밟았다.
다시 그의 일을 할 시간이었다.
시간.
핸들을 돌리며 단어를 되뇌다 주혁은 별안간 브레이크를 밟았다. 몸이 퉁 앞으로 쏠렸다가 푹 뒤로 꺼졌다. 둔탁한 통증이 삽시간 퍼진다. 그러나 그를 지배하는 것은 그 통증의 감각이 아니었다. 그는 찰나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어쩌면 죽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죽은 시간 속에 그의 존재도 함께 묻혀. 그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시간이 정지한 지점을 헤아려 본다. 서은과 함께 행복하던 날들의 어딘가, 혹은 서은과 그가 이별한 그날. 서은이 잊으라 했던. 잘 지내라, 하였던.
잡념을 떨치고 다시 액셀을 밟았다. 일을 해야 한다. 그의 일을.
계기판의 숫자가 한껏 치솟았다. 밤이 깊어 텅 빈 도로에, 차체의 사나운 진동음이 울렸다. 우로, 좌로, 손이 움직이는 대로 핸들을 돌리지만 정해진 도착지는 없었다. 이대로 강변북로를 돌기도 하고, 서울의 북쪽 끝에서 테두리를 따라 달리든가, 올림픽대로로 내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기도 한다.
그저 순간순간의 충동으로 움직이지만, 실낱의 이성이 홍은동과 서교동만은 피하도록 했다. 그곳은 감히 주혁이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다. 그곳은 죽은 윤철과 서은이 힘들게 쌓아 놓은 서은의 세상이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고 싶다는 서은의 간절한 바람과 꿈이 깃든 곳이다.
감히 주혁은 망칠 수 없는. 나쁜 말도 시선도 닿아서 안 되고, 어느 무엇도 감히 깨뜨려선 안 되는.
그 세상을 제외한 모든 곳이 그의 도로였다.
그건 일종의 도피였다. 살고자 하는 나름의 방편이고 억눌려 비틀린 욕망의 배출구였다. 이렇게라도 달리지 않으면 고여 있는 시간이 늪처럼 달라붙어 그를 삼켰다.
한동안은, 참을 수 없이 괴로워 매일 밤 서교동의 화실을 찾아갔다.
상상대로, 서은은 무탈했다. 무사했다. 웃고 있었다. 즐거워 보였다. 무정했다.
그렇게 서은의 무탈을 확인하였을 때, 그 경각의 순간은 안도했지만 찰나가 지난 후 그를 덮치는 것은 허무과 상실, 괴로움, 원망, 슬픔 따위의 것들이었다.
서은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를 두고.
잊으라며, 잘 지내라며, 의연하게 말하던 그날의 모습대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건 끔찍하였다. 잔인한 역설이었다. 서은이 잘 지내길 바랐으면서, 서은이 웃길 바랐으면서. 바람대로 웃으며 잘 지내는 여자를, 주혁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네가, 나를 두고.
어느 순간 그것을 견딜 수 없어졌다. 보이는 모든 것이 폭력이었다.
나쁜 계집애.
매정한 계집애.
결국, 다시, 넌 그 정도였을 뿐이고. 나는 다시 또 홀로 남아.
그 서은이 원망스럽고 괴로워 도망치듯 차를 돌리고 속도를 올렸다. 대신 그 세상을 제외한 모든 곳을 즈려밟아 깨뜨리듯 누비고 다녔다. 그렇게 시작한 질주는 밤마다 계속되었다.
계기판의 화살표가 미친 듯이 돌아가고 어느 순간 차 안의 공기마저 빠져나가 모든 것이 비어 있는 느낌이 들었을 때, 언제나처럼 그를 가둔 시간 속 망령이 묻는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아니. 몰랐어. 내가, 오만했어.
‘왜 내 여자가 그런 것들을 견뎌야 하지?’
언젠가 혜선에게 자신만만 말했던가.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일줄 모르고. 그것이 나를 죽이는 길임을 모르고.
‘나는 당신이 없어도 잘 살 거야 지금껏 그래 왔듯이.’
너는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고, 나는 그 시간에 갇혀 결국 괴물이 되겠지.
‘그러니까 당신도 날 잊어.’
아니. 아니야. 시은아, 나는.
그날, 나는 실은,
빌고 싶었어.
짧은 숨을 터뜨리며 주혁은 결국 브레이크를 밟았다. 몸이 앞으로 튕기고 이마에 핸들이 닿았다. 그러나 망령의 뇌엔 그 고통이 닿지 않는다. 망령이 된 그는 같은 말을 되뇌었다.
네게 빌고 또 빌고,
놓지 말아 달라, 애원하고 싶었어.
너의 세상을 끌어내려 나의 세상을 살리고 싶었어.
‘나는 당신이 없어도 잘 살 거야. 지금껏 그래 왔듯이.’
‘잘 지내.’
제발,
그러지 마라.
그러나 여자는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 결국 여자를 잡지 못한 그는 지금, 그날의 그를 죽이고 싶다.
열대야가 장악한 도로 위로 여러개의 클랙슨 소리가 우렁우렁 울렸다. 악에 바친 욕설과 죽고 싶냐는 물음이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에겐 닿지 않았다. 들리고 보이는 모든 것들이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낱낱이 조각나 흩어져 버린다. 흩어지는 시공간 속에서 다시 망령이 말하였다.
‘잘 지내.’
갇힌 시간 속에서도 여자의 음성은 구슬이 굴러 부딪히듯 낭랑하고 선명하다.
그를 가둔 뫼비우스의 시간에서 여자는 늘 이별을 말하고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그 시간을 맴도는 망령은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