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함부로 마음이 마음에게-13화 (13/16)

13. 결국, 고작, 한낱

연일 뉴스는 서정가의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서은은 TV 화면을 통해 주혁을 보았고, 인터넷을 통해 주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화면 속 검은 정장을 입은 주혁은 차갑고 피로 해 보였다. 넷상에서 주혁과 그의 부모는 세상에 둘도 없을 파렴치였다.

서은은 그 모든 주혁이 낯설고 아득히 먼 존재처럼 느껴졌다.

서은이 아는 주혁은 ‘이곳 상황 정리될 때까지 홍은동에 못 갈 거야.’라는 문자를 남겨 놓았을 뿐이다.

홍은동은 고요했다. 언덕 집에 살던 주혁을 기억해 낸 주민이 제보라도 하였는지, 기자 두어 명이 홍은동을 배회하는 걸 보았으나 그들은 이내 여의도로 돌아갔다.

밤중의 심장 마비였다 한다. 지병이 있었다는 짤막한 한 줄이 함께 있긴 했지만 로열의 사생활 보호에 유난스러운 서정인지라 구체적으로 밝혀진 건 없었다.

마땅한 자격이 없어 감히 장례식장에 찾아갈 수 없는 서은은 홍은동에서 홀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주혁을 향한 나쁜 소리들이 주혁에게 닿지 앉기를 빌었다. 주혁이 너무 아프지 않기를 빌었다. 또한 주혁이 오기를 기다렸다.

저 너머의 세상은 저토록 요란해 보이는데 주혁이 없는 세상은 너무 고요해 낯설어, 생소한 곳에 버려진 기분이다. 이상하지. 원래부터 서은의 세상은 적막 속이었는데.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서은의 아픔은 주혁의 아픔에 비할 바가 못 될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살아 있는 동안 무겁고 아픈 비밀을 죽 감춰 왔을 남자의 앞에서 감히 서은은 그녀의 아픔을 내밀지 못한다.

핸드폰을 켰다. 주혁과의 대화 창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모순 속에서 글자들을 두드리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힘내. 라는 말은 식상하여 가볍게 느껴질까 봐.

기다릴게. 라는 말은 부담이 될까 봐.

그러니까 내 손을 놓지 말아 줘. 라는 말은 염치가 없어서.

결국 보내는 문자는 ‘나는 서주혁편이야.’라는 짧은 한 줄이다.

* * * * *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 상무는 등을 보이며 창가에 서 있었다. 블라인드는 다 올려져 벽창 너머 밤하늘이 가득했다. 상무의 어깨 위로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른다. 까만 밤을 배경으로 담배 연기는 안개구름처럼 가물거렸다.

기척을 눈치챈 주혁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여전히 단단하고 매끈한 얼굴이었다. 장례의 준비부터 발인까지 내내 주혁은 그런 얼굴이었다. 송선미의 인터뷰가 터지고 그 일을 수습하는 동안에도 주혁은 특별히 화를 내거나 무너지는 얼굴을 하지 않았다.

태일의 화장 후 돌아오며 괜찮으십니까, 물었을 때 주혁은 편히 가셨다 하니 다행이죠, 했을 뿐이다.

‘송선미의 일은.’

‘고인의 명예를 실추시킨 건 짜증나는 일이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잖습니까.’

진실로 상무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송선미의 목적은 주혁을 무너뜨리기 위함일 테지만, 그 노력이 가상하다 못해 가여울 만큼, 주혁은 무너지지 않았다. 시끄러운 추문과 비난에 그저 지루해 보였다. 서주혁 답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그런 것들을 견디며 살아온 남자이니 수치와 고통의 역치가 높아진 걸지도,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건 서주혁이라 가능한 일이다. 누구나 그게 가능하진 않다.

그리고 그건 그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주혁이 눈썹을 슬쩍 올리며 무언의 질문을 던진다. 홍 실장은 흐린 초점을 다잡았다.

“K 사 한상오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요.”

주혁은 심상히 되물었다. 예사로운 음성에는 성가심도 조금 묻어 있다. 추문에 대한 기자들의 접촉은 모두 서정의 공식 입장으로 답변을 대신하라는 오더가 내려졌다. 기자들은 비서실에서 막고 주혁에겐 따로 보고를 올리지 말란 지시도 함께.

홍 실장도 줄곧 서정의 공식 입장을 참고하라는 형식적인 답변으로 기자들을 대하고, 주혁에게 일일이 보고를 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주혁에게 보고를 위해 들어온 것이라면, 마땅히 중요한 문제여야 했다.

주혁이 재떨이에 담배를 툭툭 털었다. 검붉은 재가 떨어진다. 홍실장은 담배를 두드리는 상무의 손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정서은 씨에 관한 거랍니다.”

주혁의 손짓이 멈추었다. 그 정지로, 공기의 질감이 싸하게 변하였다. 홍 실장은 상무의 얼굴로 눈길을 돌렸다. 사선의 허공 어딘가에 머물던 상무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온다. 마주 본 눈동자가 차고 뜨거웠다. 이성과 감정의 극점이 교차하는 얼굴.

침묵이 깔린다. 주혁의 표정 없는 얼굴이 분노하는 듯도 했고, 내밀히 감춰 둔 불꽃 하나가 차갑게 식어 가는 듯도 했다.

시간이 무겁고 느리게 흘렀다. 홍 실장과 시선을 마주하며 주혁은 다시 담배를 입에 댔다. 깊이 흡입한다. 곧 연기를 뱉으며 지시했다.

“일정 잡으세요.”

한상오가 정서은을 취재하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일의 시작은 세 달 전쯤. 서주혁이 홍은동에 집을 구했다는 제보가 들어왔고, 그쪽을 취재하다 보니 뜻밖의 여자가 딸려 나왔다. 청각 장애인이면서 SNS에서 점차 인기를 얻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처음엔 그럴듯한 러브 스토리로 포장하여 기사를 낼 생각이었다. 특별히 화제성을 더 얹기 위해 칠 수 있는 조미료도 없어 보였다. 이도 저도 안 될 기사라면, 서정에 적당한 가격에 팔아 한탕 할 생각도 잠깐 하였다.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뜻밖의 일들이 터진 것이다.

상오는 직감적으로 자신의 기사의 몸값이 수배 뛰었다는 걸 알았다. 그대로 언론에 터뜨려 화제성을 극대화할 수도 있었지만, 다시 고민했다. 여자의 사연은 퍽 기구했다. 스무 살 때 장애인이 되어 아비와 고생 꽤 하다가 최근에서야 SNS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하며 삽화가로 활동하고 강의를 시작했다.

이제 막 꿈을 키우고 있는 여자의 정보를 언론에 터뜨린다면, 파렴치의 여인으로 여자의 삶과 꿈은 무너질 게 뻔하였다. 재벌가에 입성한 신데렐라들이 괜히 하던 일을 관두고 숨어 버리는 게 아니다. 한번 터진 기사는 얼마의 사실과 추측과 거짓이 더해져 온갖 말들을 만들어 내 여자를 괴롭게 할 거였다.

더욱이 여타 재벌들보다도 서주혁은 곱씹고 뱉어지기 완벽한 조건들을 갖추지 않았는가. 그런 개자식의 여자. 완벽한 특종감이다. 화제를 부풀리는 데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있을 수 없었다.

여자를 두고 뽑을 수 있는 타이틀도 여럿이었다. ‘서정 서주혁 동거녀, 인기 밴드 원스트 앨범 제작자’, ‘서주혁의 그녀는 알고 있었나’, ‘고 서태일 회장과의 반목에 서주혁의 여자 문제도 한몫’, ‘패륜아 서주혁, 뜨거운 열애 중’ 등등, 유치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끌 만한 수 개의 타이틀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래. 어차피 상오가 아니더라도 서주혁이 그 여자를 만나는 한은 언젠가 터질 일이다. 더욱이 요즘 서주혁을 향해 있는 언론의 눈이 얼마나 많은데. 어차피 터질 일이라면 선점하는 게 맞는 거다. 그럼에도 찝찝했다. 취재 대상에 동정과 연민을 갖게 되다니. 자칭 상업 기자로서 자격 박탈이다.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서주혁을 찾아왔다.

파렴치의 러브 스토리로 기사를 내 화제를 부풀리든, 서주혁에게서 아주아주 비싼 값을 치르게 하든, 일단은 서주혁과 인터뷰를 해야 기사에 재미난 한두 문장을 더 추가할 수 있는 거고 서주혁을 만나야 돈을 받을 수 있는 거였다.

그리고 무엇이든 상오에겐 큰 이익을 가져다줄 거였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서주혁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짓으로 맞은편의 자리를 가리켰다. 일어나는 시늉과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손짓만 하는 남자의 건방에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보다, 가슴 깊이 새겨지는 인상이 먼저였다.

줄곧 멀리서 훔쳐보듯 하기만 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보니 무척 아름답고, 잘생긴 사내였다.

소파에 앉았다. 서주혁의 주위로 연기가 자욱하였다. 서주혁의 손가락 사이에 담배가 끼워져 있다. 담배가 끼인 남자의 손가락을 마뜩찮게 바라보니 서주혁이 ‘아직 장초라.’ 웃으며 거만한 양해를 구한다. 사내는 담배를 끄지 않은 채, 담배가 없는 손을 상오에게 내밀었다.

“서주혁입니다.”

맞잡은 서주혁의 손은 몹시 차가웠다.

* * * * *

승혁은 지쳐 있었다. 태일의 죽음과 연이어 터지는 추문 속에서 적과 아군이 뒤엉켰다. 그의 가족들은 넷상에 ‘아침 드라마 뺨치는 복잡한 족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어린 조카 진우까지도. 이혼한 전처 혜선에 대한 것도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기 시작했다.

사십 해가 넘는 시간 동안 묵묵히 견뎌온 승혁이다. 집안의 추문도, 다리의 장애도, 주혁과 선미와 석현의 존재에도 모두 꿋꿋이 버텨 온 승혁인데 이번만큼은 힘에 부친 듯했다.

승혁이 깊은 한숨을 쉬며 몸을 휠체어에 묻었다.

승혁은 창 너머 검은 하늘을 보다, 휠체어의 바퀴를 의미 없이 두드리다, 고단한 눈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발가벗겨져 세상에 내던져진 기분이야.”

그러고도 승혁은 무너지는 얼굴로 주혁아. 주혁아. 불렀다. 부르며 쓰러지듯 앞으로 상체를 숙인다. 그 장면 장면을 주혁은 말없이 물끄럼 응시했다.

잠시간 손에 얼굴을 묻고 깊은 한 숨을 내쉰 승혁이 곧 몸을 일으켰다. 마주한 주혁의 얼굴엔 무어라 정의 내릴 표정이 없다.

“미안하다. 너도 힘들 텐데.”

태일이라는 큰 산이 사라지자 선미와 재형은 두려운 게 없는 듯했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주혁과 주혁의 부모는 완벽한 악인이었다. 피해자는 패륜의 아이를 낳은 아내와 그 아이를 받아 주어 한 많은 시간을 묵묵히 견딘 재형이다. 그 이야기에서 승혁은 그런 어머니를 두었으면서 다리가 없어 불쌍한, 조연쯤은 되려나.

승혁은 자조했다. 낙인은 대를 이어 그의 어린 아들 진우에게도 씌워질 것이다. 생각하면 심장이 타들어 간다.

“이앤장 통해서 소장은 접수시켰고, 언론은 시간 지나면 잠잠해지겠지.”

승혁은 중얼이듯 말하였다. 비서실과 홍보실이 언론을 잠재우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중이다. 정정 보도는 이미 냈고 동시에 명예 훼손이라는 뻔하고 식상한 명목으로 선미에 대한 소송이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재판의 결과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걸 승혁도 주혁도 알았다.

승혁은 몹시 피곤했다. 모든 걸 다 내던지고 싶었다. 장애를 이겨 내고 아내를 외면하고 동생을 이용하여 지켜 온 이 자리가 지금은 다 지겹기만 하다.

“지금이 적기야.”

고저가 없어 냉정한 목소리가 흐른다.

“나를 내쳐, 형.”

시선을 올리면 정결한 표정의 주혁이 그를 보고 있다.

“형도 알잖아? 어차피 진실은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아. 믿고 싶은 걸 믿을 테고 믿고 싶지 않은 건 거짓이라 치부하며 인정하지 않을 거야. 아버지가 내세우는 명분은 정당성이지만, 형 앞에서 어림없고. 문제는 언론인데, 추문을 잠재우고 시선을 아버지 쪽에서 형으로 옮기려면 쇼가 하나 필요할 거야.”

재형과 선미의 쇼는 복수심으로 악에 바쳐 있지만 결국 부질없는 외침이었다. 이미 되돌릴 수 있는 경영권 같은 건 그들에게 없었다. 다만 이대로 나가떨어지기엔 억울하니 최대한 많은 흠집과 상처라도 내야 분이 풀려 일을 벌이는 거였다. 그들은 목적을 이루었다. 승혁의 가장 아픈 곳을 가장 아프게 도려냈으니.

“저쪽에서 깔아 준 판을 무대로 형이 주인공이 되면 돼.”

승혁이 주혁을 내친다면 이야기는 권선징악으로 결말을 맺고 승리를 거머쥔 주인공은 서재형에서 서승혁으로 옮겨질 것이다. 장애를 딛고 악인을 물리치고 끝내 승자가 된 승혁의 이야기에 세상은 환호할 것이다. 주혁은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너는.”

완벽한 개자식이 되는 거야.

뒷말이 나오지 않는다. 개자식이 되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멸시와 모욕이 평생 너를 따라다닐 거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너에게 그 길을 가게 하냐는 말이, 끝내 나오지 않는다.

“재판이 어떻든 진실이 어떻든, 사람들은 믿고 싶은 걸 믿을 테고, 이미 난 익숙한 거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말하며 주혁이 희미하게 웃는다.

이런 순간에도 동생은 단단해 보였다. 차분히 판을 관조하고 냉정히 손익을 따지고 결국 길을 찾아내는. 영리하고 철저하고 무섭도록 착한, 내 동생. 더없이 다정하고 자상하여 질투도 원망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가여운 내 동생. 아니,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주혁아. 나는.

“나는 괜찮아.”

승혁이 아닌 주혁의 말이다.

“괜찮아, 형.”

승혁은 끝내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 * * * *

승혁의 집무실을 나왔다. 인사를 해 오는 비서들에게 눈짓을 하고 저녁을 묻는 홍 실장에게 거절을 표하며 복도를 걸었다. 바닥을 치는 구둣발 소리가 비명처럼 귓속을 자극했다. 따르는 비서들을 무시하고 홀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버튼을 누르고 앞을 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세상과 시야가 절단된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차례로 바뀌는 숫자를 보며 다음 일정을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하지 못한다.

승혁의 얼굴을 마주하며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한 음절, 음절 뱉을 때마다 아른거리는 얼굴이 있었다. 승혁의 앞에서 나는 괜찮아, 지껄이며 생각나는 미소가 있었다.

문이 열렸다. 주혁은 내리지 않았다. 이내 문이 닫히고 단절된 세상에 그는 홀로 서 있었다. 생각했다. 그의 주제를, 분수를, 최선을, 그리고 서은을.

서은을 떠올리자 언제나처럼 욕망이 솟는다. 욕심이 덩치를 키우며 영역을 넓힌다. 그러나 동시에 미천한 양심이 그 영역에 선을 그었다.

한 번도 서정을 갖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승혁을 지키는 것은 그저 관성이고 습관이었다. 그렇게 태어났기에 그렇게 살았을 뿐이다. 승혁도, 난영도, 약속도, 서정도 언제든 버릴 수 있었다. 목표 없고 재미없는 인생에서 그들의 존재는 그가 억지로 세운 목표와 재미였을 뿐이다.

게임하듯 단계를 밟아 가며 악역으로 설정된 자들을 물리치며, 하는 그 모든 노력들은 시시했지만 그에게 성취감을 주었으니까. 그를 향하는 멸시와 비난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덕분에 많은 돈을 쥐고 그를 비난하는 자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었으니까.

그는 그토록 영악하고 이기적인 존재였다. 단 한 순간도 진실로 서정과 그 사람들을 위한 적이 없었다. 그를 향하는 멸시에 제대로 휘청인 적이 없다. 외려 유쾌했다. 한때 그를 무시하고 멸시했던 자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 그들을 향해 휘두르는 칼질은 분명 흥미롭고, 더할 나위 없이 뿌듯했다.

‘너무, 독하게 굴진 말아.’

언젠가 태일의 경고가 이제 와 살갗에 닿아 스며든다. 그가 흩뿌린 독이 이제 와 그를 적신 것이다.

무미한 웃음이 새 나왔다. 결국 그는 개자식이었던 거다. 개자식의 개자식으로 태어나 결국 그 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저주는 스스로에게 돌아와 그의 가장 아픈 곳을 도려낸 것이다.

주혁은 서은을 난영처럼, 혜선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형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간절히 서은을 지키고 싶었다. 그 모든 자격을 갖추었을 때, 주혁은 말하고 싶었다.

영원, 결혼, 평생, 그런 것들을.

서은을 볼 때마다 튀어나오는 그 단어들을 억지로 눌러 내며 떳떳한 자격을 갖출 때까지 기다렸다. 너를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노라, 이제는 아파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며 살라, 오만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 고백을 받으며 서은이 환하게 웃어 주길, 일말의 염려와 걱정 없이, 티 없이 웃는 얼굴로 마냥 기뻐해 주길, 바라였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내가, 개자식이라.

아니, 개자식이니까. 원래 나는 이런 놈이니까.

‘사람들 시선이 나한테 쏠릴 때면 아직도 두려워.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뭘 듣지 못해서 나도 모르게 무슨 잘못을 했나.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날 보면 무작정 사과부터 해요. 그런데 난그 렇게 사과하는 내 모습이 싫어.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는 것도, 싫은 소리 듣는 것도, 너무 싫어서. 그래서 사람 많은 데는 잘 안 가요. 근데, 이제 괜찮을 것 같아. 같이 가줘서 고마워.’

너의 두려움 같은 것, 나의 이기심에 비할 바가 못 되니까.

너의 두려움은 무시하고. 오직 나의 욕심만 채우고 싶어. 내게 붙은 멸시와 모욕이 너에게 달라붙어도 나는 상관없어. 그러니 지금 이 순간도 오직 나만을 생각할 거야.

오직 나만을.

아니.

안돼.

너는, 그러면 안 돼. 나는 진창에 굴러도 너는 그러면 안 돼.

내가 감히, 너를. 너를. 그렇게 귀한 너를. 내가 감히.

서은아,

너를,

내가,

빌어먹을,

내가.

문이 열린다. 발을 뻗던 맞은편의 사람이 주혁을 보고 빠르게 묵례를 한다. 주혁은 힘주어 입꼬리를 올렸다. 발을 내디뎠다. 핸드폰을 쥔 손을 주머니에 꽂는다. 순간 세상이 아뜩해진다. 힘을 주었다. 손에 쥔 핸드폰 속 짧은 한 줄의 문자가 떠올랐다. 지워 냈다. 이름과 얼굴과 미소를 함께 지웠다. 이를 물고, 다시 걸었다.

* * * * *

“선을 두세 번 덧칠하듯 그리는 것보다 한 번에 이어 봐요. 조금 삐뚤해도 괜찮아요.”

서은의 말을 따라 여자가 손을 움직였다. 보다 더 깔끔하게 남자의 실루엣이 완성되자 여자가 서은을 돌아보며 고맙습니다, 말한다. 이어 서은은 여자가 가져온 사진과 비교해 배경색들을 골라 주었다. 여자가 가져온 사진은 부산의 바다를 배경으로 한 두 남녀의 모습이었다. 남자 친구에게 줄 일주년 선물이라고 했다.

아직 수강생이 많은 건 아니지만 강의는 보람차고, 무엇보다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말을 하고 입술을 읽고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시간이 간다. 주혁이 홍은동에 오지 않은 지 한달 가까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회사가 발칵 뒤집어졌으니까. 주혁의 비밀이 세상에 알려졌으니까. 주혁이 힘들 테니까. 서은은 기다렸다. 전화라도 가능하다면,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주혁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지 가늠이라도 할 텐데, 그럴 수 없었다.

평범한 전화 하나 할 수 없는 스스로의 처지에 애가 탔다. 많이 바쁘고 힘들 거야, 주혁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면서 동시에, 뚝 발길을 끊어 버린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밤이면 답답함에 화가 나고 서럽기도 했다. 남자를 원망하는 마음을 나쁘다 책망하며 다잡았다.

시간은 무심히 흐르는데 서은만이 정처 없이 붕 떠 있는 듯했다. 그래도 기다렸다.

“선생님. 남자가 오랫동안 연락이 없으면一”

“개 자식이지.”

말을 뚝 잘라먹은 영란은 더는 들어 볼 필요도 없다는 얼굴이었다.

“남자가 연락 기다리게 만들어 놓고 연락이 없으면 개자식인 거지. 그런 놈은 맘에 안 담아 두는 게 건강에 이로운 일이야.”

서은은 엷게 웃었다. 다들 주혁을 욕했다. TV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영란도, 모두. 서은은 주혁이 승혁의 것을 차지하려 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랬다면 언젠가 형과 조카의 이야기를 하며 그런 미소를 지었을 리 없다.

눈치가 빠른 서은이다. 서은은 그런 데에 예민하다. 소리를 잃은 대신 그렇게 되었다. 사람의 얼굴을 보고 생각과 기분을 읽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대신 얻은 것.

아니, 아니야. 정말 사람들 말처럼 개자식일지도, 서태일 회장과 서은을 속이고 서은의 뒤에서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래도 나는 당신 편이 돼 주고 싶었어. 나는 서주혁 편을 하고 싶었어.

그런데, 나는 정말 개자식을 사랑하였나. 내가 사랑한 그 사람은 개자 식이었나.

아무렴 어때.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사랑했는 걸.

그리고 그날은 아무 일정이 없는 일요일이었다. 흐르는 시간이 버거워 집을 나섰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도 없이 한여름 연두의 세상이 눈부셨다.

아무렇게 걸었다. 아무렇게 움직이는 발이 닿은 아무 카페에 들어가 그림을 그렸다. 싱그러운 여름의 공원을 그렸다. 푸른 여름의 바다를 그렸다. 그래도 하루는 다 가지 않았다.

카페를 나와 다시 정처 없이 걸었다. 낮의 열기가 불쾌해질 즈음 눈앞에 있는 아무 건물에 들어갔다. 영화관이었다. 주혁과 보기로 했던 히어로 영화가 아직 상영 중이었다. 끝물이어서인지 주말 낮임에도 딱 한 타임이 남아 있다.

그 영화를 예매했다. 상영 시작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팝콘을 사 영화관 로비에 앉았다. 팝콘을 씹으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사람들의 입술을 읽다가 ‘잘생겨서 더 주목받는 것 같아.’하는 말을 읽었다. 그 여자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넓은 스크린의 TV 화면에서 오랜만에 주혁을 보았다. 장례는 이미 끝났음도 주혁은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전에 TV에서 봤던 것과 달리 머리칼이 단정히 잘라져 있다. 기자의 파파라치 컷 속에서 주혁은 엷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굳은 눈과 차가운 미소였다. 그건 서은이 아는 서주혁의 얼굴이 아니었다.

영화가 시작됐다. 영웅이 악당을 물리쳤다는 뻔한 내용임에도 지루하지 않고 재밌었다. 지하의 푸드코트에서 순두부찌개를 먹었다. 길어진 해가 드디어 모습을 감추고 어둑해졌다. 서은은 홍은동으로 돌아왔다. 언덕을 올라 주혁의 집에 들어갔다. 이를 닦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며 TV를 틀었다.

생각 없이 화면을 보는데 낮에 보았던 주혁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음이 아팠다. 웃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서은을 아프게 했다. 남자는 힘겨워 보였다. 서은의 예민한 감각이 남자의 철갑 같은 얼굴 너머 아픔을 알아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화면을 넘어 서은에게 전해져 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니까, 주혁이 필사적이라는 것.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필사의 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 아마도 그건 서정이겠지.

언덕 집을 홀로 지키며 그 집에서 했던 무수한 약속을 떠올렸다. 힘겨워 보이는 남자를 떠올렸다. 소리가 없어도 꽉 차 있던 남자와의 시간들을 떠올렸다. 사진 속에서 차가운 미소로 마음을 감추는 남자를 떠올렸다. 주혁이 보낸 문자를 떠올렸다. 서은이 보낸 문자를 떠올렸다. 답이 없는 메시지 창을 떠올렸다.

돌연 초점을 놓치고 만다. 흐려진 시야를 억지로 부여잡자, 이번엔 원망감이 솟구쳤다. 그 분함을 참을 수 없어, 서은은 벌떡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 말라 바삭해진 벚꽃 가지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힘없이 바스러지는 꽃잎을 노려보았다.

나는 벚꽃도 보러 못 가고!

이런 꽃가지는 왜 주워 와서! 부산 바다도 안 갈 거면서, 그런 약속들은 왜 해서!

주인도 없는 이 집에 혼자 기다리게 하고!

나도 힘든데! 힘들다 말도 못 하게 하고!

서주혁,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지금껏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혼자 그렇게!

이런 예의는 밥 말아 먹은 이별 따위, 사랑 따위!

생각 끝에 서은은 깨닫는다.

나는, 이별 중이었구나.

검은 정장과 짧은 머리칼과 차가운 미소 같은 것들을 다시 떠올린다. 서은이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서 주혁을 떠올린다.

서은이,

주혁이,

우리가,

한계에 다다랐음을 깨닫는다.

한순간 해일처럼 덮쳐 온 자각이 자비 없이 목을 조른다.

울음을 터뜨렸다.

* * * * *

울음 끝에 서은은 기다림을 놓기로 한다. 주혁을 놓아주기로 한다.

서은은 더 이상 언덕 집에 가지 않았다. 서은은 더 이상 주혁을 기다리지 않았다.

* * * * *

시간이 좀 더 흘렀다.

문자가 왔다.

[흥은동에서 보자.]

주혁이었다.

* * * * *

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제법 따가웠다. 태양이 기세를 부리는 계절이다. 바깥의 세상은 뜨겁게 타오르는데 문득 방 안을 채우는 에어컨 바람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늦어서 미안해.”

말하는 남자의 얼굴이 전보다 날카로워져 있었다. 서은은 남자의 얼굴이 가면을 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왜 이렇게 말랐어. 묻고 싶었다.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웠다면, 테이블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지 않았더라면, 서은은 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하고 대신 서은은 흐리게 웃었다. 억지로 입매를 끌어 올리고 미소를 지어낸다. 꼴사나운 모습으로 기억되기 싫어 안간힘을 다해 미소를 지어냈다.

서은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날이 많이 덥네.”

서은은 테라스 너머 세상을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말의 끝자락에 여운이 길다. 그 부드러운 숨이 주혁의 마음을 적셨다. 주혁은 서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서은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향하길 기다렸다. 기다리며 여름날 눈부신 환영처럼 앉아 있는 서은의 이마와 눈시울과 볼과 목덜미 같은 것들을 뇌중에 새겼다. 마침내 서은 이 주혁을 보았다. 주혁은 달라붙어 굳은 입술을 떼었다.

"서은아.”

이름을 부르고는 한참간 말이 없다. 그러나 서은 또한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주혁의 음성을 상상해 보았다. 여름처럼 뜨겁고 물결처럼 부드러울. 고이는 시간이 버거워질 즘, 주혁이 말하였다.

“미안해.”

서은은 난해한 그림을 감상하듯 주혁을 응시했다. 시간이 지나 서은이 물었다.

“왜?”

“......지켜야 할 게 많아서.”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주혁이 답하지 않자 서은이 덤덤한 어조로 말하였다.

“비겁해.”

말을 하는 서은의 눈동자가, 목소리가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다잡고 진동 없는 얼굴로,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눈으로 말을 잇는다.

“잔인해.”

“그래.”

“나빠.”

“맞아.”

“평생 미워할 거야.”

“원하는 대로.”

“아니. 다 잊을래. 모두 다 잊을 거야.”

한 톨의 기억조차 남기지 않을 거야.

쓰게 웃던 주혁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동조차 멎는다.

“......그러니까 당신도 날 잊어.”

그래도 나는 행복하고 고마웠어.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했어. 그런 말들은 하지 않는다. 그 말들은 결국 주혁을 다시 아프게 할 거였다. 서은이 그러하듯 이미 나누었던 그 수많은 순간들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을 쑤실 텐데. 거기에 서은의 말들을 더할 수 없다.

모든 게 버겁고 힘겨울 남자에게 서은의 처지는 짐이 될 것을 안다. 자신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꿈을 꾸고 버거운 욕심을 내었는지를 안다. 그러니 이제 되었다. 살면서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했던 기억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은 기억 하나쯤은 가져도 되는 거지. 가져 보았으니 되었다.

“나는 당신이 없어도 잘 살 거야. 지금껏 그래 왔듯이.”

그러니까 당신도 잘 살아, 하는 말을 그렇게 대신했다.

“잘 지내.”

그 말을 끝으로 더는 견딜 수 없어 집을 나왔다. 모든 걸 함께했던 그 집에서 주혁을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그 시간들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언덕 집을 나오는데 달라붙는 바람이 뜨겁다. 바삐 걸었다. 언덕을 내려오고 홍은슈퍼를 돌아 돌담길을 걸었다. 빌라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목덜미의 땀을 훔치며 현관문의 손잡이를 돌리는데 돌연 힘이 빠졌다. 손잡이를 잡은 채로 주저앉았다.

잊으라 했다.

서은은 평생 잊지 못할 테지만. 잊은 척 살아가야 하는 앞날들이 막막하다. 돌고 돌아 결국 이 끝에 다다른 사랑이 한심하다. 고작 그뿐인 사랑에 이토록 마음이 아프다니 우습다. 한낱 사랑이 끝났음에 투둑 끊어지는 세상이 괴롭다.

결국, 고작, 한낱, 그저 그렇게 끝나는 사랑이라니.

그토록 다정했던 당신이,

그토록 행복했던 내가,

그토록 뜨거웠던 우리가,

결국, 고작, 한낱 이렇게 끝이 났다니.

그럴 순 없어.

다시 일어나 언덕 집을 향해 뛰었다.

주혁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문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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