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희의 호적에 들어가야겠다, 라는 생각은 갑작스레 떠올랐다. 충동적이지만 서은은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두 해 전 원규진 교수가 제안했지만 그 집의 호적에 들어가는 건 아빠에 대한 배신 같아서 거절하였다. 이제 와 호적에 들어가고 싶다 말하는 게 염치없는 일인 줄을 알면서도 머릿속에 한번 자리 잡은 생각은 쉬이 떨쳐지지 않았다.
“제법 그럴싸하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주혁이 물었다. 주혁의 뒤로 브라운 톤의 작업실이 반짝반짝 빛을 냈다. 이전엔 주인 없이 놀고 있는 방이었는데 이제부턴 서은의 작업실이 될 터였다.
“마음에 들어?”
“응.”
“뭐가 제일 마음에 들어?”
서은은 작업실을 둘러보는 체를 하다가 빙긋 웃으며 오만하게 답을한다.
“서주혁이 제일 마음에들어.”
주혁은 별스럽다는 듯 가벼이 웃었다.
그건 당연한 거고.
그가 중얼인 듯했지만 확신은 못했다. 주혁이 고개를 숙이고 서은은 입술을 열었다.
식어 가는 햇살을 받으며 섹스를 했다. 숨을 쉬고 내뱉는 것 마냥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들이었다.
동거를 시작한 지 수일이 지났다. 주혁의 집에 서은의 짐들이 하나, 둘 늘어나더니 어느 순간 주혁의 방은 서은의 방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서은의 공간이 하나 더 늘었다.
서은은 다시 경희의 호적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둘 사이에 조금의 방해물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서은보단 원규진 교수의 서은이 주혁과 함께하기에 좀 더 구색이 갖춰질 것이다.
결혼을 꿈꾸는 건가, 자조도 했다.
결혼하고 싶었다. 하고 싶지 않을리 없잖아. 처지를 생각하여 주혁을 놔줄 만큼 착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았다. 이런 계산을 하는 스스로가 속물적이어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하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그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다만 서은은 그저 주혁과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다고 네 주제가 뭐 얼마나 달라져?
상상 속에서 서은은 덤덤히 그러나 뻔뻔히 답하였다.
지금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야.
* * * * *
함성이 쏟아졌다. 들리지 않지만 느낄 수 있었다. 수천은 족히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입 모양을 하고 있는 게 웃기기도 했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말은 힘껏 달리고, 전광판의 숫자들은 쉴 새 없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웃고 화내고 떠드는 모습들이 생생하게 와닿았다. 장애가 생긴 이후로 이토록 소리가 꽉찬 공간은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무척 즐거웠다.
아주 오랜만에 주혁이 쉬는 토요일이었다. 그런 날은 함부로 썩힐 수 없어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섰다. 주혁의 스포츠카를 타고 고속도로에서 함께 속도를 즐겼다. 심장이 아찔할만큼 분명하게 와닿는 스피드는 무서웠지만, 두려움은 한순간이었다.
스릴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가장 강렬한 감정이었다. 슬쩍 내린 창문 틈으로 찬바람이 매섭게 들이닥쳤다. 바람은 스릴의 강도를 높이는 촉매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서은은 그 강렬한 순간을 주혁과 함께해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살을 따갑게 치는 바람의 온도와, 차와 함께 달리는 심장의 박동이 매개가 되어 주혁에게 서은의 존재를 깊이, 깊이 새겨 넣을 것이다.
하여 잊히지, 않을 것이다.
휴게소에 들러 뜨끈한 어묵을 먹었다. 무섭지 않았냐는 주혁의 질문에 서은은 ‘몰랐는데 이런 체질인가 봐요.’ 자신만만 말하였다. 그런 서은의 자만을 가소롭다는 듯 혹은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주혁이 ‘한탕 해 볼래.’라며 데리고 온 곳이 과천의 경마장이었다.
주혁이 이천 원짜리 정보지를 사왔다. 다소 촌스러운 프레임 속 검은 글자들이 전하는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서은과 주혁도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미 두 번의 라운드에서 오만 원을 잃은 터였다.
그런데 정보지를 봐도 서은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정보지에서 추천하는 말에는 돈을 걸어도 돌아오는 수익이 적었다.
“난 내 감을 믿을래.”
서은이 제법 당차게 말했다.
“자신만만하시네.”
“운이 좋은 편이거든요.”
“그래?”
“그래.”
그래서 지금 내 앞에 서주혁이 있는 거잖아. 뒷말은 괜히 쑥스러워 하지 못하였다.
서은은 ‘광화문프린스’라는 이름의 말에 베팅을 했다. 한참 정보지를 뒤적이던 주혁은 ‘사랑둥이’라는 이름의 말에. 말 이름이 과하게 귀여워 풋 웃음이 났다. 결과는 이번에도 참패였다.
주혁은 운이 좋다 자신만만하던 서은을 놀렸고 서은은 엉터리 정보지를 산 주혁을 놀렸다. 그 순간에도 웃음이 났다. 말 흉내를 내며 달리다 넘어진 아이를 보기도 했고 정보지에서 인기 순위 꼴찌였던 말이 1위를 하기도 했다. 그 말이 1위를 하던 순간에는 주위에 있던 남자들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는데 분명 들릴 리 없는 욕이 들리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웃음이 나왔다.
저만치, 어린아이들의 뒤꽁무니에 얌전히 솜사탕을 기다리며 서 있는 주혁을 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돌연 전화가 왔는지 주혁이 핸드폰을 귀에 댔다. 거리가 멀어 입술은 읽히지 않았다. 그사이 솜사탕이 나와 서은은 벤치에서 일어나 가판대로 서둘러 다가갔다. 주혁이 전화에 집중하도록 대신 솜사탕을 받았다. 주혁이 시선을 내려 오며 미안, 입 모양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전화를 이어 가며 점원에게 지폐를 건넨다.
서은은 솜사탕을 들고 주혁을 기다렸다. 주혁은 시선을 허공에 내리고 매끈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잘 읽히지 않는 어려운 단어들이 튀어나오는 걸 보니 회사 일인 듯싶었다. 긴통화가 될 눈치였다? 괜한 방해가 될까 싶어 서은이 벤치에 먼저 가 있겠다 손짓을 하니 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벤치로 돌아가 솜사탕을 몇 입 뜯었을 때, 어느새 남자는 장소를 옮겨가 담배를 들고 있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인 담배를 물고, 볼이 패일 만큼 깊게 흡입하였다가 입을 모으며 연기를 뱉는다.
연기는 금세 흩어졌다. 햇살은 비늘처럼 유려하게 남자의 곁에서 반짝인다. 건조하게 통화를 이어 가던 주혁이 일순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여유 있고 관능적인 미소였다. 그 앞으로 자전거가 지나갔다. 다정한 연인과 함께 커피 향이 스쳐 가고, 주인을 잃은 풍선 하나가 두둥실 떠오르며, 그 풍선을 쫓아 아이와 아빠가 달려간다.
고요하며 소란하다. 평온하며 흥분되고, 벅차지만 부족하다.
그 모든 모순들의 공존. 주혁과 있는 순간들은 모두 그러했다.
마침내 통화를 마치고 주혁이 성큼성큼 서은에게 걸어온다. 서은에게 다가올수록 보폭이 더 넓어졌다. 벤치에 다다랐을 때 주혁이 상체를 숙여 와락 서은을 안았다. 힘을 주었다가 부드럽게 풀어 준다. 그는 곧 눈을 맞춰 왔다.
“왜 이렇게 예뻐.”
말에도 온도라는 게 있다면 주혁의 것은 36.5도의 체온보다 더 높을 것이다.
“불안해서 혼자 둘 수가 있나.”
너무 뜨겁지는 않고, 38도에서 40도의 사이. 슬쩍 몸을 달아오르게 하고 마음을 앓게 만드는 정도의.
여전히 서은에게 서주혁은 자상하고 친절하고 사랑스러우며, 그래서 더 두려운 사람이다.
소풍을 온 기분이었다. 주혁이 서은에게 세상의 말들을 전해 주었다. 경주의 중계와 어린이를 찾는다는 방송, 경품 추첨의 이야기 등등. 방금 지나간 남자가 칠백만 원을 잃고도 이건 노름이 아니라 재테크라는 명언을 했다는 이야기에선 웃음을 터뜨렸다.
서은이 한 박자 느리게 웃음을 터뜨리면 주혁도 함께 웃었다. 웃음을 참았다가 서은과 함께 웃는 주혁의 배려를 서은은 안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거나 마음이 아프진 않았다. 주혁이 전해 주는 소리들로 세계의 빈 공간이 채워졌다. 그 느낌이 좋았다.
“다음에 또 와요.”
서은이 신이 나 말했다.
“그렇게 돈 잃어 놓고?”
"에이. 이건 노름이 아니라 재테크입니다, 서주혁 씨.”
서은의 농담이 마음에 들었는지 주혁의 얼굴에 나른한 웃음이 흘렀다.
언제나처럼, 남자가 서은의 시공간을 장악한 순간이었다.
가장 가까운 호텔이 우면산의 근처였다. 커튼을 치고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의미 없이 입술을 맞대고 한량처럼 뒹굴거리다 노을이 지는 걸 보았다. 유치한 질문을 하고 유치한 답을 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주혁의 품에서 서은은 고백하듯 말하였다.
오늘 많이 고마워요.
그 한마디를 뱉고 목구멍이 뜨거워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주혁이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여린 부분을 내보이는 건 언제나 조금은 두렵고 서러운 일이다.
서은은 다만 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게 주혁이니까, 주혁이므로, 주혁이기에. 어떤 어미를 붙이든 그게 오로지 서주혁이라서 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당신 덕분에 안심이 되고 가슴 벅찬 순간들의 감동을.
실은 사람들 시선이 나한테 쏠릴때면 아직도 두려워.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뭘 듣지 못해서 나도 모르게 무슨 잘못을 했나.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날 보면 무작정 사과부터 해요.
그런데 난 그렇게 사과하는 내 모습이 싫어.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는 것도, 싫은 소리 듣는 것도, 너무 싫어서. 그래서 사람 많은 데는 잘 안 가요.
근데, 이제 괜찮을 것 같아.
같이 가 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웅얼이며 서은은 눈을 감았다.
"뭐가 미안해?”
넌, 왜 그런 걸 미안해 해. 묻지만 눈을 감아 소통을 차단한 여자는 답하지 않는다. 품 안의 서은은 죽은 이 마냥 감정 없이 고요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진실로 죽은 것은 생이 아니라 마음이었을 것이다. 주혁은 마음이 죽은 얼굴을 잘 알고 있다. 원하지 않는 말과 시선과 마음에 닳고 닳아, 견디고 견디다, 삭이고 삭이다 차라리 상처 입는 스스로의 마음을 죽이고, 텅 빈 자리 위엔 가면을 씌운다.
그것은 난영의 얼굴이었다.
깨닫자 심장이 천 길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주혁은 서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서은의 체온이 다시 주혁을 달래 주었다. 서은의 체취는 악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서은의 숨소리는 자장자장 괴로움을 잊게 했다. 고요한 절망 속에서, 그는 점차 깨달았다.
그가 여자를 아주 많이 사랑하게 되었음을.
어쩌면 그 자신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음을. 서은이 아파하면 그도 아플 것이다. 서은이 슬퍼하면 그도 슬퍼질 것이고 서은이 무너지면 주혁도 무너질 것이다. 그건 괴로운 일이다. 누군갈 지나치게 사랑하는 일은 고통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아차릴 땐 이미 물러날 수 있는 시기를 놓친 것이다.
주혁의 입술 새로 절망과 환희가 섞인 기묘한 웃음이 비져나왔다.
“왜 웃어요?”
내리는 숨결에 서은이 눈시울을 올렸다. 방금 전의 숨결이 착각인가 싶을 만큼 남자의 얼굴엔 웃음기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명도 높은 눈이 서은의 것과 맞물렸다. 그가 느릿이 입술을 움직였다.
“안아 줘.”
욕망이 들끓는 눈과 달리 하는 말은 아이처럼 천진하다. 서은이 가만 바라보기만 하자 고개를 가까이 숙이며 다시 요구해 온다.
“말해 줘.”
"……."
“사랑한다고.”
표정 없이 하는 말은 분명 잔잔한 울림일진대, 서은의 마음은 파도가 치듯 울렁거렸다. 왜인지 남자가 막막하고 아슬해 보여서, 답하는 대신 서은은 남자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추었다.
무심한 여자는 금세 잠이 들었다.
주혁은 잠든 서은의 얼굴을 당겨도 보고 쓸어도 보고 살짝 깨물어도 본다. 어느 순간 서은이 번쩍하고 눈을 떴다. 서은은 뜬금없이 ‘입욕제 사왔는데.’ 말하며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서은이 호기심에 주문했다는 황금색 입욕제가 보글보글 거품을 일으키며 바스라졌다. 함께 욕조에 들어가 아이처럼 거품 놀이를 했다. 서은은 거품을 휘 불어 날리기도 했고 주혁을 향해 물장난을 치기도 했다. 서은이 신기한 듯 거품을 빤히 보다가 뺨에 묻히고는 주혁의 얼굴에도 거품을 묻혔다. 거품을 묻히고 가볍게 입을 맞추는 기분이 색다르지만 나쁘지 않았다.
한창 서은의 장단에 맞춰 주던 주혁이 지루하단 얼굴을 만들었다. 그는 곧 따분한 눈을 하더니,
이제 어른들의 거품 놀이를 해 봅시다,
하며 벌거 벗은 몸을 일으켰다.
목련이 피었다. 꽃샘의 바람은 사늘했다. 홍은동으로 돌아오며 그들은 아주 많은 약속을 했다. 다음번엔 경마장에서 십만 원을 따기로 했고, 다다음달 개봉한다는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를 함께 보기로 했고, 벚꽃이 피면 남산에, 여름이 되면 부산 바다에, 가을 단풍이 물들면 팔당댐에 가기로 했다.
담벼락을 따라 걸으며 또한 그들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 미래에 서은과 주혁의 사이엔 아이가 있었다. 주혁과 서은을 반씩 닮은 아이였다. 여러 채소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마당엔 강아지 한 마리도 있었다. 아무 일정이 없는 주말에 주혁이 요리를하고 서은은 아이에게 밥을 떠먹였다. 어느 날엔 아이와 함께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가 바다를 구경했다. 주혁이 다닌 대학교의 잔디밭에서 셋이 함께 샌드위치를 먹었다.
아주 단, 꿈이었다.
* * * * *
오랜만에 본가에 온 주혁은 화를 묵히는 얼굴이었다. 삼촌이 반가워 달려드는 조카도 마다하고 주혁은 곧장 태일의 서재로 들어갔다. 한바탕 무언가 몰아칠 것 같은 예감에 최씨는 진정에 좋은 차를 달였다. 선미가 쫓겨나듯 집을 나가고 살림은 최씨가 도맡아 하는 중이다.
바람 잘 날 없는 집안이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다과를 준비해 놓고도 결국 버려질 것을 알기에 최 씨는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조마조마 서재 근처를 서성이기만 했다.
“독일 지사 발령 물려 주십시오.”
단정한 어투였다. 그새 말이 흘렀나 보다. 태일은 안경 너머 힐긋 주었던 시선을 거두었다.
“회사에서 꼬박꼬박 월급 받아 가는 치가 무슨 주제로 그런 요구를 해.”
담은 내용과 달리 비난 없이 느리고 명료한 음성이었다. 노인의 무딘 얼굴엔 드러나는 의중이 없다.
거래에서 점유하는 위치가 낮을수록 보이는 온도는 미지근해야 한다. 절박하게 굴어 스스로의 위치를 더 낮추어 얕보이지 말아야 하며, 위치와 능력에 맞지 않는 과한 자신으로 우습게 보이지도 말아야 한다. 주혁은 태일에게 그렇게 배웠다.
주혁은 들끓는 감정과 말들을 목울대 아래에 밀어 넣고 알맞은 말을 고르기 위해 노력했다.
“꼬박꼬박 받아 가는 월급의 양보다 배로 더 일했습니다.”
“남들보다 더한 권리를 누렸으니 배로 더 일하는 건 당연지사지.”
“아직 여기서 제 할 일이 많습니다. 본사에서 제가 맡은 일들 끝까지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서정에 속한 몸, 쓰임이 필요한 곳에 가서 마땅히 쓰이는 게 네 할 일이야.”
“회장님.”
“그래, 내가 네 회장이고 넌 내 회사 직원인 걸 잊지 말아야 할 게다.”
태일은 심상히 대꾸하며 만년필을 집었다. 만년필은 종이 위에서 매끄럽게 움직이며 사각거리는 마찰음을 냈다. 고요히 내려앉은 노인의 눈꺼풀은 들릴 줄을 모른다. 태일의 말투엔 조금의 힐난과 조급함도 없었다. 주혁이 걸어오는 도발에 동조할 생각 없이, 뿌연 안개 같은 얼굴로 예사로운 일을 할 뿐이다.
주혁이 내달 독일 지사 사업 지원 TF팀으로 비공식 발령을 받을 거란 얘기를 들은 직후였다. 인사이동 시즌도 아니었고 승진 발령도 아니었다. 다분히 의도가 깔려 있는 조치였다.
주혁은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차라리 화를 냈더라면, 고함을 지르고 힐난이 가득한 눈길을 보내왔더라면. 어느 평범한 집의 조손처럼 한바탕 대들어 보기라도 할 텐데. 하지만 안개가 된 노인의 앞에선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안다.
한때 열정과 야망이 들끓어 불보다 더 뜨거웠다는 사내는 어느 순간 안개가 되었다. 끓지 않고 얼지 않으며 다만 흐리고 사느랗게 변했다 한다. 재형이 번번이 그의 뜻을 저버렸을 때, 주혁이 태어났을 때, 재하와 주혁을 내쫓았을 때, 승혁이 다리를 잃었을 때, 재하가 죽고 주혁을 받아들였을 때.
그 모든 순간을 버티고 견디며 노인은 색을 잃고 바래졌다. 해서 겉으로 노인은 평온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혁은 알았다. 노인의 안개 너머 보이지 않게 자리 잡은 것은 세차게 찢기고 밟혀 너덜해진 심장이다. 안개는 잔인하게 뚫린 노인의 인생을 가리기 위한 위장일 뿐이다. 나달대다 못해 고통의 역치가 높아진 마음은 어느 것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주혁의 반항도 태일에겐 그저 얕게 스쳐 가는 바람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주혁은 자신의 간절한 바람이 그저 스쳐 가는 것을 지켜만 볼 수 없었다.
안개처럼 번지는 고요를 주혁이 깨뜨렸다.
“형에게 누가 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만년필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러고도 태일은 움직이지 않다가 이내 눈을 올렸다. 젊은 사내의 곧은 눈매와 선명한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때와 뜻에 따라 완고와 유연을 천연스레 넘나드는 아이의 얼굴이 오늘은 빗장을 풀고 본의를 드러내고 있다.
제 핏줄이지만 잘난 인사라 생각했다. 젊은 날 상상 속에서 내 자식이라면 응당 이럴 것이다, 하는 것들을 품고 자란 아이.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다면 매 순간 태일을 즐겁고 흡족케 했을 것이다. 어디든 당당히 드러내 자랑하고 예뻐했겠지.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다면一
그러나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늘 태일에게 쓰린 업보를 상기시켰다.
움직임이 멎었던 태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연유로 너 보내는 거 아냐.”
주혁의 말은 석현과 선미와 재형을 매몰차게 내쳤으나, 승혁은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승혁의 것은 감히 넘보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자신을 내치지 말아 달라는 의미였다.
이 집에서 아이는 제 존재 의의를 승혁에게서 찾고 제 가치의 기준을 승혁에게 두었다. 그걸 모르지 않았지만 애써 감싸 주지도 않았다. 아이의 상처는 이용 가치가 있었으므로. 태일에게 주혁은 외면하고 싶은 손가락이다. 치우침 없이 재하와 난영을 반씩 닮은 아이는 분명 집안의 치부였다.
땅을 치고 기며 하늘을 원망했다.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아이를 재하와 함께 내쫓고 태일은 매 순간 가슴에 펄펄 끓는 증기를 안고 살았다.
재하가 죽고 그 아이를 다시 보았을 때, 태일은 지쳐 있었다. 그저 피로했다. 더는 원통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다만 내게서 나온 업보들을 거두어야겠단 생각뿐이었다.
그 아이에게 눈길을 준 적 없었다. 손을 뻗은 적도 없었다. 변변찮은 말 한마디 건넨 적 역시 없다.
그렇게 홀로 자란 아이가 성인이 되어 서정에서 일을 시작하고도 몇 달 동안 태일은 그 사실을 몰랐다.
수십 년 사람을 상대로 장사를 한 태일이지만 그는 섣불리 사람을 믿지 않는다. 주혁이 하고 있는 것이 승혁을 지키기 위한 것인지 승혁을 내치기 위한 것인지 그는 판단을 유보하였다.
그러나 주혁이 승혁의 것을 넘본다면 언제든 내칠 준비는 되어 있었다. 주혁은 어디까지나 승혁을 보좌하는 장기 말이어야 했으므로. 아름다운 분배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그건 인간의 본성이었다. 다만 주혁을 이용해 태일은 깨끗한 손으로 승혁의 적들을 내칠 수 있었다. 손자의 상처는 그런 용도였다.
비정하고 못된 노인이다. 지은 죄가 크다. 죽어서 지옥문은 피할 수 없을 거였다.
그러나 그 아이가 그토록 번듯하게 자라 환하게 웃어 줄 때면 내심 뿌듯하였다. 기특하였다. 안쓰러웠다. 안타까웠다. 죄스러웠다.
해서 못되고 비정한 할아비일지라도, 핏줄로서의 마지막 바람이었고 의무라 생각했다.
누구보다 번듯한 가정을 안겨 주고 싶었다. 오랫동안 사랑이 고픈 아이였고 앞으로도 쭉 사랑이 고플 터였다. 그 아이에게 아무 탈 없이 사랑 많은 집의 여식을 짝지어 주고 싶었다. 서정의 회장으로서가 아닌 할아비로서 해 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일.
주혁이라도, 주혁이만은 행복한 가정을 일구길 바라였다. 기상목 회장의 손녀라면, 아이를 보듬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또한 그곳이라면 서정의 굴레와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 맘껏 제 날개를 펼쳐 볼 수 있을 터였다.
“이유를 말해 봐.”
"……."
“네가 타국에 가기 싫은 진짜 이유.”
"……."
“너 스스로 떳떳한 이유도 없으면서 떼쓰지 마라.”
“떳떳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상처받을 게 싫어서입니다.”
"……."
“아시잖습니까.”
두서없이 기습처럼 주혁은 여자의 존재를 드러냈다. 태일의 깊은 시선이 밀려온다. 주혁은 노인의 안광이 드러내는 엄중한 경고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불편할 겁니다. 입 모양을 읽는 것으로 대화를 하는 여자예요. 모국어도 아닌 언어를 배우고 또 그 구화를 익히는 것 굉장히 힘들 겁니다. 저 따라 독일 올 여자도 아니구요. 더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네가-!”
말끝에 힘이 가득하다. 짧지만 감정이 묵직하게 실린 단어였다. 실로 오랜만에 주혁은 태일의 생생한 감정이 담긴 말을 들었다. 주혁은 벌떡 뜨여 타오르는 빛에 지지 않고 맞서듯 눈을 피하지 않았다.
찰나의 침묵 속에서 팽팽한 긴장만이 형태를 뚜렷이 했다. 태일은 만년필을 쥔 주먹에 힘을 주었다.
“네가.”
음의 고저는 낮았으나 여전히 묵직한 음성. 태일의 입가에 주름이 깊게 팬다.
뒷말을 태일은 차마 하지 못하였다. 재벌가라 뒷짐 지며 위세 부리고 가진 것 자랑하며 휘두르기엔 스스로가 흠이 많은 인간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결국 모두가 그런 존재라는 진리를 한 많은 세월 속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네가 어디가 모자라서.”
"……."
“뭐가 아쉬워서.”
그러나 염치없고 이기적이게도 기어코 말이 나왔다. 그러나 곧 한숨을 감추고 이지적인 말투를 되찾는다.
“젊은 날 연애 같은 것, 상관치 않지만 이젠 나이도 들었으니 현명한 선택을 해야지. 젊은 날의 열정과 치기야, 모르는 바 아니다. 감정에 눈이 멀어 판단이 서지 않을 때도 많지. 네 큰아비도 그랬어. 네 어미도, 네 아비도, 그래. 재하, 재하도 그랬지. 그 끝을 난 다 보았어. 결국 모두 후회하고 괴로워하며 지옥에서 살았다. 어째서 멀쩡한 길을 두고 어렵고 괴로운 길을 가려는 게야.”
잠시 말을 끊고 주혁의 얼굴을 살핀다.
“괜한 길 가서 더 아프지 마라.”
툭하게 뱉지만 진심이었다. 노인의 진심이 아이에게 통하길 빌었다. 태일은 그 이상 할 말이 없다. 이만가 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내리고 마저 보던 종이를 살피는데,
“저는 갑니다.”
아이의 고집이 완연한 투가 검질기게 태일을 붙잡는다.
“가고 싶습니다.”
미련한 놈. 실망인지 분노인지 모호한 감정이 태일을 삼켰다.
“......미련하고 헛된 감정 따위.”
“간절하게, 진실로 바라는 유일한 마음입니다.”
“한낱 지나갈 바람.”
“차라리 그러길 바랐습니다만 아니었습니다.”
답 없는 고백을 반복하며 구걸하듯 매달렸으나 번번이 서은이 그를 저버렸을 때, 서은의 거짓을 알았을 때, 끝내 서은이 이별을 택했을 때, 주혁은 진실로 이 감정이 차라리 지나갈 바람이길 바랐다. 자존심은 너덜대며 바닥에 나뒹굴었으며, 서은을 원할수록 갈증은 해갈되지 않아 답답하고, 상처는 아물 겨를 없이 깊어지기만 했다.
그 답답함과 괴로움을 어찌할 수 없어 차라리 시간을 절단해 버리고 싶었다. 뚝 끊어 오랜 뒤의 시간으로 넘어가 모든 감정에 초연한 존재가 되어 있길 바랐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서은을 원하고 있을 자신이었다.
“그 애의 장애를 네가 짊어지겠다고, 결국 너도 그 애도 괴로워할 게다. 그 똑똑한 승혁이 처도 결국 그렇게 떠났어. 너나 그 아가씨에게나 못 할 짓이야. 나는 그 괴로운 일을 더 반복하기 싫다. 나도 이제 늙었어. 대체 언제까지 내가 새끼들 그러는 꼴을 보고 살아야 해. 너만은 이제라도 번듯이 살아야지. 네 어미, 네 아비, 네 형 몫까지 번듯이 살아야지.”
“아뇨, 싫습니다. 제 몫대로, 제 몫만큼 사랑하고 싶습니다.”
난영도 재하도 승혁도 모두 상관 않고 오로지 그의 뜻대로.
“장애를 짊어지는 게 아니라 그저 사랑하고 함께하는 겁니다. 서은이 불편해하는 게 있다면 제가 도와주고, 제가, 이런 처지에,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하지만 서은이 그런 저를 보듬어 주고 그렇게 함께하고 싶습니다. 저희의 이야기는 장애에 대한 도전기가 아니라 그저 흔하고 평범하게 사람들이 하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어리석은 놈. 왜 자꾸 쉬운 길을 놔두고.”
“불편할지언정, 행복한 길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태일은 끝내 말을 잃고 만다.
“너를, 너를 아까워서 내가.”
그는 주혁에게 그저 힘없는 노인일 뿐이었다. 주먹을 쥐었다. 그를 두고 일찍 떠난 아내가 그립고 원망스럽다. 두 아들을 그에게 맡기고 그리 가 버린 며늘아이도 원망스럽다.
“내가 반대할 것 알았으면서, 이렇게 당당히 존재를 말하는 이유는 뭐야. 내 허락은 필요 없다는 오만이야, 자신이야?”
“오만도, 자신도 아니고 간청입니다.”
"……."
“혹여 상처 주실 거라면 제게 미리 주십시오. 허락은 언젠가 받으러 올 겁니다. 제게는 너무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숨겨 가며 떳떳하지 못하게 살게 하지 않을 거예요. 지키고 싶습니다.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 사람이 하고 싶은 것 하며 살면서 행복하게 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서정의 힘도 필요하고요. 그러니 허락은 받으러 올 겁니다. 그때에 그저 예뻐해 주십사, 하는 간청입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서정을 이용하겠다?”
부러 대답의 건방짐을 꼬집지만 주혁은 굴하지 않고 뻔뻔히 대꾸한다.
“딱 그 여자 지킬 만큼만 이용하겠습니다.”
"……."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다양한 방면으로 최대한 활용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내는 게 바로 능력이라고, 회장님께 배웠습니다.”
주혁의 능청과 언변에 태일은 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다. 결국 팽하니 시선을 틀어 버렸다.
“......이만 가 봐. 꼴 보기 싫어.”
“발령 건은 물려 주실 것으로 알겠습니다.”
“고얀 놈.”
“계속 설득하러 오겠습니다.”
고얀 놈은 노인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감사합니다. 아까워해 주셔서.”
서재를 나가기 전 주혁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그 말이 골육에 사무쳤다. 그럼 아깝지. 누구 새끼인데, 그걸 고마워하고 있어.
태일은 눈을 감았다.
결국 질 것이다. 재형에게도, 재하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아비인 죄로, 할아비인 죄로 결국 이번에도 태일이 질 것임을 알았다.
오랜만의 흥분에 심장이 파들대는 것이 느껴졌다. 가쁜 숨을 뱉으며 빈자리를 바라본다. 간절하게 진실로 바라는 유일한 마음이랬던가.
그 마음이 얼마나 하찮게 바뀌고 뒤집어지는지를 태일은 안다. 수없이 봐 온 인간의 간사함이다. 한순간 갖고 싶은 마음에, 원하는 마음에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내뱉지만 결국 원하는 것을 쥐고 나면 마음은 금세 방향을 틀어 버린다. 한때 그토록 원했던 대상은 마음을 바꾸어 버린 주인을 어리둥절히 바라보다 결국 상처를 입거나 잊혀 원래의 빛을 잃을 뿐이다.
그 지겨운 장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같은 실수를 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있는 힘껏 맞설 것이다. 또한 동시에 간절히 바란다. 주혁이 끝내 지지 않기를. 그리고 그 순간 마침내 태일은 아이의 힘이 되어 주고 싶다. 그것이 지금 태일이 간절하게 진실로 바라는 유일한 마음이다.
생각 끝에 태일은 힘없이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가는 숨을 길게 뱉는다. 몹시 피곤했다.
* * * * *
서은은 요리에 소질이 없었다. 주혁을 위해 피자를 만들어 보겠다며, 인터넷에서 오븐 없이 만들 수 있는 피자를 보았다며 만든 음식은 맛이 지독히 없었다. 이 재료로 이렇게 만들기도 힘들겠다 생각하며 접시를 비웠다.
서은은 스스로의 요리 실력에 실망한 눈치였다. 미안하다며 따라붙는 시선이 묘한 흥분을 부추겨 서은을 눕히고 옷을 벗겼다. 서은도 어줍게 그러나 대담하게 주혁의 옷을 벗겼다. 주방에서, 거실에서, 침실에서, 욕실에서 하는 섹스들이 허기진 마음을 채워 주었다.
밀도 있게 주혁의 얼굴을 살피는 눈동자와 종종대며 주혁의 옆에서 알짱대는 발걸음이 좋아 주혁은 늘 억지로라도 짬을 내 홍은동으로 갔다. 일이 산처럼 쌓여 도무지 어찌할 수 없을 때에는 처리해야 할 업무 파일을 들고 홍은동으로 갈 때도 있었다.
주혁은 지키고 싶었다. 또한 자격을 갖추고 싶었다. 지키고 싶은 것을 마땅히 지켜 낼 수 있는 자격.
어느 밤, 마트에서 행사 상품을 놓쳐 비어 있는 판매대들을 배회하는 서은을 보았다. 줄을 서라는 확성기 너머의 입술을 읽지 못해 홀로 어리둥절해 있는 서은을 보았다. 마감하는 계산대에 서 있는 서은에게 짜증을 부리는 점원을 보았고, 죄송하다 고개 숙이는 서은을 보았다.
주혁은 서은을 향한 불만과 비난과 짜증과 불쾌와 부정한 그 모든 것들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나쁜 말들과 시선들이 서은에게 닿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나쁜 것들은 그가 대신 할 테니, 서은은 오직 웃고 즐겁고 행복하기를 바라였다.
해서 서정을 위한 것이라면, 그래서 태일의 마음에 들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때가 오면 떳떳하게 서은을 소개하고 싶었다. 그때에 어느 누구도 감히 서은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실적을 쌓고 인정을 받아야 했다. 5G와 AI 관련 세계의 내로라하는 인재들을 영입하기 위해 그는 관련 학문을 파고들고 인맥을 다지고 짧은 동안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다녔다. 독일의 인공 지능 개발 벤처와의 인수 합병을 성공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다,라는 말을 실감했다. 승혁의 측근들이 뒤에서 그를 의심하고 경계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홍은동으로 돌아가면 서은이 그를 보고 웃어 주었다. 그가 거는 실없는 장난에 서은이 발끈하고 투덜대고 이내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들은 그의 뇌중에 오래도록 남아 서은이 없는 순간에도 이따금씩 그를 웃음 짓게 했다.
그래서 그는 피곤하나 지치지 않았다. 힘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살얼음 같지만 유리의 성처럼 아름다운 길을 주혁은 걷고 또 걸었다.
* * * * *
밤중에 서은은 토악질을 하며 속을 게워 냈다. 주혁이 아연실색하여 약국에 가 온갖 종류의 약을 사 왔다. 약은 소용이 없었다. 신경성 소화 불량이었다.
오랜만에 경희네와 저녁을 함께했다. 의붓동생 민정이 곧 결혼을 할 모양이었다. 경희 부부는 새로 사위가 될 남자의 앞에서 즐거워 보였다. 입 모양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서은은 대화에 끼지 못했다. 남자의 과한 배려는 불편했고 그 배려를 불편해하는 서은을 경희는 책망했다. 결국 먹은 음식들이 얹힌 모양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주혁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은은 고민하다 솔직히 겪은 일을 말하였다.
주혁은 화를 냈다. 왜 네가 그곳에서 그런 대접을 받고 앉아 있었냐며 짜증을 냈다. 넌 그런 거 하지 마. 앞으론 가지 마. 화를 내는 주혁이 좋았다. 서은이 겪은 아픔에 화를 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든든한 일이었다. 다음에도 그렇게 화를 내 줘, 웃으며 말하는 서은을 주혁은 어이없어했다.
한바탕 봄이 지나갔다. 드센 바람과 이른 낙화로 벚꽃이 피면 남산에 가자는 어느 날의 약속은 지키지 못하였다. 주혁이 대신 여의도에서 주웠다며 벚꽃 가지 하나를 서은에게 내밀었다. 내미는 남자의 얼굴이 어단가 수줍어 보여 서은은 실은 내가 꽃이지, 실없는 소리를 했다. 서은은 이제 주혁에게 말을 높이지 않는다.
주혁은 더욱 바빠졌다. 한 달에 온전히 시간을 같이 보내는 날이 많아야 삼사 일이었다. 3월 정기 주총이 끝나면 생길 거란 여유는 밥에 말아 먹었냐, 국으로 끓여 먹었냐 하는 서은의 농담에 주혁은 커피에 타 먹었지, 했을 뿐이다.
주혁이 바쁜 만큼 서은도 일을 늘렸다. 전부터 준비하던 미술 클래스를 열었다. 유튜브를 보고 요리를 배우는 새로운 취미도 생겼다. 함께 시간이 비는 날이면 내일은 없는 사람들처럼, 어떨 땐 세상에서 제일 게으른 사람들처럼, 때로는 섹스에 미친 사람들처럼 시간을 보냈다.
홍은동에서 주혁이 오기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일은 즐겁지만 때로 불안하고 행복하지만 때로 버거웠다. 말하지 않지만 주혁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았다. 지친 기색을 애써 감추는 주혁을 모르는 척하였다. 구태여 그가 관계의 불안정함을 알아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서은의 곁이 주혁에게 안식처가 되길 빌었다. 진심으로 주혁이 행복하길 바란다. 때때로 위태롭게 웃는 남자가 짊어진 짐의 크기를 감히 가늠할 수 없다. 세간의 나쁜 말들을 끌어모아 살아가면서 서은의 앞에선 한없이 다정하기만 한 남자의 비밀을 서은은 감히 묻지 못한다.
주혁이 진실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가 말해 줄 날을 기다렸다. 주혁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주혁의 흠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따금씩 경희네에 연락을 하며 적당히 비위를 맞추었다. 때때로 그들은 서은을 아프게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서은은 최선을 다하였다.
그럼에도 불안감에 몸서리쳐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었다. 늦은 밤 서재에 엎드려 잠든 주혁을 보았을 때. 지친 얼굴로 다른 이와 통화를 하는 주혁을 보았을 때. 오랫동안 주혁이 서울을 떠나 있을 때. 서은이 남들에게 주혁의 존재를 알리지 못할 때. 섣불리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는 서은의 바람을 말하지 못하고 우물거릴 때.
때마다 부푸는 불안감이 괴로웠지만 외면했다. 모두 묻어 두었다.
“이러고 있다가 출근은 언제 해?”
하얀 햇살은 초여름 아침의 것치고 기세가 사납고 광도가 높았다. 그보다 더 노골적인 눈길이 서은의 얼굴을 더듬었다. 남자의 몸이 이불 대신 서은을 덮고 있다. 주혁은 뻔뻔하게 되물었다.
“그러게, 왜 깼어?”
“내 잘못이란 거야?”
“어.”
“억울해.”
불만스레 하는 말에 주혁은 낮게 웃는다. 눈이 시리고 몸이 더워 눈을 뜨니 주혁이 서은을 가두듯 엎드려 그녀를 내려 보고 있었다. 눈을 시리게 하고 체온을 높인 것은 아침 햇살이 아니었나 보다.
“오늘 출장 간다면서.”
주혁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출근도 않고 아침나절부터 이러고 있는 이유를 눈으로 물었다.
“그냥.”
답이 간결하다. 그러나 보이는 남자의 눈은 알 수 없는 상징과 기호를 담고 있다. 시선은 쏟아지는데 그 너머 숨겨진 의미에 서은은 닿지 못한다. 서은이물었다.
“심심해서?”
주혁은 다시 입매로 웃었다. 소리 없는 미소가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런데 남자의 눈은 웃지 않아서, 서은의 안에서 그것은 아쉬움으로, 슬픔으로, 애끓음으로 변모했다.
“예뻐서.”
뜻밖의 낯간지러운 답에 서은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주혁도 따라 웃었다.
“얼른 가. 난 더 잘래.”
“못 잘걸.”
“왜?”
“내가 괴롭힐 예정이라.”
서은은 또 웃음을 터뜨렸다.
“뻔뻔쟁이.”
“우리 애인은 익숙해질 때도 됐고.”
서은의 투정도 개의치 않고 주혁의 손이 서은의 엉덩이 골을 타고 내려갔다. 성적인 의도가 다분한 손짓이었다. 서은의 하체가 주혁에게 바짝 당겨졌다. 그가 노골적으로 서은의 사타구니 사이에 다리를 들이밀었다.
“이제 가면 일주일은 못 볼 텐데.”
서은을 내려 보는 주혁의 얼굴은 제법 거만하다.
“흔적 좀 남겨 봐.”
한눈 못 팔게.
정서은 것이라고.
금세 가면을 바꾸듯 얼굴을 바꾸어 장난을 거는 남자. 그 장단에 맞추어 서은은 주혁의 목덜미를 깊게 빨아들였다.
어느 날은 행복했다. 어느 날은 불안했다. 어느 날은 행복하다가, 다시 불안하다가 또 행복했다. 이토록 행복하고 그래서 더 불안한 감정은 서은이 장애를 가져서, 주혁이 딛고 선 땅이 저 먼 곳에 있어서 드는 게 아니었다.
그저 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은이 주혁을 사랑하였으니까. 주혁이 서은을 사랑해 주었으니까.
손에 잡힌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아 꽉 쥐려 하지만 쥘수록 망가질까 두려워 이도 저도 못 하는 마음. 서은은 그걸 사랑이라 불렀다.
대로변에 나가 두 발자국만 걸어도 눈에 보이고 발에 차일 만큼 흔한 마음. 언젠가 그것이 식어 서로의 손을 놓게 될 날이 올 수도 있다. 언젠가 서로가 지겨워지는 날이, 그래서 서로의 존재가 짐으로 느껴지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럼 그때에 모든 걸 내려놓고 돌아설 것이다. 그저 여느 평범한 연인들이 겪는 일련의 과정들을 착실히 밟아 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에 눈이 멀었기에. 서은은 온 힘을 다해 그 사랑을 지키고 싶었다.
* * * * *
깊은 새벽이었다. 잠결에 흐린 시야로 방을 나가는 주혁을 보았다.
어디 가? 하는 질문을 꿈에서 한 건지 현실에서 한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또 회사 일 인가 봐.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잠에 들었던 것 같다.
다음 날, 여느 때처럼 서은은 주혁을 기다렸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주혁은 오지 않았다. 셋째 날이 되는 날, 모든 신문사 1면의 내용이 같았다.
서태일 회장의 부고였다.
연이어 송선미 여사의 언론 인터뷰가 터졌다.
서정이 오랫동안 숨기고자 했던 집안의 치부가 세상에 밝혀졌다.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패륜으로 태어난 서주혁이 염치를 모르고 주제를 몰라 서재형의 자리를 빼앗고 큰어머니 격인 선미를 내쫓았으며 서승혁의 자리를 넘보려 했다.
그 일로 서태일 회장과 서주혁의 사이는 크게 틀어졌으며 결국 서태일 회장이 쓰러진 거였다.
라는 말들이 온 세상을 돌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