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밤의 여왕
서은은 무너져 울었다. 엉엉 크게 소리를 내다가 애타게 아빠를 찾기도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냉기가 흐르던 남자는 사라지고, 무얼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는 남자는 애가 탔다. 함부로 울지 마, 라는 말을 할 수 없다. 흔하고 같잖은 위로의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좀 전까지 힘껏 위악을 부리던 여자가 지금은 사냥개에 물려 몸을 떠는 약한 짐승 같았다. 서은의 상처를 함부로 들추어낸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것은 우두커니 앉아 서은의 곁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서은의 눈물 앞에서 그는 참을 수 없이 무력하다.
욕심이 그득하고 이기적인 사내는 정말 그뿐이냐고 사납게 묻고 싶었다. 내가 너를 사랑해 주는 게 좋았을 뿐이냐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없었냐고, 너는 정말 나를 거짓으로 기만한 채 버릴 생각이었냐고 바락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에 빠져 한없이 나약하고 무능한 남자는 다른 말들을 하고 싶었다.
혼자 두렵고 무서웠지. 내가 일찍 알아줬어야 했는데. 나는 괜찮다고, 말해 줬어야 했는데. 나를 속인 너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라고, 네가 어떻든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고. 그 말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하등 쓸모없는 사과였다.
그러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자여겐 닿지 않는다. 여자의 수그러진 고개는 들리지 않는다. 박자를 잃은 여자의 울음소리가 사납게 그의 마음을 헐뜯고, 뒤늦은 무력한 후회가 뇌를 할퀴었다. 서은을 품에 안으면 서은이 밀쳐 냈다.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 뻗은 손길은 허공에서 시름없이 멈추었다. 주혁은 감히 서은의 울음을 방해할 수 없어 손가락을 말아쥐었다.
애타게 아빠를 찾던 서은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서은은 아주 간절히 아빠가 보고 싶었다. 아빠가 괜찮아, 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았다. 서은의 엄마면서 아빠이며 바다고 하늘이고 신이었던 아빠. 귀가 안 들린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절망하고 분노하던 서은을 묵묵히 받아 주던 아빠. 아빠. 아빠.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오래전 묵혀 두었던 질문들이 다시 고개를 쳐든다. 답 없는 질문을 묵묵히 받아 줄 아빠가 이젠 세상에 없는데. 다시 고개를 쳐든 이 분노와 절망을 어디에 쏟아 내야 할지 몰라 그저 서럽고 답답했다.
안 들려, 아무것도. 내 소리도 비명도 울음도 모두 잡아먹어.
두렵고 무서웠다. 형체도 소리도 없는 괴물이 서은의 소리를 모두 먹어 치웠다. 그 괴물은 서은의 몸에 기생하며 무럭무럭 자라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키었다. 의사에게 빌었다. 제발 괴물을 떼 달라고, 무섭다고, 그 괴물은 들리지도 않는데 보이지도 않는다고.
모두 서은이 미쳤다고 했다. 모두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오직 아빠만, 아빠만이 서은의 편이 되어 서은의 괴물을 물리쳐 주겠다 했다.
그래. 아빠와 서은은 괴물을 물리쳤고 이제 괴물은 존재하지 않아. 그저 서은은 서은인 거다. 들리지 않아도 세상을 보고 그리고 느끼고 살아가는 정서은이다.
흐르는 눈물을 벅 벅 닦고 앞을 본다. 아빠가 아닌 주혁이 그녀 앞에 있다. 당신은 뭐지? 뭔데 이 행패를 받아 주고 이 비참한 꼴을 다 보고 있지?
하여 얼간이처럼 물었다.
“넌 뭐야?”
지겹지 않게 섹스나 하자며 모르는 척 속아 주겠다는 넌 어디의 어떤 바보 등신이 니.
“......정서은에 환장한 미친놈이지.”
하하. 젖은 숨 사이로 허탈한 웃음이 새 나왔다.
매일 오늘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나의 거짓을 주혁이 아는 일 없이 나의 사랑이 무사하기를, 염치없지만 바라였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무너졌다. 모든 게 밝혀진 지금 서은은 논리적인 사고가 되지 않는다.
좀 전까지 밀려오던 수치와 죄책과 그로 인한 여파들은 더 이상 서은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갈 곳을 잃고 방향을 잃어 속수무책인 심정이다. 서은이 지키고자 했던 세상은 무너졌는데, 무너진 세상에서 어떤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려 줄 이가 없다.
그때 주혁의 손이 서은의 얼굴에 닿았다. 주혁이 검지를 굽히고 서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남자의 손짓을 따라 호흡이 점차 잦아들었다. 물기 가득한 시선이 남자의 입술을 향한다.
“어떻게 하면 네가 그만 울지 알려 줘.”
날 선 얼굴의 남자가 아득한 눈을 하고 어설픈 말을 하였다.
“사랑, 해 줄게.”
"……."
“지금까지처럼 사랑해 줄게. 그게 좋은 거라면 질리도록 실컷 해 줄게.”
"……."
“넌 하고 싶은 걸 해. 지금까지처럼.”
더 바라지 않을게. 말을 하며 주혁은 제 안의 한 사내를 죽인다. 진절머리가 나도록 사랑을 구걸하는 나약한 사내와 그가 품은 욕망을 낭떠러지로 밀어 넣는다. 그 무력한 사내를 죽이고 대신 여자를 선택한다. 그저 서은이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서은이 다시 웃기를 바란다. 그럴 수 있다면 그는 이제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깟 마음 따위, 그의 존재 따위 몇 번이고 죽일 것이다. 얼마든지 이용당하고 버려지고, 다시 이용당할 것이다.
눈시울이 매워 서은은 잠시 눈을 감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한 순간, 다시 아빠를 떠올렸다.
서은이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돼.
못 할 게 뭐야. 우리 서은이가 하고 싶은 건데.
구겨진 약봉지에 적어 보여 주던 아빠의 투박한 글씨들을.
근데 아빠. 아는데, 무서워.
말하던 서은 역시 떠오른다.
하다가 안 되면 그때 포기해도 돼. 그거 또한 서은이가 그만하고 싶어서 그만하는 거니까. 그럼 그때엔 또 서은이가 하고 싶은 걸 하자.
마구 뒤엉킨 머릿속에서 아빠의 말들이 점차 분명해졌다.
이 정윤철이 인생 통틀어 제일 자랑스러운 내 딸, 서은이. 우리 공주님.
뻔한 말임에도 안심이 되었던 순간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아빠가 해 준 말이어서 위로가 되었던 그 말들이.
‘날 사랑해줘.’
그리고 서은이 진실로 하고 싶은 것이. 두서없이 쏟아지는 생각들 속에서 마침내 한 가지 바람이 오롯한 윤곽을 드러냈다.
“많이 귀찮게 할지도 몰라. 들어도 계속 물어볼 거고 혼자 이상한 말도 할 거야.”
서은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거름 없이 나오는 말들을 토해 냈다.
“사소한 거에 혼자 놀라서 당신을 놀라게도 할 거고 혼자 눈치 없이 크게 말할 수도 있어. 가끔은 답답해서 당신한테 화를 낼지도 몰라. 그래도 한숨 쉬지 말고 짜증 내지 마. 나는 답답해도 당신은 답답해하면 안 돼. 당신은, 당신은 그러면 안 돼.”
상처는 생각보다 끈질기고 깊었다. 아물었다 생각한 그것은 깊숙한 곳에서 누렇게 곪아 있었고, 덮어 두었던 상처는 덧이 나 고통을 더했다. 남의 큰 상처보다 제 손톱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프다는 말처럼 서은은 서은의 상처가 제일 아파 주혁의 상처를 헤아리지 못했다. 서은의 상처를 가리는 데 급급해 주혁의 상처를 알려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러지 않을게. 너는 화내고 짜증 내고 답답해해.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게.”
“......왜? 당신이 왜 그러는데?”
아픈 마음으로 물었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덤덤히 하는 말이 다시 또 서은을 아프게 한다.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해서.”
"……."
“그러니까 넌 미안해하지 말고 당연하게 받아들여.”
소리 없이 뚝뚝 흐르는 눈물을 이를 악물며 참았다.
“싫어. 싫어. 싫어어一”
서은은 절규하듯 말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결국 나는 또 당신을 아프게 할 거야. 나랑 함께하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답답할 거고 짜증 날 거고 화가 날 거야. 그러지 않겠다는 당신의 약속도 나는 믿지 않아. 결국 당신은 약속을 깨뜨리게 될 거야.
주혁이 다시 서은의 뺨을 잡아 들었다. 서은은 그녀의 볼에 가 있는 주혁의 한 손을 잡았다. 잡은 손이 따뜻해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다시 주혁을 마주하고 멘 목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해. 내가 너무 미안해. 끝까지 비겁해서, 끝까지 당신을 상처 줘서 미안해. 내가 이런 나라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그럼에도 이 순간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이 가득했다.
그래도.
그럼에도, 함께하고 싶어.
이런 나이지만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당신의 약속을 믿지 않지만 당신이 약속을 깨뜨린다 해도 나는 이해할 거야. 당신이 화를 내고 짜증을 낸다면 나도 똑같이 화를 내고 짜증을 낼 거야. 그래도, 그래도.
“같이 있고 싶어.”
그 순간에도 그 이후의 순간에도 나는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당신이 좋아. 너무 좋아. 이기적이지만, 그래도 당신이 좋아.
서은은 더 이상 흐르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돌고 돌아 결국 하고 싶은 말도 이거였다. 죄책감에 차마 할 수 없었던 말. 그럼에도 결국 할 수밖에 없는 말.
“사랑해.”
“…….”
“당신을...... 사랑해.”
마침내 그 말을 토해 내자 가슴 깊은 곳에서 저릿한 감각이 번졌다. 그러나 그것은 아픔이 아니었다. 줄곧 가슴 깊은 곳 묻어 두기만 했던 말이 나옴에, 함께 묻혀 있던 뜨거운 감정들이 솟구쳤을 뿐이다.
많이 사랑하고, 많이 그립고, 많이 바라며, 많이 아끼고픈. 그런 감정들이.
주혁이 웃었다. 서은의 눈물을 닦아 주고 웃었다. 쓰게, 아득하게, 지치게 그러나 기쁘게 웃는다.
그는 서은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 * * * *
하릴없는 욕망의 생물이라 지친 몸을 하고도 서로를 원했다. 손을 잡았고 입술을 맞댔다. 나체가 된 몸으로 서로를 더듬으며 눈길을 마주했다. 눈이 마주치면 당연하다는 듯 키스를 했고 팔과 다리로 서로를 얽어맸다. 흐느끼며 애원했다. 서은은 그녀의 몸에 흔적을 새기듯 주혁을 받아들였다.
나체의 몸을 안으며 전달되는 심장의 진동과 온기에 서은은 안심이 되었다. 위로가 되었다. 다시 또 눈물이 나왔지만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면 주혁이 그것을 닦아 준다. 주혁의 가슴을 툭툭 치면 주혁은 맞아 주었고 손을 뻗으면 잡아 주었다.
이 쾌감이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과 어서 빨리 산산조각 나 부서지길 바라는 마음이 충돌했다. 그래도 두 눈에 힘을 주고 주혁을 보았다. 섹스를 하는 게 아니라 싸움을 하듯 보았다. 주혁이 속도를 더 높이고 부딪힘을 거세게 했다. 쾌락에 고통에 눈물이 주룩 흘렀다. 불에 타는 듯 심장이 들끓었다. 그래도 그를 보았다.
굳게 다문 입술과 뜨겁게 타는 눈을 본다. 흔들리는 머리카락과 일순 쾌락에 주름진 미간도 보았다. 주혁의 것을 몸 안에 넣고도, 서은은 주혁의 모든 것을 서은의 몸에 새기고 싶다.
그 마음은 주혁도 똑같았는지 그는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쾌락에 굴복한 서은이 비명을 지를 때에도 그는 다시 밀고 들어왔다. 서은을 향한 시선을 떼지 않고 서은의 예민하고 은밀한 곳들을 샅샅이 들추어낸다. 맹렬한 시선과 열기 속에서도 단단한 갑옷 같은 얼굴로 서은을 자극하는 남자는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웠다.
다시 시야가 뭉개지고 세상이 뒤집히는 순간이 닥쳐왔다. 줄곧 단단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가 그 순간만큼은 서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거친 숨을 느꼈다. 주혁은 곧 서은과 함께 무너졌다.
* * * * *
‘참. 이름은 정서은이에요. 혹시궁금한 거 생기면 물어봐.....요.’
서은을 돌아보는 남자의 눈빛엔 차갑고 성가신 기색이 역력했다. 남자의 바지 주머니에서 반쯤 나왔던 담뱃갑은 다시 바지 안쪽으로 들어갔다. 서은은 담뱃갑을 따라 모양 진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권태로운 음성이 아래로 내려간 서은의 시선을 끌어 올렸다.
‘너 지금 존댓말 되게 어색해.’
남자는 제 앞머리를 뒤로 슬어 넘겼다. 짜증이 묻어난 손짓이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곧 날 선 부름이 따라왔다. 정서은.
‘그냥 말 놓으세요.’
어울리지 않는 존대에는 희미한 비아냥이 섞여 있다. 남자는 서은의 답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 그녀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 남자의 말투와 표정에 무신경하고 귀찮다는 기운이 가득이었다. 돌아서는 남자의 등이 매정하고 무심하였다.
멀어지는 남자의 위로 나무 속 새들이 삐삐, 울어 대고, 그 소리의 위로 댕댕, 학교 종소리가 섞여 멀리멀리 원을 그리며 퍼졌다.
홀로 남은 서은은, 내리는 봄 햇살이 따가워 눈가를 찌푸렸던가.
혼몽한 정신 속에서 오래전의 기억이 떠오르다 가라앉는다.
그 후로도 서은은 줄곧 주혁에게 존대를 했다. 아무리 어색해도,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따가운 시선을 보내와도, 존대를 고집했다. 이제서야 그 노력들이 우스워진다.
왜 그렇게 애를 썼을까.
남자의 무심한 명령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오기였던가. 남자의 진실된 관심을 바라는 치기였던가.
그렇다면 지금은. 주혁의 앞에서 불가능을 꿈꾸고 무리하였던 이유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미련과, 남자의 앞에 서면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과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를 향한 그릇된 욕심이 뒤엉켜서.
어리석은 욕심의 말로는 추하였다. 추하고 허망하지만, 후련했다. 후련하지만 미안했고, 미안하지만 결국 다시 욕심을 낸다.
“다른 생각 할 여유가 있으시고.”
혀로 유두를 굴리던 주혁이 몸을 일으켰다. 서은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다시 물었다.
“무슨 생각 해.”
물으면서도 주혁은 서은의 가라앉은 열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미 몇 번의 사정을 하였는데 주혁은 지치지 않고 자신의 것을 받아들일 여자의 몸을 준비시킨다. 남자의 성실한 애무에 반응하기 시작하는 몸의 열망이 동물의 것처럼 원초적이었다. 주혁의 손짓을 따라 서은은 밭은 신음을 뱉었다.
그 소리를 신호로 여겨 주혁이 다시 얼굴을 내리는 순간, 서은이 답하였다.
“......짐승 같아. 그런 생각.”
주혁이 낮게 웃었다.
“겨우?”
주혁이 하체를 바짝 서은의 아래에 댔다. 다시 또 굵고 단단히 선 것이 서은의 사타구니 사이를 자극하며 움직였다. 이제는 그것이 놀랍지도 않고, 다만 미끄덩 마찰하는 부위에 다시 열이 올랐다.
나른한 눈을 한 주혁이 고개를 기울여 서은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흣,하며 입술에 힘을 줄 때. 하아, 하며 비음을 터뜨릴 때. 결국 서은의 눈에도 힘이 풀리고 잔뜩 젖은 소리가 울릴 때. 그는 그 모든 순간들이 좋았다.
“난 내가 섹스에 영혼을 판 악마나 마귀쯤은 될 줄 알았는데.”
서은은 말끝에 숨겨진 의도를 짐작한다. 섹스에 환장했냐고 물은 건 너였잖아? 하는.
“생각보다 뒤끝 있나 봐요.”
“설마 뒤끝만 있으려고.”
순간 느슨해져 있던 남자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서은은 겁을 먹어 움츠리는 대신 맞서기를 택한다.
“그동안 다정했던 서주혁은 어디 갔어요? 다 연기였나.”
“연기라니, 본능이지. 목줄을 쥔 주인에게 예쁨받고 싶어 나오는 노력이라 생각해.”
“......비약이 너무 심해.”
“아까의 정서은만 할까.”
서은은 몇 시간 전 주혁을 향해 독기 가득히 뱉었던 말들을 떠올린다. 다시 미안함이 몰려오는데, 주혁이 서은의 손을 가져가 목을 두르게하곤, 상체를 내려 거리를 가까이 했다. 밝은 눈동자에 서은이 담겼다. 힘을 풀고 느른하게 내린 눈이었지만, 시선을 뚫고 상대를 헤집어 놓는 기세는 변함이 없다.
“앞으로도 그렇게 휘둘러 줘. 목줄을 쥐여 준 건 나니까.”
“…….”
“말라 죽지 않게 가끔씩 먹이 한 번 먹여 주고 쓰다듬어 주면 돼.”
“......이렇게?”
서은이 순식간 다리를 감아 주혁에 허리에 둘러 주혁의 것을 당겨 온다. 짧은 순간 주혁의 입술을 흡입하다 풀어 주었다. 서은이 순한 얼굴로 약게 굴 때마다 주혁의 심장은 사납게 박동을 한다.
큰일이지.
“내 성향이 M이었다니.”
한 박자 느리게 말을 이해한 서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서야 주혁도 미소를 지었다.
주혁이 서은의 몸 위로 몸을 겹쳤다. 서은은 그 묵직한 온기에 매섭고 날 선 마음들이 한순간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깊은 눈으로 서은을 들여다보다 대뜸 말하였다.
“난 네 살이 좋아.”
순수하고 노골적인 고백이었다.
“네 머리카락도 좋고.”
"……."
“네 뺨도 좋고 귀도 좋아.”
주혁은 머리카락, 뺨, 귀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네 목도.”
이번엔 깨문다.
“네가 없을 때 가끔씩 떠오르는데.”
"……."
“그게 미치게 좋아.”
서은의 가슴이 검게 타올랐다.
“내가 좋아요?”
“어.”
그는 응, 이라 하지 않고 어, 라고 했다.
“왜?”
“몰라.”
주혁은 다소 무뚝뚝하게 답하였다. 서은은 주혁이 그 이유를 몰라서 좋았다. 예뻐서, 착해서, 다정해서, 그런 이유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이유를 모르는 사랑은 우리가 운명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진실로 우리가 운명이면 좋겠다. 그래서 쉽게 잊히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다.
“계속 반말해 줘. 네가 하는 존댓말은 선 긋는 거 같아서 싫어.”
말을 하고 주혁은 서은의 심장 부근에 입술을 내렸다. 다시 고개를 들고 서은의 뺨을 쓴다.
“서은아.”
“......응, 주혁아.”
주혁이 키들 웃었다. 서은도 순간 웃음이 나왔다. 울다 웃어 바보 같은 얼굴이 되었을 것이다. 어느 땐 사나운 맹수 같은 남자가 때때로 한없이 고분고분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기분이 좋아서. 습관처럼 웃음이 나와서. 그러나 다시 또 눈물이 핑 돌았다. 서은은 이렇게 못됐는데.
“서은아.”
“…….”
“서은아.”
서은이 답을 않자 주혁은 참을성 있게 다시 그녀를 불렀다.
“네.”
주혁이 피식 웃었다.
“약속 좀 지켜 줘.”
“…….”
“사람이 이렇게 신용이 없어서야.”
“내 마음인데.”
새침하게 답하니 주혁이 다시 또 웃는다.
“네가 그랬지. 싫증이 나면 말해달라고. 그럼 그때 끝내겠다고.”
"……."
“약속 지켜 줘. 난 아직 아니거든.”
“......싫증은 언제 나는 건데?”
“글쎄. 애 셋 낳고 손주를 열 명쯤 보면 날 것 같기도?”
서은은 눈물이 매달린 눈으로 웃음을 흘렸다. 주혁도 함께 웃었다.
“나, 아무것도 안 들려.”
서은은 그의 앞에서 그토록 숨겨왔던 그녀의 장애를 인정했다.
“알아”
“지금 당신이 말하는 것도 안 들려.”
“괜찮아.”
“왜?”
“너는 그래도 정서은이니까.”
소리 없는 음성이 내밀한 상처를 어루만진다. 한 문장의 말에 어설픈 설명과 위로가 없어 좋았다. 장황하지 않아 좋았다. 그저, 당연하다는 말이었으니까.
나는 그래도 정서은이고, 당신은 그래도 서주혁이고.
“나는 여전히 정서은에 환장한 미친놈이고.”
맥없이 또 웃음이 나와 버렸다. 희미하게 웃는 서은의 눈 끝에 눈물방울이 맺힌다. 서은은 주먹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눈물을 털어 냈다.
“고마워요. 들리지 않는데 그게 그래서 뭐, 라고 해 줘서 고마워.”
문지르는 서은의 손을 주혁이 잡아 내렸다. 대신 주혁의 엄지가 서은의 눈 끝을 쓸었다.
서은은 매 순간 궁금했다. 주혁이 서은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어떠할까. 서은아, 하고 말하는 얼굴이 매번 다정해서. 꿀에 젖은 듯 달고 심장의 고동처럼 낮은 음성을 상상하지만, 욕심의 범위는 늘 상상의 한계치를 넘어섰다.
결국 매 순간 드는 호기심은 서은의 결핍을 상기시켜 주혁의 다정에 마냥 기뻐하지 못하였다. 아마 주혁을 만나는 동안은 계속 그럴 것이다. 어쩌면 평생을 그럴지도 모른다. 평생이 무성 영화인 삶이었다. 그 삶에서 소리를 바라는 건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궁금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리석게도, 기어코.
그러나 이제 멈출 수 없음을 안다.
어차피 멈추지 못하는 마음이라면,
기꺼이 내달리고 싶다.
숨 막히게 가쁜 순간들을 기꺼이 감당하고 싶다.
끝에는 탈진해 쓰러질지언정 지금은 이 질주를 스스로는 도저히 멈추지 못하겠다.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책, 알아요?”
서은이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주혁은 습관처럼 짧게 키스를 했다. 그런 주혁을 뒤로 밀어 내고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거기에 그런 말이 나와.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데, 여자는 자신을 부르는 그 목소리의 온도를 좋아했다고.”
"……."
“온도니 뭐니 그런 건 몰라도 난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를 때가 좋아. 그 느낌이 좋아.”
주혁의 손이 서은의 몸을 쓸어내렸다. 등과 엉덩이를 타고 내려가는 부드러운 손짓이 다시 욕망에 불을지핀다.
"들리진 않아도 느끼고 싶어.”
몸을 숙이니 주혁이 당연하게 입술을 열었다. 따듯한 숨이 나온다. 그 숨을 삼키고 입술을 덮었다. 사타구니 사이로 뜨거운 것을 끼워 움직였다. 안달이 난 주혁이 한순간 자신의 것을 서은의 몸에 넣었다. 신음이 나오며 얼굴을 찡그렸다. 주혁이 몸을 일으켰다. 마주 보며 함께 몸을 움직였다.
아, 좋아. 거기. 뜨거워. 기분 좋아. 하아.
쾌락에 절박한 눈빛으로 흐트러져 하는 말들의 주인을 가늠할 수 없다. 생각에 있던 것을 음성으로 뱉었는지도 알 수 없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다른 감각들이 서은의 세상을 빈틈없이 채워 온다.
웃고, 찡그리고, 다시 또 웃음을 흘리고, 신음을 흘리고, 시야도 정신도 흐릿해지는 와중에 오직 서로의 존재만이 명확하였다.
* * * * *
어스름이 걷히는 아침에 주혁을 배웅했다. 밤새 서로의 몸을 탐한 탓에 몹시 피곤했지만 주혁이 차에 오를 때까지 서은은 그의 곁을 졸졸 따랐다. 일자로 뻗어 노곤한 남자의 눈이 서은을 향할 때면 서은은 입매를 끌어 올려 방긋 웃었다. 차에 오르기 전 그는 서은에게 키스를 했다. 새벽까지 그를 받았던 몸이 버릇처럼 뜨거워지지만 서은은 홀로 욕망을 갈무리했다.
긴 입맞춤이 끝났을 때 주혁은 ‘연락할게.’라고 했다. 그 네 글자는 주문이 되어 주혁이 없는 동안에도 서은이 서주혁을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예감하며 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앞으로 나아가며 공기가 밀려온다. 한 덩이의 공기가 새벽바람과 섞여 부웅, 코트 자락이 날렸다. 세상의 가벼운 것들이 함께 날렸다. 담벼락 위에 앉아 있던 고양이는 허리를 잔뜩 늘어뜨리다가 서은과 눈이 마주치자 몸을 돌렸다. 넘어질 듯 말 듯 어정쩡한 속도로 담벼락 위를 달리다 금세 담을 넘어 모습을 감춘다.
그 푸르고 고요한 아침이 새삼스러워 서은은 목을 긁었다.
마냥 차기만 했던 바람에선 미약하지만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봄은 왔고 서은은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밤새 헐떡이며 호흡을 섞었지만 순간은 현재일 뿐,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서은의 모든 걸 내보였음에도 관계는 여전히 막막하고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위태롭다.
우리의 사랑은 모든 ‘부’의 집합들이지만,
그럼에도
사랑이었다.
서은은 오직 그 사실만 생각하였다.
* * * * *
태일이 홍 실장을 불렀다. 집안에 한바탕 태풍이 지나간 후였다. 듣기로 선미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 한다. 못난 자식 기 살려 주고 싶어 그런 일을 벌였다고. 절대 승혁의 것을 넘보는 게 아니다 변명을 늘어놓았다 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돌아선 태일이다. 석현은 퇴사하는 것으로, 선미는 집을 나가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주혁이 혼담, 자네가 진행해 줬으면 좋겠는데.”
차를 마시던 홍 실장은 잠시 멈칫했다.
“집에 안사람이 없어 이런 일을 부탁할 사람이 자네밖에 없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홍 실장은 다만 이 시점에 그 화제가 나올 줄 몰랐을 뿐이다.
“더 늦기 전에 주혁이 보내야지. 내 몸도 예전 같지 않고, 주혁이 자식 낳는 것까지는 보고 가고 싶은데, 얼마나 남았을지.”
“아직 정정하십니다, 회장님.”
홍 실장의 감언에 태일은 싱거이 웃었다.
“주혁이 처는 집안의 명예니 돈이니 그런 것보다, 남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흠 없이, 화목한 가정에 사랑받고 자란 여식으로...... 밝은 여자면 좋겠다고 줄곧 생각했어.”
일이 터지기 전 태일이 주혁의 혼처를 알아보고 있다는 말을 듣긴 하였지만 아직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었다. 그런 혼처가 어디일까 생각하며 홍 실장은 태일과 시선을 마주했다.
“호텔 캐슬이야. 고맙게도, 먼저 연락이 왔군.”
캐슬이라면 태일의 오랜 벗인 기상목을 회장으로 둔 곳이다. 그 집에 손녀가 하나 있다 했다. 집안의 명예와 재력을 바라지 않았다는 태일의 말치고 상당한 재력가였다.
“집안의 재력은 중요치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 자리라면 주혁이 제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 형제간 아귀다툼을 벌일 리도 없고.”
짧은 시간 홍 실장은 태일의 본의를 판단하기 위해 궁리했다. 주혁에게 캐슬을 안겨 주려는 목적이 형제간 갈등의 방지에 있는 건지, 승혁에게 위협이 되는 주혁을 내치는 데 있는 건지. 둘 다일지도.
하지만 그런 것들을 다 제쳐 두고, 주혁의 결혼엔 보다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여느 재벌가 회장답지 않게 인간적인 면이 많은 태일은 사람에게 사람을 붙여 보고를 받거나 뒷조사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인간에 대한 예의를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태일이었다.
상도를 지키는 그의 경영 방식에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이들도 많고 언론이나 대중 역시 무척 호의적이었다. 자잘한 실패를 반복하며 성공한 경영인의 길을 걸어온 그가 진실로 실패한 것은 오직 자식 교육이다.
그런 태일이기에 홍 실장도 태일에게 말하지 않았다. 뒷조사라면 뒷조사일 테지만, 회사 로열의 비서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게 술, 도박, 여자 등등의 스캔들이다. 스캔들 방지 차원에서 이런 정도의 조사는 공공연히 행해지는 것이고 묵인되는 거였다.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감히 로열의 뒤를 조사했으니, 홍 실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회장님, 상무님 만나는 사람 있으신 것 같습니다.”
태일의 시선이 홍 실장을 향한다.
“가정이야, 확신이야?”
“......사실입니다. 홍은동 자택에서 같이 지내십니다.”
홍 실장을 응시하던 태일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자네, 알고 있군.”
사람 속을 귀신처럼 읽는 태일이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자네야, 비서의 본분을 다한 것일 테지. 그래, 어디까지 알고 있어?”
홍 실장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무엇부터 말해야 하나.
태일이 요구한 ‘남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흠 없이 화목한 가정에 사랑받고 자란 여식’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평균보다 못하는 경제 수준에, 과거 연희동에서 일한 적이 있는 아비의 딸.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서정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하다 최근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을 시작했고...... 그리고, 청각 장애인.
그저 상무의 짧은 일탈이거니 했다. 성인 남자가 연애야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거니까. 돈 많고 잘생긴 남자가 인기 많은 건 동서고금 불변의 법칙이고, 상무도 자신의 그런 점을 이용하지 않을 만큼 바보거나 금욕주의자는 아닐 거였다.
그런데 상무가 여의도가 아닌 홍은동에서 매일 출퇴근을 할 땐 어라,했다. 연애를 했어도 늘 우선순위는 서정이 먼저인 상무였으니까. 상무가 출장 일정 중에도 틈틈이 핸드폰을 확인하고 회의 도중 잠시 다른 생각으로 유하게 웃는 그런 모습을 볼 때는 아차, 했다. 후에 여자가 장애인이라는 걸 알았을 때 홍 실장은 이런, 싶었다. 그건 좀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연애라면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러나 결혼은 분명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상무도 완전히 정신 줄을 놓은 게 아니라면 정리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홍 실장은 어딘가 불안했다. 이번은 다른 것들과 무언가 다르다고. 일탈의 범위가 점점 제어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홍 실장.”
이상한 느낌이 있다면, 그 느낌까지 태일에게 말하는 것이 홍 실장의 일일 것이다. 판단은 태일의 몫이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 * * * *
고작 이 정도로 주주들을 만족시킬 성싶어? 고작 이 정도를 보여 주기 위해 서재형 부사장을 내치고 곧 상무보 달았을 석현일 내친 거야?
태일의 고요한 책망에 한순간 회의장이 얼어붙었다. 회의장을 나오고 그의 집무실에 들어서서도 태일의 일갈은 쟁강대며 뇌중을 서늘하게 했다. 고위 임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주혁에 대한 비판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는 태일이다.
주혁을 겨냥한 것이다. 흠을 잡기 위함일 테지. 주혁은 눈가를 눌렀다. 눈이 피로를 호소했다.
정기 주총을 앞두고 일이 몰렸다. 지난해 하반기 실적 하락을 설명하기 위한 자료들을 만들고 검토하고, 혁신을 원하는 시장을 설득시킬 서 정만의 무기를 만들어야 했다. 가족간의 아귀다툼으로 인해 언론의 비난을 산 게 엊그제다. 이번 주총은 어느 해보다 많은 주주들이 몰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여 오랜 시간 준비한 자료였다. 그러나 태일의 마음에 들지 못했고. 결국 모든 걸 뒤집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시 기획팀원들을 불렀다. 점심을 거르고 줄회의가 이어졌다. 와중에 올 초 출시된 신제품과 관련해 미국에서 특허 분쟁이 터졌다. 이미 재작년 한차례 특허전을 벌였고 패배했던 상대다. 또 같은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없었다.
다급히 TF팀을 꾸리기 위해 서정의 인사 시스템을 뒤졌다. 서정 자문 로펌의 변호사들과 긴급회의를 하고 회의 후엔 천안의 공장에 시찰을 갔다. 언론에 내보낼 사진을 찍고 공장의 사람들과 미 팅 겸 회식을 했다. 계산 섞인 찬사와 진심 담긴 불만을 들으며 고기를 씹었다.
다시 여의도로 돌아왔을 때엔 깊은 밤이었다. 법무팀에서 올라온 자료를 검토하고 이앤장의 변리사가 보낸 미국 PP 사의 제품과 서정의 제품 비교 자료를 확인했다. 손목이 아프고 목이 뻐근하여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믹스커피 한 잔을 타고 창가로 가 블라인드를 올렸다. 전면 유리창이 드러나고,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까만 밤의 하늘이 덮치듯 그의 시야를 꽉 채웠다. 시선을 내려 색색의 빛을 내는 도시를 보지만 특별한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빠르게 컵을 비우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헤드헌팅사업본부장이 보낸 인사 자료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TF팀 명단을 작성할 때, 핸드폰이 울렸다.
[나 데리러 와요.]
그에게 이토록 오만한 문자를 보낼 수 있는 이는 세상에 단 하나였다.
* * * * *
“와아. 이거 봐, 엄청 넓어. 건물들이 레고 조각 같아.”
서은은 즐거워 보였다. 파노라믹뷰의 밤이 보이는 창가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좌측의 끝에서 우측의 끝까지, 위로, 아래로 시선을 옮겨 가며 나비가 날아다니듯 움직였다. 서은이 움직일 때마다 펄럭이는 치맛자락은 나비의 날갯짓 같았다.
서은의 문자를 받고 서교동의 화실에 갔을 때 서은은 술기운이 잔뜩 오른 상태였다. 깊은 밤, 서은은 몽롱한 눈을 하고 무릎을 굽혀 상가 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런 서은을 보았을 때 불쑥 불쾌감이 엄습했지만 화내지 않고 서은을 부축했다.
‘왜 이렇게 다정해, 당신. 다른 사람한텐 이러면 안 돼.’
말하는 서은의 볼을 살짝 꼬집었을 뿐이다.
조수석에 앉아서도 서은은 내내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거기 사람들이 막 맛있는 거 만들어 주겠다고 이것저것 섞어서 술을 만들었는데. 도수가 그렇게 센지 몰랐지. 그래도 맛있었어요. 안주도 맛있었구, 술이 술술 들어갔어. 아. 술술 들어가서 이름이 술인 건가?’
애인을 두고 다른 사람들과 마신 술이 그렇게 맛있었냐는 질문이 불만스레 솟았다. 신호등에 걸려 차가 멈추었을 때 고개를 돌려 서은을 보았다. 표정 없이 바라보는 시선에 주눅이 들었는지 서은은 눈길을 창으로 돌려 버렸다.
어이가 없었다. 괜한 말 들어 가며 혼나기 싫다는 명확한 의사 표시였다.
다시 페달을 밟았다.
돌연 서은이 물었다.
‘하늘공원에 가 본 적 있어요?’
‘아니.’
‘......가고 싶어.’
차를 돌렸다.
상암동의 하늘 공원에 도착했지만 입장 시간이 마감돼 들어갈 수 없었다. 서은은 아쉬워했다. 축 처진 눈꼬리가 강아지의 것과 비슷했다. 그 눈 끝을 문지르며 이곳에 오고 싶어한 이유를 물었다. 하늘이 보고 싶어서, 라는 엉뚱한 답이 따라왔다.
‘내가 더 높은 하늘을 보여 줄게.’
그리고 서은을 데리고온 곳이 잠실의 호텔이었다.
건물은 주위의 경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홀로 우뚝 서 있었다. 그 호텔의 가장 높은 층 룸을 잡았다.
룸에 들어섰을 때, 넓게 시야를 채우는 밤의 전경에 서은은 아이처럼 좋아하며 감탄을 했다. 밤을 배경으로 서은은 해사하게 웃었다. 웃으며 고마워, 말하였다. 켜켜이 쌓였던 피로가 한순간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감상하며 주혁은 벨보이가 테이블 위에 세팅한 와인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서은은 창가에 붙어 쭉 이어진 의자 높이의 대리석에 다리를 올려 앉았다. 서은의 밑으로 도시의 정경이 아스라이 펼쳐졌다. 저 먼 땅에선 수많은 빛이 번쩍대지만, 밤하늘은 높고 멀고 광활하여 빛 한 줄기 닿지 않는다.
시선을 내렸다. 장난감처럼 오밀조밀한 건물들을 바라보자니 비행기를 타는 기분도 들었다. 조금 어지럽고 막막하지만 속수무책의 흥분감이 가슴속에 차오른다.
가만 앉아 하늘과 도시를 구경하는데, 멀찍이 떨어져 서은을 관찰하던 주혁이 와인 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느긋한 걸음걸이에 신경을 빼앗겨 일순 상념이 끊긴다. 주혁의 인영이 가까워졌을 때 서은도 고개를 돌렸다.
주혁이 손가락으로 빗질하듯 서은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상체를 숙여 왔다. 입술이 가까워지고 서은은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주혁은 간질이듯 입술을 훑고 빨다가 혀를 들이민다. 밀려오는 남자의 숨과 혀를 당연하게 들이마셨다. 쌉싸름한 와인 향이 입안에 퍼진다.
주혁의 혀는 부드럽게 서은의 입안을 탐하였다. 감각이 한 부위로 집중되며 서은은 스스로의 몸이 점차 수면 아래 잠기는 느낌을 받았다. 머리칼을 넘기던 손이 서은의 턱을 잡아 내리며 입술을 더 벌렸다. 혀는 더욱 깊숙이 들어와 숨겨진 곳곳을 비비고 끈적한 타액을 맛본다.
턱을 벌렸던 주혁의 손이 더 밑으로 내려가며 서은의 옷 사이를 파고 들었다. 차가운 손이 가슴의 정점을 비볐다. 맞댄 입술의 틈으로 신음이 비져나왔다. 그러자 주혁이 정점을 문지르며 가슴을 주무른다. 신음이 한층 진해졌다.
혀와 손의 움직임을 따라 단단히 뭉쳐 있던 것들이 무르게 변하고, 마침내 기화되어 몸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증기가 오를 때.
주혁이 몸을 일으키며 멀어졌다.
그가 물었다.
“좋아?”
설마 키스의 소감을 묻는 건가 싶어 몽롱했던 눈을 동그랗게 했다. 주혁이 피식 웃으며 턱짓으로 창가를 가리켰다.
“하늘.”
서은은 허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주혁 씨는?”
“나도 좋아.”
말하며 주혁이 다시 서은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남자의 나른한 눈길과 머리를 넘기는 손길에 졸음이 몰려왔다. 서은은 주혁의 허리를 안아 배에 얼굴을 비비며 잠을 쫓아냈다. 이토록 아름다운 밤과 다정한 남자를 두고 일찍 잠드는 게 너무 아까웠다.
“춤추고 싶어.”
별안간 서은이 몸을 일으켰다. 잠시 휘청이던 서은의 몸을 주혁이 잡아 주었다. 그 손을 잡고 허밍을 하며 창가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규칙 없이 흐르는 허밍과 서은의 어설픈 몸짓에 맞추어 주혁도 몸을 움직였다.
실은 근사한 노래를 부르고 싶었는데, 노래를 들은 게 너무도 오래전이라 음이 기억나는 노래가 없다.
허밍을 멈추고 고개를 올려 물었다.
“내 목소리 어때요?”
“예뻐.”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해 줘요.”
“햇살 같아. 물방울 같아. 천사 같아. 구름 같아.”
“그게 뭐야. 귀찮아서 대충 답한 거죠?”
“진짠데.”
주혁이 다소 난처하게 웃는다. 남자를 골리는 재미가 좋아 서은도 피식 웃었다. 주혁의 가슴에 고개를 기댔다. 소리 없이 심장의 박동이 전달된다. 따듯하고 생생한 감각이다. 고개를 돌리면 창밖으로 아득한 하늘이 여전하다. 그 위로 겹치는 실루엣은 하늘 위에 서 있는 연인의 그림이었다. 세상에 이 높이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서은과 주혁, 둘뿐일 것이다.
서은의 상념을 쫓아내듯 주혁이 서은의 허리에 팔을 감아 안았다. 얼굴은 서은의 목에 묻으며 눈을 감는다. 서은은 그녀의 목덜미에 묵직이 전해 오는 남자의 무게감과 온도가 나쁘지 않았다. 주혁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감기고, 주혁은 기분이 좋은지 서은의 어깨에 뜨겁고 습한 숨을 뱉었다.
그 숨을 타고 야릇한 감각이 번져 오른다. 서은은 괜스레 유리창에 시선을 주었다.
“신기해. 이렇게 높은 곳에서도 하늘은 더 높아 보여. 감히 닿는 건 꿈도 못 꿀 만큼.”
주혁이 서은의 얼굴을 떼 내고 눈을 맞춰 왔다.
“하늘에 닿고 싶었어?”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높은 곳에 오르고 올라도 결국 닿지 못할 것을 안다. 하늘이 손에 잡히는 일은 없겠지. 서은이 소박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
“내 애인은 욕심도 없으시고.”
주혁은 입가에 미소를 띠웠는데 묘하게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난 싫어. 어차피 일생 지겹게 볼 거, 재미를 위해서라도 꿈을 꿔야지. 이왕이면 큰 꿈. 보다가 결국은 닿고 싶다는 생각을 할 거야.”
“......그러다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타 버리면?”
“네 애인이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아.”
주혁이 순식간 서은을 안아 들었다. 서은은 어어, 하며 버둥대다가 이내 얌전해진다. 창을 마주한 너른 소파에 서은을 앉히고 양손을 벌려 서은의 옆을 짚었다. 하늘의 주인처럼 밤을 배경으로 주혁은 빙글 웃고 있었다. 남자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요즘 기분 좋아 보여.”
“맞아.”
주혁은 서은의 손가락을 끌어다 입술을 맞댔다.
“널 보면 웃음이 나.”
“......내가 술을 잔뜩 마셔도?”
“어.”
“한밤중에 막 불러내도?”
“어.”
“이렇게 술주정 부리는데도?”
“좋아.”
서은의 입매 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서은의 손등을 잡아 또 입술을 올린다.
“네가 결국 나를 선택해서, 아주 기분이 좋아.”
이번엔 뺨에, 이마에.
“너는?”
입맞춤을 끝내고 시선이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남자의 눈빛은 야생동물의 눈처럼 육욕적이며 소년의 기대감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그 남자의 목에 팔을 두르며 답했다.
“나도 좋아.”
마침내 답을 듣고 주혁은 힘주어 서은을 끌어안았다.
원하는 답이었음에도 주혁은 어딘가 부족하다. 해갈되지 않는 갈증을 느끼며 그는 몸을 돌려 서은을 무릎 위에 앉혔다. 서은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꾸밈없이 무구한 눈빛을 마주하며 주혁은 다시 또 못마땅해진다. 주혁은 그런 서은을 재촉하고 싶었다. 좀 더 나를 갈망해 달라, 보채고 싶었다. 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는 소박한 정서은에게 욕심을 심어 주고 싶었다. 자신의 것과 똑같은 종류와 크기의 욕심을.
나를 마음껏 원하고, 마음껏 헤집어 주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로지 나만 느끼고 나만 생각하고 나에게만 몰입하게 만들고 싶어.
이 그지없이 비열하고 불순한 욕망을 내보이면 너는 경악을 할 테지.
겁을 먹어 도망가지 않도록, 대신 주혁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착하고 순진한 아가씨는 그의 속도 모르고 따라 웃어 준다.
주혁이 서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목에 입술을 대며 브래지어의 후크를 푸르고 뱃속을 간질이며 상의를 벗겨 낸다. 바닥에 툭툭, 옷가지가 떨어지고 서은은 곧 나체가 되었다. 나신이 된 하얀 몸이 뒤의 검은 밤하늘과 대조되어 더욱 해말갛다.
환시의 밤이다. 홀리는 기분을 만끽하며 주혁은 입을 열었다.
“밤의 여왕이 여기 계셨군요?”
“......여왕치고 너무 야한 거 아닌가?”
“그래서 더 흥분돼.”
결국 미천한 하인은, 매번 속절없이 당하고 말지.
서은의 가슴을 입에 물며 벨트를 풀었다. 솟아 있는 정점을 혀로 간질이며 바지를 대충 내렸다. 젖가슴을 강하게 물고 빨 때마다 서은의 몸이 부들 떨었다. 그 몸을 끌어당겼다. 얼굴에 닿는 맨살의 느낌이 황홀하였다. 혀로는 유두를, 한 손으론 서은의 아래를 자극하자 서은이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주혁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 어설픈 힘의 압박이 남자의 흥분을 더욱 자극했다.
“으응.......”
서은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몸을 들썩인다. 주혁도 서은의 체취를 흠뻑 들이마시며 하체를 움직였다. 이미 아래는 미끌대고 번들거렸다. 주혁의 아직 벗지 못한 속옷의 천이 축축이 젖었지만 누구의 분비물로 인한 것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주혁이 더욱 힘을 주며 서은을 당겨 왔다. 서은의 살갗에 남자의 옷이 닿는다. 능란하게 움직이는 혀와 손을 따라 열이 올랐다. 부드럽게 서은의 아래를 왕복하던 그것은 점차 속도가 빨라졌다. 서은을 당기는 남자의 힘도 더욱 거세졌다. 잔뜩 밀착된 채 비벼지는 그것의 느낌은 뜨겁고 축축했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서은이 주혁의 이름을 부를 때, 마침내 주혁이 재빠르게 자신의 속옷을 내렸다. 흉흉하게 선 것이 모습을 보이기 무섭게 순식간 서은의 안으로 들어왔다. 애타게 갈망하듯 자신의 것을 문질렀던 주혁은 정작 들어오고선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은의 잇새로 얕은 숨이 새 나왔다. 서은의 안에서 울컥이며 크기를 더욱 키우는 느낌이 전해졌다.
주혁이 서은과 눈을 맞추었다. 가슴을 뜨겁게 한 술기운이 아래로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서은이 먼저 허리를 움직였다? 허리를 빙 돌리기도 하고 쿵쿵, 약하게 찧기도 했다. 주혁은 그 광경을 황홀하다는 듯 풀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혁의 입술 사이론 뜨거운 숨이 연신 흘렀다.
주혁이 다시 서은의 유두를 물고 혀로 희롱하듯 움직였다. 아응, 쾌감에 서은은 눈을 감고 고개를 기댔다. 그러면서도 허리 짓은 멈추지 못하였다. 주혁도 점차 서은의 속도에 맞춰 온다. 맛을 음미하듯 느리게, 느리게 움직였다.
격렬하지 않아 더 아찔하고 느른하여 더 흥분되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섹스였다.
하늘은 검은 장막처럼 그들을 휘감았다.
* * * * *
서은은 기실 밤의 여왕이 된 기분으로 서울 곳곳을 누볐다. 주혁은 매번 밤늦게 들어와 서은을 깨워 차에 태웠다. 처음에 일었던 잠투정도 어느 순간 습관이 되어 아무렇지 않아졌다. 차도 인적도 없는 고요한 밤의 도시를 둘이 함께 손을 잡고 걸었다. 커다랗고 텅 빈 거리가 좋았다.
오직 남자의 손을 잡고 서울의 밤을 걸었을 뿐인데, 신기한 일들이 펼쳐졌다. 그 넓은 도로와 높다란 건물들이, 검은 숲과 강과 하늘이, 도시의 빛과 마천루가 그리는 풍경들이 모두 서은의 것이 된 기분이었다.
이제 서은은 주혁의 입술에 집중하지 않는다. 드라이브를 할 때면 창밖 세상을 구경했다. 빈티지 펍에서는 오직 맥주의 맛과 향을 느꼈다. 계절의 감각과 어긋난 눈이 내릴 땐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서 하늘을 올려 보았다.
어느 순간 정신을 다잡고 시선을 옮기면 그곳엔 늘 주혁이 있었다. 귀가 들리지 않아 시선이 붙들려야 하는 건 서은인데, 주혁의 시선이야말로 늘 서은에게 붙박여 있다. 시선이 맞물리면 주혁은 눈매를 휘어 웃음을 짓는다. 홍채와 동공의 경계가 뚜렷해서 더 빛이 나는 눈동자는 한밤에도 아름다웠다.
손을 잡고 남자의 몸을 껴안아 키스를 했다. 광화문의 거리, 반포의 한강, 북악의 팔각정, 봉은사의 연등, 청계천의 돌길, 혜화의 마로니에와 낙산의 돌계단. 그 모든 것들이 그 순간만큼은 오직 서은과 주혁을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필사적으로 시간을 멈추게 하고 싶은 순간이면서, 가슴 벅차게 그다음을 기대하도록 만드는 순간이었다.
나를 잊고 너와 부유하는 시간들. 훗날 이 들끓는 사랑이 식는다 해도 이 순간의 기억들을 함께 추억할 이가 있다면, 서로의 존재가 익숙해져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되어도 그 사람과 함께라면, 그 순간들은 언제든 되살아나 현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소리 없이 홍은동의 벽돌 길을 걷는 이 순간도 분명히.
새삼스레 환상 같은 밤이다. 놓치고 싶지 않아 서은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돌연 주혁이 걸음을 멈추었다. 너무도 수월히 서은에게 잡힌 손을 빼낸다. 허무하게 온기를 뺏긴 서은은 얼결 고개를 들었다. 빼앗긴 손이 서은의 목덜미를 당겼다. 남자가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추었다. 혀는 달고 축축했다.
밤은 까맣고 달은 보이지 않아 세상의 주인은 서은과 주혁, 둘인 듯했다.
* * * * *
그 밤 꿈에 주혁이 나왔다.
꿈에서 서은은 주혁의 목소리를 들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근사하여 서은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기쁜 마음에 서은은 이 사람이 내 남자 친구라고 온 동네에 자랑을 하며 뛰어다녔다.
어느 누구 하나 서은을 막지 않았다. 어느 무엇 하나 서은을 막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