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뿌리 깊은
주혁은 몹시 피곤했다. 정치 문제로 인한 중국의 보이지 않는 경제 제재로 골치 아픈 일들이 생겼다. 중국 정부 측에서 허베이성에 짓기로 한 공장을 걸고넘어졌다. 착공에 들어간 지 삼 개월이 지났는데, 뒤늦게 계약서의 조항들을 문제 삼고 공장의 구조와 설비에 시비를 걸고 들어왔다. 회의는 지루하고 생각보다 끈질겼다. 그 회의를 마치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서울로 돌아온 게 두 시간 전의 일이다.
해외 출장을 마치면 늘 연희동 본가에 들렀다. 태일은 승혁과 주혁이 외국에서 돌아올 때면 타지에서 고생한 손자 뜨끈한 밥 한 끼 든든하게 챙겨 먹이도록 했다. 무척 피로했지만 그렇게만이라도 손주를 챙기고 싶다는 조부의 마음을 거스르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연희동에 도착했을 때 철문 앞, 선미가 그를 마중 나와 있었다. 아마 처음일 것이다. 그녀가 그를 마중 나온 것은. 주혁은 딱딱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어요?”
선미의 눈이 퍼렇게 빛난다.
“너는 뭐가 그렇게 떳떳해.”
선미는 이를 씹으며 말했다.
짜증스럽군. 선미를 내려 보며 생각했다. 피로가 몰려온다. 이런 신파를 견뎌야 한다니, 그게 주혁의 업보라면 주혁은 묵묵히 들어 주기로 한다.
너른 식탁에 홀로 앉아 밥을 먹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뜨거운 것이 때때로 역류하듯 올라왔지만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네가 뭔데. 네가 감히 우릴 욕할 자격이 있어?
씹고 삼키고 마시는 것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고 음식을 입에 넣었다.
하! 네가 내 것, 남의 것 운운하는 게 웃기는구나. 이미 네 애미가 널 낳을 때부터 이 집안에서 니들 것은 사라진 거야. 자격을 잃은 지가 언젠데 이제 와 소유를 따져? 그래. 죽은 네 엄마도 웃기는 인간이지. 겉으로는 우아한 척 착한 척 온갖 척은 다 하면서 나랑 서재형보다 더 더러운 인간이야.
얘. 내가 아무리 남의 것 욕심낼지라도 최소한의 상도덕은 지켜. 어디 남편 동생이랑. 그런 주제에 남의 것? 그 더러운 피가 흐르는 채로 네가 그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댈 때마다 내가 속으로 얼마나 우스웠는지 알아?
“집에 반찬 떨어질 때 됐지? 반찬 몇 개 싸 줄 테니까 갖고 갈래? 김나물무침 했는데 회장님이 참 좋아하시더라. 네 입맛에도 맞을 거야. 회장님이랑 입맛 똑같잖아.”
너른 식탁 위로 최 씨의 목소리가 재깔재깔 울렸다. 손이 큰 최 씨는 반찬 통을 꺼 내 한가득 반찬을 담았다.
구걸했다지? 바로 여기에서. 서재하의 애인이랑 너랑 돈이 떨어지면 찾아와 여기에 무릎 꿇고 빌며 구걸했다며. 최난영 그 여자가 병들어 죽은 이유가 나 때문인 것 같아? 거기에 네 죄는 없는 것 같아? 아니, 최난영 그 여자 본인의 죄지. 자업자득! 그런 주제에 그따위 명분을 내세워? 더러운 년놈들.
상처를 주기 위한 말들에 상처를 입는 건 무용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 것들엔 이미 무뎌졌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한동안 목적을 다하기 위해 그의 머릿속을 맴돌 것이다.
착한 척하지 마. 너나 나나 똑같아. 결국엔 네 형도 네가 내칠 거잖아? 네 형을 지킨다는 건 핑계고 결국 원하는 건 돈이고 회사잖아. 그러지 않고서야 네가 이럴 이유가 뭐가 있어? 지 거둬 준 큰아버지도 버린놈이.
주혁은 마지막으로 물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책을 향해 있던 시선이 주혁에게 향했다. 돋보기안경 너머 태일의 눈은 조금 무심한 듯도 조금 피로한 듯도 했다. 말이 없는 태일은 눈빛마저 과묵해서 어릴 적엔 그 시선이 무서웠다. 고요히 그를 살피는 시선에 어린 가슴이 뜨끔거렸다.
“그래. 눈 오니 조심히 가.”
“예.”
“따숩게 입고 다녀.”
“예.”
태일은 잠시 말을 끊고 오래전 주혁의 가슴을 뜨끔하게 했던 그 눈으로 주혁을 살폈다. 그리고 느리게 입을 연다.
“너무, 독하게 굴진 말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철문을 나오는 얼굴이 홧홧했다.
염치라는 것이 주혁의 마음을 찔러 댔다.
태일의 그 말은 고요한 경고처럼 가슴에 박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욕해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태일의 경고는 그의 얼굴을 뜨겁게 했다.
주혁에게 난영이 커다란 나무였다면 태일은 높은 하늘이었다. 늘 올려다볼 수밖에 없으며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존재. 그럼에도 동경해 마지않는. 아버지가 없는 주혁에게 아버지 역할을 해 준 것도 태일이었다. 무뚝뚝하고 때론 무서웠을지언정 그의 손자이고 싶었다.
언젠가, 이용 가치가 다한 주혁을 결국 태일이 놓는다면, 그는 내쳐져야 할 것이다. 그래도, 그때에도 그는 태일의 손자로 남고 싶었다. 더러운 피일지라도 그는 재하의 아들이고, 반쪽짜리일지언정 그는 승혁의 동생이니까. 그러기로 하였으니까.
다시, 쏟아지듯 피로가 몰려왔다.
* * * * *
기억 속에 재하는 신경질적이고 불안정했다. 한때 가수를 꿈꾸기도 했다지만 주혁이 기억하는 재하는 어느 가게의 이름 없는 밤무대 가수일 뿐이었다. 새벽이 지나 동이 틀 무렵 들어왔고 오후가 되면 눈을 떠 다시 집을 나갔다.
어느 날엔가부터 재하는 더 이상집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못 보던 여자가 그들의 집에 들어왔다. 역한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여자는 호들갑을 떨며 주혁을 안았다. 재하와 같은 곳에서 일한다는 그녀는 자신을 엄마라 부르라 했다.
여자가 들어온 순간부터 재하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했다는 듯 더 이상 주혁을 돌보지 않았다. 빈 얼굴로 집을 나가고 빈 얼굴로 돌아왔다. 주혁을 돌보는 건 여자의 몫이 되었다. 주혁의 양육비로 여자는 비싼 가방과 비싼 옷을 사 입었다.
그 많은 양육비를 받고도 사치를 부려 돈이 다 떨어질 때면 여자는 드물게 주혁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여자가 찾아간 곳은 수 풀 속에 있는 거대한 저택이었다. 그 단단한 철의 문 앞에서 여자는 엎드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혁이 옆에서 멀뚱히 서 있으면 주혁도 꿇어앉혀 함께 엎드리게 했다. 거기서 여자는 곡소리를 냈다.
먹을 게 없어 아이가 제대로 자라질 못합니다. 도와주세요. 제발. 제발
무시했어야 했다. 그들은 여자의 그 뻔한 거짓말을 믿어 주지 말고 냉정하게 끊어 내야 했다. 그러나 여자는 결국 원하는 것을 얻고, 기분 좋은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 옆에서 주혁도 같이 웃었다. 염치를 몰라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여자가 기분이 좋은 날엔 주혁도 편하게 잠들 수 있었기에, 그저 좋았다.
재하와 비슷하게 여자도 신경질적이고 불안정했다. 때때로 몹시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너 때문이라며 종종 주혁을 내쫓았다. 주혁이 기어코 집을 찾아 돌아오면 여자는 그를 비웃었다. 분노와 슬픔으로 반복되는 행위였고 때론 재미로도 벌어지는 일이었다.
어느 날 한겨울 눈이 쌓인 골목에서 재하를 보았다. 그날도 주혁은 벌건 맨발로 집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주혁은 그때 처음으로 재하의 다른 표정을 보았다.
재하와 여자가 심하게 다투었다.
여자가 집을 나가기 전 비아냥대며 한 말들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 그 여자 봤어. 네 새끼랑 같이 찾아가서 그 여자한테 돈 달라 했어. 지 새끼라고 순순히 돈 주대? 예쁘긴 하더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 형수랑. 쓰레기 새끼. 너도 네 새끼도 개새끼들이야.’
한동안 재하는 밖에 나가지 않았다. 주혁을 보지도 않았다. 술을 마시거나 누워만 있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재하는 다정히 주혁을 불렀다. 맛있는 음식을 사 주고 좋은 옷을 입혀 줬다. 아주 오랜만에 받는 관심과 애정에 주혁의 기분이 높이높이 올라갔다. 매일이 오늘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밤, 재하는 주혁의 목을 졸랐다. 모두 잊어버리렴. 말을 남기고.
주혁은 모두 잊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재하는 없었다. 슬펐던가. 그런 아버지가 죽었음에도 주혁은 엉엉 울었던 것 같다.
돌봐 줄 이가 없어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평온했다. 문득문득 외롭고 아프고 무서웠지만 겉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에 재형이 나타난 것은 벼락같은 일이었다.
난영의 얼굴을 본 건 재형이 보육원에서 주혁을 데리고 태일의 앞에 내놓은 날이었다. 승혁이 다리를 못 쓰게 된 지 반년이 지난 때였을 것이다. 승혁의 다리가 그리됐음에도 재형은 여전히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고 마침내 태일이 재형에게 한바탕 분노를 쏟아 낸 후였다.
승혁의 다리가 그렇게 된 것도 결국은 아비인 재형이 아비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처자 식을 나 몰라라 하고 밖으로 쏘다녔기 때문이라고, 말을 했다 한다. 그말을 듣고 재형은 곧장 강동의 보육원에서 주혁을 데려왔다.
‘승혁이 대신 이 애를 후계 삼으면 되지 않습니까.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만, 결국 아버진 아버지 다음으로 회사를 이을 후계자가 필요한 거 아닙니까. 승혁이 대신 이 애를 후계 삼으세요! 그럼 된 것 아닙니까!’
결국 태일이 고함을 했다. 어린 주혁이 울음을 터뜨렸고, 재형이 주혁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주혁의 눈을 난영이 가렸다. 주혁을 품 안에 안고 ‘괜찮아, 아이야. 아이야.’ 해 주었다. 그 품에서 주혁은 더 섧게 울었다.
* * * * *
문이 열리고 주혁이 들어왔다. 주혁은 웃으며 서은을 안았다. 보고 싶었어, 말을 하고 다음에 출장 갈 땐 같이 갈래, 농담을 했다. 외투를 벗으며 그가 베이징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를 말했다. 서은의 손을 잡으며 연희동에서 먹은 저녁에 대해 말했고 피곤하다고도 했다. 말을 하는 입술의 움직임이 정확하고 뚜렷해서 서은은 주혁의 말을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주혁은 일상적인 행동을 하면서 말을 할 때에는 고개를 돌려 서은을 보았다.
주혁과 함께 침대에 누웠다. 주혁의 얼굴이 몹시 고단해 보였다. 그런 남자를 앞에 두고 서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이 든 주혁의 품에서 서은은 숨죽여 울었다.
다음 날 주혁은 평범히 출근을 했다. 주혁이 떠나고 서은은 늦은 아침을 먹었다. TV를 켜 예능 프로그램을 봤다. 밥을 먹으며 틈틈이 화면의 자막을 확인했고, 밥을 다 먹은 후엔 설거지를 했다. 물을 콸콸 나오게 하고 그릇들을 세게 문질렀다. 테이블 위에 미술 도구를 올려놓고 윤호석 작가의 책에 들어갈 삽화를 계획했다.
몇 시간이 지나 대강 스케치를 완성하였을 때.
까맣게 선을 마구 긋고 종이를 구겼다. 찢어 버리고 그다음 장에 다시 스케치를 했다. 그것 역시 완성하지 못하고 구겨, 찢고, 버렸다. 그다음의 종이를 찢었다. 그다음의 종이도 찢고 구겼다. 찢고 구기고를 한참 반복하다 결국 종이에 손을 베였다.
흐르는 자신의 피마저도 증오스러워 서은은 손가락을 노려보았다.
아, 소리를 냈다. 들리지 않았다. 다시 입을 더 크게 벌리고 아, 소리를 냈다. 이번엔 목에 힘을 주어 아. 다음엔 음을 길게 끌며 아아. 그래도 들리지 않았다. 비명을 질러 본다.
아아악一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들리는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증오스러웠다.
* * * * *
늦은 저녁, 서은이 잠시 그녀의 집에 갔다 돌아온 사이 주혁이 집에 와 있었다. 책을 읽고 있었는지 소파 앞 테이블에 책 한 권이 엎어져 있다.
"어디 갔다 왔어?”
주혁이 몸을 일으킨다.
“저녁은 먹었어?”
여느 때처럼 평범히 묻는다.
“안 먹었으면 외식할까? 스시 먹고 싶다고 했잖아. 연희동에 잘하는 집 하나 알아 왔는데.”
그 여상하기만 한 행위의 사이사이에 숨겨진 행위를 이제는 안다.
단단히 마음을 붙들었는데도 서은은 잠시 앞이 캄캄해진다. 그래도 서 있는 몸을 유지했다. 그래도 기우는 마음을 잡아 세우는 건 힘이 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야 했다.
“나 할 말이 있어요.”
늘 이 순간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막상 닥치니 사고가 되지 않았다.
뭘? 되물으며 주혁이 다정한 얼굴을 하고 서은에게 다가온다.
서은은 현관에 선 채로 나지막이 말하였다.
“우리 이제 그만해요.”
아니, 실은 이렇게 할 말이 아니었는데. 오랫동안 준비한 말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러고 보니,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더라. 이별의 말들을 생각하며 여기까지 오는 순간들과 내딛는 걸음들이 천 근 같았는데 결국은 왔네. 그 모든 것들을 지나 결국 여기에.
주혁이 걸음을 멈추었다. 정적에 잠긴 세상에서 주혁이 움직이지 않으니 시간마저 멈춘 듯했다.
주혁이 표정 없이 물었다.
“왜?”
“지겨워졌어.”
“......뭐가?”
“그냥, 이 모든 게, 다.”
주혁은 웃어 버렸다.
웃음 끝에 남자의 얼굴에 떠오른 건 냉기와 피로와 무료였다. 그는 차가움이 밴 무심한 얼굴로 입술을 움직였다.
“싫어.”
그리고 시선을 돌리고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을 한다. 서은을 무시하고 서은의 등 뒤로 문을 닫는다. 방금 전 그녀가 고한 이별 같은 건 듣지 못했다는 듯 처음부터 그런 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참을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서은을 덮쳤다. 그건 아마도 수치심.
“나도 싫어.”
서은이 몸을 돌렸다.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데 뒤에서 주혁이 서은의 팔을 붙잡았다. 뿌리쳤다. 다시 잡혔고, 다시 뿌리치지만 결국 잡혔다. 주혁이 이름을 불렀다. 서은과 눈이 마주칠 때에만 입술을 움직여 그녀를 불렀다.
비참했다. 아팠다. 부끄러웠다. 슬펐다. 또 아팠다.
차분히 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괜찮지 않았고, 아플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아플 줄 몰랐다. 모두 서은의 착각이고 교만이고 죄다. 서은은 흔들리는 입술로 간신히 소리를 냈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알았어요?”
원래 말하려던 것도 이게 아니었는데 뇌가,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 당신을 속이고, 그런 주제에 연애를 하자고 해서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욕심을 부리고 분수를 몰랐어.
생각했던 말들이 나오지 않는다.
주혁은 답하지 않았다. 다만 주혁의 명명하고 깊은 눈이 차분해 보이기만 해시, 세상이 뒤집혀 속이 울렁대는 서은과는 달리 덤덤하기만 하여 울컥, 덩어리가 솟구쳤다.
“왜 말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주혁은 답하지 않고 주혁의 눈빛 또한 변하지 않았다. 모든 걸 다 아는 눈.
뜨거운 덩어리가 가슴을 누르고 목구멍을 누르고 눈을 누른다. 시선 따위에 꿰뚫려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복받치는 가슴을 날카로운 말로 토해 냈다.
“내가, 내가, 어디까지 당신을 속일 수 있나 재 보는 중이었어요?”
시야가 뿌예지고 눈이 벌게졌다. 뇌는 여전히 멋대로 움직였다.
“왜? 불쌍했어? 당신을 속이는 날 속이면서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어요? 완벽하게 당신을 속였다고 착각하는 내가 우스웠어? 어디까지 가보나 지켜보는 중이었어?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숨이 턱턱 막혀 말이 끊겼다. 그다음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참담한 수치심과 자괴감과 죄책감. 서은은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넌 어디까지 할 생각이었는데?”
주혁이 싸늘히 물었다. 서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해 봐.”
주혁은 감정 없이, 미동 없는 얼굴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나한테 네 그 비밀을 들키기 전에 끝내려는 생각이었어?”
"……."
“누구 맘대로?”
눈동자가 서늘히 가라앉는다.
“내가 정말 모를것 같았어? 평생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웃기지도 않는 소리. 너 못 듣는 것, 진작 알았어. 그런데, 그래서 뭐? 네가 말을 하지 않길래, 네가 나를 속이길래 속아 준 척했던 거야. 그래서 그게 뭐. 왜 내가 헤어져야 하지?”
“당신은!”
서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당신은, 나한테 화를 냈어야 했어.”
“.......”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나를 속였냐고 화를 내고 내 잘못을 비난해야 했어. 그리고 깔끔하게 이별을 고했어야지!”
주혁이 조소하듯 픽 웃었다.
“그래서, 내가 화를 내지 않아 화가 나셨다?”
들끓어 뜨거워지는 눈을 가라앉히려는 듯 서은은 두 눈을 느리게 감고 떴다. 막히는 숨을 끊어 내듯 뱉으며 대답했다.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으니까.”
“비참?”
주혁의 눈이 일순 번뜩였다. 서은의 팔을 붙잡은 주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다시 얼굴에 감정을 지운다.
“비참이라.”
주혁이 고개를 비틀고 냉기 짙은 시선으로 서은을 내려 본다. 조소를 머금은 그는 아주 단단한 빙산 같았다.
“서은아. 나는 전화도 못 했어. 네가 먼저 전화해 주길 기다리면서, 전화하지 말라는 네 요구를 착실하게 지키면서, 네 그 뻔한 연극에 장단을 맞춰 주고 네가 시키는 건 뭐든 다 했어. 그러면 언젠간 마음을 열어 주는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면서, 그러면 내게 전화해 주는 날도 오지 않을까 기다리면서.”
"……."
“그런데도 너는 그런 나를 두고 언제 어떻게 헤어질까 고민했지.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그리고 그런 너를 두고 나는, 네 마음 하나 얻겠다고 그 광대 짓을 계속하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어떻게든 네 마음 돌리려고, 네 마음 얻겠다고 나는!”
무표정이었던 주혁의 얼굴이 서서히 깨졌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했잖아.”
가면을 가르고 드러나는 것은 차갑고 뿌리 깊은 분노였다.
“그러다 네가 못 듣는다는 걸 알았지. 멍청하게도 그때서야 깨달은 거야. 너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너는, 결국 나랑 끝낼 거라는 것. 내가하는 짓은 정말 그저 멍청한 광대 짓에 불과했다는 것.”
희망이 있었다. 결국 서은은 주혁을 선택할 것이라고. 작지만 분명 희망이었다.
그 희망에 매달려 했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지고 우스워졌던 날을 기억한다.
"그런데 더 멍청한 게 뭔지 알아? 그걸 다 알면서도 내가 선택한 건 다시 광대탈을 쓰는 거였어. 비참은 말이야 시은아. 이럴 때 써야지. 버려질 걸 알면서 손 하나 붙잡고 전전긍긍하는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꼴이라니, 등신처럼. 개새끼처럼.”
"......."
“그런데도 끝까지 아무 말 않는 너를 두고 나는, 네가 나한테 말을 해주지 않아서. 계속 갈등하는 너를 보면서 나는,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뭘 해 줘야, 뭘 얼마나 해야 네가 날 놓지 않을까, 헤어지자 하지 않을까!”
“.......”
“내가 화를 내고 말을 해야 했다고? 너야말로 말했어야지. 네가 말해주길 내가 어떤 심정으로 기다렸는데. 너를, 내가, 어떤 마음으로 지켜봤는데!”
눈시울이 화끈거렸다. 피곤하고, 참담했다. 서은은 지친 얼굴로 고저없는 목소리를 냈다.
“......미안한데, 나 지금 당신이하는 말 너무 빨라서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해. 쓸데없는 짓이야. 괜한 감정 소모 하지 말고 끝내요, 지금.”
주혁은 하하, 웃었다. 웃으며 내리는 숨이 서은을 아프게 했다.
“묻자. 넌 어떤 마음으로 날 만났던 거야?”
마음의 정체.
떠올리자 아득해진다. 남자가 터뜨리는 웃음이, 다정한 눈짓과 손길이, 가벼운 장난들이, 따듯한 숨이, 넓은 품이, 하늘이, 바다가, 우주가 모두 당신이었던 순간들이.
서은은 그저 함께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 순간들이 마냥 좋았을 뿐이다. 다만 그 사람은 높고 멀고 빛나 영원하지 않았을 뿐이다. 여기가 서로의 제자리가 아님을 알았을 뿐이다.
쓴 숨을 삼켰다.
서은은 두 눈에 힘을 주고 뻔뻔하게 지껄였다.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 만나 보고 싶었거든요. 나도 당신 같은 사람 만날 수 있다는 것, 뽐내도 보고. 아, 그래. 섹스도 좋았어요. 근데 이제 다 지겨워. 내가 왜 말하지 않았냐고? 말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어차피 가볍게 즐기려던 거였잖아요. 어차피 안 될 사이였잖아. 그래도 당신한텐 고마웠어요. 잠시나마 멀쩡한 정서은일 수 있어서. 그렇게 해 주어서. 그런데 이제 다 들켜 버렸네. 더 이상 멀쩡한 정서은으로 살아가는 건 틀려 버렸네.”
“.......”
“그래서 더 이상 나한테 서주혁은, 의미 없어.”
후회하겠지. 아프겠지, 분명.
두고두고 후회할 테지만, 이 순간을 잊지 못하고 평생 이때의 나를 죽이고 싶을 테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루어선 안 되었다. 이제는 주혁을 놓아주어야 한다. 이제는 내 자리로 돌아가자. 처음부터 그러기로 하였으니까.
무감정하던 주혁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미소는 비틀리고 싸늘하며 기괴했다. 그 미소를 걸치고 그는 아주 느리게 말을 이었다.
너, 내가 우습지.
"……."
“내가 어디까지 널 봐줄 수 있나, 어디까지 하찮아지나. 그동안 시험하고 감상하는 기분이 꽤 즐거웠을 거야. 그러니 내 앞에서 그따위 말 지껄이며 버린 짐승 새끼 대하듯 날 대하는 걸 테고.”
그렇지?
묻는 주혁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짧은 순간 남자의 시린 눈에 무수한 감정들이 초라하게 나뒹굴었지만, 그래서 더욱 뚜렷이 전해지는 감정이 없었다. 서은은 감히 읽어 낼 수 없는 감정들을 뒤집어쓴 남자를 향해 체념하듯 말하였다.
“......그래. 그러니까 그만해요.”
그리고 주혁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려는 찰나였다. 주혁이 서은의 팔을 잡고 몸을 돌린다.
“아니. 그럼 끝까지 해.”
다시 마주한 시선에 미명처럼 검푸른 빛이 타올랐다.
“끝까지 속여야지. 왜 하다 멈춰?”
주혁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비아냥이다.
“놔. 나 갈 거야.”
“어딜?”
“내 집으로.”
“못 가. 회피하지 마. 못 들은 걸로 해 줄 테니 다시 속여 봐.”
서은이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피하자 주혁이 서은의 뺨을 잡아 올렸다.
“피하지 마. 내 얼굴 봐 내가 하는 말 읽어.”
서은은 벌건 눈으로 노려보듯 주혁을 봤다.
“다시 속이라고. 속아 줄 테니, 처음부터.”
주혁의 얼굴이 다정하다. 다정한 얼굴로 주혁은 서은아, 서은아, 하고 그녀의 이름을 두 번 더 불렀다. 그 다정에 신물이 나 서은은 부러 신랄하게 일갈했다.
“미쳤어요?”
“좋을 대로 생각해. 섹스 좋았다며. 섹스나 하든지. 지겹지 않게 해 줄게.”
“하. 섹스에 환장했어?”
“그래. 환장했어. 그러니까 속아준다고.”
“.......”
“속아 준다니까, 못 들은 척해 준다니까! 다시 해. 왜 포기해?”
“…….”
“여기서 포기하지 마.”
서은은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꾹꾹 누르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남자의 손을 뿌리치려 버둥대는 서은을 붙잡으며 그는 계속해서 서은의 이름을 불렀다.
서은아,
정서은.
“날 사랑하는 게 연기든 뭐든, 젠장, 끝까지 하라고.”
"……."
“끝까지 날 속여.”
"……."
“기꺼이 속아줄 테니까.”
“.......”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속아 줄 테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 줄 테니까, 제 발!”
주혁은 잠시 숨을 골랐다.
“제발.......”
남자의 눈이, 얼굴이 하잘것없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날 사랑해 줘.”
그리고 마침내 무너져 내렸다.
남자는, 병이 들었다.
서은의 모든 거짓을 알고도 다시 속아 주겠다는 남자는, 몹쓸 병에 걸렸다.
남자는 아프다 계속 신호를 보냈지만 여자는 이제야 깨닫는다.
그는 아주 많이 아픈 거였다.
참았지만 눈물이 뚝 흘렀다.
들키고 싶지 않았어. 온전한 정서은으로 남고 싶었어. 나는 그저 잠깐, 사랑하고 싶었어. 어차피 안될 것 알았는데, 십 년 전처럼 멀쩡한 정서은으로서 잠시나마 서주혁을 사랑하고 싶었어. 멀쩡한 정서은으로서. 멀쩡한. 그럼, 나는 지금 멀쩡하지 않다는 걸까. 나는 정상이 아닌 건가. 정상은 뭐고 비정상은 뭔데.
그렇게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면서까지 서주혁에게 온전한 정서은으로 남고 싶었던 건,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뿌리 깊은 미련이다.
“나는.”
고작 두 글자를 뱉었을 뿐인데 시야가 번지고 말문이 막혔다.
“나는. 내가, 아니. 당신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숨과 함께 말을 뱉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봐 주는 게.”
편견과 동정과 연민 없이 그냥 나를 봐주어서.
터지는 울음과 가쁜 숨이 뒤섞이어 말을 잇지 못한다. 목소리는 분명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목이 막히고 가슴이 메고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후둑 떨어지는 눈물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차마 흉한 얼굴을 보일 수 없어 손으로 입을 막아 가렸다. 그마저도 손이 떨려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냥, 나를. 사랑해 주는 게.”
복받치는 설움과 눈물에 쫓기면서도 말을 뱉기 위해 애를 썼다.
“그게, 너무 좋아서.”
말을 하고 서은은 숨을 몰아쉬었다. 뜨겁게 쏟아지는 설움을 가누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서은을 주혁이 안았다.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 울음에 잡아먹혀 말을 하지 못한다. 주혁의 품에 안겨 서은은 질긴 울음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