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 겹의 세상
주혁과의 두 번째 밤은 느리고 뜨겁고 농밀했다. 첫 번째와 비할 수 없이. 이마에서 발끝까지 주혁에게 먹히는 기분이었다. 서은은 존재를 인식조차 못한 곳들을 그가 헤집어 놓으며 주혁의 혀가 서은의 깊은 곳에 닿기도 했다. 앉아서 주혁의 것을 받기도 하고 몸이 뒤집어진 채 받기도 했다. 감당할 수 없는 쾌락에 저절로 눈물이 나올 때면 주혁이 닦아 주었다.
그 밤, 몇 번의 바다를 만났다. 넓고 깊어 아득한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몸이 축 늘어지면 주혁이 다시 불을 지펴 서은을 끌어 올렸다. 뜨거운 것이 끝없이 올라와 하늘이 무너지고 우주가 뒤집어지는 경험을 했다. 이런 것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하면서, 주혁이 서은을 끌어 올릴 때면 몸은 착실하게 반응을 보이고 본능적으로 다시 바다의 끝에 다다르기를 원하였다.
해가 짧아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겨울의 깊은 밤, 여운이 남아 아직 뜨겁고 축축한 몸이 힘없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주혁은 서은의 마르지 못한 눈물을 혀로 닦으며 서은을 꼭 안았다. 그녀의 몸만으로도 가눌 수 없이 무거웠는데 거기에 주혁의 몸이 달라붙으니 서은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피곤했다. 눈을 감았다. 주혁의 숨이 운무처럼 몸을 휘감았다. 주혁의 숨과 온기, 살과 품이 세상 그 무엇보다 따스하고 아늑하며 아찔했다.
* * * * *
네 아버지한테서 허구한 날 전화와. 앓는 소리 듣는 것도 한두 번이지, 지겨워 죽겠어. 아들이 등 뒤에 칼 꽂은 걸, 나더러 어쩌라는 건지. 집안 어른들한테도 계속 그렇게 연락 돌리는 모양이더라.
어머, 전혀 안 죄송한 얼굴로 하는 사과, 달갑지 않거든.
그래도 당분간 재단 쪽 눈에 띄진 마. 서씨 문중, 그 고고한 유교 집안 어른들, 불미스러운 일로 우리 집안 언론에 오르내리는 거 끔찍이 싫어하잖니. 나나 되니까 너한테 이런 말이라도 하는 거야.
고맙긴. 어르신들은 큰할아버님이 왜 아직 널 가만두는 거냐고 닦달하는 모양인데, 그래도 혹시 알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나중에 네가 진짜 그 자리에 오를지.
하하, 웃기는 말을 하네. 난 정치인, 연예인, 기업인 말은 안 믿어. 형의 것은 넘보지 않는다는 네 말, 언젠가 네가 뒤집어도 난 비난 안 해. 다만 나중에 진짜 그때가 오면 내 은혜 잊지 말고 고스란히 내 아들 진혁이한테 갚아 주렴. 뭐, 네가 계속 서 전무 칼잡이 역할 하면서 서 전무가 그 자리에 올라도 상관은 없고. 그럼 그땐 이 은혜 잊지 말고 형에게 전해줘.
아아, 난 이래서 네가 좋아. 너 그렇게 웃으면서 예쁜 얼굴로 하는 말들, 너무 다정해서 거짓말인 거 알아도 진짜로 믿고 싶어지거든. 뭣 모르는 사람들은 다 진짜라 믿을 거야. 그것도 재능이지. 우리 진혁인 애가 너무 낯을 가려서 걱정이야.
아, 난 저기 가 봐야겠다. L화학 둘째가 그렇게 괜찮다며? 마스크도 우리 지영이가 딱 좋아할 마스크고. 다음에 봐, 파티 잘 즐기렴.
안부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지는 대화들은 권태로웠다. 떠다니는 소음과 흐르는 장면들도 판에 박은 듯 익숙한 것들이다. 일 년에 한 번, 내로라하는 정재계 인사들이 다 함께 모이는 자리. 신년 하례회 겸 후원 행사였다.
다리가 불편한 승혁은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서정의 얼굴마담 역할은 늘 승혁을 대신해 주혁이 맡았다. 그의 엑스 형수님, 혜선은 이 행사를 두고 ‘역겨운 가면무도회’라 했다. 겉으로 다들 하회탈을 쓰고 있지만 이 자리의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했다. 하회탈 이면에 어떻게든 우위를 점하기 위해 정보를 주고받고 때론 헐뜯으며, 종국엔 스스로가 제일 잘났음을 과시하는 이들과, 그들의 눈에 들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혀를 내두르는 사람들.
이 행사의 묘미는 후원이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지는 적선이라고도 했다. 저들의 눈에 피후원인은 조선 시대 엎드려 동냥질하는 하층민들과 다를 게 없다고 했던가. ‘돕는다’의 개념보다 ‘불쌍하고 어리석다’의 정서가 우선이며, 그보다 더 우선인 것은 이 거액의 후원에 참여하는 스스로의 위치와 고고함이다.
혜선이 무슨 공부를 하고 어떤 능력을 쌓든, 저들에게 혜선은 그저 다리 불편한 재벌 왕자를 잡아 신분 상승한 평민 신데렐라였다. 그 위선과 시선과 독이 밴 말들을 견디지 못하고 혜선은 스스로 유리 구두를 부수고 성문을 깨 도망쳤다.
누군가 주혁과 부딪힌다. 이내 우아한 말과 몸짓으로 사과를 하고 명함을 건네 온다. 감흥 없는 영화를 보는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보았다.
그러나 곧 주혁도 그들의 것과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하회탈이 흉측했다.
“샴페인 냄새가 나요.”
서은이 코를 킁킁댔다.
“와인 냄샌가?”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곧 서은이 장난기를 담아 웃으며 물었다.
“지금 취했죠?”
그런 서은에게 불쑥 봉투를 내밀었다.
“뭐예요?”
“마카롱.”
단거 좋아하잖아.
“와아. 나 마카롱 좋아하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다 알지.
“어어, 근데 이 손에 상처 뭐예요? 어디 긁힌 거 같은데. 어디에 긁혔어요?”
몰라. 펜인가, 손톱인가, 나이프인가. 긁힌 줄도 몰랐어, 난.
정말 술에 취했는지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빨개. 따가울 거 같은데, 어떡해. 괜찮아요?”
그저 보는 것만으로 벅차서.
“응? 안 아파요?”
그의 앞에서 종종대는 발걸음도, 걱정스레 달라붙는 시선도, 오밀조밀 움직이는 입술도, 코도, 귀도, 볼도,
모두 보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아깝고,
너무 예뻐서.
어떻게 세상에 이런 생물이 존재 할 수 있지.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듯, 주혁은 여자가 일으키는 하나하나의 움직임과 바람과 그로 인한 감각들을 모두 뇌에 담았다.
“아아, 정말 취했나 봐. 이 인사불성 아저씨를 어쩌면 좋아. 뭘 먹고 이렇게 취한 거야, 대체.”
아저씨 아냐. 근사한 왕자이고 싶어, 너에겐. 내 모든 허물은 감추고, 내 몸에 들러붙은 더러운 것들은 너에게 묻히지 않고.
“이제 집에 들어가요. 이러고 있다가 감기 걸리겠다.”
나 같은 것과 어울리지 않는 건 알아.
“내가 데려다줄게요. 술 취한 아저씨, 여기 내 손 잡고 넘어지지 않게 잘 따라와요.”
때가 되면, 고이 돌려보내 줘야 할까.
지금처럼 예쁜 모습 그대로.
“아이, 말 잘 듣네.”
주혁이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에 서은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서은이 흘리는 웃음이 좋았다. 살얼음 낀 계절이 마냥 봄 같았다.
창백하고 날카로운 얇은 달도, 그저 무단 선이었다.
무거운 몸을 침대에 누이자 서은이 낑낑대며 옷을 벗긴다. 양말을 벗기고 벨트를 풀고 바지를 내린다. 넥타이를 벗기다 주혁의 붉어진 귀를 보고 서은은 ‘술 마시면 빨개지는 타입이구나.’ 말하였다.
너 때문이야.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알코올에 절어 무겁고 피곤한 혀가 움직이지 않는다. 붉어진 귀는 더 붉어졌을 것이다. 서은이 주혁의 몸 위에 올라타 셔츠의 단추를 푸를 때 주혁은 뒹굴 몸을 굴려 서은을 안아 버렸다. 품 안에서 서은이 버둥댔지만 주혁은 묵직하게 내리는 눈을 감은 채 더 힘을 주었다.
여기 있어 줘.
일 년이 걸리든 삼 년이 걸리든 십 년이 걸리든,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 언젠가의 때가 마침내 다가올 때까지, 곁에 있어 줘.
생각을 하지만 혀는 움직이지 않았다.
* * * * *
서은은 동거도 결혼도 하지 않았지만 종종 그 집을 찾았다. 주혁이 없을 때에도 가끔은 그 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 집은 주혁처럼 높고 넓고 커다라며 때론 공허했다.
그 집에 들어가면 서은은 잠시 다른 차원의 공간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긴 서주혁의 세상이었다. 그곳의 서주혁은 오로지 서은의 서 주혁일 뿐이다. 어떠한 미사여구 없이 서은의 서주혁이기만 한 주혁이 좋았다. 그곳에서 둘은 장난 같은 연애를 했다.
별 의미 없는 농담 따 먹기를 한다든가, 주혁의 집에 서은의 물건 하나를 숨겨 놓고 돌아와 보물찾기 미션을 준다든가.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홍은슈퍼에 없는 것을 두고 내기를 한다든가. 얼어붙은 백련산 산책길을 반만 오르다 포기한다든가, 하는 장난처럼 즐겁고 가볍고 무의미한 연애를.
어느 밤 서은은 자꾸 그녀의 몸을 뒤집는 주혁이 싫어 짜증을 냈다. 어느 밤엔 여전히 전화는 싫다는 서은을 두고 주혁이 차갑게 돌아섰고. 서로에게 처음으로 낸 짜증이며 화였다.
서은의 말도 안 되는 고집으로 마침내 남자가 차갑게 돌아섰을 때, 서은은 어쩔 수 없는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헤어진다면 그렇게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은은 가슴이 턱턱 막혔다. 잘못은 모두 서은이 한 거였지만, 그럼에도 주혁에게 섭섭하고 화가 났다. 사람은 어찌나 이기적인 동물인지 주혁이 화가 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주혁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막막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헤어지진 않을 거야, 이게 정말 끝은 아닐 거야.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서은은 처음으로 분명한 형태의 이별을 생각했다. 또한 선명한 그 후를 상상했다.
주혁과 헤어지면 더 이상 홍은슈퍼에 갈 수 없을 것 같다. 백련산 산책 길을 걸을 수 없을 것 같다. 멀리서 주혁의 집을 보는 것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 더 이상 홍은동에 살 수 없을 것 같다. 머릿속에 홍은동을 떠올리는 것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주혁과 헤어지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러나 시시하게도 모두 주혁의 사과로 끝이 났다.
잘못했어.
말하는 입술을 읽는데 서은은 마음이 아팠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주혁을 안았다. 내가 더 많이 잘못했어요, 뻔뻔하게 말하며.
설날 연휴 동안은 얼굴을 보지 못했다. 서은은 할머니가 있는 경산에 내려갔고 주혁은 연희동 본가에 들어갔다. 그 나을간 서은은 매 순간 주혁을 생각했다. 전을 부치다가, 할머니와 화투를 치다가, 제사를 지내다가, 떡국을 먹다가 문득문득 주혁이 그립고 보고 싶었다. 어서 명절이 지나길 바랐다. 명절이 끝나고 경산에서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서은은 설레었다. 굼뜨게 움직이는 차 안에서 오로지 주혁만을 생각했다.
아무리 불안해도,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행복해도, 시간은 흘렀다.
그리고 어느덧 이월이었다.
* * * * *
“이번 그림장 참여 못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찻잔을 들던 영란이 물끄러미 서은을 본다. 서은의 답에 무언갈 생각하는 듯 눈을 내리다가 덤덤히 대꾸했다.
“죄송할 건 없지. 서은 씨 선택인데. 그래도 기한 좀 남았으니까 마음 바뀌면 언제든 알려 줘. 이번에 참여 못 해도 다음 프로젝트도 있는 거고.”
‘그림쟁이들’이라는 이름의 소수의 젊은 화가들이 모인 모임이 있었다. 영란의 소개로 서은도 거기에 속해 있었는데, 그 모임에선 장소를 옮겨 가며 정기적으로 ‘그림장’이라는 아트마켓을 열었다. 화가들이 그림장에 직접 참여하며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 주는 이벤트도 함께했는데 서은은 그림장의 준비만 도울 뿐 직접 마켓에 참여한 적은 없었다. 최근 들어 SNS에서 그림장이 유명해지며 찾아오는 손님들이 부쩍 늘어났다 들었다. 서은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였지만 특정되지 않은 다수에게 서은의 장애를 드러내기에 서은은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
“그런데 서은 씨. 괜찮아, 괜찮아 미루다가 이미 늦었어, 하는 순간이 분명히 온다?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미루진 말고. 그 순간이 오면 마음이 엄청 아프거든.”
서은은 모호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영란의 말대로 그 순간이 오기 전엔 그림장에 나가야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여전히 서은의 용기는 부족하고, 그곳에 나갔다가 서은의 이름이 알려지고 혹여 주혁이 알게 된다면. 주혁에게 서은의 일상을 말해야 하는데, 주혁이 서은이 참여하는 그림장에 대해 알아보고 그곳에서 장애를 가진 화가로 활동한다는 걸 알게 되는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은 주혁과 헤어진 다음에, 서은의 이름이 아닌 필명으로 이루어질 거였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주혁과 헤어지고 아무렇지 않게 그림을 그리고 살아가는 일이 가능한 건가. 다시 원래의 정서은이 되어 원래의 정서은이 사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일이.
생각만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가능하지 않아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서주혁과 헤어진다고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끝나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가야지.
오래전 소리를 잃었을 때와 김선우의 가족들에게 병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에 서은은 한순간 하늘이 꺼지고 땅이 산산조각 나 갈라지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도, 그 다다음 날에도. 무섭도록 아무렇지 않게 반복되는 일상이 서은의 목을 조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엔 서은도 다시 멀쩡해졌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마찬가 지일 것이다. 주혁이 없어도 서은은 다시 살아갈 거였다.
* * * * *
목줄을 쥔 주인이 흔들린다. 주혁은 턱을 비틀어 제 목을 가벼이 쥐었다. 목줄 대신, 손목의 은색 시계만이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당연하겠지만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혁은 그의 턱 끝에서 무엇인가 달랑대며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기실 흔들리는 것은 살가죽에 파묻힌 심장이었다. 심장의 박동이 신체 곳곳의 핏줄에 연결돼 있는 탓에 목줄의 동요를 느낄 때마다 그의 목구멍이, 가슴팍이 욱신대는 감각을 느끼는 것이다.
목줄을 쥔 주인이 흔들리고, 목줄로 연결된 관계가 흔들리고, 결국 그것은 이 관계의 피권력자인 그에게 고통을 야기한다. 행여 그것이 그의 목을 빠져나갈까 싶어, 행여 주인이 그 줄을 잘라 낼까 싶어.
그럴 때마다 주혁은 도리어 입가에 웃음을 걸치고 다정한 말을 건네며 주인의 손을 잡았다. 주인의 동정에, 연민에, 미련에 목숨을 빌어 하루하루를 연장한다.
그에게 줄을 채워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주인은 서은이었다. 그는 매 순간 급경사와 급커브가 난무하는 기구 위에 올라탄 기분으로 서은을 주시했다. 서은이 흔들릴 때마다 겉으로는 태연했으나, 안에서는 순식간 천 길 아래로 떨어지는 감각에 휩싸였다. 그럴 때면 주혁은 태연한 얼굴로 서은의 연민을 자극해 그녀를 붙잡았다.
그럼에도, 서은이 흔들린다. 그를 기다리고 그에게 웃어 주고 그를 안으면서 동시에 분명한 선을 긋고 멀어진다. 멀어지며 괴로워하고, 괴로워하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가장하여 다시 그를 안는다. 주혁은 본능적으로 그에게 채워진 목줄이 헐거워졌음을 느꼈다. 관계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 또한.
그건 일련의 사고를 거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거였다. 이미 오래전의 경험들과 본능으로 알 수 있는 것.
그러나 가만 놔두었다. 관계에 있어 권력을 쥐지 못한 약자에겐 감히 누리고 휘두를 권리가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약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뿐이다.
섣불리 한 발짝만 내디뎌도, 발악 한번 하여도, 목줄이 잘리고, 검은 구렁이 그를 삼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엔 화가 치밀었다. 어느 때엔 답답했고 또 어느 때엔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맡은 역할을 성실히 해내었다.
서은의 밝은 웃음 속에 스치는 흐린 감정을 볼 때마다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았지만 모르는 척 외면하고, 욕심을 채웠다. 밤이면 서은에게 더할 나위 없는 쾌락을 선사하며 서은을 무아경으로 몰아갔고 끝에는 탈진하여 그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도록 했다. 서은의 갈등이 극에 달할수록 주혁은 더욱 다정하고 자상히 굴었다.
그래서 감히 목줄을 자르지 못하도록.
그는 서은과 헤어질 마음이 없으니까. 그는 서은이 좋았다.
주혁이 서은을 생각하고 서은을 기다리는 건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또한 하염없이 일어나는 일들이기도 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는 상태. 왜일까, 자문해 본 적도 있다. 그러나 곧 이유 없이, 하염없이 일어나는 일들엔 답 또한 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비논리적이지만, 결국 세상을 이루는 건 그런 비논리적인 것들이었다. 우주가 존재하고, 우주에 지구가 있고, 그 안에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고 수십억의 사람들이 살며, 태일이 그를 거두고, 그가 난영을 어머니라 부르고. 십여 년이 흘러서야 다시 만난 서은이 이렇게 그의 마음을 잡아끄는 것도, 결국 그런 일들 중 하나이고, 주혁은 평생 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대신 납득할 테지, 이유 없이. 원래 그건 그랬던 것이라고.
그러므로 그는 멈추지 못한다. 하여 끝까지 가 볼 생각이었다. 서은이 이별을 고하지 않기를 바라며 동시에 서은이 준비하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침내 그를 선택해 주기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한다 말해 주기를 바라였다.
서은이 홀로 갈등할 때면 묘한 쾌감에 휩싸임과 동시에 초조했다.
괴로워하지 말고, 그쯤 하고 이만 넘어와
상상 속에서 서은에게 속삭였다. 때론 ‘어째서 나는 안 되는 건데?’ 다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겉으로 그는 한없이 다정했다. 서은의 눈길과 손짓과 미소가 설령 거짓일지라도 그는 좋았으니까. 여전히, 서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으니까.
“어때요?”
이어폰을 꽂고 한참간 그림을 그리던 서은이 마침내 완성된 엽서를 보여 주었다. 물끄럼 바라보기만 하니 손가락으로 그림 속의 부분 부분을 짚는다.
“이게 주혁 씨고 이게 나예요.”
엽서 속에서 그들은 지금의 모습 그대로 카페에 나란히 앉아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림을 그리고 남자는 책을 읽고.
주혁은 손가락으로 엽서를 툭 튕겼다.
“못생겼어.”
그림을 바라보는 표정 또한 무심하다. 서은은 눈가를 찌푸렸다.
“맘에 안 들면 말고.”
홱 가져가는 걸 주혁이 다시 낚아챘다.
“다시 보니 여자가 예쁘네.”
서은은 주혁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가만 바라보다 싱긋 웃는다. 주혁은 서은의 어깨를 당겨 뺨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입술을 떼어 내면 서은은 어줍은 곁눈질로 주위를 살핀다. 유리창 너머 세상은 새하얀 눈밭이었다.
뒤늦게 주문한 와플이 나왔다. 따뜻하게 데워진 와플의 옆엔 생크림이 수북이 올려져 있다. 서은이 와플 조각에 생크림을 듬뿍 묻혀 한입에 넣고 입을 오물대며 말했다.
“생크림의 달달함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
주혁은 낮게 웃었다. 인터넷에서 그런 비슷한 농담 같은 걸 본 적이 있는데,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볼이 불룩해진 서은이 허락도 없이 주혁의 책에 엽서를 꽂았다.
“못생겼어도 자주 보면 예쁘게 보이는 법이에요. 책에 꽂아 놓고 자주자주 봐요.”
주혁은 턱을 괴고 다른 손으론 서은의 머리칼을 만지작댔다.
“예쁘다니까.”
서은은 말없이 눈을 맞추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돌렸다.
“그러니까, 예쁘니까 자주자주 봐요.”
가끔씩 서은은 이렇게 조금 엉뚱하게 말을 이어 나갈 때가 있다.
“주혁 씨도 그려 볼래요?”
“뭘?”
“아무거나.”
서은이 가느다란 색연필을 내민다. 주혁은 군말 없이 색연필을 받아들었다. 그는 다소 무성의한 태도로 빠르게 스케치를 했다. 대강 사람의 형체로 보이는 두 개의 사람을 그리더니 서은이 했던 것처럼 손가락으로 짚으며 그림을 설명했다.
“이게 너고, 이게 나야.”
그림은 젬병이구나.
잠시 황당해하는 것 같던 서은은 곧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주혁이 그린 그림에 몇 가지 선을 더 그려 넣고 색을 칠한다. 낙서에 불과했던 것이 그 잠깐의 터치로 제법 봐줄 만한 그림이 되었다.
주혁은 그림에 열중하는 서은을 응시했다. 서은에게 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서은은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해 주는 대신, 종이 한 겹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좋다고 했다. 특별할 것 없는 자신의 하루가 특별하게 느껴지도록 한다고 했다. 유수처럼 흐르는 시간을 한 겹의 종이에 담아내는 것뿐임에, 잠시동안 붙잡을 수 있다고도 했다.
한 겹의 세상을 딛고 서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생각을 하다 주혁은 테이블 위에 팔을 겹쳐 올리고 고개를 기대 엎드렸다. 비스듬히 보이는 서은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도렷하게 빛난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서은은 다른 세상에 머무는 듯 보였다.
마음에 안 들어.
나를 두고.
“서은아.”
그림에 열중했는지 서은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서은아.”
다시 불러도 여전히 서은은 그림에만 시선을 준다.
“정서은.”
이쯤 되면 그를 돌아볼 법도 한데. 조금 이상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서은이 몸을 움찔이며 주혁을 보았다. 서은은 당황한 듯했는데 이내 애매한 미소로 감정을 지웠다.
“졸려요?”
주혁이 말없이 바라본다. 그는 아니, 답을 하며 고개를 일으켜 서은의 입술에 입술을 맞댔다. 서은의 몸이 살짝 떨렸다. 그 은근한 움직임이 좋아 다시 또 입술을 대었다. 입술을 뗐을 때 서은은 능금 같은 얼굴로 흐리게 웃었다.
기묘한 모순과 은밀한 불쾌와 예리한 절망.
서은의 거짓과 주혁의 거짓.
시간은 아슬아슬 흘렀다.
* * * * *
어떤 기미를 눈치채기 시작한 건, 눈치채지 못하는 어느 순간부터. 서은을 만나는 동안 그는 여자에게 푹 빠져 온전히 제정신은 아니었으니까. 그저 이상하다, 하는 순간들이 눈처럼 조금씩 내리다가 어느 순간 돌아보니 그의 무릎 언저리에 닿을 정도의 눈밭만큼 쌓여 있었다.
때때로 서은은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주혁의 말을 무시했다. 때론 주혁의 질문에 엉뚱한 답을 하기도 했고 바로 등 뒤에서 하는 질문에 답을 않기도 했다.
의문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아 소리 없이 싹을 틔우고 몸집을 키웠다.
그리고 간밤 마침내 망울을 터뜨렸다.
화가들의 모임에 갔다는 서은은 오래도록 연락이 없었다. 전화를 해도 당연히 받지 않았다. 번번이 전화는 싫다는 서은이었다. 주혁은 모르는 사람의 차에서 내리는 서은을 보았을 때 검푸른 분노가 그를 집어삼켰지만 그는 버텨 냈다. 그럼에도 끓어오르는 감정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하였다.
겉으로는 부드러운 얼굴로, 그러나 눈에는 감정을 담지 않은 채로 말했다.
‘앞으론 전화하고 싶을 때 할 거야. 전화 오면 받아.’
서은은 차분한 얼굴로 싫어요, 답했다. 주혁은 시니컬한 웃음을 터뜨렸다.
‘전화할 테니까, 받든지 말든지.’
날카로운 말을 자상히 전했다. 서은은 주혁의 다정에 약했다. 서은의 시선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곧 억지로 붙잡아 올리는 것처럼 서은의 눈이 주혁을 향했고 서은은 덤덤히 말했다.
‘노력은 할게요.’
고저 없이 감정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두고 이어서 따라오는 말들은 이전의 것과 다르게 많이 흔들리고 불안정했다.
‘전화는 편하지 않아서 그래요. 늘 문자로 하는 게 익숙해져서, 핸드폰 무음으로 해 놓고 확인을 안 하거든요. 또 작업할 땐 전화로 방해받는 것 싫기도 하고.’
말을 끊고 서은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주혁의 옷깃을 잡았다.
‘화내지 마요.’
싹을 틔운 의심이 제 존재감을 확연히 드러낸 건 그 순간이었다.
별로 이상할 것 없는 말들이었는데.
소리 없이 싹을 키우고 멋대로 터져 버린 삿된 의심이 그의 불안을 앞세워 주혁을 예리하게 관통했다.
의자에 묻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마우스가 부드럽게 손에 잡혔다. 짧은 사이에 날아와 있는 메시지들을 무시하고 인터넷 창을 켰다. 인사 자료 시스템에 들어갔고, 몇 번의 클릭을 했다. 그 몇 번의 클릭으로 쉽게 서은의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설마 하였다. 분명 서은에 관해 이해 가지 않는 것들이 있었지만 동시에 그럴리야 있겠느냐고 스스로 반문했다. 의심 많은 그의 성격이 불러온 어이 없는 착각 같은 것이라고.
종이로 치자면 한 장짜리의 화면이었다. 그리고 그 화면의 가운데에 박힌 다섯 글자.
주혁은 잠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차근차근, 밟고 있는 세상에 금이 갔다. 떨리고 흔들리는 것이 그의 손인지 시선인지 세상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가 살아온 시간 동안 겹겹이 쌓아 온 하루들로 이루어진 세상이었다.
눈을 감고, 서은을 생각했다. 치열하고 격렬한 생각들이 마구 엉킨다. 화면에 박혀 있는 다섯 글자를 분명히 보았음에도 뇌가 어긋난 듯 의미가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생각해야 한다, 서은을.
무서우니까요.
진심이라면 눈을 맞춰 주세요.
얼굴, 보여 줘요.
싫어. 하지 마. 뒤로 하지 마.
노력은 할게요.
화내지 마요.
이마를 짚고 고개를 내렸다. 다시 서은을 생각했다.
또다시,
다시, 다시, 다시 서은을 생각했다.
그러니까 너는. 그래서 너는. 너는, 정서은,
너는.
결국,
너는.
하.
입술이 비틀렸다. 잇새로 숨이 터져 나왔다. 우악스러운 압력이 그의 고개를 내리쳐 고개를 숙였다.
아슬아슬했던 둑이 기어코 무너져 무수한 것들이 틈을 비집고 터져 나온다. 그는 너무나 미약하여 울컥울컥 솟구치는 것을 감히 막을 수 없었다.
고작 다섯 글자였다.
고작 다섯 글자에 한 겹의 세상이 일순 우르르 부서져 내렸다.
그러니까 입춘, 그의 세상이 무너진 날이다.
* * * * *
일주일 가까이 주혁을 보지 못했다. 출장을 간 것도 아니고 명절도 아닌데 이렇게 보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늘 잠깐이라도 짬을 내보곤 했는데. 일이 바쁘다 했다. 오는 봄 출시할 신제품 때문이라던가. 지난번 전화 때문에 싸운 일로 화가 난 걸까 하는 의심을 지워 주듯, 주혁은 꼬박 연락을 해 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다시 본 주혁은 조금 이상했다. 일이 몰려 한동안 여의도에서 출퇴근을 했다는 그는 피로해 보이기도 했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주혁은 화실이 있는 서교동까지 서은을 데리러 왔다. 평소보다 일찍이라곤 하지만 저녁 일곱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홍은동으로 가는 차 안에서 주혁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서은은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짐작할 뿐이다.
홍은동에서 차가 멈추었는데도 그는 내리지 않았다.
서은도 차 문을 반쯤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오늘은 먼저 자.”
이상하게 바라보니 주혁이 말을 잇는다.
"연희동으로 가 봐야 해. 어머니 기일이거든.”
아. 그랬구나. 서은은 몰래 손가락을 말아 쥔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잘 다녀와요, 답을 하려는데 주혁이 다시 선수를 쳤다.
“다음 주에 베이징으로 출장 잡혔어.”
말을 이해했을 때 또요? 하는 물음이 불쑥 올랐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지만 이런 서은의 이기심으로 그를 불편하게 할 순 없었다. 초조한 마음을 누르고 덤덤히 말했다.
“조심히 갔다 와요.”
주혁이 엷게 웃는다. 오늘 처음으로 보는 그의 미소였다. 그리고 주혁은 또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아쉬워 좀 해 주라.”
종종 느끼는 거지만 이 남자는 정말 선수 같다.
“이렇게 예뻐서, 어떻게 두고 가지.”
아니면 어떻게 이토록 가슴을 진동하게 만드는 말만 골라 할 수 있겠어.
“다녀올 동안 기다려.”
“연희동을 말하는 거예요, 베이징을 말하는 거예요?”
“질문이 틀렸어. 내가 어딜 가든 기다려야 하는 거지.”
이런 말도 선수니까 할 수 있는 거였다.
서은은 웃어 버렸다.
“다녀올게.”
“......금방 다녀와요.”
왜인지 주혁의 얼굴에 미동이 멎었다. 늘 느끼는 거지만, 때때로 남자가 무표정할 때면 그 느낌이 몹시 건조하고 차갑다. 찰나의 정지 후 주혁이 느리게 입술을 늘였다. 그 움직임 하나로 남자의 얼음 같던 인상이 깨져 버린다. 그는 다시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주혁은 미묘히 웃었다.
“우리 애인님 말씀 잘 들어야지.”
서은은 그저 또 선수 같은 농담인가 싶었다. 주혁이 한 손으로 서은의 목덜미를 당겨 오고 주혁의 입술이 서은의 것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갈게. 하는 말에 서은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입술이 떨어지는 찰나 보았던 주혁의 시선이 왜인지 가슴을 그어 내렸다. 아마도 본능적으로 이별의 때가 다가 왔음을 서은 스스로 알았기 때문일 거라고, 서은은 생각했다.
그는 아주 깊고 늦은 밤 돌아왔다. 부드럽게 몸을 열고 격렬하게 서은을 탐했다. 서은을 절정으로 몰아가며 그가 몇 번이고 서은의 이름을 불렀다.
다음 날 주혁은 집을 떠나지 않았다. 종일 그 집에 머무르며 서은과 함께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고 장난을 하고, 서은을 안고, 섹스를 하고. 출장을 가기 전까지 그는 서은과 많은 시간을 함께할 것이라 했다.
* * * * *
유난히 날이 흐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쨍한 햇살과 투명한 하늘이 보기 좋았는데,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 맥주 여러 병이 담긴 비닐봉지에선 찬기가 올라오고 쌀쌀한 공기가 목덜미를 스쳤다. 패딩을 걸쳐 입고 나왔지만 드러난 살점 구석구석을 바람이 에운다.
모처럼 주말에 한번 봐야지 않겠냐며, 수현이 화실로 온다 했다. 수현의 소식에 영란은 오랜만에 여자 셋이 화포를 풀어 보자 했다. 결국 알코올이다. 서은은 화실 근처 마트에서 맥주 몇 병과 안줏거리를 샀다.
마트를 나오며 주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주혁이 마트에서 무얼 사느냐고 문자를 보낸 참이었다. 맥주 몇 캔, 마른안주, 과자 몇 봉지 따위의 답을 보냈다.
주혁은 베이징이었다.
답은 금방 왔다. 술고래, 라고.
풋 웃으니 뽀얗게 입김이 퍼진다.
늦겨울의 어느 날이다.
“정서은의 새 출발을 위하여.”
뻔하고 흔한 건배사를 거창하게 외쳤다. 외치고 셋은 함께 웃었다. 서은은 오래전부터 영란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고, 수현은 서은의 소개로 영란에게 수채화 클래스를 들었다. 그걸 계기로 셋은 친해졌는데 의외로 쿵짝이 잘 맞았다.
“지난번 왔을 때보다 더 깔끔하고 예뻐졌다.”
물고 있던 오징어를 빼내고 수현이 말하였다. 오는 봄부터 서은의 이름으로 일러스트 강의를 시작할 예정이었던지라 이번 주 내내 영란과 함께 화실 단장에 힘 좀 써 보았다. 건배사처럼 서은의 새 출발이고 새로운 도전이었다. 강의를 시작한다는 건 큰 모험이기도 했다. 서은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귀가 들리지 않아도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사람과 함께 사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한없이 모나 있던 시간들이 있었다. 세상을 원망하고 사람이 싫을 때. 아무렇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미웠고 그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미움과 두려움의 일부는 그들이 만든 게 아니라 서은 스스로 만든 것이기도 했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의 모든 슬픔을 끌어안고 차오르는 분노를 마주하며 웅크린 채 다시 그것들을 무럭무럭 자라게 했다. 그러다 시작한 게 그림이었다.
“참, 내가 서주혁 상무 이야기 했나?”
가슴이 뜨끔했다. 하지만 뻔뻔하게도 서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되물었다.
“출장 갔다구요?”
“그거 말구. 왕자들의 난이 드디어 시작됐어.”
비장한 투로 말을 시작한 수현은 구구절절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결국엔 간단했다. 미국에서 훌륭한 실적을 쌓으며 승승장구하던 석현의 치적들이 실은 가짜였고 이걸 주혁이 터뜨렸다고. 그래서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서태일 회장이 진노하였고 석현과 그 모친의 입지가 애매해졌다는. 서주혁은 길러 준 큰아버지이자 법적 아버지를 내치고 동생을 내치고, 이제 남은 건 형밖에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무튼 그 세계 사람들은 돈도 많으면서 욕심은 왜 그렇게 부리는지.”
수현의 말에 영란이 곁들 듯 장난어린 핀잔을 준다.
"얼마 전엔 톡으로 서주혁, 서주혁 찬양을 하더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생긴거야 멋있긴 한데 피 섞인 가족들 배신하고 그러는 거 보면 좀 무서워. 차갑다 못해 잔인한 것도 같고. 이 일 때문에 서 상무 혼담도 일시 정지 됐다나.”
“혼담?”
순간 서은의 마음이 포물선을 그리며 고꾸라진다.
“뭐어. 어디 재벌가랑 혼담 진행 중이라고, 소문이 돌긴 했는데. 호텔이라든가, 항공이라든가. 근데 일 터져서 잠깐 정지 상태.”
“일 끝나면 다시 재생이고? 호텔인지 항공인지 알아 와 봐. 거기에 주식 좀 넣어야겠다.”
소리 없는 글자들이 서은의 혀를 뎅강 자르고 마음을 조각낸다.
갈라진 마음을 붙이기 위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때맞추어 진행되는 혼담에, 어쩌면 이것이 신이 준비한 절차이고 그것이야말로 이치에 맞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때가 되었으니 그만두라는 신의 신호이고 예고이고 경고인가 보다 생각을 한다.
들키지 않고 헤어질 수 있는 적기가 있다면 지금일 테지. 그러면 서은의 장애를 주혁이 아는 일 없이, 주혁은 훌훌 털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다행이다. 서은은 들키지 않았고, 서은의 존재가 주혁에게 짐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행여 마음의 짐으로 남아 주혁을 괴롭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단 이 일 완전히 끝나구요. 지금은 다들 정신없어서.”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우리한테 막 해도 돼?”
“이미 언론들 기사 작성 중일걸요. 이거 막느라 요즘 비서팀이랑 홍보팀 되게 바쁘다던데. 서은 씨 좋은 타이밍에 잘 퇴사했어. 황 대리 맨날 앓는 소리 하더라.”
“제가 원래 운이 좋잖아요.”
서은은 웃으며 농담으로 말을 받았다. 그녀와는 별로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그러나 마음으론 여전히 주혁을 생각했다. 수현의 이야기 속 주혁과 달리 서은의 주혁은 잔인하지 않고 자상하며 무섭지 않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베이징으로 출장을 가는 전날까지 주혁은 어딘가 지치고 피로해 보였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
그런데도 나는 몰랐고, 당신도 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나는 모르는 척해야겠지. 주혁이 어째서 그토록 무섭고 차갑게 굴어야 하는지, 그가 왜 서은에게 자상하고 다정한지. 그럼에도 이따금씩 텅 빈 바다처럼 보이는 이유 같은 건, 알아도 소용이 없는 거였다. 그래서 서은은 마음이 아프다. 주혁에게 어떠한 위로도 위안도 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게 때때로 사납게 가슴을 후벼 판다.
왜 그렇게 힘든 일들을 벌여요?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왜 그런 말을 듣고 다녀.
그래도 괜찮아.
그래도 나는 당신 편이 될게.
서은은 감히 할 수 없는 말들. 맥주를 삼키며 생각을 흘려보낸다. 만나는 동안은 좋은 생각만 할 것이다. 만나는 동안은 오로지 사랑만 하고, 행복만 하고 싶다. 모든 절망과 후회와 미련은 이 관계가 끝난 뒤로 미루고 또 미룰 것이다.
창밖으로 구름이 흐리고 바람이 매섭게 불지만 눈은 내리지 않았다. 서은은 무릎을 굽혀 고개를 기댔다. 눈을 감고 봄이 오는 소리를 상상했다.
* * * * *
화요일 저녁 서은은 홍대에서 고기를 먹었다. 지난 달 앨범의 표지를 의뢰했던 밴드의 초대였다. 그 앨범이 소위 대박을 터뜨려 각종 차트를 휩쓸었다. 앨범의 콘셉트부터 음악까지 무엇 하나 버릴 것 없다는 앨범에 대한 기사는 매일 연예 기사 톱을 차지했다. 댓글들도 호평 일색이었다. 평생 앨범 속 노래를 들을 일은 없겠지만 그 앨범은 서은의 책장에 고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어제 오후 느닷없이 밴드의 리더로부터 고기 파티 초대 메시지가 왔다. 밴드 멤버들과 앨범 제작자 몇 명이 모여 조촐한 자축 파티를 열 거라며. 주혁도 서울에 없고 요즘은 종일 화방에만 갇혀 있다시피 했던지라 심심하던 차였다. 약간의 망설임 끝에 서은은 그들의 초대에 응하였다.
홍대의 반지하 고깃집을 통째로 빌린 그들은 저마다 개성이 뚜렷했는데,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어서인지 다들 흥이 넘쳤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제대로 말을 읽지도 못했지만 그들이 만드는 풍경은 시끌벅적하고 활기가 넘쳤다.
입을 벌리고 연신 크게 웃어 대던 밴드의 기타리스트는 건배사를 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드러머는 기타리스트에게 술을 뿌리며 핀잔을 주었고 기타리스트는 다시 짓궂은 표정을 만들며 무어라 건배사를 말하였다.
서은은 건배사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서은도 함께 웃었다.
지금의 순간을 즉석에서 그려 줄수 있냐는 리더의 물음에 서은은 선뜻 그러겠다 했다. 펜으로 스케치만 한 간단한 그림을 밴드 사람들이 좋아해 주어서 서은도 기분이 좋아졌다. 밴드의 멤버들과 사진도 찍고 사인도 받았다.
주혁이 오면 보여 줘야지. 서은은 홀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밴드의 리더와 나란히 길을 걸었다. 서은은 역사로 가는 중이었고 남자는 역사 근처 편의점에 들러야 한다 했다. 걸으며 서은은 내달 클래스를 시작 한다는 이야기, 애인이 베이징에 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남자가 밴드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 멤버들을 만나게 된 이야기들을 들었다.
지난번 미팅 때 봤을 때보다 남자의 입술의 움직임이 느리고 또렷했다. 남자는 부러 힘주어 정확히 발음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고개가 서은에게 향해 있다가 앞의 전봇대를 미처 보지 못해 부딪힐 뻔하기도 했다. 남자의 배려는 고마웠지만 버겁고 어색해 보였다.
“굳이 애써 말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편한 대로 말씀하세요. 듣다가 모르는 게 있을 땐 제가 다시 물어볼게요.”
“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남자는 겸연쩍게 미소 지었다. 그럼에도 남자의 배려는 계속됐다. 길을 걷다가도 말을 할 때면 꼭 얼굴을 돌려 서은이 정면으로 볼 수 있게 하였고 서은의 말이 끝날 때까지 먼저 입을 열지 않는다.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밴드의 리더 같은 것도 하나 보다고.
역사 입구가 보였다. 남자의 말을 적당히 끊으며 인사를 하려는 순간.
모든 것이 일시에 멈추었다.
누군가 서은의 눈앞에 먹물을 끼얹은 듯,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서은의 머리로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주혁이 들어왔다. 서은을 안아 주다가도 해야 할 말이 있으면 꼭 얼굴을 보이며 말을 하던. 나란히 걷다가도 말을 할 때면 부자연스레 꼭 서은에게 고개를 돌리던. 섹스를 할 때에도 이전과 달리 꼭 서은의 얼굴을 보고 하던.
그 모든 주혁이 쏟아지듯 한꺼번에 밀려 들어와 벼락처럼 깨닫는다.
알았구나.
그 사람. 알았구나.
순식간 눈앞의 세상이 새카매지고 발밑의 세상이 유리처럼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