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함부로 마음이 마음에게-8화 (8/16)

8. 욕심이 자라는 밤

텃밭은 처참했다. 모든 게 말라비틀어져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꽁꽁 언 텃밭은 흡사 신화 속 죽음의 땅 같았다.

“난 속았어.”

이렇게 만들어 놓고서 주인이란 사람이 하는 말이 저거다.

“집 살 때 중개인이 뭐든 주렁주렁 열린다고 했는데.”

모든 책임이 중개인에게 있다는 말이었다. 서은은 털장갑을 낀 손으로 형체를 알 수 없이 죽은 이파리를 만져 보았다. 식물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죽기 전 주혁에게 욕을 했을 게 분명하다.

“대체 여기에 뭘 심었던 거예요?”

텃밭 앞에 무릎을 굽혀 앉은 서은을 따라 주혁도 몸을 숙였다.

“호박.”

"호박?”

“이왕 키우는 거 큰 걸 키워 보자 했거든. 그래야 보람도 크지 않겠어?”

유아적인 발상에 서은은 웃음을 터뜨렸다.

“시작부터 목표가 너무 거창했네.”

“뭐든 주렁주렁 열린다고 중개인이─”

“비료도 안 샀죠?”

"옛날엔 그런 거 없이 다 컸잖아.”

“그래서 굶어 죽은 사람도 많았죠. 모종 아니고 씨만 뿌린 거죠?”

“홍은슈퍼에 팔던데.”

“아, 서주혁 씨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하네.”

주혁이 이마를 찌푸린다. 서은은 작게 키득였다.

“모종이나 비료 같은 거 인터넷에 검색하면 많이 나오는데. 배달도 금방 오고. 나중에 봄 돼서 날 풀리면 상추 모종 사서 심어 봐요. 상추는 키우기 쉬워. 근데 금방 자라니까 빨리 따서 먹어야 해요.”

“그래. 그럼 봄엔 마당에서 고기도 구워 먹을 수 있겠네.”

주혁이 서은을 보며 웃었다. 추위에 입김이 폴폴 날린다. 서은은 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봄. 세상이 무채에서 유채로 변하는 그 계절. 그 봄에 서은은 없을 테지만, 주혁의 바람대로 그 봄엔 이 텃밭에 뭐든 주렁주렁 열렸으면 좋겠다. 상추를 따서 고기를 먹고, 그 옆엔 꽃도 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정서은은 뭘 먹어서 그렇게 예쁘나.”

그러다 가끔 서은을 생각해 주었으면.

“......기밀이라서. 함부로 말해 줄 수가 없네요.”

간질대는 심장을 무시하고 뻔뻔하게 받아쳤다. 주혁이 서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차가운 뺨에 닿은 입술의 감각이 낯설지만 좋았다.

주혁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고 천장이 높은 집이었다. 어릴 때 언덕 위의 큰집을 보며 아빠가 종종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이 집 사 줄게.’ 우스갯소리를 했던 게 떠올랐다. 그러나 주혁에겐 말하지 않는다.

거실과 주방과 서재와 테라스를 구경했다. 주혁의 침실과 드레스룸도. 한겨울 햇살이 옅은 갈색의 바닥과 화이트 톤의 각진 벽을 비추었다.

문밖의 세상과 다르게 따듯하고 아늑했다.

서은은 주혁의 집을 그림에 담았다. 마주 앉은 주혁도 서은을 따라 그림을 그렸다. 두 개의 그림을 나란히 주혁의 냉장고에 붙였다. 주혁이 포테이토 오믈렛과 베이컨양파볶음을 뚝딱 만들어 주었다. 너무 맛있어서 놀라니 주혁이 놀란 서은을 외려 어이없어했다. 같이 설거지를 하다 물장난을 쳤다. 부른 배를 하고도 홍은슈퍼에 가 과자 몇 봉지와 귤 한 봉지, 맥주 두 캔을 사 왔다.

케이블 영화 채널을 틀고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언제나처럼 주혁이 몸을 붙이고 키스를 해 왔지만, 언제나처럼 서은이 그를 밀어내는 지점에서 주혁은 행위를 멈추었다. 느른한 눈을 하면서도 불뚝 솟은 것을 굳이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는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거나 핀잔을 주지 않고 순순히 멀어졌다.

서은은 소파에, 주혁은 소파 아래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이불 하나를 길게 늘어뜨려 함께 덮었다. 주혁이 까 주는 귤을 받아먹었다. 주혁은 금세 영화에 몰입한 듯했다. 서은은 주혁이 말을 할까 입술을 보느라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서은의 시선을 모르고 영화에 집중하는 남자는 보아도 보아도 잘생겼다. 소쿠리에 귤껍질이 소복이 쌓였다. 맥주는 시원했다. 겨울밤은 길고 어둑했다.

이 겨울을 사랑한다. 생에 마지막일 이 겨울을.

눈을 떴을 땐 새벽이고 주혁의 침실이었다. 옆에 주혁이 서은의 손을 쥐고 잠들어 있다. 주혁의 얼굴을 가만 어루만지고 바라보다가 서은도 다시 잠에 들었다.

* * * * *

눈을 뜨자마자 늦잠을 잤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햇볕에 눈이 부셨다. 침대 위엔 서은 혼자였다. 월요일이니 주혁은 출근을 했을 거다. 갈증이 나 방을 나왔고, 주방으로 들어선 순간 서은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머리를 들이민 낯선 사람이 다이닝룸에 있었다. 그 사람도 기척을 느꼈는지 몸을 빼 서은을 본다. 머리를 하나로 올린 중년의 여인이었다. 여인은 당황하여 입을 벌렸다.

서은은 곧 여인의 정체를 깨달았다. 오래전 어릴 적 몇 번 본 기억이났다. 주혁의 연희동 본가에서 일하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서은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서은도 난감했다. 서은을 무어라 설명해야 하나.

“저─"

“어머나.”

돌연 여인은 다급하게 비디오 인터폰을 향해 뛰어갔다. 초인종이 울린 듯했다. 인터폰 화면에 남자가 비쳤다. 여인이 거기에 대고 무어라 말하였고 화면은 곧 꺼졌다.

최 씨는 남 기사를 돌려보냈다. 차 안에 깜빡 놔 둔 핸드폰을 가져다 달라 부탁했던 참이었다. 그러나 남기사에게 주혁의 집에 머무는 젊은 여자를 내보일 수 없었다. 회장님 귀에 들어갈 게 분명했으니. 남 기사를 돌려보내고 최 씨는 겸연쩍은 얼굴로 몸을 돌렸다.

“나는 아가씨가 있는 줄도 모르고. 미안해요. 주혁이 본가에서 일하는 사람이에요. 반찬 가져다주러 왔는데 내가 실례를 했네. 냉장고 정리만 조금 하고 금방 나갈 테니 걱정 마요.”

최 씨는 다시 냉장고로 가 반찬통을 정리했다. 혹여 부담스러울까싶어 일부러 여자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기한 건 어쩔 수 없어, 주절주절 입이 움직였다.

“내가 반찬 넣어 주러 종종 오거든요. 매번 이 시간쯤에, 주혁이 없을 시간에. 근데 신기하네. 주혁이가 혼자 살았어도 여자를 재운 적은 없어서. 그래서 아가씨가 있는 줄도 모르고 내가. 옛날부터 자기 집에 들어올 수 있는 여자는 돌아가신 사모님이랑 나밖에 없다고 농담도 하고 그랬거든요.”

다른 고용인들에게서도 주혁이 집에 여자를 들였다는 말은 들어 본적이 없었다. 재형 때문인지 그 부분에 있어선 결벽이 있다 싶을 만큼. 그런데 집에 여자를 들이고 거기다 잠까지 재우는 사이라면 분명 주혁에게 특별한 존재일 것이다.

냉장고 속 오래된 반찬 통을 빼내며 슬쩍 여자를 보았다. 어딘가 낯이 익은 것도 같지만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아무튼 미안해요. 앞으론 주혁이한테 미리 말하고 와야겠네.”

“괜찮습니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어머. 나 금방 나갈 텐데 그러지 말아요. 여기 있어요.”

“제 집도 아니구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저 때문에 당황하신 것 같아 죄송합니다.”

사실은 보이지 않았다. 여인이 냉장고를 정리하는 동안 입술을 움직이는 듯했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여인이 이상하게 생각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야 했다. 서은은 도망치듯 황급히 집을 나왔다.

겨울바람이 몹시 따가웠다.

* * * * *

“젊은이들 하는 식사에 늙은이 끼어 주어 고마워.”

“고마운 것 아시면 앞으론 그러지 마세요.”

준경이 심상히 말하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런 준경을 보고 기상목회장이 혀를 끌끌 찬다. 이놈 철드는 것 보고 가는 게 내 소원인데 다 글러먹었어. 불만하는 모습이 여느 집의 평범한 조부와 다르지 않다. 국내 호텔업계의 살아 있는 거성이라 불리는 상목은 준경의 조부였다. 준경이 어릴 적 사고로 부모를 잃어 유달리 정이 깊은 조손 관계이기도 했다.

연말과 연초는 늘 일이 몰리는 시기였다. 회사 업무도 업무이거니와 잡다한 명목의 모임들이 몰려 있는 시기라 중요하지 않은 사적인 자리같은 건 잘 갖지 않았는데, 오늘은 예외적으로 준경과 점심 약속을 잡았다. 전부터 녀석이 계속 애원해 대는 통에 못이기는 척 주혁이 받아 주었다. 겉으로 준경은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라는 명분을 들이밀긴 했지만 사실은 준경이 새로 벌이는 사업의 투자를 위해 마련한 자리라는 걸 알았다. 주혁이 아는 걸 준경도 알 테고, 다만 투자 건 꺼낼 타이밍만 재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상목이 나타난거였다.

상목은 사찰차 호텔에 들렀다가 지배인으로부터 둘의 모임을 듣게 되었다고 했다. 준경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준경의 새로운 사업을 상목은 별로 반기지 않았을뿐더러 조부가 있는 자리에서 친구에게 청을 하는 모양새는, 영 준경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준경은 공연히 투덜대다가 지배인의 호출을 받고 자리를 비웠다.

“저 녀석이 말하는 것, 들어주지마.”

역시나 상목은 손자의 속셈을 알고서 낀 자리였다. 주혁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건너 들어 보니 꽤 괜찮은 아이템 같던데요? 어차피 있는 돈 가만히 썩히는 것도 아깝고요.”

설령 준경이 실패해 그 돈이 공중에서 분해된다 해도 주혁은 어떠한 책망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지 말아. 저 녀석도 정신 한 번 차려 봐야 해. 멀쩡히 있는 호텔이나 공부해서 간수할 것이지, 곧 죽어도 숙박업은 저랑 안 맞는다는데. 저 녀석이 서른 넘어서도 겉멋만 잔뜩 들었어. 부모 없는 게 가여워 내가 너무 오냐오냐한 탓이지, 누굴 탓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 한마디, 한마디에 준경을 향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 주혁은 눈을 내리며 웃음을 지었다.

“회장님 뜻이 그러하시면 거절하겠습니다.”

“그래. 행여 자네 돈 썼다가 저 녀석이 날려 버리기라도 하면 내가 서 회장 볼 면목이 없어. 이 호텔도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줄 생각이야. 저 녀석도 그닥 탐내 하지도 않고 부담스러워하는것 같고. 아, 자네가 가져갈 생각은 없나?”

주혁이 눈썹을 세웠다. 서정 계열사 중 하나로 호텔이 있긴 했지만 브랜드 파워에서 상목의 호텔과 견줄게 못 되었다. 합병이 이루어지기만한다면야 서정의 입장에선 말 그대로 대박이지만, 그런 일이 벌어질 리만무했다. 어차피 상목이 지금 하는 제안도 본심은 아니었다. 농담에는 농담으로 맞받아치는 게 맞을 터였다.

“언제든 준비해 놓을 테니, 필요하시면 불러 주십시오. 회장님의 치적을 생각해 호텔 캐슬의 브랜드는 유지하겠습니다.”

상목이 껄껄 웃었다.

저 능력하며, 배짱하며. 확실히 탐나는 재목이긴 했다. 서 회장이 자식 농사는 망쳤어도 손주 농사는 잘지었다. 또래의 범인들보다 다른 빛이 나는 사내였다. 인물도 잘났고 능력도 훌륭하며 배포가 두둑하니.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내 할 테지만, 주혁에게는 늘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전제가 하나 있었다.

그 출생만 아니라면.

돈 있는 집안에서 우애 좋은 집안이 얼마나 될까 싶었지만, 주혁의 경우는 그중에서도 특수한 축에 속했다. 적이 너무 많은 인사였다. 인물과 능력을 보고 사위로 삼아 볼까 싶다가도 그 출생으로 인해 손사래를 친 집안을 상목은 벌써 몇이나 알고 있다.

대외적으로 서태일 회장의 두 아들은 모두 망나니였다. 둘은 나이 차가 꽤 큰 이복형제였다. 해서 후계는 큰아들로 일찌감치 내정되어 있었지만 큰아들은 무능했다. 그렇다고 작은아들이 유능한 것도 아니었다. 나온 배가 달랐지만 형제는 똑같이 망나니여서 모두 태일의 눈 밖에 났는데, 작은아들이 더 대단한 망나니여서 일찌감치 집에서 쫓겨날 정도였다더라, 하는 카더라는 이미 진실이 되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린 지오래다.

결국 그 둘째 아들은 어미를 모르는 아이 하나를 남기고 불명예스럽게 죽었다. 어미를 모르는 그 아이는 큰아들 부부의 아들로 입양되어 살고 있다.

그 아이가 장성해 은혜를 모르고 거둬 준 큰아버지를 향해 칼을 들이 민다지. 주혁이 재형을 밀어냈다는 소문이 여의도에 파다했다. 사지 멀쩡한 아비를 밀어내고도 얼마간 그 배후에 주혁이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었다.

일 처리에 있어서 칼로 베듯 날카롭고 때로 잔인하다 생각될 만큼 사정을 봐주지 않는 건 주혁의 타고난 성품에서 비롯된 것일 거였다. 그다음 타깃은 승혁, 혹은 미국에 있는 석현이라는 소문은 진실이 되어 떠돌았다.

그러나 상목만은 사람들이 진실이라 믿는 진실의 ‘진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친우의 손자이면서 손자의 친우이기도 한 주혁이 늘 안타깝기만 하다. 태일과는 죽마고우였던 탓에 주혁이 그 집에 들어간 해부터 주혁을 알아 온 상목이었다.

부모의 죄가 대를 이어 간 탓에 주혁은 능력이 있음에도 서정에서는 결코 날개를 펼 수 없을 것이다. 서정에 있는 한 그는 늘 승혁의 그림자로 살아갈 것이다. 차라리 준경의 동생인 신희와 짝을 지어 이 호텔을 물려준다면.

생각을 하다 상목은 허허 웃어 버린다. 모두 늙은이의 오지랖이다.

* * * * *

아주 게으른 목요일이었다. 서은은 늦잠을 자서 늦은 아침을 시작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 책상 앞에 앉았다. 인디밴드의 앨범 표지에 실을 일러스트 시안을 완성해야 했다. 최근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인기를 얻고 있는 밴드였다. 앨범의 이름은 ‘지금, 우리, 서울’.

서정을 퇴사하고 받은 네 번째 외주 의뢰였다. 지난 주 미팅에서 밴드의 보컬이 말하기를, 서은의 그림과 자기네들의 음악이 무척 잘 어울린다고 했다. 느린 흐름과 포근한 느낌같은 것이 비슷하다고. 서은은 잘 모르겠다. 그들의 음악을 들어 본 적이 없으니.

다만 앨범의 제목과 곡명들을 통해 분위기를 짐작하고 소리를 상상하여 그림을 그려야 했는데, 그들은 그래서 더 좋아했다. 그 이질감이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하였다. 그들의 매니저는 청각 장애인이 그린 앨범표지라 홍보를 한다면 반응이 꽤 좋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서은은 적당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청각 장애인임을 밝히지 않기를 요구했다. 그들은 수긍하면서도 아쉬워하는 기색이었다. 서은이 SNS에 그림을 올릴 땐 필명을 사용했는데 당연히 그녀가 청각 장애인이라는 걸 밝히지 않았다.

다만 SNS에서 그림이 인기를 얻고 외주 요청이 들어오고 클라이언트들을 만나면, 그들에겐 서은이 듣지 못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럴 때면 종종 밴드의 사람들처럼 일러스트레이터가 청각 장애인이라는 걸 홍보에 써도 되느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장애도 희소성이라는 가치를 갖나 보다. 씁쓸해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체념하여 덤덤해졌다. 순간 서은은 아차 한다. 생각이 또 부정으로 흐르고만다. 장애가 진실로 무서운 이유는 스스로를 부정한 생각에 가두는 것이다.

해서 이번에도 생각을 지운다. 서은은 연필을 들어 길게 선을 그었다.

여덟 시가 되었을 때 작업실을 나왔다. 배가 고파 오전에 만들었던 미역국을 다시 끓이고 냉장고에서 반찬 몇 가지를 꺼내 식탁에 올렸다. 홀로 식탁에 앉은 서은은 뜨거운 미역국을 떠 호 불며 삼키었다. 밥알과 함께 어묵을 우물우물 씹으며 핸드폰을 본다. 주혁에게선 종합기술원장과 저녁을 먹고 있다는 걸 끝으로 연락이 없었다. 주혁에게는 밥을 먹는것도 업무의 일부였다. 주혁은 여전히 일이 많았다. 또한 여전히 서은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

이따금 주혁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땐 그저 예사로운 척 모르는 척 무슨 말이냐 되물었다. 때론 재밌는 화젯거리가 막 생각난 것처럼 말을 돌리기도 했고 웃음으로 넘기 기도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높은 하늘에서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넘어질 듯 말듯 위태로운 속도로 달리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주혁에겐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주혁과 함께할 수 있으니까.

메시지 창을 조금 올려 본다. 이런 잠순이, 하는 내용과 나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다는 내용과 너는 지금 무얼 하고 무얼 먹느냐는 질문들.

서은은 때때로 주혁의 다정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했다. 일에서만큼이나 연애에 있어서도 성실한 남자였다. 바쁜 와중에도 꼬박꼬박 연락을 하고 서은을 보러 오고 때론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크리스마스이브에도, 크리스마스에도 주혁이 바쁜 탓에 오래 함께 하진 못했지만 와중에 들러 선물을 안겨 주었다. 오늘은 이브라서, 오늘은 크리스마스라, 오늘은 해의 마지막 날이라, 오늘은 돈이 남아서, 오늘은 사고 싶어서, 오늘은 맛있어 보이 길래, 오늘은 예뻐서.

종류를 가리지 않고 갖가지 이유로 늘어나는 선물들이 버거워 거절했을 때.

‘이렇게라도 해야 환심을 사지.’

답하는 주혁은 무성의하면서 피곤한 얼굴이었다.

서은의 이런 거절은, 의미 없다는듯. 이따위 소모적인 논쟁에 시간을 쓰는 건 아깝다는 듯.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 건 알아. ’

말의 의미를 이해했을 때 그게 무슨 말이냐 반박하기도 전에 이어지는 말들이,

'때되면 알아서 관둘 테지만.’

서은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이런 식으로 피곤하게 하지 마'

남자는 이렇든 저렇든 상관이 없다는 얼굴로 하는 말들이지만 서은은 도저히 그런 얼굴론 할 수 없는 말들이이서,

‘연기라도 하든지.'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진짜처럼.’

진짜처럼. 이 순간이 가짜여도. 진짜처럼.

그 말에 수긍하여 주혁이 하고 싶은 대로 가만 놔두었다.

바쁜 중에 잠깐이라도 들러 선물을 줄 때면 세상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기뻐하며 선물을 받았다. 바쁜 중에 서은을 생각해 주었다는 거니까, 때 되면 사라질지라도 그 순간의 그 감정만큼은 서은을 향한 것일 테니까.

서은은 기뻐하며 선물을 받았고 감사의 의미로 주혁에게 키스를 했고 그 순간들을 오롯이 마음에 새겼다. 그러는 스스로가 발칙하고 앙큼할 때도 있었다. 가벼운 관계에서 허용되는 다정과 낭만의 범위를 아직도 헤아리지 못하겠다. 지금은 그저 착실하게 흐르는 하루하루를 감당하며 살아갈 뿐.

핸드폰의 화면을 다시 검게 만든다. 서은은 마지막 숟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거지를 하다가 창문 넘어 쌓인 눈을 보았다. 오후내 눈이 푹푹 내리더니 길에도 나무에도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그릇을 털고 선반 위에 올렸다.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거품이 남아 있는 싱크대를 정리했다. 고무장갑을 벗어 건 후 다시 작업실로 들어갔다. 시안을 이번 주까지 완성하여 보내야 했다.

그래서 연필을 드는데,

문득 서은은 초조해진다.

일월의 중순이다. 다음 주는 설날이고, 명절을 보내면 이월이 오고 입춘이 온다.

돌연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주혁의 집으로 달려갔다. 심장이 덜덜 떨렸다. 초인종을 눌렀다. 당연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급히 주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디냐고. 언제오냐고. 바쁜지 주혁은 한참간 답이 없었다. 서은은 대문 앞 디딤돌에 몸을 구부려 앉았다. 시간이 흐른다. 주혁에게 문자가 왔다.

[이제 끝났어. 홍은동 가는 중.]

다시 서은은 기다렸다.

홍은슈퍼를 지나 골목에 들어섰을 때부터 서은이 보였다. 무릎을 굽혀 몸을 웅크린 여자는, 분명 서은이었다. 서은도 그를 발견했는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겨울의 밤중이다. 눈이 내렸고 길이 얼었다. 그가 차고에 차를 주차하고 서은에게 가는 동안 서은은 서 있던 그자리에 멈추어 서 그를 바라볼 뿐이다.

주혁은 서은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불쑥 화가 솟았다. 그는 읊조리듯말을 뱉었다.

“너, 언제부터.”

“지금.”

서은이 다급하게 주혁의 말을 잘랐다. 의미를 알 수 없어 주혁의 눈가가 미세하게 일그러진다.

“지금이에요.”

말하며 서은이 주혁을 껴안았다. 까치발을 들어 남자를 힘주어 안고 눈을 감는다. 주혁의 몸이 움찔거렸다. 주혁에게서 희미한 담배 냄새가났다. 독하지도 매캐하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어딘가 달콤하면서 씁쓸하다. 주혁의 향이다. 매끄러운 재킷, 넓은 등, 머리카락, 체온, 숨결, 단단한 가슴, 두근대는 심장, 체취, 달밤. 이 모든 것이 좋았다. 놓치기 싫었다.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사라지지 마. 아직은.

주혁이 그의 목에 두른 서은의 팔을 풀었다. 싫다. 떨어지기 싫었지만, 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주혁은 서은을 품에서 떼어 내고 고개를 내리며 서은을 보았다. 시선으로 서은의 얼굴을 훑고 살핀다. 냉한 남자의 눈빛이 견고했다. 서은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고집스레 맞섰다.

얼마간 말없이 서은을 바라보던 주혁이 도발하듯 서은의 뺨을 잡아든다. 주혁이 몸을 붙여 오며 서은이 주춤 뒤로 물러났지만 곧 그녀도 지지 않겠다는 듯 발을 멈추고 주혁을 직시했다.

주혁의 얼굴이 바짝 다가온다. 서은은 찰나 호흡을 멈추었다.

“준비는?”

“......끝났어요.”

주혁이 희미한 웃음을 짓나 싶었다. 곧 고개를 숙였다. 코끝이 스쳤다. 서은은 다시 느릿하게 숨을 쉬었다. 그가 몹시 아슬한 틈을 남겼을 때 잠시 멈추는가 하였다.

서은의 뺨을 감싸 올려 순식간 입술을 연다. 건조하고 차가운 손길이었음에도 열이 뻗쳤다. 주혁의 다른 손이 서은의 허리를 끌어당긴다. 거듭 주혁의 입술을 받으며 서은도 다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입술 사이로 서로의 열기를 교환했다. 축축하고 말캉한 촉감이 기분 좋아 서은은 짙게 신음을 뱉었다.

여느 때보다 더 깊고 짙은 혀의 움직임으로 서로를 탐했다. 순식간몸이 달아오른다.

구석구석, 욕망이 퍼졌다.

* * * * *

“불, 켜 줘요.”

가쁜 숨을 쉬는 와중의 부탁이었다. 서은이 손을 들어 주혁의 뺨을 어루만졌다.

“보고 싶어.”

말의 끝에 흐읏, 신음이 나오며 얼굴을 찌푸렸다. 주혁이 니트와 속옷을 올려 유두를 비튼 까닭이다. 주혁의 혀가 다시 서은의 입안으로 들어오고, 주혁은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옷 안으로 들어온 그의 두 손이 힘껏 서은을 안는다. 주혁은 그대로 서은의 옷을 밀어 올려 순식간 벗겨 냈다.

무의식중에 서은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옷가지를 향했는데 주혁의 손이 부드럽게 뺨을 감싸며 그를 보게 했다.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다정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평생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서은은 일렁이는 흥분 속에서 예감했다.

선 채로 받는 애무는 낯설지만 뜨거웠다. 벽에 몸을 맞대어 물리기도 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기대어 빨리기도 했다. 주혁에게 물리는 살들이 가끔은 간지럽고 가끔은 아팠다가 가끔은 짜릿했다. 그 모든 느낌이 동시에 밀려올 때면 주혁의 어깨를 꾹 쥐었다. 서은도 주혁을 따라 그의 목을 물기도 했다.

주혁이 견딜 수 없다는 듯 숨을 짙게 뱉었을 때 서은의 몸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천장이 높고 환하다. 그 아래서 서은은 숨을 헐떡였다. 야릇한 쾌감들이 그의 입술을 타고 끝없이 번졌다. 주혁이 서은의 허벅지를 벌리며 안쪽의 여린 살을 물었을 때는 숨이 턱 하고 막히는 느낌이었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럼에도 주혁은 봐주지 않고 서은의 허벅지를 잡아 벌리며 더욱 안쪽의 살을 빨아들였다. 어떤 기대감에 눈앞이 흐릿해지고 뱃속이 울렁였다.

“아읏, 아아.......”

몸을 떨며 다리로 주혁의 머리를 감았다. 모두 서은의 의지로 움직이는 행위는 아니었다. 주혁은 평소의 그와 다를 바 없이 성실하고 고집스러웠다. 주혁의 입안에서 미끄덩대는 살점들 덕에 서은은 정신을 차릴수 없었다. 주혁의 행위가 무척 낯설고 부끄러워 수치스럽기까지 할 때 그를 밀어내 보기도 했지만 밀리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는 오히려 더 집요하게 혀와 손을 움직였다.

주혁이 서은의 젖은 속옷을 잡아 내릴 때, 서은은 뒤늦게 그의 입술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서은이 흐느끼듯 말하였다.

“얼굴. 보여 줘요. 싫어.”

신음과 함께 띄엄띄엄 내뱉는 말에 주혁이 동작을 멈추었다. 입술이 서은의 하복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주혁이 움직임을 멈춘 잠깐의 시간 동안 서은은 흐린 시야를 정돈하고 가쁜 숨을 가라앉혔다.

주혁이 몸을 일으켰다. 잠시 서은에게 일별을 주었다가 몸을 돌린다. 그는 셔츠의 단추를 풀고 벗어 던졌다. 바지의 버클도 풀고 내리고 벗고 하는 그 흐름이 여유롭고 느릿했다. 서은은 망연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나체가 된 주혁이 다시 서은의 몸 위로 올라온다. 주혁은 서은을 포박하듯 두 팔을 서은의 머리 옆에 두고, 어긋남 없이 그의 맨살이 서은의 몸에 닿게 했다. 남자와 살이 맞닿자 다시 몸이 뜨거워졌다. 남자의 가슴에 짓눌리는 가슴과 맞닿은 배, 서은의 다리를 묶듯이 결박하는 남자의 하체가 움직임도 없이 서은을 자극했다.

지척에서 주혁이 숨을 흘렸다. 그가 아까보다 더 다정한 눈길로 서은을 내려 보며 묻는다.

“뭐가?”

주혁이 서은의 뺨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 귀 뒤로 넘기며 재차 물었다. 물으며 남자의 하체가 조금씩 움직였다. 단단하게 툭 튀어나온 것이 맞닿은 서은의 하체에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 기분이, 미칠 것 같았다.

“뭐가 싫은 건데?”

귀를 지분대던 손가락은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가 서은의 몸을 간질였다. 그러다 끝에는 서은의 은밀한 곳으로 향하였다. 아까는 내리지 못했던 속옷 속으로 밀고 들어와 맞물린 곳을 부드럽게 더듬는다. 서은의 의지와 상관없이 쾌락을 예감하는 몸이 긴장과 흥분에 휩싸였다.

이윽고 그가 서은의 깊은 곳에 손을 넣었을 때 서은이 다시 신음을 흘렸다. 얼굴이 찌푸려지며 아득해진 눈이 저절로 감겼지만 애써 쾌감을 떨쳐 내 주혁을 보았다. 주혁도 그런 서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밝은 눈동자가 선명하여 더욱 노골적이었다. 주혁의 손이 움직인다. 서은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숨을 뱉었다.

하아. 으응. 하앗.

흐느낌 같기도 허덕임 같기도 한 그 소리들이 주혁은 마음에 들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다가 무언가 견디지 못해 서은이 숨을 참을 때는 짜릿했다. 움직임을 빨리하자 서은이 헐떡이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주혁은 멈추지 않고 다시 서은의 입술을 벌려 혀를 넣었다.

“그만. 아아. 으응. 하아, 앗. 응......!”

착실한 손의 움직임에 신음을 터뜨리는 서은의 혀와 숨이 끔찍하게 달았다.

“싫어하지 마.”

입술을 맞댄 채 말하고, 입술을 빨아들인다.

“사랑해 줘, 나를.”

다시 입술을 맞댄 채 말하고 또 부드럽게 핥아 올렸다. 어느 순간 그가 손을 멈추고 몸을 들었다. 서은이 흐릿해진 눈으로 숨을 들썩이며 그를 본다. 그는 서은이 답을 할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었지만 결국 성마르게 재촉하고 만다.

“답은?”

서은의 가슴과 숨이 점차 가라앉았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서은이 슬며시 그의 눈을 피했다. 주혁은 그런 서은의 얼굴을 잡아 그를 향하게 하며 다시 요구했다.

“답을 해 줘.”

서은과 달리 남자의 눈빛은 정결했다. 정결한 남자의 눈빛엔 빈틈이 없다.

서은이 입술을 끌어모으는가 싶었다. 하지만 끝내 서은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반쯤 일으켜 그의 뺨을 감싸고 입을 맞춘다.

서은이 혀를 움직이며 가만 멈춰있는 주혁에게 서툰 자극을 주었다. 그래도 주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뺨을 핥고 귀를 무는 어줍은 움직임 끝에 서은은 주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끌어안았다. 그가 무슨 답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무엇을 물었고 그녀가 무엇을 답해야 하는지 서은은 죽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설움을 참아 내고 서은은 간절히 부탁했다.

“멈추지 마요.”

그때 주혁의 턱이 움칫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곧 주문처럼, 다시 주혁이 움직였다.

그가 서은을 눕혔다. 주혁은 그 위에 올라타 서은의 코와 입과 뺨과 목과 가슴과 배에 거듭 입술을 누르며 아래로 내려갔다. 주혁이 입술을 내리는 방향을 따라 남자의 머리칼이 맨살을 간질였다. 느린 움직임이 긴장을 더한다. 주혁은 서은의 사타구니로 향하는 바로 위에서 입술을 찍고 몸을 일으켰다.

다시 마주 본 주혁의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캐러멜색의 눈동자가 영종도의 밤바다만큼 차갑고 어둡다. 어쩌면 그가 화가 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서은이 답을 하지 않아서. 해 줄 수가 없어서.

남자의 화를 풀어 줄 길이 없다.

“......미안해요.”

충동적이지만 진심을 담아 하는 말이 또 다른 주문이 된 것 같았다. 주문처럼 일순 모든 것이 정지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과 공간과 감각, 그 모든 것들이.

무표정하게 서은을 응시하던 주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주혁의 기이한 웃음과 함께 다시 시간이 움직였다.

웃음이 멎고도 주혁은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는데, 겨울밤의 시린 공기를 끌어모은 듯 뿌리 깊은 냉기가 함께 내려앉아 있다.

“섹스를 하다가 사과를 하는 건 무슨 의미야?”

그는 느리고 명료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서은은 답하지 못한다. 여전히 답하지 않는 서은을 보고 주혁은 어슷하게 웃었다. 미소와 냉기가 혼재된 얼굴이 서은의 마음을 서걱 베었다. 주혁이 불시에 서은의 젖어 있는 곳에 손가락을 넣었다.

“멈추지 않고, 끝까지 갈 거야.”

넣으며 동시에 다른 손가락으론 툭 튀어나온 돌기를 문지른다.

아, 안 돼. 반사적으로 말하자 그는 고개를 비틀며. 부러 묻는 눈으로 서은을 내려 봤다. 이게 네가 원하는 것 아냐? 하는.

주혁이 다시 고개를 내렸다. 주혁은 서은의 가슴을 물고 아래로는 더 깊숙이 손가락을 넣었다. 미끄럽고 진득하게 달라붙는 그곳을 자극하자 다시 서은이 흐느낀다. 그만, 제발, 하는 말들을 무시하고 서은을 몰아붙였다.

신음이 비명이 되어 터지는 순간, 주혁이 젖은 몸을 가르고 들어왔다.

남자의 것이 밀고 들어오자 또 다른 열락을 예감하는 서은의 깊은 곳이 다급하게 경련했다. 서은은 얕은 숨을 뱉었다. 좀 전의 한계를 넘어서는 느낌이었지만, 곧 그 한계의 한계를 넘어설 것이라는 것을 동시에 직감했다.

부피를 늘려 꽉 채워 오는 것의 느낌이 뜨겁고 아찔했다. 주혁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서은의 입술에 키스를 한다.

으응, 응. 남자의 느릿한 움직임을 따라 목구멍이 메아리치듯 울려 신음이 나왔다. 가늘게 눈을 떠 주혁을 보았다. 고통인지 쾌락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각을 느끼는 것은 서은만이 아니었는지 주혁도 미간을 좁혔다. 잠시 입술이 떨어진 짧은 순간 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쏟아졌다. 이제껏 본 적 없는 무방비한 얼굴의 남자가 서은의 흥분을 부추겼다.

듣고 싶어.

찰나 그런 생각을 했다. 서은도 주혁의 소리가 듣고 싶었다. 서주혁이 흥분에 휩싸여 내는 소리들이 미치도록, 끔찍하게, 간절하게, 궁금했다.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간절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일은 끔찍한 고통이었다. 이 참담한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생각을 떨쳐 내야 했다. 소리가 아닌 쾌락에 집중해야 한다.

서은은 주혁에게 붙잡힌 팔을 빼내어 그를 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흡입하듯 숨을 들이마시자 주혁도 서은을 안아 온다. 주혁은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퍽퍽, 강렬하게 부딪히며 뜨겁고 질척이는 느낌이 더욱 선명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끝까지 밀려오는 주혁의 몸을 견딜 수 없어 서은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주혁이 서은의 고개를 안은 손을 내려 엉덩이를 잡아당기고 더욱 격렬하게 몸을 부딪쳐 왔다.

“아혹. 윽, 흐읍.”

주혁의 살이 부딪힐 때마다 숨이 턱, 턱 막혔다. 막힌 숨은 신음성으로 터져 나와 주혁을 자극하고, 주혁은 더욱 격렬한 움직임으로 서은의 소리를 터뜨렸다. 이제는 서은의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가 비명인지 신음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부딪히는 남자의 하체가 거대한 물살처럼 서은의 살에 마찰했다. 어느 순간 손과 혀의 애무도 잊고 주혁은 신음하며 거칠게 허리만 치댔다. 짐승 같은 움직임이었다.

마침내 깊은 곳에서 점차 무엇인가 울컥이며 올라오는 느낌에 서은의 이성이 잡아먹히는 듯했다. 서은은 주혁을 붙잡은 손도 놓아 버렸는데, 기실 놓은 것은 손이 아니라 스스로인 느낌이다. 온몸의 신경이 쾌락에 붙잡혀 서은 자신을 놓아 버리는 느낌이다. 아아, 제발. 아니, 좋아. 하아. 머리를 채운 그 단어들이 소리로 튀어 나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주혁이 허리를 잡아당기더니 더욱 속도를 높였다.

안 돼. 경험한 적 없는 감각의 예감에 본능적으로 저항하지만, 서은이 할 수 있는 것은 서은은 들을 수 없는 소리를 터뜨리는 것뿐이었다. 주혁의 몸이 쿵쿵쿵 밀려왔다. 빠르고 세게, 뜨겁고 질퍽이게 맞부딪치며 멈추지 않는다. 온 신경의 감각이 아래에 집중됐다.

마침내, 서은의 안에서 무엇인가 터졌다. 비명을 질렀다. 몸을 떨었다.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깜깜했다. 몸이 바다 깊은 곳으로 떨어졌다.

잠시 후에 주혁이 다시 들어오자 악 소리를 냈다. 남자가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그만. 제발. 미약하게 저항해 보지만 무용했다.

주혁이 곧 속도를 높였다.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질러도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우주만 한 파도가 다시 서은을 덮쳤다.

* * * * *

새근한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맞닿아 있는 남자의 단단한 가슴이 크고 느리게 진동했다. 이불은 없지만 덮치듯 서은의 몸 위에 몸을 포갠 남자 덕에 서은은 춥지 않았다. 서은의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묻은 남자의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였다.

남자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움직임에 주혁이 느른한 눈을 올리며 시선을 맞춰 온다. 웃음기 없이 나른한 얼굴이 관능적이다. 얼마의 눈 맞춤 후 주혁이 고개를 올려 서은의 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한 번의 흡인 뒤에 주혁은 다시 서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서은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탁자 위의 핸드폰을 찾았다. 그러자 주혁이 자연스레 서은의 몸에서 내려갔다.

주혁은 엎드린 채 고개를 돌려 서은을 보았다. 서은은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들었다. 그는 시선으로 서은의 몸을 훑어 내렸다. 부드럽고 탐스러운 곡선의 몸이다. 하얗고 뜨겁고 부드러운 몸. 감각을 떠올리니 은밀한 흥분으로 몸이 다시 뜨거워지고, 성기엔 피가 돌아 딱딱하게 솟는다.

팔을 뻗어 서은의 허리에 감았다. 서은은 잠깐 움찔이며 눈을 마주칠 뿐, 그의 팔을 밀치지 않았다. 서은의 시선이 이내 거두어졌다. 그는 엄지로 서은의 허리 어딘가를 문질렀다. 은밀하게, 부드럽게 지분대지만 서은의 눈은 주혁에게 향하지 않는다.

더 하겠다 하면 싫어하겠지, 권태로이 생각했다.

정적 속에서 주혁이 몸을 일으켰다. 주혁은 얼굴을 한 번 슬더니 방을 나갔다.

어디를, 왜 가는 거예요? 서은은 묻지 않았다. 어쩌면 서은이 보지 못한 사이에 그가 말을 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대신 고개를 돌려 방금 전 주혁이 머물던 자리를 바라봤다. 빈자리가 허무하고 소슬하다. 주혁이 없는 침대에 가만있자니 그 서늘한 감각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서은도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욱신거리는 하체는 무시하고 바닥에 발을 딛고 섰다. 바닥에 옷가지가 낭자하게 흩어져 있었다. 열기가 사라지고 남은 공간은 아무렇지 않아 평범하기만 해서 더욱 적나라한 느낌을 준다.

몸을 굽혀 서은의 옷들을 주워 들었다. 그러다 서은은 뒤늦게 천장 형광의 밝은 빛이 부담스러워졌다. 침대 협탁에 스탠드 전등이 있던데 그걸 킬걸, 하는 작은 후회가 들었다. 니트에 몸을 넣으며 형광등을 끄고 사이드 테이블 위의 스탠드 조명을 켰다. 사위가 푸릇한 와중에 은은한 주황색 조명이 방을 밝혔다.

이어서 마저 속옷을 줍는데 방의 한 면을 가득 채운 블라인드로 시선이 갔다. 슬랫이 세로로 이어진 버티컬 블라인드였다. 호기심에 줄을 당겨 슬랫을 살짝 옆으로 보냈다. 제일 먼저 달이 뜬 밤하늘이 보였다. 그다음엔 불이 꺼져 구석구석 어둠이 밴 동네를 내려 보았다.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데다 이 근방의 다른 주택들보다 높이가 훨씬 높은 집이어서 전망이 꽤 넓었다.

다시 시선을 올려 하늘을 봤다. 맑고 검은 하늘이 모든 소리를 잡아먹어 고요하고, 모든 거짓을 덮어 어두운 게 아닐까, 하는 아연한 생각도 했다.

유리창으로 주혁의 인영이 비쳤을 때 서은은 몸을 돌렸다. 다가온 주혁이 컵을 건넸다. 서은은 그 컵을 들고 물을 마셨다.

“뭘 봐?”

물으며 주혁이 서은의 손에서 컵을 받아 간다.

“......달이요.”

“달?”

“밤도, 별도.”

주혁이 감흥 없는 얼굴로 아아,하며 살짝 고개를 튼다. 서은이 아는 주혁의 습관. 무의식중에 웃음이 나오는데 그가 서은의 뺨을 들었다. 잠시 가만 내려 보더니 꾹 입술을 눌렀다.

“이제 나를 봐.”

이따금씩 남자는 왜 이리 소년 같은지. 하지만 그 모습이 싫지 않았다. 서은보다 커다랗고 넓은 남자가 보여 주는 여리고 말랑한 부분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서은은 남들보다 좀더 특별한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돌연 그가 눈썹을 비뚜름히 올렸다.

“옷은 왜 입었어?”

다시 옷을 벗기고, 서은의 손을 잡아 이끈다.

침대 위로 뒹굴 구르듯 넘어갔다. 주혁이 서은의 손을 끌며 서은을 그의 품으로 당겼다. 이마에 따듯한 숨이 닿았다. 서은은 무심결 남자의 뒤에 있는 테라스 창 너머 하늘을 보았다. 달이 서쪽으로 지고 있다. 달을 따라, 밤도 같이.

주혁이 이번엔 서은의 얼굴을 잡아 이끈다. 시야에서 밤이 사라지고 빈 시야를 주혁이 채웠다. 주혁은 서은이 그를 보게 하며 그도 서은을 응시했다.

한참간 말없이 바라보더니, 주혁의 입술이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추었다. 싫어해도, 하고 싶어. 그런 말을 했던가.

점차 깊어지는 호흡과 키스에 서은도 반쯤 눈을 내렸다. 서은을 잡아 이끌었던 손은 여전히 서은의 손을 잡고 있다. 도시의 밤과 별은 달을 따라 오늘도 내일도 지고 뜨고 다시 지기를 계속할 테지만, 그녀를 이끄는 남자의 손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생각을 해 본다. 나는 언제까지 이 손에 잡혀 줄 수 있나 생각을 해 본다.

무럭무럭, 욕심이 자라는 밤이다. 그 욕심을 가눌 수 없어, 괴로운 밤이다.

* * * * *

주혁이 눈을 떴을 때 서은은 없었다.

긴 겨울밤의 한바탕 꿈처럼 여자는 사라지고, 그가 누운 방은 어제와 그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커튼의 벌어진 틈 사이로 날카로운 햇살이 들어와 눈을 찔렀다. 욕지기가 올라오는 것을 누르고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무심중 간밤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의 아래서 욕망에 쾌락에 흐느끼고 눈물을 흘리고 뜨거웠던 여자도 함께.

감각은 이토록 선명한데 명징하게 보이는 것이 없다.

사과를 했던가. 미안하다고.

무엇이, 자문하다가 비틀리는 웃음이 새 나왔다.

사랑해 달라는 요구에 딸려 오는 답이 사과라.

언제 어디서든 그와의 관계에 있어 어떠한 확신을 주지 않는 여자였다. 친절하게도 서은은 이 관계를 시작할 때부터 그것을 분명히 밝혔으며, 주혁도 거기에 응해 주었다.

분명 모르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런데도 나는.

욕설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시간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나오며 주혁은 고개를 쳐드는 어떤 의문에 몹시 짜증이 난다.

왜 나는 안 되는 거지?

강아지도, 마당이 있든 없든 하는 집도, 매달 나오는 월급도 다 가져다줄 수 있어. 몇 마리든 몇 채든 얼마든 다. 그런데 왜 나는 안 되는데? 왜 나는 가볍게만 허용되는 거지? 왜 나는 한낱 네 유흥거리일 뿐이어야 해?

네가 긋는 그 같잖은 선 안에서 놀아나는 더러운 기분을, 왜 내가 감당해야 해.

넌더리가 나 묻지만 답은 알고 있다. 모든 의문의 답은, 그가 서주혁이라서. 그의 존재 자체가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을 하는 기분이 엿 같다. 하여 질문을 관둔다.

대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꿈이 아닌 현실임을 확인받고 싶어 문자를 보냈다. 핸드폰을 침대 위에 던져놓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다.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고 집을 나서는 동안까지 서은에게서 답은 없었다.

분별 있는 홍 실장은 평소보다 출근이 늦은 주혁에게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커피와 함께 오늘의 일정표를 건넬 뿐이다. 주혁은 커피를 마시는 동안 국내외 통신과 신문을 통해 간밤 일어난 일들을 확인하고, 오전 회의 자료를 점검하여 출력했다. 주혁은 회의가 시작되기 오 분 전 집무실을 나왔다.

불안이 신경을 좀먹어 불쾌로 이어지고, 불쾌는 날카로운 창이 되어 그의 가슴을 할퀼 때에,

서은에게 답이 왔다.

[오전에 일찍 외주 미팅 있어서 나왔어요. 자는 사람 깨우기 싫어서 그냥 나왔는데. 출근했죠? 오늘도 열일해요. 으쌰으쌰.]

문장의 마지막엔 두 주먹을 불끈 쥔 이모티콘도 달려 있다.

표정 없이 문자를 본다.

주혁은 서은의 거짓말을 믿기로 했다.

* * * * *

때때로 서은은 낯선 곳에서 서주혁을 봤다. 신문의 지면이나 인터넷의 블로그나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 그곳에서 주혁은 조연으로 나오기도 하고 주연으로 나오기도 했다.

서정의 서주혁 상무가 외국의 무슨 기업과 협약을 체결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무슨무슨 정도의 이익이 기대된다는 이야기. 또는 기자가 지난해 기업들의 성적을 매기며 ‘잘했어요’ 도장을 받은 서주혁의 이야기. 서태일 회장의 업적을 늘어놓는 기사의 끄트머리에, 일가를 설명하며 짤막하게 나올 때도 있었고, 그의 기이한 가정사에서 비롯된 추문 속에 등장하기도 했다.

서태일 회장이 더 이상 망나니짓을 봐줄 수 없어 내쫓았다는 서재하의 아들. 친모가 누구인지는 불명하지만 서재하가 죽고 서재형과 최난영 부부의 둘째로 입양되었다는. 공식적으로 서정은 서재하의 사인을 밝히지 않았지만 죽음의 이유가 자살이라는 의혹이 인터넷에 파다했다.

창을 껐다.

뜬금없이 주혁의 이름을 검색해 본 건, 기다림이 지루해서.

오후에 주혁으로부터 여덟 개의 숫자가 적힌 메시지가 왔었다. 비밀번호라고. 그러니까 집에서 기다려, 라고.

서은은 현관문이 보이는 자리의 식탁 의자에 앉아 주혁을 기다렸다. 사선 방향의 TV에선 예능인들이 직접 잡은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TV를 켜 놓긴 했지만 그건 주혁을 속이기 위한 일종의 소품 같은 것이다. 주혁이 들어오면 멀쩡하게 TV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몸을 일으킨 척 반겨 줄 거였다.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며 주혁을 기다렸다. 냉장고를 구경하기도 하고, 수첩에 그림을 끄적이기도 하고,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기도 했다. 마침내 시간이 지나 문이 열렸다. 서은은 하던 것을 멈추고 현관으로 다가갔다. 틈 사이로 선득한 찬 기운과 함께 주혁이 들어왔다.

새벽에 봤던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일 뿐인데도 가슴이 뛰었다. 얼굴을 마주하자 괜히 멋쩍어져 서은은 웃음을 지었다.

“나 엄청 많이 기다렸어요. 졸리는데도 꾹 참고.”

서은이 대뜸 하는 말에 주혁이 설핏 웃는 듯했다.

“그런데 맛있는 것도 안 사 오고.”

서은은 주혁의 빈손을 가리키며 탓하였다. 주혁이 신발을 벗으며 올라왔다.

“배고파?”

“배고파요.”

“지금이라도 나가서 맛있는 거 먹을래?”

“이 시간에 연식당 없을걸요.”

“그럼 시켜 먹자.”

“이십 분 후면 열두 시인데? 배달은 적어도 삼십 분은 기다려야 하잖아요.”

“그럼 뭘 해 줄까?”

물으며 주혁이 서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주혁에게서 흙냄새 비슷한 눈 냄새가 났다.

내려오는 눈빛이 다감하다. 서은은 내색 않고 홀로 안도했다. 서은은 막연히 그가 화가 났을 거라 생각했다. 간밤 주혁은 화가 났었고, 거기에 더해 새벽에 서은이 말도 없이 가 버렸으니까. 비밀번호를 보내며 집에서 기다리라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반나절이 지나 다시 본 주혁은 더없이 다정하기만 해시, 심장이 저릿해지고 온몸이 간질거렸다.

“뭘 해 줘야 할지 스스로 생각하는 성의를 보여 줘요.”

언젠가의 주혁의 말을 따라 한 건데, 알아챘을까?

“글쎄. 지금 내 머릿속에 든 건 하나밖에 없어서.”

서은의 기대와 달리 주혁은 무심한 낯으로 답하였다. 서운함이 몰려오는 찰나, 그는 서은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누르고 서은을 풀어 줬다. 그러곤 서은을 지나쳐 외투를 벗는다. 벗은 외투를 서은이 앉아 있던 의자에 걸고 넥타이를 당겨 느슨히 한다.

주혁은 테이블 위의 서은이 먹다 만 주스가 담긴 컵을 가져가 마시고, 몸을 돌려 조리대에 기대어 섰다.

서은은 일상적이며 매끄러운 남자의 움직임에 시선이 붙잡혀 주혁을 졸졸 따랐다. 그러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낯선 이를 보는 것도 아니고 오늘 새벽까지 함께 누워 있던 남자인데, 서은은 주혁의 시선에 왜 이토록 스스러워지는지 모르겠다.

그가 심상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짐은 언제 들어와?”

“네?”

“네 짐.”

“.......”

"뭐, 없어도 상관은 없지만. 필요하면 내가 사줄게.”

입술을 잘못 읽었나 싶어 다시 반문하는데, 주혁이 태연스레 되물었다.

“여기서 살기로 한 것 아냐?”

서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서은이 되물으려 입을 여는 순간 주혁이 여유 있게 말을 가로챘다.

“어차피 이제 못 나갈 텐데. 여기 들어오면 함부로 나갈 수 없는 곳이거든.”

서은은 그래도 이해가 안 가 아연한 얼굴로 주혁을 바라보다가 곧 남자의 장난임을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난 동거 안 해요.”

서은은 새침한 음성으로 주혁의 말을 장난처럼 받아쳤다.

“그럼 동거 말고, 결혼은?”

웃음이 뚝 멈춘다. 예상 못 한 단어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주혁의 얼굴에 엷은 웃음기가 배어 있어 진심 같기도, 그래서 더 장난 같기도 했다. 곧 서은은 아무렇지 않은 척 반문했다.

“너무 많은 과정을 건너뛴 것 아니에요?”

“무슨 과정이 필요한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여러 절차들. 뭣보다 우리 사귄 지 오래된 것도 아닌데.”

“해 볼 건 다 해 봤지.”

뜨끔하여 다시 또 말문이 막히지만 서은은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많이 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 하루만으로도 난 끝내주던데. 뭣보다, 내가 생긴 거랑 다르게 좀 보수적이라.”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말 같은 말이었다. 서주혁이 보수파 서 선비였다니. 서은은 웃음을 꾹 참고 농담을 받았다.

“하룻밤에 책임을 지겠다구요?”

“아니.”

잠시 주혁이 고개를 기울이며 입가의 물기를 닦아 냈다.

“책임을 지라는 거지.”

뻔뻔하지만 당당한 태도였다.

“난 생긴 거랑 다르게 좀 진보적이라서요.”

“진보와 보수의 대통합, 명분 좋네.”

“건국 이래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을 우리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참에 대통령상 받아 보지 뭐.”

“그런 거 필요하지도 않잖아요.”

주혁이 엷게 웃는다.

“받으면 정서은이 칭찬해 줄까 싶어서.”

서은은 그 희미한 감정의 흔적에서 진심을 느낀다. 한순간 착각일지라도 서은은 진심으로 믿고 싶어, 진심이라 굳게 믿기로 한다.

“아아, 왜 이렇게 말을 잘해요? 못 이기겠어.”

결국 서은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 위에서도 그렇게 진보적이어 주는 건 어때?”

어느새 다가온 주혁이 성마르게 서은의 입술을 깨문다.

“책임질 거지?”

목덜미의 어딘가도 깨물고 툭 튀어 나온 쇄골도 살짝 문다.

“응?”

싫어. 말을 하다가 서은은 간지러워 또 웃었다. 어느 순간 주혁의 뺨을 잡아 발꿈치를 올려 입술을 물었다. 서은의 니트 사이로 주혁의 손이 들어왔다. 배를 간질이며 가슴으로 향했다. 차가운 손가락이 가슴 한가운데를 만지작거리며 꼿꼿하게 세웠다. 기분 좋아 나오는 신음을 애써 눌렀다. 대신 혼자서는 주체할 수 없는 이 마음을 내보인다.

“없는 동안 실은, 보고 싶었어요.”

입술이 아닌 주혁의 밝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하였다.

“아주아주 많이.”

남자의 눈이 이채를 띠며 반짝였다. 이내 눈이 굽는다.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아이 같은 눈빛이 짧게 스쳐간다. 주혁은 서은의 엉덩이를 쓸어내리곤 바짝, 그에게 당겼다. 서은의 다리 사이로 단단하게 솟은 것이 맞닿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망연한 의문이 솟지만 묻지는 못한다.

그저 한 부위 접촉했을 뿐인데 익숙한 예감에 아래로 열이 몰렸다.

“매번 너한테 놀아나는 기분인데.”

소년 같던 눈은 순식간 위험한 수컷의 것으로 변모했다.

“거기에 또 좋다고 장단 맞추는 나도 미친놈이지.”

뭐라고 말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입술의 움직임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까. 그래도 상관없었다. 주혁이 웃으니 되었다. 그것으로 서은은 족하였다.

주혁이 안겨 온다. 서은의 팔을 목에 두르게 하고 얼굴을 내려 서은의 어깨에 묻었다. 서은의 몸집이 작아 주혁을 다 품어 줄 수는 없겠지만 서은은 힘껏 주혁을 안았다. 남자의 체온을 느끼며 서은은 그녀의 앞에 있는 서주혁이 아닌 인터넷에서 읽은 서주혁을 생각했다.

서정의 서주혁. 높고 멀고 빛나, 서은의 비밀이 아니었어도 결국엔 함께할 수 없는 남자임을 안다. 어쨌든 헤어져야 하는 남자이고, 어쨌든 한철 지나갈 사랑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어차피 이 겨울이 끝날 때까지라고 마음먹었으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 두었고, 겨울은 아직 남았으니까.

그러니까, 한 달만 버티자.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남자를 보며 웃고 안고 입을 맞추고. 남은 시간 동안 아직 하지 못한 것들을 하고, 이미 해 본 것들을 또 해 볼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있다면 부디 그저 가엾게 여기시길. 바라는 것은 한 달, 그러므로 그때까지는 이 거짓과 사랑을 허락해 주시길. 부디. 부디.

주혁의 손길에 옷이 하나하나 벗겨졌다. 서은도 주혁의 옷을 벗겼다. 다급하게 입술을 맞대고 서로의 혀를 물었다. 팔로 목을 감고 다리로 허리를 감아 소파 위에 마주 앉았다. 어느새 맨살이 된 몸을, 팔을 내려 가려보기도 하지만 남자의 힘에 풀리고 다시 남자의 몸을 감았다. 살과 살이 닿은 것만으로 전율이 퍼졌다.

따뜻해. 부끄러워. 원해. 더. 흐트러지는 호흡으로 말을 대신했다.

다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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