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함부로 마음이 마음에게-7화 (7/16)

7. 하늘과 바다와 우주

토요일은 주혁과 함께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집 앞으로 찾아온 남자였다. 초인종은 있어도 쓸모가 없는 존재라 주혁이 온 걸 모르고 있다가 주혁의 문자를 받고서야 알았다. 문 좀 열어 줘. 작업 중이어서 처음엔 문자도 못 봤었다. 뒤늦게 문을 열어 주고 주혁에게는 늦잠을 잤다는 핑계를 댔다.

“이렇게 갑자기, 내가 없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어제 약속했잖아.”

거실이라 하기에도 뭐한 작은 공간을 죽 둘러보며 주혁은 태평하게 답하였다. 그런데 약속이라니. 고개를 갸웃하다가 설마, 하며 떠오른 것이 하나 있었다.

간밤, 주혁은 서은을 바래다준다는 핑계로 졸졸 따라오더니 서은이 빌라 입구의 비밀번호를 누를 때까지도 옆에 서 있었다.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주혁도 따라 들어오려는 걸 황당하게 바라보니,

‘피곤해서.’

되도 않는 연기를 하며,

‘방 좀 빌려줄래?’

염치없이 물었다.

황당하다 못해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단호하게 말했다.

‘안돼요.’

‘그럼 집 구경 좀 시켜 줘.’

‘늦었어요.’

‘그럼, 언제?’

‘나중에 밝을 때, 그때 다시 와요.’

그러자 주혁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순순히 그래, 하고 물러섰다.

‘나중에 밝을 때’가 바로 다음 날 아침인 줄은 서은도 몰랐다.

“본인이 보고 싶다던 영화 보다가 잠들 때부터 알아봤지.”

무슨 잠을 그리 오래 자느냐 하는 말을 저렇게 하나 보다. 식탁에 앉은 주혁에게 서은은 김이 오르는 모과 차 한 잔을 내밀었다.

“잠자느라 야근했다는 것 보고 확신했고.”

“뭘?”

“내 애인이, 잠에 약하구나.”

말하며 주혁은 머그 컵을 내려 보다가 다시 서은과 눈을 맞춘다. 표정 없이 차갑던 시선에 나른하고 따스한 아침의 빛살이 스며드는가 싶었다.

“빌미 삼기 좋은 핑계인데, 언제 한번 이용이나 해 볼까.”

남자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아름다워, 잠시 입술을 놓쳤다. 주혁은 심상히 앞에 놓인 머그 컵을 쥐었다.

“이건 뭐야?”

“......모과차예요? 추우니까, 감기 조심하라구.”

주혁이 물끄러미 찻잔 속을 바라보다가 한 모금 들이켠다. 주혁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맛 어때요?”

유달리 단 모과차였다. 달아서 서은은 좋았는데, 주혁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런데 주혁에게선 답이 없다. 아니면, 답을 했는데 컵을 문 채여서 서은이 못 봤거나. 그래서 서은은 더 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주혁과 무얼 하지. 곧 있으면 점심 먹을 시간인데. 냉장고에 뭐가 있더라. 아니. 요리를 하는 동안은 주혁의 입술을 읽을 수 없으니까 안 되겠다. 그럼 근처 맛집에 데려갈까.

그때 불쑥 주혁이 몸을 일으켰다. 주혁의 상체가 다가오고 입술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가만 올려 보니 다시 또 입술을 맞춰 온다. 이번엔 좀 느리게. 그러고도 몇 번 더.

부모가 아이에게 하는 것처럼 무구하다가도 입술을 살짝 빨아들이다 떨어질 땐 어른들의 그것처럼 은밀했다. 그러다 마침내 입술이 열리고 혀가 들어왔다. 그는 마음껏 서은의 입안을 헤집으며 무엇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어느 순간 입술 위에서 주혁이 무어라 말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입술이 온전히 보이지 않으니 알 수 없었다.

아쉬웠다. 견딜 수 없이.

주혁은 가져온 랩톱으로 업무를 보고, 서은은 그 앞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점심은 근처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사 와 함께 먹었다. 아침을 먹은지 얼마 안 되었던 터라 서은은 금세 배가 불렀는데, 서은이 남긴 샌드위치를 주혁이 몽땅 먹었다.

앉아서 서은은 엽서 크기의 작고 두꺼운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속엔 낡은 식탁과 널브러진 샌드위치의 포장용지와 랩톱과 남자가 담겼다. 그리는 동안 서은은 핸드폰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틀었다. 그러자 주혁이 무언가 마뜩찮은 듯 바라보았는데, 서은은 작업하는 동안의 습관 같은 것이라고 했다.

물론 거짓말이다. 실은 그림에 열중한 사이 남자가 말을 붙이는 게 두려워서였을 뿐인데.

하지만 어차피 거짓말쟁이가 될 거라면 완벽해야 했다. 완벽한 거짓을 만들기 위해 다시 거짓을 만들고 그 거짓을 지탱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을 만들고. 이 알고리즘을 얼마나 반복해야 끝이라는 출구에 다다를까. 담담한 불안 속에서 다시 색연필을 들었다.

어김없이 시간은 흐르고 있다. 아낌없이, 온전히 만끽해야 한다.

식탁 아래로 주혁의 발이 서은의 발을 툭 친다. 올려 보니 남자는 시치미를 떼고 랩톱의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서은도 주혁의 발을 툭 쳤다. 그러자 주혁이 이번엔 툭툭 친다. 서은이 이어폰을 빼고 ‘왜요?’ 물었다.

그는 ‘심심해서.’라고 하였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남자의 무료에서 비롯되었다. 심심해서 서은에게 말을 붙였고 심심해서 밥을 먹자 했고 심심해서 서은과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가벼운 연애를 시작하기로 한 것도 어쩌면 그로부터.

그러니 무료한 주혁의 흥미가 다 식으면 이 관계도 끝날 테지.

다만 바라는 건, 이 시간 후에 너무 아프지 않도록 너무 체하지 않도록 너무 마음을 휘두르지 않으면 좋겠다.

싶다가,

이 짧은 동안 미련 남지 않게 놓치는 것 없이 모든 걸 탐하고 싶기도 했다.

모순덩어리. 거짓덩어리. 결국 옴짝달싹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주혁에게 잡혀 휘말린 기분이다.

조금 전까지 서은의 발을 툭툭 건드리던 주혁은 키보드와 마우스를 열심히 두드리고 핸드폰과 모니터 화면을 번갈아 보며 무언가에 열중이었다.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골몰해 하다가 다시 또 움직인다.

처음에 서은은 주혁을 가만 살펴보았다. 그러다 이끌리듯 일어나 식탁을 돌아 주혁에게 다가갔다. 주혁이 서은을 돌아보기도 전에 서은이 주혁의 양 볼을 붙잡아 돌리고, 몸을 숙여 입을 맞췄다. 아까 전 주혁이 한 것처럼 가볍게 두어 번 더 입을 맞추었다 떼었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살짝 주혁의 입술을 빨기도 했다.

그는 놀라 하는 기색 없이 눈도 감지 않고 서은이 하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서은이 입술을 맞추다 떼고 고개를 들고, 다시 숙여 오는 것을 잠자코 바라보기만 한다. 고요한 시선이 예리해서 더욱 뜨거웠다. 그래도 서은은 멈추지 않았다. 처음엔 충동이었고, 다음엔 오기였다가, 결국엔 본능이었다.

남자의 맞물린 입술은 도톰하고 부드럽고 차갑고 씁쓸했다. 은은한 담배의 맛 같기도 했고 차가운 눈을 훑고 온 바람의 맛 같기도 했다. 그것을 물고 핥았다. 남자의 양 볼을 잡아당기며 혀를 깊게 넣자 뜨거운 숨이 훅 들어온다.

어느 순간 서은도 행위를 멈추고 주혁을 내려 봤다.

주혁이 그의 뺨을 감싼 서은의 손을 내렸다.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분명히 해두는데.”

그는 무에 가까운 얼굴이었지만,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파도가 깊은 밤의 바다처럼 위험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 뒤의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주혁이 일어났고 서은의 뺨과 목덜미를 주혁의 손이 감쌌고, 주혁이 입술을 열고 들어오고, 서은의 얼굴이 뒤로 넘어가고, 주혁이 더욱 서은을 끌어당겼다.

혀가 혀를 애무하듯 움직였다. 주혁의 손길이 서은의 뺨과 목과 어깨와 팔과 등과 배를 스쳤다. 부드럽다가 격렬했고, 성급하다가 느릿했다.

서은의 허벅지엔 장대하게 솟은 것이 은밀히 비벼졌다. 그 은근하며 노골적인 마찰이 민망했지만 서은의 허리를 붙잡아 당기는 주혁의 손 때문에 피할 수도 없었다. 어느 순간 서은도 그 감각을 즐기며 하체를 비틀었다.

으으응. 야릇한 쾌감에 목구멍을 울리는 비음들이 터질 때 티셔츠 안으로 주혁의 손이 들어왔다. 주혁의 손가락들이 서은의 배를 쓸었다. 차갑고 간지러워 흠칫 몸을 떨었다. 주혁이 놀라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허리를 감싼다. 그러다 미끄러지듯 바닥의 러그로 함께 넘어졌다. 넘어지는 순간에도 주혁의 혀는 서은을 놓치지 않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안에 축축한 느낌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뒤엉킨 혀는 떨어질 줄 몰랐다. 퍼붓듯 하는 키스에 숨이 가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남자가 조르듯 서은의 얼굴을 좇으며 다시 서은의 입술을 깨물고 혀를 빨아들인다. 키스는 집요하게 이어졌다.

배를 쓸던 손가락들이 이젠 서은의 겨드랑이와 가슴 바로 밑을 매만졌다. 주혁이 몸을 더욱 밀착하고 흥분이 고조된다. 서은의 아래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가슴 밑을 배회하던 손이 브래지어를 밀고 올라와 서은의 가슴을 쥐었다. 주혁의 다른 한 손은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그 모든 걸 탐하는 손길이 서슴없었다.

가슴을 쥔 손가락이 유두를 빠르게 문지르자 서은의 안에서 팽창하던 어떤 것이 마침내 터진 듯했다. 서은이 다리로 주혁을 감았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주혁이 짙게 숨을 뱉었다. 은근히 몸을 치대며 다급히 서은의 입술 사이를 파고든다. 어떤 본능에 서은도 주혁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그의 입술을 받았다. 남자의 혀가 닿을 때마다 서은의 입에서 무언가 터져 나왔지만 그게 어떤 소리인지 서은은 알 수 없었다.

주혁이 목덜미의 귀밑 어딘가를 빨아들이자 견딜 수 없는 짜릿함이 순식간 퍼져 나갔다. 똑똑한 남자가 서은의 반응을 눈치채고 그곳을 집요하게 핥았다. 동시에 주혁의 손이 서은의 엉덩이를 감싸 당겼다.

너무, 뜨거웠다. 축축하고. 불쑥 튀어나온 것은 이제 망설임 없이 서은의 사타구니 사이를 찔러 댔다. 서은의 하부를 쓰다듬고 당기며 자꾸만 무언갈 느끼게 하는 손길이 서은의 혼과 넋을 모조리 앗아 가려 할 때.

안돼.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주혁의 손이 서은의 바지를 밀고 내려오는 때였다.

“안 돼.”

얼마 안 되는 이성을 붙잡고 간신히, 간절히 말했다. 말하면서 후회하였지만, 후회되어도 해야 했다.

“준비가, 안됐어요.”

어떤 음성으로 어떤 떨림으로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일순 주혁의 행동이 정지했다. 그대로 고개를 들다가 무언가 아쉬운 듯 서은의 입술을 빨아올리듯 핥으며 눈을 치켜뜬다. 서은은 살며 시 주혁을 밀어 냈다. 주혁은 순순히 고개를 들고 멀어졌다. 그는 잠시간 말없이 서은을 내려 보았다. 침묵 속에서 가만히 바라보는 눈길이 허락해 주라고 채근하는 것 같기도 왜 안 되느냐, 무언의 시위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서은의 입술이 열리지 않자 주혁이 슬쩍 시선을 튼다. 그는 서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어떠한 설득보다도 머리를 만져주는 남자의 부드러운 손길이 달콤하고 매혹적이었다.

주혁의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빠져나가다가, 다시 주혁에게 붙잡히고 주혁은 서은의 머리칼에 입을 맞춘다. 주혁의 움직임은 긴장되지만 동시에 기분 좋은 나른함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머리칼에 주혁의 입술이 가려져 서은은 잡힌 머리칼을 빼내어야 했다. 그러자 주혁의 시선이 다시 서은의 눈을 향한다.

조금 전의 맹렬한 기세는 사라지고, 차분하고 단정한 얼굴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묻는다.

“준비는 언제 되는 건데?”

답을 기다리는 남자의 눈빛이 투명하여 밝고 무구했다.

“......되면 말해 줄게요.”

서은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었다. 주혁은 속을 알 수 없는 모호한 얼굴로 서은을 보다가,

“그렇군.”

고분고분 수긍하였다.

“기다릴게.”

그리고 서은의 손을 잡아 든다.

“여왕님이 그러시다면야.”

그는 곧 서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창문으로 초겨울의 가는 햇살이 서은의 손등을 비춘다. 서은은 진실로 여왕이 된 기분이었다.

배웅을 했다. 주혁은 저녁에 약속이 있다고 했다. 차에 오르기 직전 주혁과 짧게 키스를 했다. 두둥실 떠오르는 마음을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떠오르는 마음의 농도와 밀도가 짙고 높았다. 주혁의 차가 멀리 작아져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동안 서은은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었다. 색이 바래 낙하하는 이파리와 마른 나뭇가지들이 발에 차였다. 주혁이 머물렀던 단조로운 회색빛 살풍경을 왜인지 오래도록 잊지 못하리란 예감이 들었다. 이 시간의 감각 또한.

올겨울이 지나도 다시 겨울이 오면 마른 나뭇가지와 이파리와 시린 바람 같은 것들이 서은의 시간과 공간을 이곳의 이때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 느끼는 이 감정들도 함께 떠오를 테지. 훗날 그것들은 서은의 안에서 추억이 아닌 상흔으로 남을 것이다.

하늘에서 눈인지 비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내려왔다. 진눈깨비다.

그리고 첫눈이었다.

* * * * *

나이가 들어 하는 연애는 덤덤할 줄 알았다. 해 볼 걸 다해 본 나이니까, 또한 이전에 밑바닥도 경험해 보았으니까. 해 볼 걸 다 해 봐서 더 이상 새로울 게 없고 밑바닥을 경험해 보아서 더 이상 연애에 기대하는 것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서툴러서 오는 긴장과 설렘이 줄고, 익숙한 패턴과 경험에서 오는 안정감이 늘어나 이 나이가 되었을 때 하는 연애는 전보다 덜 설레고 덜 힘들고 보다 잔잔할 줄 알았다.

그건 서은의 오만이며 착각이었다.

아침이면 주혁에게 문자가 왔다. 오래전 메일을 주고받을 때처럼 문자를 주고받았다. 밥을 먹고 그림을 그리다가도 핸드폰의 화면을 켰다 껐다 하며 주혁의 연락을 기다렸다. 주혁의 문자 하나로 짧은 동안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그네를 탔다. 아닌 척 굴려 해도 서은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연애는 즐겁고 설레고 기뻤다. 서은의 경험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고 서은의 거짓과 정해진 끝이 관계에 긴장을 주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도 서은은 처음이기 때문일 거라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처음이 아니었음에도 결국엔 처음이었다. 주혁과 손을 잡고 홍은동의 골목길을 걷고 함께 하늘을 올려보는 것들은 모두 처음이었다. 이전의 남자와 했던 연애의 경험은 주혁과의 관계에선 모두 소용이 없었다. 주혁과의 연애가 처음이기에 서은은 여전히 서툴렀다.

그래서 서은은 여전히 답을 알지 못한다.

최선을 다해.

무얼 어떻게 해야 최선을 다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만 그 말을 나침반 삼아 매 순간 서은은 최선을 다할 듯이 굴었다.

하지만 결국 최선을 다하진 못할 것이다.

문득문득 주혁의 서늘한 얼굴을 보았지만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묻지 않은 것처럼. 때때로 바닥 모를 심연 같은 주혁의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굳이 알아내려 하지 않은 것처럼. 또한 주혁 역시 서은에게 그 마음을 온전히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즐겁고 설레고 특별하게 느껴진다 하여도, 그들의 연애는 결국 그 정도일 뿐이었다.

[베를린은 재밌어요?]

그런데 결국, 고작, 한낱, 그 정도인 연애가 이러한 떨림을 주다니.

고작 문자 한 줄 보낸 것뿐임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아니.]

한낱 두 글자의 답장에 웃음이 번지고 지루했던 하루가 톡톡 튀는 콜라처럼 변하였다.

[너 없어서 재미없어.]

으아. 오글거려. 그래도 터지는 웃음.

다시 용기를 내 키패드를 두드렸다.

[지금은 뭐해요?]

[조식 먹어.]

[소시지도 있어요?]

[있던데.]

[거기 소시지 맛있어요?]

[안 가져왔는데 먹어 볼게. 소시지 좋아해?]

[아니. 안 좋아해요.]

[그런데 왜 물어봐?]

[심심하니까.]

예전에 주혁이 했던 말을 따라 한 건데, 주혁이 눈치를 챘을까?

[어쩐지 웬일로 먼저 연락을 다 주시나 했습니다.]

말을 하는 주혁의 얼굴을 상상했다. 실없이 웃음이 샜다.

[밥 맛있게 먹어요.]

문자를 보냈는데 주혁은 또 잠시 간 답이 없었다.

[너도.]

한 박자 느리게 도착한 답장에 연이어 몇 개의 메시지들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날아왔다.

[춥다.]

[옷 잘 챙겨 입어.]

옷은 챙겨 입지 않아도, 마음은 언어의 옷을 입어 따스해진다.

[문단속 잘하고.]

[이제 피곤하다고 방 달라고 할 사람도 없는걸요.]

웃었을까? 문자를 보고 웃었으면 좋겠다.

남자가 터뜨리는 웃음을 상상하며 서은도 웃었다. 다음 답이 오기를 기다렸다.

[지금도 피곤해.]

[소시지는 맛도 없고.]

[지루한데.]

거기서 다시 또 메시지가 끊겼다.

[지루한데, 뭐?]

[그냥 지루하다고. 이제 가 봐야해.]

진득한 아쉬움이 몰려왔다. 마음을 감추고 열심히 일해요, 문장을 만들다가 지워 버렸다. 너무 밋밋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서은이 고민하는 짧은 동안 다시 메시지 창이 올라가며 새로운 문자가 왔다.

[연락할게.]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연락할게, 네 글자는 살그머니 마음을 부풀게 하는 주문 같다. 부푸는 마음을 다잡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주문받은 그림엽서를 포장용지에 넣고 미리 출력해 놓은 리스트를 베끼며 주소를 적는다. 중간에 손목이 아파 손을 흔들고 고개도 한 바퀴돌린다.

답장을 보내는 건 하지 않기로 한다.

* * * * *

깊은 밤이었다. 머리맡의 진동에 잠에서 깼다. 주혁이었다. 급히 외투를 챙기고 계단을 내려가 빌라를 나왔다. 와락, 주혁이 품에 안겼다. 서은이 어어, 하며 몸을 휘청였는데 주혁이 그런 서은을 꽉 안아 주었다. 주혁의 입술 사이로 나오는 숨에 서은의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주혁이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알 수 없었다. 듣지 못한 걸 들킬까 봐 물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주혁이 다시 몸을 떼고 서은을 내려다볼 때 서은은 다만 배식 웃었다.

* * * * *

길고 지루해지는 회의였다. 뜻밖의 소란이 주혁의 흥미를 끌었다. 반투명 시트지 너머로 엉키는 검은 실루엣들이 보이고 비서 몇 명의 목소리와 허스키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함께 들렸다. 부사장님. 부사장님! 하는 다급한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마침내 회의실 문이 열렸다. 주혁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나머진 다음에 해야겠네요. 미안합니다.”

회의가 너무 길어지는 것도 별로 좋지 않았다. 팀원들의 집중력과 체력도 고려해야 하고, 쓸데없이 긴 회의는 오히려 시간을 낭비하는 셈이 되니까.

“네놈이었다며!”

분기가 탱천한 음성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재형의 눈이 붉었다. 주먹을 쥐고 목에 핏대가 선 모습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보다는 빠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늦어서 주혁은 실망한다. 그때까지도 팀원들은 나가지 못하고 있다가 문 앞에 서 있는 비서 실장의 손짓을 보고서야 회의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재형은 주혁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개자식! 배은망덕한 자식! 애미애비도 없는 놈!

옆에서 재형을 붙잡는 비서들이 아니었다면 주혁의 얼굴을 몇 대 쳤을 것이다. 퍼붓는 무수한 욕들에도 주혁의 표정이 변하지 않자 재형은 어조를 더욱 날카롭게 바꾸었다.

“네놈이 주주들 꾀어내 뒤에서 작당한 거라며? 쥐새끼처럼! 내가 아니었다면 네가 지금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을 성싶어? 어디 길바닥에 쳐나뒹굴고 있어야 마땅한 놈이一”

말이 지나치다 싶었는지 옆에서 비서 한 명이 부사장님, 하며 재형을 부른다. 그 호칭이 재형의 화를 더욱 부추겼다. 부사장은 무슨 부사장! 저 새끼가 날! 다시 음성이 끝없이 올라가다가 그런 방법으로는 주혁에게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목소리를 누르고 표정을 차갑게 꾸몄다. 그럼에도 잠시간 화를 참지 못하여 가슴을 들썩이다 이내 잔뜩 비틀린 얼굴을 하였다.

“생긴 것도 죽은 그놈을 빼다 박더니, 하는 짓도 이렇게 비열해서야.”

끝내 나와선 안 될 말들이 나올 예감에 홍 실장이 다른 직원들을 급히 내보냈다.

재형은 여전히 주혁의 얼굴에 변화가 없자 이번엔 구슬리는 투로 바꾸어 말을 이었다.

“너를 데려온 게 나야. 모두들 반대했지만 결국 너를 데려와 너를 구한 것도 나지. 네가 그렇게 끔찍이 아껴 죽고 못 사는 최난영도 겉으로는 널 위하는 척했지만 널 버려두었어. 내가 데려오지 않았다면 평생 버려두었겠지!”

재형은 스스로의 말에 스스로 흥분한 듯했다. 눈을 내린 주혁이 설핏 웃었다.

“서재하가 그리되었을 때 가장 좋아한 게 누구였을 것 같아? 바로 최난영이지. 네가 죽기를 바란 것도 내가 아니라 네 어미였다고! 그런 네가 내게 이따위 짓을 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아 나를 내쫓아? 주제를 파악해야지!”

“회사를 위하고, 아버지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재형의 것과 상반되게 느릿하고 여유 있는 음성이었다. 재형에게 한 발, 두 발 가까이 다가가다 멈추어 서고 재형을 위하는 얼굴을, 도리어 지금의 재형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짓는다.

“뭐야?”

“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까. 회장님 눈치가 보여 그러지 못하시기에 제가 대신 원하시는 바를 이루어 드린 겁니다. 듣자 하니 내년엔 전시회도 열 계획이시라면서요?”

말하는 주혁의 태도는 무성의했다. 들으며 재형의 피가 차게 식었다.

“하지만 호칭에 대한 문제는 제가 사과드리죠. 아버지 말씀대로 일선에서 물러나셨는데 부사장이라는 호칭은 마땅치 않죠. 제 불찰입니다. 호칭에 대한 지시는 다시 제대로 해 두겠습니다. 서재형 씨면 될까요?”

“이 개자식!”

마침내 손을 들어 내리치려는 찰나, 주혁의 눈빛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재형은 흠칫 행동을 멈추었다. 주혁의 눈빛이 태일의 것을 닮아 있었다.

“회장님도 아무 말씀 하시지 않는 일입니다.”

“…….”

“아버지도 아시는 걸 회장님이 모르실 리가 없잖습니까. 그럼에도 회장님께서 아무 말씀 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십니까?”

“…….”

“아시고도 저를 불러 호령을 하거나 내치지 않고 계십니다. 그 뜻을, 모르시겠습니까?”

천장에 솟은 재형의 손가락이 벌벌거렸다. 어금니를 악물어 턱과 뺨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니까, 버려진 패라는 거였다. 이제 쓸모가 없다는 거였다. 승혁이 자라서, 주혁이 자라서. 모두 그를 버린 거였다.

다시 재형의 눈에 빛이 번뜩였다. 벌벌거리던 손에 잔뜩 힘을 주고 내리쳤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주혁의 얼굴이 돌아갔다. 옆에서 말리지 못한 비서가 짧은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작 주혁은 고개를 살짝 비틀 뿐, 다시 재형에게 향하는 얼굴은 아까의 표정과 변함이 없다. 오히려 평온하다 못해 따분해 보이기도 했다. 이내 주혁은 담담하게 어쩌면 조금 미안하다는 듯 타이르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내 규정상 폭력을 행사한 이는 격리하여 추방하는 게 원칙이라서요. 죄송한 일이지만, 아버지껜 제가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못다 한 이야기는 그때 해 주십시오.”

놈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제 할 말을 다 하였다. 재형의 내면이 차게 식어 퍼렇게 변하고, 명치가 저려 온다. 뒤이어 밀려오는 것은 사무치는 후회였다.

주혁을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평생 그 보육원에 버려두고 그 존재 따위 평생 무시하고 살았어야 했다.

“혼자 나가시겠습니까 아님, 경비를 부를까요?”

재형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멀리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빼빼 마른 몸에서 나오는 소리가 귀를 찢을 듯해서 재형이 무어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난영이 아이의 눈과 귀를 막고 품에 안아 ‘괜찮아, 아이야. 괜찮아.’ 중얼였다. 그 품에서 아이의 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그때, 그 애를 끌어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지금 이렇게. 그 애새끼 대신 재형이 이따위 꼴을 당하고. 비참히 끌어내진다.

“너 따위가 뭐라고. 너 따위가 뺨 한번 맞은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너절한 꼭두각시 따위가.”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고 뒤돌아나가는 모습이 초라하고 볼품없어, 주혁은 시시했다. 오래전부터 꿈꿔온 순간이었는데. 이토록 시시할 줄이야.

그의 양아버지이자 큰아버지 재형은 무능했다. 처음에 태일은 재형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았다. 태일이 재형에게 바라는 것은 산처럼 많았다. 재형은 공부보다 놀기를 좋아하고 경영보다 미술을 배우고 싶어 했지만 태일의 불호령이 무서웠다. 처음에 재형은 견뎠다고 한다. 하지만 타고난 무능을 극복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고 태일의 실망과 불호령은 늘어만 갔다. 갈수록 재형은 기가 죽었고 그럴수록 태일은 그런 재형을 사내답지 못하다며 더욱 못 미더워했다. 마침내 부자는 어느 순간 선을 넘었다.

재형은 회사에서 맡은 대부분의 사업을 실패했다. 무능에서 비롯된 실패였는데 개중엔 반항에서 비롯한 의도된 실패도 있었다. 재형이 약속된 집안의 여자가 아닌 어느 평범하고 다소 가난했던 국밥집의 딸 난영과 덜컥 혼인 신고를 해 버린 것도 태일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었다.

처음에 태일은 끝까지 난영을 인정하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아비의 마음을 몰라주는 재형도 괘씸했고 시부모 얼굴 한번 보지 않고 허락 없이 혼인 신고에 동의한 난영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하지만 어느 날 호기심에 몰래 난 영을 보았을 때, 난영이라면 아들을 다잡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배가 부른 채로 웃으며 손님을 맞이하고 땀을 닦으며 책을 읽는 난영을 보고 태일의 노기가 일순 가라앉았다고도 했다. 난영의 강단과 현명과 밝음에 결국 태일은 그녀를 며느리로 받아들이고 아들 부부를 집에 들였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재형에게 난 영은 또 다른 태일이 되었다. 그 순간부터 부부는 부부이되, 부부가 아니었다.

* * * * *

모시겠다는 기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차에 올랐다. 동절에 접어들어 헐벗은 가로수가 삭막하고 검은 밤은 스산했다. 강변북로에서 보이는 한강만이 화려하게 반짝였는데 그 아래의 검은 물은 밤하늘보다 더 깊은 어둑함으로 출렁였다.

주황빛의 무리를 따라 달리며 그는 이다음 그가 해야 할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재형을 밀어내긴 했지만 재형의 주식은 그대로다. 주혁의 일이라는 걸 알았으니 이제 그 주식을 가지고 완전히 선미와 석현에게 붙겠지. 굳이 재형이 밀려나지 않았어도 그건 자명한 일이었으나 손에 쥔 주식으로 이곳저곳을 간 보듯 젠체하며 힘자랑하는 것을 지켜 보는 게 불쾌했다. 어차피 주혁의 것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빠르게 결론을 내 주는 게 앞으로 일 처리를 하는데 더욱 수월하기도 했다. 그런 것을 제외하고서라도, 그저 재형이 방축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주혁의 마음이 일정 부분 작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석현의 차례인가. 캘리포니아 지사의 석현은 일을 꽤 잘해 낸다고 했다. 길지 않은 경력임에도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치밀한 문서 작성 능력으로 지사 사람들을 놀래킨다던가. 주혁에게 들려올 정도이니 태일에게도 전달됐으리라.

이제 그쪽에 재를 뿌릴 차례였다. 시나리오는 이미 준비해 놓았다. 나이와 경력에 맞지 않는 석현의 그 능력이 실은 석현의 것이 아니었다는 걸 적당히 때를 봐 다음 달쯤 흘릴 것이다. 그럼 그다음 달이면 여의도 증권가에 찌라시로 돌 테지. 그다음엔 서정의 현금 유통을 담당하는 화학쪽 인사들을 만나야겠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아무 흠 없는, 온전한 서정을 승혁에게 안겨줄 거였다. 그럼 난영도 기뻐하리라.

차가 망원동에 진입하였을 때, 별안간 재형의 말이 떠올랐다. 너절한 꼭두각시 따위가, 했던. 문득 궁금해진다. 주혁의 인생이 꼭두각시라면, 그를 조종하는 꼭두각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우편으로 핸들을 돌리며 주혁은 궁리한다. 태일, 재형, 난영, 승혁의 얼굴이 차례로 떠오르다가 마지막엔 재하였다.

재하에 대한 기억은 단편적이다. 키가 크고 마르고, 늘 술에 취해 있었고, 우울하고 어둡고, 살아 있음에도 죽어 있는 것마냥. 늘 죽기를 바랐던 재하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주혁에게 했던 말은 ‘모두 잊어버리렴.’이었다.

역설적으로 모두 잊으라 했던 순간은 결코 잊히지 않았다.

그는 주혁의 작은아버지이면서 주혁의 친부였다.

형수를 범한 패륜아. 개자식도 그런 개자식이 없지. 그리고 주혁은 개자식의 개자식이고.

한땐 그 사실을 절실하게 증오했다.

그러나 이제 와 비관하고 분노하며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진 않는다. 오랜 시간 속에서 주혁은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불변하는 사실에 절망하고 방황하는 시기는 지나, 삶의 목표를 세우고 주어진 것을 적당히 이용하며 이제는 제 몫을 다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개자식의 개자식으로 태어나 개자식의 개자식이었기에 주어지는 일들을 묵묵히 해내고 적당히 타협하고, 가끔은 웃고 떠들며. 그럼에도 무딘 기억은 가끔 떠올라 무용한 상념을 일으켰다.

창문을 내리니 밤의 한기가 밀려와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검은 하늘이 구름 없이 투명하다. 그 하늘이 서은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차고 맑은 공기가 몸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올랐다.

돌연 주혁은 서은과 드라이브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서은을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가야겠다. 서울 말고, 조금 먼 곳으로. 바다가 보이는 영종대교도 좋고, 조금 고전적이지만 팔당댐을 돌아 팔당전망대에 가 보는 것도 괜찮겠다. 팔당댐은 가을이 기가 막히는데, 그 수려한 단풍을 지금 서은에게 보여 줄 수 없어 아쉬웠다. 다음 가을에, 라고 미루기에는 그 가을이 너무 멀고 분명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걸 핑계로 그때까지 서은을 붙잡아 둘 수도 있겠다. 그때가 되면 또 다른 핑계를 만들어 서은을 붙잡고. 그렇게 붙잡고 붙잡다 보면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다음의 말을 이으려다 생각을 멈추었다. 이런 주제와 분수에 아직은 그래선 안 된다는 알량한 양심이 그를 붙잡는다.

입술 사이로 툭, 실소가 흘렀다.

우스웠다.

이제 와서.

* * * * *

깊은 새벽의 도로였다. 주위에 보이는 차가 하나도 없어 달리는 차는 주혁의 차뿐인 듯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그는 영종도에 가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 시각이 새벽 한 시가 넘은 때였다. 원래대로라면 잠에 들었을 시각이지만 서은은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작업을 한다는 핑계로 주혁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속된 표현으로 ‘너무너무’ 바쁜 남자여서 요즘은 밤이 아니고서는 만나지 못하는 남자였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얄미웠다. 얄밉지만 안쓰러웠다.

언젠가 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요, 물었을 때 주혁은 정서은 맛있는 거 사 주려고, 답했을 뿐이다. 서은은 그 특별할 것 없는 대답이 마음에 들어 바쁜 남자를 용서해 주기로 했다.

마침내 주혁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서은은 설레설레 흔들리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너무너무 바쁜 남자 앞에선 밀고 당기기를 하거나 내숭 같은 걸 부릴 시간도 아까웠다. 오늘도 늦은 시각까지 일을 하다 왔는지 주혁은 정장 차림이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남자의 검정색 정장 코트가 무척 잘 어울려서 서은의 설렘이 배가되었다.

처음엔 영종도를 말하는 입술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서은은 어디든 주혁과 함께라면 가 보고 싶어서, 갈 준비가 되어 있어서 함께 가자는 주혁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내비게이션에 영종도라는 이름이 나타나서야 목적지가 영종도인걸 알았다. 밤이 어두워 주혁의 입술을 읽을 수 없다. 서은은 잠시 눈을 붙이겠다는 핑계로 고개를 틀었다.

눈을 감는데 이불을 덮어 주듯 주혁의 코트가 서은의 몸을 감싼다. 서은은 모르는 척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속도를 높이고 막힘없이 내달릴 때 슬며시 눈을 떴다. 차창 너머 규칙적인 주황의 불빛들이 빠르게, 빠르게 뒤로 넘어가고 요란 없는 밤하늘엔 달도 보이지 않는다. 시선을 조금 내려 창문 위의 남자를 보았다. 차창 위로 비치는 남자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운전을 하고 있다. 무료해 보이기도 하고 무념해 보이기도 했다.

이런 때에 재밌는 말로 주혁의 피로를 가시게 하면 좋으련만.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어 다시 눈을 감았다.

몸이 흔들렸다. 눈을 뜨니 겨울의 밤바다가 눈앞에 있었다. 옆으로 찬바람이 훅 끼쳐 왔다. 조수석의 문을 연 주혁이 몸을 기울여 손을 내밀고있다.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 잠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해 몸은 느른하고 정신은 멍하였다. 두 눈을 끔뻑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린 내음이 물큰 풍겼다.

그때 불쑥 주혁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주혁이 고개를 기울여 서은의 멍멍한 얼굴을 살피더니 뒷좌석 문을 열고 무언가를 꺼내 온다.

목도리였다. 그는 갈색의 체크무늬 목도리를 서은의 목에 휘휘 감아주었다. 목도리를 둘러 주고 꼼꼼히 묶어 주기까지 하는데, 서은은 아이가 된 기분이다. 목도리에서 나는 냄새가 주혁의 것과 똑같았다. 입술의 반을 가리는 목도리를 내리며 서은은 염치없이 물었다.

“이거 가져도 돼요?”

주혁은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그래.”

답해 준다.

그래, 하는 주혁의 답이 참 좋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냥 좋았다. 좋아서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주혁이 서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바다는 깜깜했다. 가로등의 불빛이 사위를 밝히긴 하였지만 검은 바다 아래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평 위의 빛이 없으면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흐릿하겠다. 아주 옛날 빛이 없던 시절에는 바다가 바다인지 모르고 하늘이 하늘인지 모르고 길을 잃었겠다. 때론 바다와 하늘을 분간하지 못해 우주를 걷는 기분이었겠다. 아니, 그 시절엔 우주를 몰랐으니 다만 풍덩 바다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겠다.

겨울바람이 매서워 바다 위의 작은 배들이 출렁출렁 움직였다. 바람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자꾸 얼굴을 찌푸리니 주혁이 서은의 앞으로 바람을 막고 서 주었다. 주혁의 검은 머리카락이 날리고 코트가 펄럭인다. 가만 올려 보니 그가 서은의 머리에 입술을 내려 꾹 찍었다. 심장이 가렵고 뱃속이 근질댔다.

지금 서은에겐 하늘도 바다도 우주도, 모두 주혁이었다.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물었다.

“바다가 보고 싶었어요?”

주혁이 고개를 갸웃한다.

“보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왜 왔어요?”

“그러게.”

이상한 답. 망연히 바라보니 주황빛을 등지고 남자는 부드럽게 웃는다.

“근데 저녁은 먹었어요?”

“응.”

답하는 주혁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목울대의 움직임으로 남자의 답을 읽었다.

“뭐 먹었어요?”

기억이 안 나는지 주혁은 눈가를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였다. 몇 시간 전에 먹은 것도 기억 못 하는 남자가 우스워 서은은 웃음을 흘렸다.

“다음엔 조개 먹으러 와요.”

서은이 건너편의 해산물집을 가리 켰다.

“조개 좋아해?”

서은이 가리킨 집을 보며 물었지만 서은은 답하지 않는다. 바람 소리에 못 들었나 싶어 주혁은 다시 물었다. 그러자 서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꽃게도 좋아해요.”

이어서 “주혁 씨는?” 하고 되묻는데 아직 그 호칭이 낯간지럽고 어색하다.

“무슨 음식 좋아해요?”

“맛있는 건 다 좋아해. 아, 어릴땐 피자를 좋아했지.”

서주혁과 피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기분이 좋을 때 사 주던 최고의 별식이었거든.”

어머니라면 어떤 어머니를 말하는 걸까. 주혁에게 세 명의 어머니가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주혁이 어릴 때라면 세 번째 어머니는 아닐 것이다. 첫 번째나 두 번째.

“다음에 우리 집 오면 피자 시켜 줄게요.”

집에 오븐이 없어서 만들어 줄 순 없었다. 그래도 막 비싼 음식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설령 값비싼 음식이었더라도 사 주었을 테지만, 피자만큼 자주 사 주지는 못할 거였다.

“피자보다 빌라 비밀번호를 알려주면 더 고마울 것 같은데.”

그 말에 담긴 은근한 뜻을 알아버려 서은은 속절없는 웃음을 흘렸다.

“아님 우리 집 번호를 알려 줄까?”

“주인도 없는 집, 혼자 가서 뭐 하라구?”

“뭐든 하고 싶은 것 다 해. 그림을 그리든 잠을 자든.”

잠시 말을 끊고 그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다 내가 오면 나를 반겨 줘.”

가끔씩 주혁의 요구가 너무 유치하고 당당해서 이제는 황당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반겨 주고 있는데.”

“한참 부족해. 다음엔 좀 더 격하게 반겨 줘.”

“어쩜 매번 이렇게 당당하지.”

“실망시키지 말고.”

“고집도 세.”

“미리 연락할 테니까 연습해 둬.”

“뻔뻔하기까지.”

“이제 와 새삼.”

묘하게 이어지는 대화에 결국 서은이 웃음을 터뜨렸다. 서은을 내려보며 주혁도 미소 지었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둘의 걸음이 멈추었다. 주혁의 시선이 밤바다와 모래, 네온이 꺼진 가게, 다시 바다로 움직이다가 저 너머의 마천루로 향한다. 흐르듯 느리게 움직이는 남자의 시선을 서은은 조용히 따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주혁은 밤을 닮았다. 주혁의 밝은 눈동자는 까만 밤에 드문드문 박혀 있는 별 같은 것이다.

“캘리포니아 바다만큼 예뻐요?”

주혁이 다시 시선을 내려 왔다. 서은은 어쩌면 그가 캘리포니아를 그리워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랑 캘리포니아 바다 중에, 뭐가 더 예뻐요?”

그의 시선이 다시 바다를 향하더니 고개를 슬쩍 기울인다.

“바다는 그냥 바다지.”

그렇구나. 캘리포니아가 그리워서 여기에 온 건 아닌가 보다. 서은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가 묻는다.

“준비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곧 의미를 알아챘다.

“아직이에요.”

새치름하게 대답하니 주혁이 웃는다.

“키스는 하게 해 줄 거지?”

고민하는 척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혁이 입술을 내렸다.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게 끝이어서 서은은 조금 아쉽다. 다소 허탈하기까지 했다.

이봐요, 서주혁 씨. 그건 키스가 아니라 뽀뽀예요, 뽀뽀. 요즘은 중학생들도 뽀뽀와 키스의 차이 정도는 안다는데. 나이가 서른이 넘어서 그것도 모르면 어떡해요? 라는 말들이 울컥울컥 솟는데, 취한 기분이다. 술대신 하늘과 바다와 우주를 들이마시고.

정말 주정을 부리기라도 하듯 서은은 눈을 흘겼다.

“왜?”

“남자가 눈치도 없이.”

“뭐?”

“어휴.”

서은이 깊게 내뱉는 한숨에 주혁은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다시 주혁이 다가온다. 이번엔 혀와 혀가 섞였다. 그러나 여전히 가벼운 키스였다. 그러나 이번엔 아쉽지 않았다. 간지러울 만큼 다정한 키스를 마치고 그는 서은을 안았다.

한 품에 다 들어오는 서은의 등이 부드럽고 연약하다. 그 등을 감싸 안는데 부족한 무엇인가가 채워지는 기분이다. 주혁은 눈을 감고 그 감정을 포식하듯 만끽했다. 하지만 여자를 끌어안을수록 충만함과 동시에 절박한 허기를 느꼈다.

기묘한 모순 속에서 주혁은 고백하듯 말하였다.

“바다보다 네가 보고 싶었어.”

여자의 눈은 늘 그를 향해 있었다. 그 시선을 받고 있으면 주혁은 온전해지는 기분이다. 진실로 사랑이란 걸 받는 기분이다. 여자는 그저 가볍게 즐기는 것일 뿐일지라도, 늘 그를 향해 있는 곧은 시선은 그런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그의 말을 기다리고 그가 터뜨리는 웃음에 기뻐하고 그를 빤히 보는 행위들이, 진심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해서.

준경이 알면 코웃음을 칠 일이다. ‘천하의 서주혁이 제대로 된 진짜 선수를 만나셨군.’ 하며 그를 놀릴 일이다.

진실로 정서은는 타고난 선수인가 보다. 아님 사람을 홀리는 위험한 바다의 세이렌이든가. 무엇이든 상관은 없었다. 선수라면 제대로 함께 놀아 줄 것이고 세이렌이라면 기꺼이 바다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는 주혁의 말에 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서은을 감싸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줄곧, 계속.”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를 반복하며 어떤 뜻은 강조하고 어떤 뜻은 감추었다.

줄곧, 계속,

어쩌면 앞으로도.

“너를 생각했어.”

"......."

"너는?”

묻지만 여전히 답은 없다.

고개를 들어 여자를 내려 보았다. 서은은 감정을 알 수 없는 모호한 얼굴이다. 서서히 미소를 짓는가 싶었다. 어쩌면, 하고 기다렸다. 바라였다. 그러나 여자는 불명하게 웃으며 그 마음을 뭉그지른다.

“이제 집에 가요.”

작별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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