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함부로 마음이 마음에게-6화 (6/16)

6. 서슴없이 찬란한

웃음 끝에 주혁이 내린 답은 ‘그래.’였다. 그러고선 ‘이제 바래다줘도 되지?’ 혼자 묻고 ‘사귀니까.’ 혼자 답하였다. 태평스레 택시 잡는 시늉을하며 도로에 팔을 뻗는 걸, 서은은 조금 어이없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함부로, 가볍게 답하지 마세요.”

다시 주혁이 서은을 돌아본다.

“가볍게 연애를 하자는 건 네가 한 제안이었잖아. 가볍게 연애하자기에 가볍게 응해 주었는데 뭐가 문제지?”

“후회할 거예요.”

“내가, 네가?”

“......당신이.”

“글쎄. 너야말로 괜찮겠어?”

주혁은 깊고 집요한 시선으로 서은을 보았다. 후회하는 건 서은이 될 거였다. 어설픈 선수 흉내를 내며 그에게 함부로 겁 없이 군 것에 대해 분명 후회할 날이 올 테지.

“답은 안 해도 돼.”

“…….”

“답을 원해서 한 질문은 아니니까.”

서은은 웃을 것 같기도, 울 것 같기도 한 묘한 얼굴로 주혁을 올려 보았다.

거칠 것이 없는 남자. 두려움이 없어 보여서 더욱 두려운 남자를 앞에 두고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나 사실 귀가 안 들려요.

옛날에 사고를 당해서, 아무것도 안 들려요.

실은 당신이 방금 한 말들도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그래도 괜찮아요?

목구멍에서만 맴도는 말들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정서은, 너 참 나쁘다.

벌을 받을 거야.

해야 할 말 대신 눈물이 꾸역꾸역 차올랐다.

주혁은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분명 상처를 입어야 하는 건 주혁이었는데. 그에게 거만한 제안을 하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정서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왜.”

기어코 서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서은은 도리질을 했다.

"울지 마.”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울지 마,라니. 그래서 주혁은 스스로가 한심하다.

“서은아.”

주혁의 다정에 서은의 죄책감이 몸집을 불렸다. 사실을 말하고 돌아서야 하는 게 옳을진대, 그녀를 부르는 주혁의 다정함은 서은의 욕심을 키운다.

“울지 마.”

주혁은 그가 무섭다는 서은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여기서 서은을 놓아주고 싶진 않으니까. 무모하게 굴지 말고 놓아줄 테니 돌아서란 말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우는 건 싫은데.

“미안해.”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고 어설픈 사과를 건넨다. 그럼에도 서은의 울음은 그치지 않는다.

해 줄 수 있는게 없어서,

주혁은 입을 맞추었다.

* * * * *

밤중에 잠에서 깼다. 몸이 조금 뜨거웠다. 몸이 더워 살짝 창문을 열었다. 기어드는 찬바람 아래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래도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리는 무겁고 마음은 달떴다. 밤이 깊어질수록 서은은 자신이 무슨일을 저질렀는지 점점 실감이 났다.

주혁은 이제 가고 없는데 심장은 여전히 크게 가슴을 두드렸다. 두렵지만 설레었다. 설렜지만, 마음이 아팠다. 끝이 정해진 연애였다. 마음은 아파도, 다행이었다. 안도의 끝엔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달라붙어 감정들이 뫼비우스의 띠를 돌듯 어지러웠다.

똑똑한 남자니까 분명 들킬 테지. 아니야, 그렇게까지 깊게 가진 않을거야. 그 정도로 오래 만날 일도 없고 말대로, 가볍게, 아주 잠시만. 잠시라면, 언제까지. 올해가 끝나면? 아니야. 그건 너무 짧고, 남자는 바쁘니까. 겨울이 끝나면. 그래. 겨울이 지나면. 긴 인생에서 그 정도의 유희쯤은 괜찮을거야.

신이 있다면 서은의 삶에서 이 정도의 욕심은 허락해 주어야 한다고, 서은은 스스로 합리화를 했다. 합리화의 끝에 떠오르는 건 다시 서주혁이다.

그러나 떨쳐 내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 시야는 까맣고, 들리는게 없어 그 무엇의 존재도 와닿지 않으니. 우주에, 심해에, 무인의 세상에 홀로 둥둥 떠 있는 느낌으로 잠을 청했다. 바람만이 서늘한 존재를 알리며 토닥이듯 살갗을 간질인다. 고요속에서 상념들이 점차 가라앉았다. 몸은 무거워지며 의식은 가물가물 아스러졌다.

혼몽에 몸을 맡기지만,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떠올라 남아 있는 건, 홍은동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의 온도가 얼마나 후더분했는지.

차창 밖의 달이 자꾸자꾸 서은을 따라왔다는 것과,

그 아래 세상이 인공의 빛으로 반짝이며 밤을 무색케 하고,

차창 위 주혁의 인영이 서은을 향할 때면 괜스레 힘을 주었던 입안의 감각과.

택시에서 내리며 서은의 손을 잡아당기던 단단한 힘의 크기.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한 시선,

끝내 견디지 못해 다시 고개를 돌린 스스로의 부끄러움, 떨림, 뜨거움, 같은 것들.

아득히 잠기는 정신 속에서 결국은 희미해지는, 그런 것들.

* * * * *

시선이 어딜 향해 있는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을 만큼 수현의 시선은 모호했다. 젊은 상사의 내리깐 눈매 혹은 그 너머의 유리 벽쯤을 바라보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흐릿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수현은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젊은 상사가 내뿜는 차가운 위압과 예리하고 생생한 공기, 낯설고 건조한 기류들이 짧지만 무거운 고요 속에 그녀를 침잠시키는 느낌이다. 소음이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현은 남자에게 빨려 들어가는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남자는 타인을 본인에게 몰두하게 만드는 기이한 능력이있다. 화이트 톤의 싸구려 책상도 남자를 앞에 두고 고급의 것으로 변모해 있다. 서주혁, 서주혁, 말만 들었는데 실제로 이렇게 대면해 보니 과연 서주혁이었다.

그러니까, 시작은 인터넷 기사에 달린 어느 댓글이었다고 한다. ‘서정홍보팀은 서정의 지능 안티이고 서정 마케팅팀은 서정 몰락을 목표로하는 X맨이다.’

신세대 마음을 배워야 한다며 종종 인터넷 서핑을 즐기는 김재구 사장이 간만에 서정을 검색했을 때 뜬 기사가 서정의 마케팅을 비판하는 기사였고, 그 밑으로 가장 많은 추천수를 받은 댓글이었다. 다혈질이면서 의외로 단순한 구석이 있는 사장이 거기에 꽂혀 ‘서정 홍보’ 혹은 ‘서정 마케팅’을 내리 검색했고, 그렇게 발견한 글들은 대강 비슷한 내용이었다.

‘제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진성보다는 못한, 만년 2위 기업, 서정. 진성이 메시를 모델로 쓰면 서정은 펠레를 모델로. 대체 언제 적 펠레인지.

펠레의 저주는 신경도 안 쓰나? 설마 서정도 대기업인데 인재가 없으려고, 윗자리 차지하고 있는 꼰대 같은 임원이 퇴짜 놓는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하는 홍보마다 하나같이 이렇게 구릴 수 있어.’

사장의 엄중한 얼굴과 차분한 어조에 어울리지 않는 말의 내용이 회의실의 긴장을 더했다고 한다. 준비된 댓글을 모두 읽었을 때 사장은 잠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벽력처럼 소리를 내질렀다고도 했다.

대체 그간 기자들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언론에 이따위 글이 뜰 때까지 무얼 했어!

하여 부장급 이상 관리자들의 급작스러운 인사이동이 결정되었다. 그건 수현이 있는 마케팅팀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수현은 얼마 전 막 부서 이동을 하였기에 수 현의 잘못은 아니었다. 마케팅팀으로 이동을 할 때만 해도 수현은 이곳에서 마케팅팀원들과 이렇게 기죽은 모양새를 하고 죽은 듯이 서 있을 줄은 몰랐다. 과연 머피의 법칙은 이번에도 어김이 없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다. 어찌 되었든 발표는 끝났는데 상사는 말이 없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비튼 젊은 상사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원래대로였다면 프레젠테이 터는 곽재혁 대리였다. 지난 주말 간만의 동창회에서 술을 들입다 부어 마셨다는 곽 대리의 목은 그제부터 맛이 간 상태였다. 술 대신 약을 탈탈 들이 붓고 목에 좋다는 온갖 차를 마셨지만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여 오늘 오전 프레젠테이터가 수현으로 급하게 변경되었다. 곽재혁 대리의 PPT를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는 이유로, 누구보다 프레젠테이션의 내용을 정확히 알 터이니, 하는 이유로.

그 긴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수현은 지금 제대로 똥을 밟은 기분이었다. 홍보2팀이 눈물 나게 그립다. 서은이 보고 싶었다.

“PPT 내용 완벽하고, SWOT 분석 좋고.”

남자의 매끄럽지만 감정 없는 목소리가 팽팽하게 유지되던 기류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그런데 결론은 왜 이렇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죠?”

답이 없는 질문이고 답을 해선 안되는 질문이었다. 옆에서 김 대리가 눈치 없이 마른기침을 콜록해 댄다. 수현은 그 작은 소음이 눈물겹게 반가웠다.

“AJ attribute 분석 자료 있습니까?”

“7쪽의 제품 포지셔닝 전략 파트보시면....”

“일곱 줄짜리 스펙 기술한 것 말고,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분석 자료를 말하는 겁니다.”

수현은 잠시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가 빠르게 잘못을 인정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차분한 대꾸에도 주눅이 들어 땅에 박힌 시선은 올라올 줄을 모른다.

“애초에 준비하란 말을 않았으니 내 잘못이겠죠.”

상사가 ‘내 탓이요’ 스킬을 시전하다니. 세상에 그보다 더한 책망은 없을 거였다.

그 뒤에도 주혁은 수현을 비롯한 몇몇 팀원들에게 AJ의 셀링 포인트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묻고, 답을 듣고, 다시 반박했다. 주혁의 반박에 제대로 답을 내는 이가 없어, 분명 회의실에는 다양한 음성들이 떠돌고 있음에도 고요에 가까운 분위기가 두텁게 깔렸다. 상사가 눈썹이나 턱을 매만지는 행동 따위에도 신경이 곤두설 정도였다.

다시 수현은 후회한다. 내가, 왜, 마케팅팀으로 부서 이동을 신청해서. 내가, 미쳤지. 이놈의 똥손!

곧 주혁이 무성의하게 종이를 촤르륵 넘기더니 사무적이고 조금은 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죠. 지금 필요한 건 파격 입니다. 이미 서정 마케팅에 대한 소비자의 이미지는 바닥을 치고 편견이 두껍게 깔린 상태라 웬만한 자극으로는 그 이미지를 벗기 힘들 겁니다. 숙제를 하나 내도 될까요? 두 가지 분석안을 만드세요.

하나는 전문 용어들을 사용한 평상시 여러분이 쓰는 분석안, 하나는 전문 용어를 모두 배제하고 초등학생에게 설명을 한다, 가정한 상태에서의 지나치게 이해하기 쉽고 구체적인 분석안. 가장 기본인 프로덕트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 봅시다. 때때로 시시하고 쓸모없다 생각하는 것에서 셀링 포인트를 잡아내는 경우가 있으니.”

그리고 남자는 한 템포의 텀을 두었는데, 다시 말을 시작했을 때의 음성은 전의 것과 비슷하면서 미묘하게 달랐다. 조금 사무적이고 조금 무정하지만, 햇살처럼 온화하고 물처럼 흐르는 목소리.

“여러분을 질책하거나 힐난하려고 자리를 만든 건 아닙니다. 저 또한 팀원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프로젝트를 완성해 가는 과정에 있고 서정에서 월급을 받아먹고 사는 직장인입니다. 실패나 책망을 두려워하지 말고 어차피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나를 백으로 삼아 각자의 능력을 보여 주기 바랍니다.”

말을 마치고 주혁의 시선이 회의실을 쭉 훑었다.

“그러니 잘 부탁해요.”

남자가 엷게 웃는다. 사람을 홀리는 미소였다.

회의가 끝나고 주혁이 회의실을 나가기를 기다리며 문 앞에서 배웅을 했다. 주혁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수현을 응시했다. 빤히 응시하는 눈길에 수현의 심장이 덜컹 흔들렸다. 혹시 오늘 발표에 또 무슨 문제가 있었나 불안해서, 그가 하늘 높은 상사여서, 남자가 너무 잘생겨서, 남자의 미소가 나른하다 못해 섹시해서 등등, 서주혁을 앞에 두고 심장이 덜컹대는 이유는 수 가지였다.

“왜…….”

“원래 마케팅팀이었습니까?”

“네? 아, 아뇨. 원래 홍보2팀 소속이었다가 이번에 부서 이동했습니다.”

“아아.”

수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내 젊은 상사는 태평하게 그렇군요, 하고 회의실을 나갈 뿐이었다.

이쪽의 흔들리는 심장은 생각도 안해 주고.

주혁이 나가고 마케팅팀의 사람들은 저마다 안도의 숨을 뱉었다. 그러다 끝에는 저마다 서주혁에 대한 감상을 내뱉었다. 대개 처음엔 차갑고 무섭고 위압적으로 보였는데 결국에는 잘생기고, 멋있고, 유능하다는 거였다. 확실히 새로운 상사는 생각보다 꽤 많이 근사했다.

어쨌든 가슴 졸이며 준비했던 PT가 끝나서 수현은 혼이 빠져 의자에 축 늘어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불현듯 서은에게 문자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오전에 서은에게 사내메시지로 마케팅팀으로 이동한 것에 대해 신세 한탄을 하였는데, 얼른 새소식을 전해야겠다. 서주혁이 우리 담당이라고. 같이 회의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는데 완전 대박이었다고.

더불어서 나를 아는 것 같더라고. 지난번 엘리베이터의 우연과 겹쳐서 설마 인연인가, 설마 나한테 반했나, 하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지만 그건 너무 터무니없었다.

아무튼 서은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을 해 주어야지. 분명 서은이 부러워할 거였다. 수현은 홀로 키득였다.

“아시는 분입니까?”

회의실을 나오며 비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뇨. 어디서 본 것 같아서, 내 착각인가 봅니다.”

주혁은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그러자 비서도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물러났다.

주혁의 기억에 최수현은 서은의 동료였다. 그것도 제법 친한. 언젠가 수현이 서은의 볼을 잡고 늘어지던 장면을 떠올렸다. 서은이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고. 주혁은 짧은 숨의 웃음으로 생각을 갈무리했다.

가벼운 연애를 시작하며 서은은 다시 조건을 걸었다. 밥 한 끼에 뒷조사하지 말아 달란 조건을 붙인 여자였는데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여전히 뒷조사받는 건 상하의 지위를 깨닫게 해서 불쾌하다 하였고, 이번에 추가된 건 전화는 안 된다는 것.

‘그럼, 나는 네게 어떻게 연락을 하지?'

불퉁스레 물었더니 문자로 하랬다. 이유를 물었다. 서은은 ‘관계가 깊어지길 원하지 않아서’ 라고, 묘하게 반문하듯 답했다. 서은의 답은 조금 괘씸했지만 서은의 입장에서 주혁과의 관계를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해 주기로 했다.

그래서 주혁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무척 성실하게 그 조건에 응하였다. 이만하면 나름 다정하고 친절하고 자상하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착실하기도 하지.

사실 마음만 먹으면 뒷조사나 전화 따위가 그 무슨 대수일까 싶었지만, 그 역시 서은의 뒷조사 같은 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지시를 내리면 단번에 태일에게 보고가 올라갈테고 여러모로 골치가 아파질 거였다. 그런 걸 제외하고서라도 굳이 할 이유도 없었다.

또한 전화는 이쪽에서 걸어도 그쪽에서 안 받으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런데도 그가 그 조건들을 착실히 지키는 이유는, 어떤 불문율이었다. 서은이 싫어하는 건 하고 싶지 않았다. 반쯤은 억지로, 서은을 울리며 시작한 관계였는데.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서은이 그를 좋아해 주었으면 하니까.

그래서 주혁은 문자를 보냈다.

[뭐 하십니까?]

답은 한참 뒤에 왔다.

[비밀이에요.]

어이가 없었다.

* * * * *

서은은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서은의 송별회 자리였다. 시작은 뷔페였지만 서은과의 마지막을 이렇게 아쉽게 보낼 순 없다며 부장이 이끌고 간 곳은 본인이 그렇게 바라던 이자까야 ‘야미’였다.

꼬치 하나를 입에 물며 이 집의 소스는 언제 먹어도 기가 막히다고 경탄을 했다. 1차에서 2차로 자리를 옮기며 야금야금 빠져나간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명분이 서은의 송별회인지라 서은은 그러지 못하였다. 부장의 옆에서 부장이 따라 주는 소주를 두 잔, 세 잔 연이어 마셨다. 술에 취한 부장의 발음이 어눌하여 제대로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그편이 차라리 나았다. 서은은 적당한 추임새로 말을 받고 적당한 미소로 말을 넘겼다.

잠시 부장의 주위가 산만해진 틈을 타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같은 테이블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표정을하고 입을 움직였다. 이런 술자리에선 자연스럽게 서은은 이방인이 된다. 좀처럼 사람들의 입술을 읽을 수가 없었지만, 쉬이 ‘다시 말해 주세요:, 할 수도 없었다. 서은의 장애가 그들의 흥을 깨뜨리는 걸 원치 않을 테고 서은도 그러기엔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이런 자리에 오면 서은은 하회탈 같은 가면을 썼다. 그러면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아무 흠 없이 그들의 장단을 맞추며 함께 어울려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부장이 이게 정말 마지막 잔이라며 다시 또 술병을 든다.

“서은 씨. 이 년 동안 수고했어. 말은 안 해도 엄청 힘들었을 텐데, 그런 몸으로 이 년 동안 잘 버텼어. 말은 안 했지만 나도 서은 씨한테 많이 배웠어.”

혀가 꼬인 말들을 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대강 버티느라 수고했다는 내용의 말이라는 건 알았다. 좋은 말이었지만, 서은은 버텼다는 말이 아팠다. 청각 장애인은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내었다는 투의 말에 마음이 한 길 아래로 떨어지지만 금세 다시 끌어 올려 술을 받았다. 처음 홍보팀으로 발령받았을 때 부장은 서은을 아니꼬워했다. 의도치 않게 짐 하나를 떠맡게 되었다는 얼굴로 ‘귀도 안 들리는데 어떻게 홍보팀을 지원해?’ 하는 눈치를 보냈다.

서은은 버텼다는 말에 상처받는 것 대신, 부장의 말처럼 버티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기로 한다. 버틴 게 아니라 그저 남들이 하는 일을 똑같이 해낸 것일 뿐이지만, 어쨌든 서은을 아니꼬워하던 부장이 지금은 이렇게 아쉬워하게 만들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조금 눈이 뜨거워지려는 찰나, 메시지를 보았다.

[뭐 하십니까?]

옆에 있던 황 대리가 서은을 톡톡친다. 화들짝 놀라 얼른 핸드폰 화면을 가렸다. 형식이 놀랐어요? 미안,하며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나랑 자리 바꾸자고. 이 부장님, 계속 받아 주면 한도 끝도 없어요.”

“괜찮아요. 이 부장님 이제 곧 들어가실 것 같아요. 그리고 저 술 세요.”

“진짜? 주량이 얼만데?”

“지금까지 저보다 센 사람을 본적이 없을 정도?”

서은의 진짜 주량을 회사 사람들에게 말한 적 없었지만 이제 헤어지는 마당에 굳이 알려도 상관없지 싶었다. 형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야. 내가 여태껏 고수를 몰라보고. 내가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았네.”

형식과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신경은 손안의 핸드폰에 가 있었다. 형식이 주는 술잔을 받으며 주혁의 메시지를 되뇌었다. 뭐하십니까. 뭐하십니까. 가슴이 동동 울렸다.

기본적으로 주혁은 바쁜 남자였다. 비서에 의해 딱 맞게 재단된 일상에서, 비져 나오는 시간의 틈에 간간히 연락을 주었을 뿐. 연말이 다가오자 주혁은 더욱 바빠졌다. 주혁은 서울에 있는 날과 없는 날이 비등비등했다.

연애를 시작하고 데이트라 부를 만한 것을 한 적은 없었다. 일상은 대개 단순하고 평범하게 흘러갔다. 평범하게 일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그러다 사내 식당에서 주혁과 우연히 마주친 적도 있었다. 서은은 평범하게 팀원들과 묵례를 했다.

그 밤, 주혁은 서은의 집 앞에 들렀다. 지난 화요일과 목요일, 금요일엔 깊은 밤 짬을 내어 서은을 보러 왔다. 얼마 안 되는 시간, 특별한 말을 주고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 밤의 순간순간들은 기묘하고 특별했다. 의미 없는 말들을 하고, 읽고, 가끔은 주혁이 던지는 시시한 농담에 웃음도 흘리며.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주혁이 입을 다물면 상상의 소리들이 멎는다.

어떤 긴장 속에서 주혁이 연락할게, 하고 돌아서면 서은은 남몰래 안도했다. 들키지 않았음과 주혁이 다시 그녀에게 연락할 거라는 사실에. 주혁이 갈게, 하고 돌아설 땐 조금 아쉬웠다. 조금만 더 있다 가요, 라는 말이 불쑥 솟아올랐다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굳이 붙잡아 돌려세우지 않았다. 언젠가 다가올, 어쩌면 아쉬울지도 모르는 이별을 생각하며 주혁이 멀어지는 걸 가만 지켜보았다.

그것으로 서은은 만족했다. 서은의 안에선 불안과 긴장과 두려움이 파도를 치듯 넘실거렸지만, 겉으로 그들은 평온하였다. 여전히 남자는 아무것도 몰랐고 여전히 서은은 남자의 가벼운 연애 상대일 뿐이다.

순간 상념을 비집고 핸드폰의 불빛이 시야에 들어온다. 화면에 떠오르는 이름이 혁주, 였다. 번호를 저장해야 하긴 하는데 본명이나 상무라는 직함으로 저장했다가 혹여 다른 이에게 보이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고민하다가 어영부영 이름을 거꾸로 해서 저장해 놓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한 번도 전화를 건 적은 없었는데, 서은은 당황하여 빨간색 전화기를 누른다는 게 초록색 전화기를 눌러 버렸다. 화면이 전환되며 통화 중일 때 나타나는 표시가 떴다. 서은은 황급히 전화를 껐다.

잠시 뒤에 주혁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미안. 실수로 전화 버튼을 눌렀어.]

실수라는데, 이상하게 전혀 실수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애인을 두고 술은 누구랑 마셔?]

그 짧은 새에 술자리라는 걸 알아챘나 보다.

[또 비밀이라고 하면.]

하면, 그다음 말이 궁금했는데 주혁은 한 템포 느리게 메시지를 보냈다.

[화가 날 것 같아.]

그러나 묘하게도 서은은 그 문자에서 분노를 느끼지 못했다.

[야미에서 회식 중이에요.]

[아아.]

답이 금방이다. 문자를 보며 서은은 남자의 얼굴을 상상했다. ‘아아’치고 별로 감흥 없는 눈으로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듯 비트는.

[끝나면 연락해.]

[기다릴게.]

가슴이 턱 막힌다. 술과 함께 숨을 삼켰다.

사람들에겐 잠시 들를 데가 있다는 말을 하고 돌아섰다. 긴 횡단보도를 건너 수풀이 우거진 여의도 공원 속으로 들어가 연못을 돌았다. 미로 같은 밤의 공원을 이리저리 헤매듯 걸었다. 들리지 않고 어두컴컴한 밤의 공원은 위험했지만, 술기운인지 그 위태로움을 즐기고 싶었다.

공기에서 시린 겨울 냄새가 났다. 숨을 뱉으면 뿌연 김이 번지며 올랐다. 걸으며 서은은 술에 잠긴 정신을 깨우고 번잡한 마음을 단련했다. 남자가 기다리고 있을 골목길에 당장 가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남자가 기다리는 시간을 좀 더 연장하며 남자와의 거리를 다잡았다. 마음이 너무 깊어지는 건 원치 않았다. 언제든 헤어져도 아무렇지 않을 관계이니, 언제든 헤어져도 아무렇지 않게 헤어져야만 했다.

불현듯 서은은 갈피를 잡지 못해 걸음을 멈춰 섰다. 어느 길을 가야 할지 모르겠어서 조금 막막해진다. 소리 없이 바람이 불고 나무가 흔들린다. 소리 없이 뒤에서 사람들이 나타나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그들은 화들짝 놀라는 서은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이 서은을 두고 무어라 떠드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으니 개의치 않았다.

흔들리는 나무 아래 다정하게 앉아 있는 연인들을 보고, 그 뒤로 높이 서 있는 빌딩들을 보다가, 깊은 밤 휘영청 떠 있는 보름달을 보았다. 익숙한 적막과 성긴 빛무리 속에서 서은은 그녀의 이름과 남자의 이름을 되뇌었다.

서주혁과 정서은.

정서은과 서주혁.

별안간 마음이 초조해졌다.

공원을 나왔다. 택시를 발견하고 홍은동이요, 하며 올랐다. 주말이 시작되는 밤이어서인지 늦은 시각임에도 차가 많았다. 차가 신호등에 걸려꼼짝 않을 땐 다시 초조해졌다. 그러다 지쳐서 가 버리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신호등이 바뀌고 차가 다시 움직이며 속도를 올린다. 도시의 달과 별과 조명, 빛을 내는 모든 것들이 함께 달렸다.

빌라촌의 골목 사이에서 익숙한 차 한 대를 발견했을 때 서은은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차에 기대어 있는 어두운 실루엣을 보았다.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주혁은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미안한 감정이 와락 밀려들었다. 서은의 이기심으로 바쁜 사람을 괜히 기다리게 한 것 같았다.

곁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주혁은 눈을 뜨지 않았다. 서은은 음영이 드리운 얼굴을 살펴보다가 손을 들어 주혁의 입술 사이에 물린 담배를 빼내었다. 그는 순순히 놓아 주었다.

다시 주혁을 보니 주혁은 눈을 뜨고 서은을 내려 보고 있었다.

“피워 볼래?”

희미한 웃음기가 감도는 얼굴로 주혁이 물었다.

“무슨 맛이에요?”

“천국의 맛.”

고민을 하다 아직 천국에 가 보고 싶진 않아 고개를 저었다.

“상무님도 피우지 마세요.”

“왜?”

“그 나이에 벌써 천국에 가면 어떡해요.”

주혁이 하하, 웃는 것 같았다. 이어 기대었던 등을 떼고 서은에게 다가온다. 서은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소용없이, 주혁은 거리를 좁히며 물었다.

“술은 얼마나 마셨어?”

“음, 셀수 없을 만큼.”

"그런데 왜 이렇게 멀쩡하지?”

“술이 세거든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튼튼한 간 덕분이다.

“소주에서 고구마 맛이 났어요.”

“모리이조?”

“......보리 아니라 고구마요.”

주혁이 피식 웃는다.

“겉은 멀쩡한데 뇌가 취했네.”

서은은 어리둥절했다. 아닌데. 정말 취하지 않았는데. 아까, 보리이죠? 라고 물은 게 아니었던가. 하기사. 이상하긴 하다. 서은에게 존대를 쓰지 않는 주혁인데 ‘보리이죠?’ 하고 물을 리가. 아아, 어떡해. 입술을 잘못 읽었나 봐.

서은은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 그런 서은을 주혁은 신기하게 혹은 기이하게 바라본다.

짧은 순간 주혁의 얼굴이 고개를 비틀어 숙이며 서은의 앞으로 다가왔다.

“맛 좀 보여 줘.”

입술이 닿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서은은 팽하니 고개를 틀었다. 처음 연애를 시작하기로 한 날 이후로 주혁이 입을 맞춰 온 적은 없었다.

서은의 뺨 위로 남자의 기분 좋은 숨결이 쏟아져 내린다. 돌아보니 주혁이 웃고 있다. 남자가 웃음을 터뜨려 남자의 숨결과 서은의 숨결이 얽혔다. 입술이 뜨겁다. 너무 가까워서 주혁의 입술을 읽을 수 없었다.

대신 서은은 주혁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마에서 눈, 코, 광대와 뺨. 주혁의 시선이 서은의 시선을 따라온다. 서은은 어떤 충동에 주혁의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부드럽고 까슬했다. 주혁이 그 손가락을 쥐어 내렸다. 그가 다시 상체를 들고 멀어졌다.

“네가 회사를 관둬서 다행이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니 주혁이 눈을 맞춰 온다.

“나쁜 짓 좀 해 보려고. 회사에선 보는 눈이 많거든.”

주혁이 자연스럽게 깍지를 꼈다. 손가락들이 빈틈없이 얽혔다. 주혁은 동네 구경을 시켜 달라 했다. 이사온 지 꽤 되었는데 아직도 홍은슈퍼말고는 아는 게 없다고 했다. 함께 나란히 걸었다. 이렇게 손을 잡는 건 처음이었다. 걸으며 주혁이 엄지로 서은의 손등을 쓸기도 했다. 그 어떤 스킨십을 하는 것보다도 이 순간 주혁과 손을 맞잡은 행위가 서은에게는 가장 은밀하게 느껴졌다. 두근두근 울리는 심장의 소리가 상상됐다.

경사진 길을 함께 내려가며 혹여 주혁이 무슨 말을 할까 싶어 서은은 계속 그를 올려 봤다. 그러자 주혁이 왜, 하고 묻는다. 서은은 단조로운 어투로 그냥, 대꾸했다. 주혁은 가벼이 웃었다.

“이젠 내가 안 무서워?”

“무서워요.”

“이유를 알려줘.”

“알아서요?”

“정서은 예쁨 좀 받아 보게.”

“전에 말했는데. 서승사자를 닮아서라고.”

“그건 내가 고칠 수 없는 거니까 패스. 내가 무서운 다른 이유는?”

“그것도 비밀.”

“아아. 아가씨, 왜 이렇게 숨기는 게 많아.”

서은의 마음이 덜컹 흔들렸다. 그저 시시한 장난 같은 대화일 뿐인데.

동요하는 마음을 숨기고 서은이 물었다.

“그러는 상무님은 비밀 없어요?”

“네가 궁금해하면 알려 줄 거야.”

“회사 기밀도?”

주혁은 고민하는 척 시선을 틀더니 그건 좀 곤란한데, 답하였다.

“치사해라.”

“그건 알아서 뭐 하려고?”

“부자가 돼 보려구요.”

주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웃으면 서은도 기분이 좋았다. 서은이 그를 웃게 하여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들뜨는 가슴을 느끼며 물었다.

“언제부터 기다렸어요?”

“맞혀 볼래? 맞히면 상을 줄게.”

“……한 열 시간?”

열 시간이라니. 스스로 답하면서도 말이 안 되었다. 어차피 못 맞힐거 잔뜩 과장을 해 봤다. 주혁이 낮은 웃음을 터뜨린다.

“사실 나도 기억이 안 나.”

아마도 거짓말일 것이다. 언젠가 부장이 말했었다. 세상에는 하루가 24시간이 아닌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서주혁의 시간이 그러하다고. 그들의 시간은 우리와 조금 다르게 흐른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시간이 아닌 초와 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도 했다. 초와 분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삶은 어떤 삶일까.

그렇게 바쁘면서 서은을 기다리는 남자를 상상하니 가슴이 뜨끈해진다. 그렇게 서은을 기다렸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능청을 부리는 남자의 모습이 서은에게 설렘 비슷한 흥분과 가슴 깊이 차오르는 뿌듯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긴 대화를 나눈 것도 이번이 처음이던가.

그러나 곧 깨닫는다. 이 감정들은 나를 썩게 만들 것이다. 이 달콤함에 도취되고 중독되게 하여 이 겨울이 지날 때면 결국 서은의 마음을 까맣게 부패시킬 것이다. 서은은 간신히 굳어 내린 서은의 뿌리가 남자로 인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남자와 헤어져도 서은은 서은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했다.

"앞으론 기다리지 않아도 돼요.”

“왜?”

서은은 답을 않고 흐릿하게 웃었다. 무언갈 느낀 주혁이 검은 얼굴로 반문한다.

“내가 기다리는게 싫어?”

“…….”

“싫으냐고.”

서은은 답을 망설였다.

“실은 기다려 주길 바랐지?”

주혁의 표정은 서은을 구슬리는 것 같기도, 아이처럼 보채는 것 같기도 했다. 서은은 원하는 답을 해 주기로 한다.

“그런 걸 바란다면 앞으론 그럴게요.”

서은이 체념하듯 하는 말에 주혁은 느리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네온이 꺼진 홍은슈퍼의 간판이 보이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홍은슈퍼 사선 방향의 언덕을 조금 오르면 주혁의 집이 나왔다. 그리고 그 반대편 방향의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면 서은의 집이 나온다. 붉은 갈색의 벽돌로 세워졌고 앞뒤로 수 개의 전깃줄이 걸려 있다. 서은의 빌라에는 서은 말고도 중년의 여성과 말티즈 한 마리, 노부부,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부가 살고 있다. 모두 서은을 기다리며 알게 된 것들이다.

검은 하늘에 가 있던 그의 시선을 서은의 음성이 잡아끌었다.

“이제 가요. 너무 늦었어.”

서은은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쥔 주혁의 손을 밀어 내려 했다. 표정 없이 바라보니 겸연쩍게 웃으며 말을 붙인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내일 지각할거예요.”

언제나 작별의 때를 알리는 건 서은이었다. 매일 밤 일이 끝나면 홍은 동으로 돌아왔다. 서은에게 문자를 보냈을 때 서은이 읽으면 서은을 보았고, 서은이 읽지 않으면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때론 밤이 너무 깊어 새벽이 되었을 때에도 서은의 집 앞에 들렀다가 꺼진 불을 확인하고 돌아갔다. 서은이 말하는 가벼운 연애에서 헤어짐을 알리는 게 서은의 역할이라면 기다리는 건 주혁의 역할이었다.

주혁이 입매를 늘였다.

키 차이가 나 눈을 내리뜬 얼굴은 나른하고도 위험해 보였다. 주혁이 힘주어 서은의 손을 당겼다. 서은의 몸이 주춤대며 주혁을 향한다.

“나는 네가 나를 기다리기를 바라.”

주혁의 얼굴에 희미한 고집이 스며 있다.

“내가 연락이 없으면 먼저 연락을 해 주었으면 좋겠고.”

그는 웃고 있었는데, 눈빛만은 서늘하여 어딘가 미소 같지 않은 미소였다.

“내 연락을 기다리면서 애를 태웠으면 좋겠어. 내가 바라는 걸 너도 바라기를 원하지.”

주혁은 곧 차갑고 인위적인 웃음마저 지웠다.

“연애를 제안한 건 너야.”

"……."

“최선을 다해.”

최선을 다해. 서은은 그 말을 곱씹었다. 주혁이 미묘히 표정을 나른하게 바꾼다.

“최선을 다해 줘.”

“……상무님.”

“넌 상하의 지위를 깨닫는 건 불쾌하다 했지. 이제 회사도 관둔다며, 왜 아직 그 호칭에 존댓말이야?”

겉으로 주혁의 얼굴은 평온했으나 스며든 고집이 완고했다. 서은은 지그시 이를 물다가 덤덤히 그를 불렀다.

“서주혁 씨.”

서은의 입에서 처음으로 듣는 그의 이름에 주혁의 피가 뜨거워진다.

“왜, 정서은 씨.”

내가 만드는 거짓은 나의 목을 조르고 당신과의 불장난은 결국 나의 마음을 태울 테지만. 사랑이 삶의 전부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삶의 전부가 되는 일은 우습다.

서은은 짧은 생각 끝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 상사도 아니니까, 정말 막대할 거예요.”

뭘 그리 진지하게 구냐는 듯 서은의 말투는 장난스럽다.

주혁은 회명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실소하듯 피식 웃었다. 그들의 관계에 있어서 서은의 위치는 이렇듯 명확하다. 얼마의 거짓과 얼마의 장난, 얼마의 가벼움과 얼마의 즐거움. 그 이상은 바라지 않고 언제든 발을 빼고 뒤로 돌아설.

때때로 서은은 그의 가슴속 깊이 잠들어 있는 맹렬하고 뜨거운 어떤 것을 도발한다. 언젠가 서은은 주혁의 그것을 터뜨릴 테지. 예감을 하며 주혁은 다정히 웃었다. 그때까지 그는 참을성 있게 기다릴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기꺼이 서은의 장단에 맞추어줄 것이다.

“얼마든지.”

주혁이 뒤늦은 대꾸를 했다. 순간 그가 서은의 목덜미를 감싸며 서은을 끌어당겼다. 서은이 멈칫하는 사이 주혁의 혀가 깊게 들어왔다. 남자의 품에 손이 갇혔다. 당황했지만 서은도 곧 눈을 감았다. 그가 서은의 몸을 더욱 당기고 혀가 집요하게 얽혔다. 주혁이 고개를 비틀며 서은의 입술을 더 벌려 온다.

깊고 짙은 키스였다.

키스를 하며 서은은 다시 주혁이 무서워진다.

서슴없이 그녀의 안에 꽃을 피우고 가눌 수 없이 찬란한 순간들을 심어 놓고 아무렇게나 마음을 흩트리는 당신이, 무서워. 하지만 겁내 하진 않을 거야. 그러기엔 이 시간과 순간들이 너무 짧고, 아름다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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