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함부로 마음이 마음에게-5화 (5/16)

5. 잠시만, 한 번쯤, 가볍게

연락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저녁 먹었어요?]

[나 배고픈데.]

[먹었어도 같이 먹어 주면 안 되나.]

한참 고민 끝에 서은은 답을 보냈다.

[제가 왜요?]

[심심하니까.]

하여튼 그놈의 심심. 서은이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농담이고. 약속했잖아.]

약속? 무슨?

다시 또 답이 없자 남자가 볼멘소리를 한다.

[너무하네, 정서은.]

[난 약속을 지켰어. 그러니 너도 약속을 지켜야지.]

[정서은에 대해 궁금했지만 인사 자료 뒤져 보거나 사람 시켜 뒷조사하지 않았다고. 심지어 구글링도 해본 적 없어.]

[이렇게 착하고 성실하게 약속을 지켰으니 이젠 정서은 차례지.]

그래도 답을 못 하는데, 다시 알람이 울린다.

[내 구글 검색 기록이라도 보여줘요?]

이쯤 되자 하릴없이 웃음이 나왔다.

주혁이 보낸 메시지를 읽고 또 읽고, 한번 웃었던 부분에선 또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한 번쯤, 잠시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는 그녀의 상사이고, 선배이고. 밥이야 저번에도 한 번 먹었는데 또 한 번 먹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영란은 서은이 말하기 전까지 그녀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걸 알지 못하였다. 선배와 상사와 몇 시간 함께 보낸다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였다. 치료를 받기 위한 병원에서 우연히 만난 기현의 때처럼. 기현을 대하듯 대하고 조금은 머리 빈 후배처럼 굴다가, 남자의 서은에 대한 흥미가 식고, 내일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될 터였다.

그러니까,

한 번쯤,

잠시만.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구글 기록이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거지만, 믿을게요.]

* * * * *

“서은 씨, 지난번에 말했던 것, 수정 다 했어?”

“네. 지금 보내드릴까요?”

“응. 얼른 언론에 띄우고 식사하러 가자고.”

서은은 알겠습니다, 답을 하는 동시에 파일을 첨부하고 ‘SEND’ 버튼을 눌렀다. 옆자리인 수현이 빙글 의자를 돌려 서은을 향해 기지개를 켜다가 대뜸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야미.”

“네?”

“야-미. 서은 씨 송별회 장소. 먼젓번에 이 부장이 좋아했던 이자까야 기억나?”

12월에 서은은 퇴사를 하고 수현은 부서 이동을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직 많이 남았는데.

“벌써 정하는 거예요?”

“지난번 회식 때 팀원 반 이상 없어서 이 부장 엄청 기분 안 좋았던 거 기억나지? 회식 좋아하고 사람 빠지는 거 싫어하는 이 부장이잖아. 근데 윗선에서 불합리한 회식 문화 개선한다는 통에 뭐라 말도 못 하고 혼자 분을 쌓아 둔 거야. 그러다 이번엔 아예 일찍부터 공고를 할 테니 그날은 꼭 비워 두고 빠지지 말고 다 참석하라는 의미지. 정말 대단하지 않니, 그 집념?”

수현은 완전히 질렸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런 또라이 정신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야 승진도 하나 봐. 그러면서 겉으로는 12월이라 식당들 바쁠 테니 미리미리 예약 잡아 두라고 하더라. 하여튼 원래 서은 씨한테 물어보고 해야 하는데, 이 부장이 서은 씨도 거기 좋아했다고 막 추천하지뭐야. 실은 본인이 먹고 싶어 하는 거면서, 그 속을 모를 줄 알고. 야미 괜찮아, 서은 씨? 별로면 내가 이 부장한테 말해 볼게.”

빠르게 쏟아지는 말이어서 다 알아 듣진 못했지만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굳이 다시 묻지 않았다. 대충 마지막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 서은이 물었다.

“어차피 마지막인데 고집 좀 부려볼까요?”

“부려. 막 부려. 제발 부려 줘. 어차피 다신 안 볼 사인데. 맨날 이 부장 비위 맞춰 주는 것도 질리고. 난 죽든 살든 계속 다녀야 하니까 서은 씨라도 막 부려 주라, 제발.”

수현은 두 손을 모으며 부탁하는 시늉까지 했다. 지난 회의에서 이 부장한테 된통 깨진 터였다. 서은은 웃음을 터뜨리다가 어차피 서은도 이 부장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으니까, 잠시 고민에 빠진다.

“으음. 고깃집은 떠나는 마당에 내가 고기 구워야 할 것 같으니까 패스. 아, 뷔페 어때요? 계속 왔다 갔다 움직여야 하니까 이 부장 얼굴 마주치는 시간도 줄고 어수선해서 일찍 나가기도 쉬울 것 같은데.”

“좋아, 좋아. 아, 근데 난 갈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 그때면 나 이미 마케팅팀으로 이동해 있을 텐데.”

“와. 저도 같이 빠지면 안 될까요?,”

“아니, 서은 씨 송별회 자리에 서은 씨가 없으면 어떡해?”

둘은 함께 키득거렸다.

“둘이 무슨 대화를 하길래 그렇게 속삭거려요?”

앞자리의 황 대리가 믹스커피 냄새를 풍기며 다가왔다. 갑자기 다가오는 바람에 입술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서은은 ‘네?’ 반문했다.

“나도 좀 끼워 달라구요.”

수현이 휘휘 손을 저었다.

“별 얘기 아니었어요. 여자들끼리 오프 더 레코드.”

“섭섭하게. 이거 남녀 차별입니다.”

남몰래 황 대리를 짝사랑하고 있던 수현은 어머, 어머, 입술을 과장되게 움직이며 ‘진짜 차별이 뭔지 보여줘요?’ 타박을 했다. 타박을 놓으면서도 수현의 즐거운 미소와 붉어진 귀밑 언저리를 서은은 놓치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대신 보이는 것들. 듣지 못한 소리를 대신하여 볼 수 있게 된 것들이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팀원들과 대화를 나누기까지, 실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농아인이 대기업 본사에 발령받아 일한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운이 좋았다. 한창 언론에서 대기업 때리기를 하던 때에 서정에선 이미지 제고를 위해 갖가지 사업을 벌이는 중이었고, 서은의 본사 발령 및 배치는 그런 사회적 환원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인터넷을 잘 찾아보면 서정의 장애인 고용에 대한 기사에 서은에 대한 것도 몇 줄 나와 있다. 그래 봤자 ‘정동그라미동그라미’일 뿐이고, 서은은 계약직이었지만.

서정 입사가 결정되었을 때 서은의 아버지 윤철은 날듯이 기뻐했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해서 서은은 윤철의 거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윤철은 서은에게 뭐가 되든 좋지만 남들에게 사랑받고 대접받으며 살길 바란다고 했다. 그게 꿈이라고. 딸이 공부를 잘해서 기쁜 이유는 공부를 잘하면 남들에게 대접받으며 살 수 있다는 순박한 믿음에서 나온거였다.

하여 사고로 서은이 듣지 못하게 되었을 때 윤철 역시 하늘이 무너졌으리라.

절망 속에서, 윤철은 서은을 살려야 했다. 서은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만들어야 했다.

윤철은 하던 일을 관두고 때늦은 공부를 시작했다. 특수 교육 기관을 찾아가고 책을 찾아보고 그러다 구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윤철은 서은과 함께 구화를 배웠다. 거울을 놓고 매일 입 모양과 목울대, 얼굴의 근육들과 씨름을 했다. 수입이 되는 모든 일을 관두고 시작한 일이었던지라 그간 모아 놓은 돈을 탕진해야 했지만, 하나뿐인 딸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락 같은 무음의 세계에서 서은은 윤철과 함께 울고 웃고 절망하다가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지금처럼 일상적인 대화가 가능하기까지 그들이 얼마나 피나는 훈련과 노력을 해야 했는지 아무도 모를 거였다.

서은의 서정 입사는 그러한 노력의 보상이었다. 윤철은 꺼이꺼이 울었다. 서은의 사원증을 들고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 입사했을 땐 여러 팀원들이 함께하는 회의 참석은 거의 불가능했고, 무엇보다 팀원들이 서은을 믿어 주지 않았다.

서은은 팀원 한 명이 정리해 주는 회의록을 전달받는 것으로 회의를 대신해야 했으며 업무 보조라는 명목 아래 팀의 허드렛일과 잡무들을 맡아야 했다. 어느 때엔 듣지 못하는 서은을 두고 회식을 가 버리기도 했다.

그들이 서은을 무시하고 하대할수록 서은은 더욱 활짝 웃으며 상냥하고 친절하게, 오기와 끈기로 무시와 멸시를 견뎠다. 그러다 가끔은 서은이 사랑받고 대접받으며 사는 게 꿈이라던 아빠의 말이 떠올라 서러워 몰래 울기도 했다.

지금에 와선 모두 지난 일이다. 처음 서은이 홍보팀에 발령받았을 때 못마땅히 여기던 부장도 이제는 서은을 믿고 업무를 맡겼다. 여전히 서은은 못 미더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친해진 사람들도 제법 생겼다.

부장에게서 계약 연장을 제안받았지만 서은은 거절했다. 부장은 이번 계약 연장을 하면 연장 기간 중에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게 힘도 써주겠다 했지만 그것 역시 사양했다. 부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뿐더러, 설령 정규직이 된다 하더라도 그녀의 한계를 서은은 알았다.

주요 임원을 대하거나 언론의 집중을 받는 막중한 일에 서은은 투입되지 못한다. 해당 팀원을 꾸릴 때마다 윗사람들의 입에서 서은의 이름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서정에 입사하고 난 후 서은은 오히려 오르지 못할 나무가 무엇인지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대신 서은은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되어 모든 의욕과 생기를 잃어 갈 때 주치의가 권했던 미술 치료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때부터 취미가 되어 서은은 지금까지도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서은이 주로 그리는 건 A4 반페이지 크기의 일러스트였다.

서울을 주제로 일상의 사람들과 풍경을 그렸다. 풍경 속의 소리를 상상해 그 안의 배경으로 색칠을 했다. 그렇게 서은이 그린 그림들을 SNS에 올리곤 하였는데 팔로어들이 점점 늘어나더니 SNS를 통해 외주 신청이 들어오고 강의을 요청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하여 퇴사 후인 다음 달부터 영란의 화실을 빌려 일러스트 강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들리지 않아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어좋았다.

“언제가 좋아?”

“......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터다. 서은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이 부장 말구, 우리끼리 또 따로 밥 한번 먹어야지. 서은 씨 다음 주 주말 괜찮아요?”

다음주 주말....... 달력을 넘기며 날짜를 확인하다가 서은의 손가락이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시선은 달력 위의 ‘1’이라는 숫자에서 머뭇거렸다.

곧 서은은 미안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옮겼다.

“그땐 안될 것 같아요. 선약이 있어서요.”

* * * * *

주혁을 다시 만난 건 토요일 오후 네 시, 시월의 시작일이었다.

번화한 횡단보도 건너편, 남자는 서은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비슷한 차림을 한 비슷한 표정과 얼굴의 사람들이 저쪽에도 한 무더기, 이쪽에도 한 무더기. 서은도 그 무리에 섞여 아무개가 된 채 남자를 관조했다. 주황빛 햇살을 품은 서늘한 공기가 남자의 곁에서 반짝반짝 빛을 냈다.

문득 김선우가 떠오른다. 연인이었던, 지켜주겠다 했던. 그의 부모는 서은을 병신이라 했다. 그런 주제에 감히 내 아들을 욕심낸다 했다. 김선우는 부모와 친구에게 서은을 떳떳하게 소개하지 못하는 비겁하고 나약하고 평범한 남자였다. 우습게도 그런 김선우를 믿었다. 그가 진실로 서은을 지켜 줄 거라 생각했다.

무엇으로부터?

나는 무엇으로부터 지켜지고 싶었나. 아마도 찬란한 세상일 것이다. 서은은 지니지 못한 것을 지닌 찬란한 사람들이 사는 찬란한 세상.

눈이 부시어 잠시 눈을 감고 뜨는데, 그 짧은 순간 하릴없는 호기심이 먹물처럼 번지었다. 번지고 번지다 마침내 형체를 잃는다. 주황빛의 찬란한 세상과는 다르게 난잡했다.

남자는 여전히 그녀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얼 바라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궁금해하다가 관두었다.

서주혁에게 정서은은 짧은 동안의 쾌락과 재미와 성취감을 위한 존재일 테지. 쉽게 마음을 내어 주지 않아 흥미를 끄는, 마음을 내어 주면 흥미가 동날.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고, 눈길을 틀어 거리를 멀리하여 모르는 척 걸었다. 반쯤의 두려움과 반쯤의 설렘 속에서 반쯤은 그가 알아차려 주길 바라며, 반쯤은 이대로 약속을 파투를 내 버릴까 고민했다. 아무개가 된 하찮은 여자를 남자는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쳤다.

그렇게 팔 차선의 긴 횡단보도를 반쯤 지나는데 톡톡, 누군가 서은의 어깨를 두드린다. 고개를 돌렸다. 태양의 반대편에서 태양을 닮은 남자가 낙엽의 내음과 가을의 햇살을 품고 서 있었다.

“안녕.”

남자의 평범한 인사가 서은을 과거의 어느 날로 데려간다. 안녕. 오래전에도 남자는 아침마다 서은에게 그렇게 인사했다. 어미를 약하게 끌어 올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가슴에 울렸더랬다. 남자의 몸에서은은히 풍겨 나오는 로션 냄새가 가슴을 톡 쏘게 할 만큼 시원하였다.

그 옛날처럼, 이번에도 남자는 약하게 어미를 올렸겠지. 상상 끝에 서은은 덧없는 웃음을 흘렸다. 서은의 미소에 주혁이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그런 주혁을 향해 서은은 주혁의 말을 흉내 냈다.

“안녕.”

그러자 주혁도 서은을 따라 웃음을 지었다.

볕이 좋았다. 정수리를 내리쬐는 햇살이 따갑지도 않고 보드라웠다. 인도도 없는 좁은 길을 주혁의 뒤를 따르며 걸었다. 허름한 건물들 사이로 오토바이와 차가 지나고 노인들은 슈퍼 앞 가판대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주혁의 뒤를 밟으며 서은은 설핏 남자의 키를 헤아려 봤다. 십여 년 전보다 좀 더 키가 큰 것도 같고, 어깨가 원래 이렇게 넓었던가 싶기도 했다.

주혁이 서은을 데리고 간 곳은 서촌의 서쪽에 있는 어느 한식집이었다. 큼지막한 고딕체로 ‘박씨댁’이라써 있는 간판이 촌스럽기도 하고 예스럽기도 했다.

식당 안은 자못 정갈하였다.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대부분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서은은 이런 곳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했다. 행여라도 주혁을 알아보는 이가 없을 테니. 그런데 주혁은 단골인지 능숙하게 주문을 한다. 서은은 주혁이 건네준 메뉴판을 살펴보다가 이내 주혁의 것과 똑같이 먹겠다 했다.

점원이 물러가고, 침묵 위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서은의 세상은 언제나 정적이지만, 상대가 입술을 움직이지 않으면 상상의 소리조차 멎고 만다. 말없이 가만 눈을 마주치니 어색함에 뒷덜미가 뜨거워질 지경이다.

“글씨가 이상해요.”

결국 대화의 시작은 그녀였다. 서은은 주혁의 어깨 너머 어딘가를 가리켰다. 주혁도 서은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벽에 걸린 메뉴판에 ‘메뉴판’ 대신 ‘매뉴판’이 크게 써 있었다. 별로 주혁의 흥밋거리는 아니었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서은은 혼자 움찔거렸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입술을 놓치고 만다. 다행히 주혁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태평하게 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순순히 먹겠다 해서 놀랐지.”

“......제가 눈치 없이 군 건가요?”

“아니, 겁 없이 굴었지.”

뜻을 알 수 없어 가만 바라보니 남자는 입매를 늘어뜨리고 소년 같은 얼굴을 만들었다.

때마침 점원이 반찬들이 담긴 접시를 가지고 왔다. 조금 거칠고 투박한 손길로 능숙하게 내려놓는 접시들의 수가 제법 많았다. 윤기가 번지르르한 김치와 전, 참기름 냄새가 풍기는 나물 반찬들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점원이 마지막 반찬을 내려놓을 때쯤 주혁이 물었다.

“아깐 도망가려는 거였어요?”

“......도망이요?”

“아까. 횡단보도에서.”

“아아.”

“내가 부르지 않았으면 그대로 지나쳐 갔을 기세던데.”

“......미처 보지 못했어요.”

“난 처음부터 알았는데.”

서은의 눈이 동그래졌다.

“일부러 모르는 척해 봤어요. 정서은이 찾아 줄까 싶어서.”

“그런데, 왜 중간에 포기하셨어요?’’

“생각해 보니 내가 불리해서. 지는 게임은 하지 말자는 게 내 신조라.”

서은의 커졌던 눈이 가느스름해지며 끝에는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불리한 위치에 처한 사람치고, 주혁은 당당하고 두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정말 심심하셨나 봐요. 저를 상대로 혼자 그런 내기까지 하실 정도면.”

“그러니까 가끔 나랑 놀아 줄래요?”

“같이 놀 친구들은 많으시잖아요. 예전에도, 지금에도.”

“예전에도, 지금에도 정서은이랑은 놀아 본 기억이 없어서.”

“별로 재미없으실 텐데.”

“그런 건 아무래도 좋고.”

주혁은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선수 같은 말을 내뱉었다.

“내가 재밌게 해 줄게요.”

남자의 밉지 않은 자만에 서은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서은이 저렇게 웃을 때면 주혁은 가슴에 어떤 물결이 이는 느낌이 들었다. 시선과 마음을 잡아끌어 결국 그의 시간과 공간을 서은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들. 그게 주혁은 나쁘지 않았다.

음식이 나왔다. 연잎 위로 모락모락 김이 올랐다. 조심스럽게 잎을 걷어 내니 고소하면서 달큼한 향기가 물씬 풍겼다. 점원이 일러 준 대로 향긋한 연잎밥 한 숟가락에 삼색전 하나를 올려 먹었다. 맛이 일품이었다.

함께 밥을 먹으며 평범하게 서로의 일상을 묻고 답했다. 상무가 국밥을 좋아하다 못해 사랑한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것과 윗분들 사이에서 회장은 서승사자로 통한다느니 하는 시시콜콜한 것들.

입술이 읽히지 않거나 곤란한 질문은 웃음으로 넘기고, 하늘 높은 상사가 어려운 직원처럼 조금 머리가 빈 후배처럼 주혁을 대했다. 부러 얼마쯤은 속물적으로 행동하며 적당한 예의로 마음을 속이는 건 나이가 들어 생겨난 기술이다.

십여 년 전이었다면 새 나오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남자를 피하느라 급급했을 테지. 십 년이 넘은 시간 동안 남자의 키가 자라고 어깨가 넓어진 만큼, 서은도 자라서.

"여전히 내가 무섭고 싫어요?”

서은은 반문하는 것 대신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주혁도 서은을 흉내 내며 고개를 기울인다. 남자의 장난기에 결국 서은이 입을 열었다.

“제가 왜 상무님을 싫어할 거라 생각하세요?”

“아닌가.”

“싫어하진 않아요.”

“무섭긴 한가 보네?”

“서승사자의 손자님이시라. 그거 아세요? 상무님, 가끔 이렇게 입 꾹 다물고 얼굴 찌푸리실 때, 회장님이랑 판박이세요.”

서은이 만드는 얼굴이 우스꽝스럽다. 그런데 그 얼굴만으로도 서은이 말하는 표정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려 주혁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들리는 소리가 없어 서은의 가슴은 뭉개졌다. 소리 없는 웃음을 찬찬히 눈에 담으며 서은은 줄곧 하고 싶었던, 이번이 마지막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상무님을 싫어한 적 없어요. 어렸을 땐 어렸으니까, 어리숙했던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정말로 상무님을 싫어하지는 않았어요.”

잠시 말을 멈추고 입술에 힘을 주다가 다시 용기를 냈다.

“저는 상무님이 잘되셨으면 좋겠어요. 잘돼서 행복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왜?”

“......나중에 명절에 믹스커피 들고 찾아가면, 뭐라도 두둑이 챙겨 주시지 않겠어요?”

주혁이 웃음을 터뜨린다. 입술의 벌어짐과 코의 모양 따위를 볼 때 고저가 낮은 웃음이었다. 왜 이렇게 웃음이 헤플까, 생각이 들 만큼 남자는 자주 웃는다.

“기대할게, 아가씨.”

가슴이 두근거렸다.

밥을 먹고 영추문 길을 걸었다. 기다란 돌담길에 인적은 드물고 꽃은 흐드러졌다. 차를 마시는 대신 길거리에서 파는 콘 아이스크림을 나란히 들고 짠, 건배를 했다. 은행알을 피하다가 남자의 옷깃을 붙잡았고 은행알을 터뜨려 울상을 지었다. 많이 웃고, 많이 떠들었다.

선물 같은 하루였다. 어쩌면 꿈같기도. 남자에게도 그런 하루였기를 바란다. 내일이 되면 일상으로 돌아가 서은은 서은대로 남자는 남자 대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오늘은 그저 오랜만에 만난 후배와 회포를 나누어 반가웠던 하루, 딱 그 정도의 하루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내일은 서은도 그럴 테니까.

어느 순간 해가 지고, 초승달보다 조금 더 살찐 달이 주혁의 머리 위로 보였다. 고요한 골목길을 걸으며 도지는 아쉬움과 긴장감이 조마거렸다. 바람이 쌀쌀해 서은은 옷깃을 여몄다. 신데렐라 이야기 속 열두 시 종이 울릴 때.

주차장 팻말이 보일 즈음 ‘오늘 감사했습니다.’ 말하며 한 발짝 떨어졌다. 서은의 움직임을 주혁은 무료한 낯으로 응시했다.

“바래다줄까요?”

“아뇨. 지하철이 빠르고 편해요.”

매정한 답에 주혁은 눈썹을 올리다가 서은의 무정을 비웃듯 다시 물었다.

“다음에 밥 한 번 더 먹을래요?”

“아뇨.”

“내일 연락해도 돼요?”

“아뇨.”

“영화는?”

“싫어요.”

“나랑 사귈래?”

서은의 무정한 얼굴에 균열이 인다. 서은은 천천히 가면을 깨뜨리며 다시 또 웃었다.

번지듯 하는 작은 미소에 가슴 어단가가 저릿하게 저며 왔다. 통증의 끝에 묘한 쾌감이 일었다.

그러니까, 서은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

웃음이 멎은 서은은 다시 새침하고 단조롭게, 그러나 부드럽게 답하였다.

“싫어요.”

표정 없이 서은을 바라보던 주혁이 빙긋 웃었다.

“그래.”

남자의 답은 시시했다. 서은은 의아해진다.

“그래도 나랑 밥은 한 번 더 먹어요. 오늘은 한식이었으니 다음엔 일식으로. 서초동에 초밥 잘하는 집을 하나 알거든.”

이번엔 황당해진다.

“제가 왜요?”

서은의 음성이 절로 뾰족해졌다. 그런데 주혁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그런 걸 되묻는 서은이 이상하다는 얼굴이었다.

“차를 안 마셨잖아. 원래 약속은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거였는데? 기억 안 나요?”

어라. 그랬나. 아닌데, 오늘이 마지막이었는데. 아닌가. 차를 마시기로도 하였나, 우리가.

“바래다주는 건 싫다 하니 어쩔 수 없고, 택시를 잡아줄게요.”

황당한 말들에 어영부영하는 사이 주혁이 대로변에 나가 손을 든다. 택시 한 대가 주혁의 앞에 멈춰 서고 주혁이 서은을 불렀다. 주혁은 기사에게 홍은동까지 부탁드립니다, 하고 서은의 손엔 택시비를 쥐여 주었다. 멍해 있는 서은의 손을 잡아 이끌어 차에 태운다. 입술의 모양이 기사에게 안전 운전 해 주십시오, 라고 말한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주혁은 서은에게 ‘연락할게.’라고 했다.

황당했다. 어리둥절했다. 뻔뻔했다. 설레었다. 이상했다. 난처했다. 울렁거렸다. 허탈했다. 그러다 끝에 웃음이 나왔다.

택시를 타는 내내 생각했다.

왜였을까.

남자의 말도 안 되는 말들을 가만 듣기만 한 건. 남자의 황당한 제안들을 거절하지 못한 건.

서은의 어리석음이었나, 미련이었나, 욕심이었나.

불가사의한 기분.

다시, 꿈같았다.

* * * * *

그다음 금요일 저녁을 주혁과 함께 보냈다. 주혁이 말한 서초동의 일식집에서 초밥과 우동을 먹었다. 주혁의 말대로 초밥이 맛있었다. 맞은 편의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마시며 주혁은 주말, 홍콩으로 출장을 간다고 했다.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기에 잘 다녀오라 평범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주혁이 자기가 없는 동안 심심해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 했다. 어이가 없었다. 택시를 태우며 주혁은 다시 또 ‘연락할게.’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번엔 그러지 말라, 대꾸했다.

그다음 주 토요일, 주혁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은에게 줄 전병과 초콜릿을 사 왔다며. 버리라고 했다. 주혁에게서 ‘정말?’ 하고 문자가 왔다. 생각해 보니 버리는 건 아까워서 주혁을 만났다. 주혁이 사 온 전병은 너무 달고 초콜릿은 카카오 함량이 높아 씁쓸했다. 주혁이 이번엔 영화를 보자고 하였다. 그는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혹여 자막이 없는 한국 영화를 말할까 싶어 서은이 선수를 쳤다.

그 주 일요일에 둘은 영화를 봤다. 자막이 있는 프랑스 영화였다. 지독하게 재미가 없었다. 서은은 깜빡 잠이 들었다. 주혁이 서은을 놀렸다. 서은은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서은을 놀리는 주혁이 얄미워서 주혁의 팔을 툭 쳤다. 순간 주혁의 몸이 휘청, 기울었다.

그다음 주 주혁은 서은 때문에 다친 팔, 보신을 해야 한다며 연락을 했다. 어쨌든 때린 건 서은이기에 함께 보신을 하러 갔다. 강서의 해신탕집이었다.

주혁과 만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짧을 땐 삽십 분일 때도 있었고 가장 길었을 땐 서너 시간 정도. 매번 주혁이 서은에게 연락을 하는 이유는 달랐지만 주혁의 마지막 질문은 늘 같았다.

나랑 사귈래?

그것에 대한 서은의 답도 같았다. 싫어요. 그럼 주혁은 그래, 하고 놓아준다.

짧은 순간, 주혁이 ‘그래.’, 하기 직전. 주혁은 표정 없는 얼굴로 서은의 시선을 얽매고 서은을 바라본다 주혁이 장난을 걸고 농담을 던지는 얼굴이 가짜이고, 그 짧은 동안의 표정 없이 서늘한 얼굴이 주혁의 진짜 얼굴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보는 동안 서은의 마음은 위태롭게 흔들렸다. 날이 선 아슬아슬함이 버겁다 생각될 즈음 주혁은 서은을 보내 준다.

가끔 서은은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모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서은은 진실로 이 이상은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은은 더 이상 주혁의 연락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더 이상 주혁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다시, 이상했다. 어리둥절했다. 뻔뻔했다. 난처했다. 울렁거렸다. 허탈했다.

그러다 끝에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잘된 일이었다. 이제야 남자의 관심이 식었다면 다행인 일이지.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마음 졸일 일 없이, 평화롭고 단조로운 일상으로.

모두, 꿈이었으니까.

* * * * *

“......경영기획팀의 내년도 예산계획 보고 후, 저녁엔 멘델 콕스 이사와 식사를 겸한 미팅이 잡혀 있습니다.”

내일의 일정을 다다다 읊고 춘성은 홀로 만족했다. 목소리 좋고, 발음이상 없고, 단어 씹지 않음. 완벽한 브리핑이었다. 홍 실장이 VVIP 호출로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춘성이 홍 실장의 역할까지 맡아 하는 중이었다.

춘성이 백미러를 통해 흘끔 의전석을 바라본다. 무신경한 남자는 춘성의 노력을 알아주지 못하고 차창만 바라볼 뿐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저 남자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 무엇을 위하여 살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로열이라고는 하지만 서주혁의 위치는 애매하니까, 속내를 감추고 몸을 사리는 거겠지.

서승혁의 대용으로 들어온 남자였다. 열 살이랬던가, 열한 살이랬던가, 아무튼 열몇 살에. 당장 차기 후계의 미래가 불안한 상태에서 부랴부랴 집안에서 쫓겨난 서재하의 자식을 데려와 최고의 교육을 시켰다. 서재하는 엄청난 망나니여서 서태일회장의 눈 밖에 난 둘째 아들이었다. 그러니 실제 서승혁과 서주혁은 사촌 지간이다. 비록 호적엔 형제로 올라왔을지라도.

그러나 서재형의 친아들이 아니고 서승혁이 살아 있다. 승혁의 불편한 두 다리는 주혁에게 호재이며 악재였다. 장애라는 역경과 편견을 극복한 기업인. 그 타이틀이 주는 상징성을 이기기 위한 패는 아직까지 없다.

아니, 사실 주혁이 그런 것들을 원하는지 어떤지도 모르겠다. 어떨 땐 세상에 둘도 없는 한량처럼 굴다가, 어느 날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성실한 상무가 되었다가, 또 어느 순간 바라보면 이제껏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무엇이 그의 진짜 얼굴인지는, 한 십 년쯤 지나면 깨달을 수 있을까.

코앞이 회사인데 차는 매우 느리고 굼뜨게 움직였다.

춘성은 부질없는 생각들을 갈무리하고 다음의 임무를 떠올렸다.

“점심으론 뭘 드시겠습니까?”

“적당히 알아서 준비해 주세요.”

춘성은 맘속으로 야호를 외쳤다. 오늘따라 칼칼한 게 끌리던 참이다.

미개연(미래개발연구회) 모임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러 학계 전문가들이 모여 최신 이슈를 발표하고, 발표 후에는 그 이슈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한다. 각종 지식과 논리가 튀어 다니는 그 토론을 보고 있노라면 말을 하지 않음에도 진이 빠지는 고된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니 이런 날엔 속을 뜨끈하게 데우고 화끈하게 풀어 줄 음식이 필요하다.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만두 뚝배기 따위를 생각하며 차에서 내리고 주혁을 따랐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비서진이 합류하고 보고를 받는데, 주혁의 걸음걸이가 느려진다. 주혁의 얼굴을 살피며 의중을 파악하려는데 주혁의 시선이 먼발치에 있다. 춘성도 주혁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데스크, 회전문, 비상구...... 마지막으로 눈길이 간 곳은 사내 식당이었다.

“보고는 점심 먹고 받도록 하죠. 오랜만에 사내 식당에서 먹고 싶은데.”

“아, 네. 알겠습니다.”

상사의 느닷없는 변덕에 춘성은 쩝, 입맛을 다셨다.

만두 뚝배기는 다음에 먹어야겠다.

했던 춘성의 다짐은 그 후 한동안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날 이후, 무슨바람이 들었는지 상무는 늘 사내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하여튼,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 * * * *

“아, 그래도 임시 주총 끝나니 살것 같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중이었다. 서은도 수현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만세, 시늉을 했다. 그때 황형식 대리가 불쑥 말을 붙여 왔다.

“인생사 산 넘어 산이요, 갈수록 수미산이란 걸 몰라요, 최 대리? 사보가 남았다고, 사보가. 이번 사보는 창립 40주년 기념으로 거창하게 할 거라고 과장님이 그러시던데.”

“살아 있는 우리 엄마 생일도 못챙기는데, 생물도 아닌 것 생일을 챙겨 무얼- 하나-”

수현이 푸념하며 말을 길게 끈다. 그 얼굴이 재밌어 서은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무심중 시간을 확인하고 배가 고파진다. 화면에 떠 있는 파일들을 모두 정리하고 자리서 일어났다. 팀원들이 늘어놓는 잡담에 말을 붙이고 호응하고 웃으며 식판을 들었다. 수요일은 수다날, 맛있는 거 나오는 날, 여고생처럼 중얼거리는 서은을 팀원들이 놀리기도 하였다.

“참, 주말에 선봤다던 남자. 어땠어?”

밥을 먹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릴때였다. 수현의 질문에 잠시 고민해 보지만,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없다. 얼굴도 이름도 선명한 것이 없는데, 다만 경희의 말대로 성실하고 됨됨이가 괜찮아 보이는 남자였다는 인상만 남아 있다. 딱히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이. 그래서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수현이 성마르게 답을 재촉한다. 괜찮았어요. 서은은 가볍게 대꾸했다. 오오, 과장하는 수현에게 서은은 아직 제대로 만나 보지도 않았어요, 부끄럽다는 듯 답하였다. 그 모습에 수현이 더 좋아하며 흥을 내는데 엘리베이터의 양문이 열린다. 나이는, 성격은, 직업은? 무엇부터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서은은 웃기만 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몸을 돌렸을 때 서은은 아주 잠깐 호흡을 잊었다.

놀랄 새 없이 묵례를 했다.

서주혁이 서 있었다. 비서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고개를 숙이고 다시 일으키는 순간의 시간 동안 수만 가지 것들이 머리에 떠돌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는데, 너무도 무수하여 어느 것 하나 형체를 뚜렷이 하진 못하였다.

주혁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비서도 따라 들어왔다.

비서가 먼저 버튼을 누르고 서은이 다음으로 버튼을 눌렀다. 언제부터 뒤에 서 있었대? 수현이 입 모양으로 그렇게 물었다. 서은은 답하지 못한다.

익숙한 정적, 규칙을 따라 일정하게 바뀌는 숫자, 금빛 문 위에 새겨진 자잘한 체크무늬들에 신경을 쓰며 생각에 감정을 지웠다.

엘리베이터에 비치는 주혁의 인영이 불쑥 수현에게 말을 걸었다. 수현은 다소 긴장하고 어색한 모습으로 남자의 말을 받았다. 서은은 들리는 게 없어 그저 승강기의 문이 어서 열리기를 바라였다.

남자와 말을 주고받던 수현이 화들짝 놀란다. 이내 호들갑스레 손사래를 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주혁도 부드럽게 입매를 늘이고, 옆의 비서도 따라 웃었다. 그래서 서은도 어설프게 미소를 지었다.

단단한 금빛의 문에 비치는 스스로의 모습이 초라하다. 시선을 더 내렸다. 바닥의 어느 점을 의미 없이 바라보았다. 계기판의 느린 숫자를 바라보았다. 수현을 따라 웃는 체를 하였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서은도 수현을 따라 몸을 구부렸다.

밀폐된 공간에서 남자의 시선이 서은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 * * * *

“상무님. 한율로펌의 최혜선 변호사님, 게스트룸에 와 계십니다.”

오후 누리은행 측과 업무 협약을 위한 미팅을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올 때였다. 한율로펌은 중국계 헤지 펀드사의 최근 선임된 법률 대리인이다. 서정 계열사들의 지분을 사고 파는 따위의 행위를 하며 경영 간섭을 하던. 그런데 최혜선이라. 해외 연수가 끝나 귀국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얼마 만이더라, 시간을 가늠하며 주혁은 몸을 돌렸다.

“집무실로 보내 주세요.”

탕비실에서 물을 마시고 비서에게 일정을 보고받은 후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보이는 게 가죽소파에 늘어지다시피 앉아 있는 혜선이었다. 등을 소파에 기대 몸을 이완시키며 고개만 돌려 유리창 밖을 관조하는 모습이 무척 익숙했다. 원래 그녀의 자리였던 것처럼.

“경쟁사 임원실에 이렇게 막 드나들어도 되는 겁니까?”

조금 멍해 보였던 혜선이 그제야 고개를 들며 시선을 마주한다. 기억에 남아 있던 것보다 화장은 진해지고 머리는 짧아져 화려하고 도도한 인상이 더욱 돋보였다. 주혁을 훑다시피 살펴보던 혜선은 오래전의 익숙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 로펌 이 박사,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능구렁이야. 내가 한때 이 회사 식구였던 것 알고 일부러 나 보낸 거야. 보내니까 순순히 들여보내 준 너희 비서들도 문제 있고.”

“우리 비서진이 상사를 닮아 유독 정이 많아서 말입니다.”

주혁은 웃음기 없이 농담을 던지고 혜선을 지나쳤다. 너른 데스크 뒤의 질 좋은 가죽 의자에 앉아 PC 화면을 확인한다. 남자를 성벽처럼 둘러싼 여러 대의 PC가 주혁의 얼굴을 반쯤 가렸다.

여유롭고 호기롭고 능청대고. 오랜만인데 변한 게 없구나, 싶었다. 하기사. 녀석이 함부로 멋대로 변할 녀석도 아니었다. 혜선은 코웃음을 치다가 주혁을 위한 선물용으로 가져온 초콜릿을 하나 꺼내 먹었다. 팔 하나를 등받이에 걸치고 입을 오물대다가 녀석의 무심하고 여유로운 태도에 조금 기분이 상해졌다.

“오랜만인데 인사도 안 하니?”

혜선의 뾰로통한 질문에 주혁이 눈을 맞추어 온다. 주혁은 곧 원하는 답을 해 주었다.

“안녕, 엑스 형수님.”

“안녕, 엑스 도련님.”

주혁의 인사가 만족스러웠는지 혜선이 씩 웃고는 초콜릿을 하나 더 까먹는다.

무턱대고 이혼한 시댁 식구 회사에 찾아와 다리를 꼬아 흔들대는 저 넉살만큼은 변함이 없다. 주혁은 스치듯 혜선에게 준 시선을 거두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새 도착해 있는 사내 메시지만 열두 건이었다.

혜선과는 유학생 시절 한인 클럽에서 처음 만났다. 형편이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는데 하고 싶은 건 뭐든 해 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성격 탓에 장학금을 받고 후원을 신청하면서까지 오른 유학길이라고 했다. 구김 없이 호탕하고 밝은 여학생이었다. 평범한 혜선의 집안을 아니꼬워하던 몇몇 유학생들까지 결국 친구로 만들어 버리던. 특이해서 더욱 빛이 났다.

한국에 와서도 아주 가끔 모임을 가졌다가 우연한 계기로 혜선에게 승혁을 소개시켜 주었다. 혜선에게 형이 소설가 고골리야노프스키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게 시초였다.

한국에선 별로 유명하지 않은 작가인데. 그 소설가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 처음 봤어. 네 형 만나 보고 싶다.

눈을 빛내며, 그렇게 말하였다.

혜선의 집안은 평범했지만 서정의 입장에서 승혁의 상대로 전혀 나쁠 게 없었다. 걷지 못하는 승혁과 젊고 똑똑하고 밝은 아가씨. 집안의 어른들은 모두 혜선을 반겼다. 이 년여의 연애 끝에 식을 올리고 이어 아이를 낳았다.

“진우는, 잘 있니?”

오랜만에 나타난 혜선에게 찾아온 이유를 묻지 않은 건 물을 필요가 없어서였다. 묻지 않아도 답은 알고 있었다.

“응. 갈수록 형을 닮아가.”

혜선이 씁슬하게 웃으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문다.

“담배 펴도 되니?”

“좋을 대로.”

혜선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였다. 후, 하고 숨을 뱉자 자오록하게 연기가 오른다. 넘실대는 아지랑이 속에서 주혁은 기계적인 얼굴로 키보드를 쳤다. 아무리 엑스라지만, 유일한 형수가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무슨 일이 저렇게 많은가 싶었다.

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바람이 웅웅 울린다. 40층의 높이에서 보는 하늘이 그림처럼 새파랗다. 주혁은 그 세상과 완벽히 동화되어 있었다.

“늘 느끼는 거지만 너 참 대단해.”

처음 주혁을 봤을 때 해를 품은 듯 밝은 눈동자가 기이하여 마음에 들었다. 아주 가끔 문득 보이던, 밤을 품은 듯 위태롭고 나른한 얼굴에 눈길이 갔었고. 그때는 몰랐지. 녀석의 그 얼굴이 누굴 닮은 것이었는지.

정적에 깔리는 리드미컬한 기계소리가 불쾌감을 더한다.

“네 것도 아니라며. 왜 그렇게 열심이야?”

모든 건 승혁과 진우의 것이 될 거였다. 그들을 위해 일하는 주혁을 인정해 주는 이도 없었다. 승혁과 진우의 것을 조금이라도 더 불리기 위해, 저토록 열심인 주혁을, 혜선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할지도. 주혁이 경험한 것들을 경험하지 못하였는데, 주혁이 살아온 삶을 함부로 이해하려 드는 게 주제를 넘는 일일지도 모른다. 세상사 납득 가는 일들만 일어난다면 철학이며 윤리며 법 따위 필요 없고, 이토록 살아가는 게 복잡하진 않을 거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칭 야망의 화신인 혜선은 이해할 수가없다. 욕심도 배알도 없나.

“너 무성애잔 아니지?”

한심한 시선이 닿았다. 주혁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얼굴이었다. 혜선은 혼자 푸흐, 웃었다.

“아. 미안. 내가 생각해도 말이 너무 안 된다. 기분 나빠하진 마. 그냥 해 본 말이었어. 우리 엑스 도련님이 욕심이 없어도 너어무 없으시길래.”

여전히 주혁은 대꾸 없이 시선을 컴퓨터에 붙박아 둔 채다. 무언가 아니꼬워진 혜선이 톡 쏘듯 말을 뱉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너무 충성하진 마.”

"……."

“거긴 지옥이야.”

“......그럼 최 변호사님은 지옥에 어린 아들을 두고 떠난 셈이 되겠군요.”

혜선이 깊게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길게 숨을 뿜었다.

“참고 견디기에 난 인내심이 적었고, 젊었고, 인생은 짧았으니까.”

주혁은 잠시 일을 멈추고 혜선을 보았다. 연희동 살 때의 혜선을 떠올린다. 대학 시절 빛나고 아름다웠던 혜선은 사라지고 생기 없이 빛은 꺼져 시들했던. 그곳에서 혜선은 하고 싶은 일 대신 해야만 하는 것들을 꾸역꾸역 해내었다. 감시받고 감시하고 인내하고 복종하며. 그러던 어느날 집안 모임에서 평범하게 밥을 먹던 혜선이 무념한 얼굴로 말하였다. 이혼하고 싶어요.

집안사람들은 길이길이 날뛰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녀의 이혼을 막을 기세였다. 하지만 승혁은 순순히 혜선과의 이혼에 응해 주었다.

깊은 새벽, 제발 여기서 내보내달라, 혜선이 울며 매달렸다고, 승혁이 술에 취해 말했었다. 아내를 사랑했지만 아내의 우울과 슬픔을 외면하지 못했던 승혁은 식구들 몰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다시 혜선을 본다. 말대로, 지옥에서 벗어났으면 행복해져야 하는게 당연할진대 그래 보이진 않았다. 이미 연희동에 들어오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걸 테지.

그때 별안간 서은이 떠올랐다.

이제는 익숙해져, 맥락 없이 떠오르는 서은을 굳이 지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주혁은 흐르는 생각을 방치하듯 가만두었다.

무료하게 흐르는 시간에서, 여전히 뇌중엔 정서은으로 인한 수많은 ‘어째서’와 ‘왜’들이 돌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진실로 궁금한 것은 이감정의 밑바닥이라는 생각을 했다. 치기 어린 시절의 풀지 못한 욕구가 만들어 낸 허상 같은 감정일 수도, 한 순간 지나가는 바람 같은 감정일 수도, 혹은 그 이상의 것일 수도 있지만. 무엇이어도 그는 상관없었다.

무엇이어도 상관이 없어서, 주혁은 난감해진다.

서은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무심과 무정과 무시.

주혁에 대한 서은의 태도는 모든 무의 집합들이다. 그럼에도 그는 서은을 생각하고, 서은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랬던 여자는 주말에 선을 봤다고 하였지. 비식, 웃음이 새 나왔다. 휘둘려지는 건 주혁의 취향이 아닌데.

반대로, 그를 갖고 노는 기분은 즐거우셨나, 정서은 씨.

타이핑을 멈추고 물을 한 잔 들이켰다. 몸이 조금 뜨거웠다.

“넌 태생부터 삐까뻔쩍한 여자를 만나. 날 때부터 부리는 사람들. 그 세계 사람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여자. 실은 강한 여자를 만나라고 하고 싶은데, 태생이 그렇지 않고서야 네 옆에서 같이 견뎌 줄 수 있고 혼자서도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 여자가 세상에 몇이나 존재할까 싶네.”

“싫은데.”

주혁이 컵을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혜선이 의아한 눈을 한다.

“뭐가?”

“왜 내 여자가 그런 것들을 견뎌야 하지?”

혜선이 담배를 입에 문 채 낄낄웃었다. 입술 사이로 담뱃대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아, 네, 그러세요. 과연 엑스 도련 님이십니다.”

“후회해?”

혜선은 피식 웃다가 담배를 짓이 기며 답했다.

“원래 인생엔 후회가 덕지덕지한 법이랍니다, 엑스 도련님.”

* * * * *

독한 감기에 걸렸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주일 동안 지구의 반바퀴를 돌았다. 취리히에서 열리는 세계 경제 세미나에 참가하여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각국 기업의 주요인사를 만나 사업 협력 강화 및 확대에 대해 논의를 했다. 세미나 기간 후엔 바로 화재가 난 인도 현지 공장으로 가 사고를 수습해야 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왔을 땐 곧 열릴 임시 주주 총회를 위해 KG IT와의 합병 계획서를 살폈다.

쉴 틈 없이, 숨 가쁘게 지난 시간들이었다.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지만 감기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의 비서도 그의 감기를 눈치채지 못하였다가 주치의를 불러 달라는 주혁의 요청을 받았을 때서야 깨달았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별것 아니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감기는 지독했다. 그의 체온을 재고 비서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루의 병가가 주어졌다. 약을 먹고 침대에 눕자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를 무지근하게 눌러 왔다. 밀도 높은 고요와 어둠이 싫어 커튼을 치고 TV를 틀었지만 본디 그들은 빛과 소음 속에서 본질을 명확히 하는 법이다.

머리는 우둔하고 몸은 굼뜨고 마음은 나약해진다.

이런 날엔 어쩔 수 없이 난영이 떠오른다.

그 집에 들어가 네 해가 지나고, 처음으로 깊은 병을 앓았을 때였다. 늘 그랬듯이 홀로 몇 개의 아픈 밤을 지새우면 나을 거라 생각했다. 아침이면 식탁에 앉아 꾸역꾸역 밥을 먹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낌새를 눈치챈 난영이 주혁의 방으로 들어왔다. 주혁은 대꾸도 않고 등을 돌렸다.

왜인지 부끄러웠다.

그런 주혁의 옆에서 난영은 모과차를 타 주고 체온을 재고 물수건을 올려 주었다. 아픈 밤의 연속이었다. 그 아픈 밤을 난영과 함께 보냈다.

줄곧 주혁은 난영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왜 내게 이렇게 잘해 주지. 왜 나를 내치지 않고 거두는거지. 왜 나를 ‘주혁아.’ 하고 부르는거지. 왜 나를 승혁의 동생으로 대하는 걸까. 이 사람은 누구이기에 이 아픈 밤을 함께해 주는 것이며 왜 내게 미안해하는 걸까. 이 사람은 누구이기에.

볼이 발개진 주혁의 손을 잡고 어느 날 난영이 말했다.

‘엄마가, 엄마가 미안해’

들으며 주혁은 조용히 울었다.

이 이상한 사람이, 나의 엄마이구나.

* * * * *

상무가 독감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입사 이래 처음으로 낸 병가 였다는 말도 함께 들었다. 별로 서은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걸 말한 사람들도 그저 가볍게 지나가는 투로 하는,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한 잠깐의 얘깃거리였을 뿐이다.

할 일이 많았다. 곧 서은의 계약 기간이 끝나지만 그 전까지 사보를 완성해야 했다. 창사 40주년을 기념하는 사보인지라 윗선에서 특히 더 기대를 하고 있다는 형식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여 홍보2팀원들은 사보에 실릴 기사의 내용부터 편집, 디자인, 교정까지 심혈을 쏟았다. 결국 모두 야근의 연속이었다. 사보 말고 다른 업무들도 동시에 소화해야 했기에 나날이 팀원들의 한숨과 탄식이 늘어 갔다.

하지만 서은은 눈코 뜰 새 없이 일이 많아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정신이 없으면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그저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하나하나 처리해 가고 또 다른 일을 맞이하고 그 일을 해결하고, 하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흐름이 좋았다.

하지만 문득문득 어쩔 수 없이 남자를 떠올려야만 할 때가 있었다.

차를 마실 때, 맥주 한 캔을 딸 때, 누군가와 영화 이야기를 할 때, 일식집을 지날 때, 초콜릿을 떠올릴 때,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불쑥 남자가 떠오르기도 했다.

독감에 걸렸다는 남자는 서은보다 높은 곳에서 업무를 보고 회의를하고 PT를 들었다. 그런 상무를 두고 독하다, 라든가 로열은 달라, 라든가 하는 평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평을하며 소문에 서 회장이 서승혁 전무와 서주혁 상무를 두고 줄다리기를 한다든가, 지금은 미국 지사에 있는 서석현 대리를 키우는 동안의 카게무샤 역할을 서주혁 상무에게 시키고 있다든가, 하는 찌라시 같은 얘기들도 함께했다.

무엇이든 서은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여서 마음에 담지 않았다.

그래도 그런 주혁이 대단하다는 생각은 하였다. 지독한 감기랬는데 고작 하루의 병가로 다 나아질 것이었나. 그렇게 아팠다는데 이렇게 나와서 저렇게 일을 해도 되는 건가. 그렇게 일만 하다가 몸 다 상하면 어쩌려고. 누가 뭐래도 건강한 게 최곤데. 요즘 감기는 독한데. 감기는 집에서 잠 잘 자고 푹 쉬는 게 제일 좋은데.

감기에는, 또 뭐가 좋더라.......

손가락이 움직였다. 눈을 떴다. 눈을 뜨고도 얼마간 얼떨떨했다. 더듬더듬 팔을 뻗어 잡은 핸드폰의 화면 속 숫자는 새벽 2시 33분을 가리켰다. 그 숫자를 보고서도 서은은 어리둥절했다. 그때까지도 상황 파악을 못 하다가,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세상모르고 잠들었나 보다. 키보드에 걸쳐진 손가락 하나가 ‘ㅊ’자판을 누르고 있었는지 한글 문서가 오로지 ‘ㅊ’글자로 빼곡했다. 벌써 몇십 쪽을 넘겨 있었다.

퇴근하는 수현이 같이 나가자고하는 제안을 서은이 ‘조금만 더 하고 갈게요. 먼저 가세요.’ 말했던 기억은 있는데. 서은은 숨을 길게 뱉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잠들 줄 알았더라면 그냥 그때따라갈걸. 때늦은 후회의 뒤로 남아있는 잠기운이 몰려왔다. 잔뜩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때, 눈앞에서 희미한 남자의 실루엣이 움직였다. 깜빡이는 시야 사이로 실루엣이 점차 선명해진다.

어라.

아직 꿈인 걸까?

망연한 의문이 피어올랐다.

파티션 위에 팔을 올려 서은을 응시하는 남자는 분명 주혁이었다. 서은은 당황하여 순간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몰랐다. 눈을 크게 뜨고 입도 벌렸던 것 같다. 처음에 주혁도 놀랐는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어어.

그 탄성이 소리로 나갔는진 모르겠다. 다만 주혁이 짧게 영문을 설명했다.

“불이 켜져 있길래.”

불충분한 말이었지만 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혁의 단조로운 눈빛 위로 어울리지 않는 숫된 감정이 떠오르다 사라진다. 주혁은 서은과 비스듬 맞물리던 시선을 어긋나게 움직이며 말을 덧붙였다.

“손가락이 불편해 보여서.”

“......네.”

잠결에 서은의 손가락을 움직였던 게 주혁이었나 보다. 여전히, 온전히 이해 가지 않는 말들이었지만 서은은 고개를 주억였다. 그것으로 설명을 다 마쳤다는 듯 주혁은 몸을 돌려 출입문으로 향하였다. 멍멍한 정신에 서은은 그 뒷모습을 아득히 바라보았다. 파티션 너머 남자의 모습이 작아지며 어느 순간 보이는 것은 까만 머리칼뿐이다.

유리문이 열리고 그 틈으로 남자의 머리가 빠져나간다. 아니, 남자는 거기서 멈추었다. 다시 유리문이 닫히고 남자의 머리가 서은에게 다가온다. 가까워지며 시야에 들어오는 범위가 넓어진다. 주혁의 이마와 눈, 코, 입, 마침내 상체를 다 보이고 서은의 앞에 섰다.

“나가요.”

서은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주혁이 손목의 시계를 짧게 훑고는 말을 덧붙였다.

“시간이 늦었잖습니까.”

주혁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다만 언젠가 ‘그래.’ 하기 직전의 그 얼굴이다.

눈을 마주하는 그 짧은 동안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서은이 주혁을 뒤따른 이유를, 서은도 몰랐다.

“바래다줄까요?”

질문이 태연스럽다. 얼마 전의 어느 날을 떠올리게 하는 질문이다. 연잎밥을 먹고 영추문을 걸었던 그때를. 그때에 남자는 바래다줄까요, 무심한 듯 다정하게 물었지. 그때의 짧은 청유 같은 물음은 한동안 서은의 뇌리를 어지러이 돌아다녔다.

서은이 답을 않자 이번엔 서은을 타이르고 설득하듯 묻는다.

“늦었으니 밥은 됐고, 차를 마실래?”

아팠다는 주혁의 얼굴은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주혁의 질문은 일종의 놀이 같다. 장난 같은 남자의 질문은 서은을 간질이기도 하고 약 올리기도 하고 마음을 졸이게도 한다. 차를 마시자는 질문에 싫다 답을 하면 이번엔 어떤 질문을 할까. 세상을 뒤흔든 판도라의 상자만큼이 나 위험한 호기심임을 알지만 이번에도 결코 상자를 닫지 못한다.

서은이 고개를 저으려는 때였다.

“왜. 데리러 올 애인이라도 있어서?”

뜻밖의 물음에 서은은 미동을 멈췄다. 주혁의 눈에 지그시 시선을 준다. 명료히 드러난 감정이 없다. 눈빛이 공허하다. 무심하다. 장난 같다. 차갑다. 서은은 그런 거 없습니다, 하려다 말을 바꾼다.

“상무님과는 관계一”

“없는 것 알지.”

“그럼 왜 물으세요?”

“너랑 노는 건 재밌지만, 셋이 노는 건 취향이 아니거든.”

정 원하면 노력해 보고.

그 뒤로 주혁이 언뜻 잔인한 말을 지껄이는 듯하였다. 하지만 낮게 읊조리듯 하는 말에 제대로 입술을 읽지 못했다. 행여 듣지 못한 걸 물을까봐 서은은 화제를 돌리듯 답을 주었다.

“애인 없습니다.”

고작 거짓을 감추기 위한 장막일 뿐인데 한순간 주혁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언제나처럼 가볍고 절제된 미소가 아니라, 소년처럼 환하고 푸르게.

감출 수 없다는 듯, 숨길 수 없다는 듯한 그 웃음이 마치 정말로 기뻐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이 놀이들이, 장난들이, 모두 진심인 것처럼 느껴져서.

서은은 또다시 말을 돌렸다.

“아프셨다고 들었어요.”

“아, 그랬지.”

답하며 주혁은 엘리베이터에 등을 기댔다. 목을 조이는 넥타이가 답답한 듯 주혁은 목을 틀며 손으로 넥타이를 느슨히 했다. 더 이상 경어를 쓰지 않고, 넥타이를 느슨히 하고, 앞머리가 내리는 남자의 모습이 날것 특유의 위험한 느낌을 주었지만 서은은 겁내지 않았다. 다만 남자의 상태를 짐작하기 위해 애를 썼다.

아, 그랬지. 그 말은 지금은 다 나았다는 건가. 얼굴이 조금 수척해진 것도 같았다. 정말 다 나은 게 맞는걸까.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알 수 있을 텐데. 서은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감기가 나아서 다행이에요, 혹은 감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같은 말들도 할 수 없었다.

“넌 되도록 아프지 마.”

주혁이 웃음을 짓고 부드럽게 말하였다.

그 미소를 보는 서은의 마음이 아파 온다. 우습게도 이제서야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이 남자를 보고 싶어 했구나.

물러서야 하는 때란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걸 깨닫자 왜인지 눈물이 나오려 했다. 물러서야 하지만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굽이굽이 물결쳐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감정들을 억지로 눌러 냈다.

복받쳐 오르는 것이 슬픔 같기도, 설움 같기도, 그리움 같기도 하면서 참을 수 없는 호기심 같기도, 끝내 터뜨릴 수밖에 없는 열망 같기도 하였다.

결국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서은은 거짓된 미소로 얼굴을 가장했다. 그런데 주혁은 여전히 묵묵히 서은을 응시하고 있다. 서은의 미소가 거짓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서은의 모든 거짓들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아찔했다. 서은의 머리와 가슴은 무수한 감정들이 혼재하며 뒤엉켰는데 주혁의 눈동자는 침착하고 고요하기만 하다. 옅은 주황빛이 도는, 밝고 투명한 갈색의 눈동자. 진심도 거짓도 배제된 남자의 투명한 눈동자가 서은은 두려웠다? 분명 지금은 물러서야만 하는 때였다.

하지만, 왜였을까.

“차는 됐고, 맥주 마실래요?”

세상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것투성이었다.

편의점에 들어가 캔 맥주를 샀다. 서은을 따라 주혁도 맥주 한 캔 집어드는 걸 서은이 도로 뺏어 갔다. 주혁은 황당한 얼굴로 서은을 보았다. 서은은 단호히 맥주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았다. 주혁이 왜 뺏느냐 어이 없다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독감 걸린 사람이 맥주 먹겠다 고집 부리는게 서은은 더 어이가 없었다.

편의점 점원은 금방이라도 잠에들 듯 피곤이 쏟아지는 얼굴로 둘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 점원의 눈치가 보여서 둘은 금방 나왔다. 결국 주혁은 맥주를 사지 못했다. 서은은 제법 만족스러운 얼굴로 뚜껑을 따고 맥주를 마셨다. 옆에서 주혁이 무어라 볼멘소리를 한 것 같았다.

맥주를 들고 높은 건물들 사이의 작은 길들을 걸었다.

그러다 주혁이 물었다.

“왜 아직까지 퇴근을 안 했지?”

“깜빡 잠들었어요.”

주혁이 크게 웃는다. 뭐가 웃긴거지, 의아해하다가 서은은 아차 했다. 아마 주혁은 프랑스 영화를 봤을 때를 떠올렸을 거다. 공연히 열없어 져 서은은 말을 돌렸다.

“상무님은 왜 늦게까지 퇴근 못하셨어요?”

“난 돈 버느라.”

돈 조금만 더 벌려다 골로 가겠어요. 라는 답은 못 하고 서은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있는 사람들이 더하는 거래요. 그래도 건강은 챙기세요. 하는 말들도 모두 가슴속에만 묻어 둔다. 어느 순간 큰길가에 다다르고 손에 들린 맥주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졌다.

“내가 없는 동안 보고 싶진 않았고?’’

“......않았어요.”

“걱정은?”

“안 했어요.”

다시 주혁과의 기묘한 질문 놀이가 시작된다.

“나 감기 나은 기념으로 내일 밥 먹을래?”

“아뇨.”

“바래다줄까?”

“싫어요.”

“나랑 사귈래?”

결국 이번엔 서은이 웃었다. 누가 먼저 발을 멈추었는지는 모르겠다. 누군가 발을 멈추었고 다른 누군가 그를 따라 멈추었다. 둘은 그러고도 얼마의 시간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누구 하나 섣불리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 속에서 서은은 주혁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을 잊고 이 세상에 오로지 주혁과 서은만이 존재하는 듯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고요 안에서 서은이 입을 열었다.

“그 질문 안 지겨우세요?”

“아직은.”

아직은, 이라는 답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은, 이라는 말은 언젠가는 지겨워진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때가 아니라는 것. 아직은. 아직은. 아직은.......

서은은 마음이 아픈 것도 같고 안도감이 드는 것도 같고, 그저 이상하기만 했다.

“전 지겨워요. 항상 똑같은 답만 해야 하니까.”

“지겹지 않게 답에 변화를 줘 봐. 꽤 즐거울 거야.”

남자의 부드러운 유혹.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서은은 마음을 단단히 붙잡았다.

“저는 상무님 싫어요.”

“싫어하진 않는다며?”

“상사로서, 선배로서는 좋아하지만 연애 상대로는 별로여서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원하는 이상형이 뭔진 몰라도 말해 봐. 최대한 맞춰 줄게.”

“힘드실 텐데. 상무님은 제 취향이랑은 너무 다르거든요.”

“정서은 취향은 뭔데?”

“......자상하고 다정하고 친절한 남자요.”

“나도 자상하고 다정하고 친절한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하는 대꾸에 서은은 그만 웃고 만다. 그래서 당신을 좋아했어요. 라는 말은 할 수 없으니까.

서은은 대신 퉁명한 얼굴을 만들고 말을 돌렸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말 놓으시네요?”

“너도 말 놓든가.”

“싫어요.”

“왜?”

“싫으니까.”

서은의 고집에 주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취했네, 아가씨.”

주혁이 서은의 손에서 맥주를 뺏어 갔다. 어어, 내 맥주. 손을 뻗는데 주혁이 손을 더 높이 들었다.

주세요. 싫어. 왜요? 싫으니까.

남자가 방금 전 서은의 말을 따라하며 장난을 걸고 소년처럼 웃었다.

왜 자꾸 웃어요.

묻고 싶었다.

욕심나잖아. 그러다 정말 내가 욕심내면 어쩌려고.

“웃지 마세요.”

생각으로 떠돌던 말을 내뱉은 건 충동에서 비롯된 거였다.

“웃으면 안 돼?”

“네.”

“왜?”

“욕심나니까.”

이건 술기운이다. 남자가 하하, 또 웃었다.

“나 사실 욕심쟁이인데.”

또 생각에 있던 말을 내뱉었다. 후회하면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행이지만, 곧 후회하였다.

이건 달고 쓴 모순이다.

“정서은.”

웃음을 멈추고 주혁이 그녀를 불렀다. 웃음은 사라졌지만 얼굴은 여전히 다정하고 자상하고 친절하다. 남자의 다정에 심장이 요동쳤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세상 모든 것들이 두근두근했다.

일순 바람이 불어 서은의 머리칼이 날렸다. 주혁의 입술을 볼 수 없어서 서은이 손으로 머리칼을 치우는데, 주혁이 서은의 머리칼을 귀밑 뒤로 넘겨 주었다. 한없이 다정하고 간지러운 손길. 뺨에 닿은 남자의 손이 차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흔들려?”

"……."

“계속 그렇게 흔들려 줘.”

주혁의 숨결이 코를 간질이고 심장을 긁어 댔다.

“욕심의 끝엔 뭐가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

남자가 유혹을 한다. 남자의 유혹에. 술기운에. 심장은 터지고. 질끈,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남자가 무어라 말을 하든 말든, 서은의 비밀이고 뭐고. 이제는 한계였다. 남자의 유혹에 당해 낼 재간이 없어 서은은 듣는 것과 보는 것을 포기했다.

그때 서은의 이마 위로 주혁의 입술이 닿았다.

서은이 눈을 뜨고 황당한 얼굴로 시선을 올리니 그는,

“이마가 예쁘네.”

하잘것없는 핑계를 댔다.

하지만 남자의 뻔뻔함에 화가 나진 않고, 여전히 들리지 않는 세상 모든 것들이 두근두근 소리를 냈다. 긴장되고 부끄러워 주혁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선을 돌린 사이 그가 무어라 말을 할까 두려워 피하지도 못하고, 남자의 시선에 서은의 시선이 가두어져서 서은은 발가락 끝에까지 힘을 주었다.

손을 맞잡고 가는 숨을 삼키다가 용기를 내 물었다.

“왜 하필 저예요?”

“하필 네가 내 첫사랑이라.”

말하며 주혁은 위험하게 웃었다. 순간, 서은이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서은이 술에 취해서 주혁의 입술을 잘못 읽은 건 아닌지. 하지만 동시에 확인해서 무얼 하나 싶기도 했고 절대로 확인해선 안 될 거라는 생각도 했다. 생각 끝에 서은은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잠시만, 한 번쯤.

돌연 그 단어들이 몸서리칠 만큼 불명확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어디까지를 잠시라 하고 무엇까지를 한 번이라 하는 걸까. 스스로에게 허락된 ‘잠시’와 ‘한 번’을 가늠해 보지만 답은 알 수 없다.

주혁에게 그녀의 비밀을 말한 후에도 남자는 이토록 자신만만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어쩌면 주혁의 흥미를 동나게 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수도 있지. 그때에 주혁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할까.

힘든 일을 겪었네, 위로를 할까. 전혀 안 그래 보여서 몰랐어, 아무렇지 않은 척 놀라워할까. 힘들었을 텐데 말해 줘서 고마워, 어설픈 감사 인사를 할지도 모르지.

무엇이든, 그녀를 아프게 할 거였다. 서은에게 서주혁은 그런 존재였다. 결국은 아플 수밖에 없는 존재.

그렇게 남자의 흥미가 식는 걸 눈앞에서 보는 순간 무엇이 그녀를 엄습해 올까 두렵다. 그리고 동시에 서은을 이토록 고민하게 만드는 주혁이 밉다. 장애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기로 하였는데 그런 생각을 들게 만드는 주혁이 싫다. 그럼에도 그가 밉지 않고 싫지 않다. 서은은 분명 흔들렸다.

서은은 전에 했던 생각을 다시 했다.

‘쉽게 마음을 내어 주지 않아 흥미를 끄는, 마음을 내어 주면 흥미가 동날.......’

그럼, 그래 볼까.

그건 얼마쯤의 체념, 얼마쯤의 호기심, 그리고 얼마쯤의 욕심이었다.

그는 잘생기고, 돈이 많고, 다정하니까.

그녀는 아쉬울 게 없을 거였다.

어차피 서주혁과는 함께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그래서 서은은 기꺼이 흔들리기로 했다.

잠시만, 한 번쯤, 가볍게.

“내 꿈은 소박하고 평범해요. 정원이라든가, 마당이라든가 그런 건 바라지도 않고, 그저 네다섯 명의 식구가 몸을 누일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집이 있고, 그 집에는 매달 착실하게 월급을 벌어 오는 남편이 있고, 귀엽고 작지만 충성스러운 개 한 마리와 그 개를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 있어요. 그래서……”

짧은 순간 서은은 눈을 꾹 감았다. 바보처럼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안 돼요. 상무님이랑은, 안돼요.”

“......그래서?”

되묻는 주혁의 얼굴이 무표정하다. 서은은 목소리를 더욱 가볍게 꾸몄다.

“그래서 상무님과는 가볍게 즐기기만할 거예요.”

주혁이 눈을 내리며 무표정을 깨뜨리고 웃음을 터뜨린다. 그런 남자를 향해 서은은 더욱 오만하게 굴었다.

“그런데도 괜찮아요?”

나는 당신을 속일 거고. 눈앞에 있어도 당신은 허상 같은 존재이며. 당신과의 영원은 위태롭고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 남자가 거절하길 바란다. 또, 거절하지 않길 바란다.

주혁의 가슴에 못이 박힌다.

이토록 잔인한 첫사랑이라니.

주혁은 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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