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상상만으로 끝날 수 없는
정말 이상한 남자다.
서은은 간신히 한숨을 삼키고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뜨끈한 국물이 목구멍을 데우는 느낌과 두툼하게 씹히는 고기의 식감에 집중하자, 마음먹지만 밥알이 가득 담긴 입을 연신 놀려 대는 황 대리 탓에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황 대리의 말들을 대강 유추해 보면 이런 것들이었다.
소금의 유통 기한은 언제까지일까요?
천일염.
으하하핫.
비가 한 시간 동안 그치지 않고 내리면?
추적 60분.
크하하핫.
이토록 질 떨어지는 개그에 젊은 상사는 하하, 웃었다. 황 대리가 입을 놀리면 젊은 상사가 리액션을 던지는 패턴이었다. 이런 대화 같지 않은 대화가 이십 분째 이어지고 있다. 평소 아재 개그를 사랑하는 황 대리야 그렇다 치더라도, 저 남자는 대체 왜.
정말이지, 이상한 남자다. 서은은 물을 들이켰다.
부서도 다른데 주혁과 한자리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그것도 밤 열시, 국밥집에서.
시작은 황 대리였다. 점심에 부서 직원들과 피자를 먹다가 황 대리는 느닷없이 이런 느끼한 음식을 먹은 다음에는 칼칼한 국밥을 먹어야 한다고 열변을 했다.
야근 내내 황 대리는 국밥이 먹고 싶다 노래를 불렀다. 일을 마치고 서은과 지하철 역사로 가는 길, 황 대리는 여전히 국밥을 외쳤다. 결국 서은은 황 대리를 따라 24시간 연중무휴라는 국밥집에 들어갔다. 국밥집에 홀로 앉아 스마트폰을 주시하는 젊은 임원을 알아본 것도 황 대리였다.
임원이, 그것도 로열이 일개 대리 따위를 알고 지낼 리 만무하지만 황대리는 넉살 좋게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상무님, 홍보2팀 황형식 대리입니다.’ 인사를 청했다. 국밥집에서의 작은 인연이 훗날 그의 미래를 밝힐 섬광이 되어 줄 것처럼 서주혁을 바라보는 황 대리의 눈은 경외로 차있었다.
주혁이 잠시 전화를 받으러 나갔을 때에는 ‘서은 씨, 오늘 나 덕에 계탄 줄 알아. 서 상무랑 한자리에 앉아 식사를 같이하다니. 캬. 어쩐지 오늘 내 뇌가 나더러 국밥을 먹으라, 끊임없이 지령을 보내더라니까!’ 스스로의 선택에 감탄까지 했다.
서은은 또 한 번 나오려는 한숨을 국물과 함께 넘겼다.
그리고 다시 물을 마시려는데 물병에 물이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점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왔다. 물병을 테이블에 내려놓다가 주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서은은 그저 무의식의 영역인 듯 자연스레 눈길을 틀었다.
“헛, 상무님도 고민 같은 게 있으십니까? 항상 회사 생각만 하시는 분 같았는데.”
아. 아재 개그는 끝났나 보다. 서은은 컵에 물을 따랐다. 그리고 물을 마시려는데 주혁이 손을 내민다.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물병을 건넸다. 서은은 그녀의 것과 똑같이 생긴 스텐 물컵에 물을 따르고 마시는 주혁을 보았다. 물을 마신 다음에는 엄지로 입가를 쓱 문지르는 모습까지도.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현실감이 없는 풍경이었다.
“인상을 바꿔 볼까 고민 중입니다.”
“인상이요?”
“내가 무섭다고, 누가 그러더군요. 이미지 트레이닝을 받아 볼까 생각 중입니다.”
형식이 과장되게 웃으며 부정을하고 주혁이 서은에게 ‘그런가요?’ 의견을 묻는다.
서은은 얼굴에 정중한 미소를 띠웠 다.
“저는 뭐든, 배워서 나쁠 건 없다는 주의여서요.”
아아. 그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기울여 입매로 웃었다.
“훌륭한 신조네요.”
감흥 없는 칭찬에 서은도 감사합니다, 감흥 없이 대꾸하려는데 주혁이 말을 잘랐다.
“그럼 같이 배워 볼래요?”
뜻밖의 물음에 눈이 동그래지는데, 그는 뭘 그리 놀라느냐 하는 표정이다.
“혼자 배우는 것보다는 여럿이 배우면 재밌지 않겠어요?”
“......글쎄, 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요.”
“필요성?”
“저는 인상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무섭다는 감상을 들어 본적도 없거든요.”
“감상을 들어 보았든 듣지 못했든, 뭐든 배워서 나쁠 건 없잖아요.”
방금 전 서은이 한 말을 그대로 되받아치는 남자의 뻔뻔스러움에 그녀는 기가 막혔다.
그런 걸 제가 왜 상무님과 배워야 하나요?
하고 싶은 말은 혀끝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땅한 답을 고민하는데 주혁이 이런, 말하며 무심히 웃는다.
“농담입니다.”
무언가 어색한 기류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관망하던 형식도 어줍게 따라 웃었다.
* * * * *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고 형식이 화장실을 간 사이였다.
초가을 밤하늘이 별 없이 한가롭다. 그 아래 미적지근 부는 바람이 취기를 일으키는 착각이 들었다. 더위가 수그러져 모든 것이 움츠러드는 계절. 고단한 열기와 모진 냉기의 사이. 여름처럼, 겨울처럼 강렬하지 않음에도 마음을 뒤흔드는 힘이 있는 묘하고도 야릇한 계절. 그러니 이 마음도 그저 그 계절이 일으키는 상념에 불과할 것이다.
서은은 밤하늘에 주었던 시선을 주혁에게 옮겼다. 주혁은 형식과 서은이 합류하기 전까지 주시했던 스마트폰에 다시 집중하는 듯했다. 언뜻 형형색색의 막대그래프와 자잘한 글씨들이 보이기도 했다.
바람에 남자의 머리카락이 미미하게 움직인다. 스산하고 건조한 공기 속에서 지극히 밋밋한 행위를 하는 남자임에도 남자의 존재감은 강렬하다. 긴장을 놓지 못하도록.
“체하진 않았고?”
주혁이 불쑥 말을 붙였다. 핸드폰의 화면을 끄고 손을 내리며 시선을 맞춰 온다. 서은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무섭다며.”
그러자 서은은 아, 하며 시선을 내리다가 거짓된 미소와 함께 눈을 올렸다.
“체할 만큼은 아니어서요. 계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맛있게 먹었습니다.”
“체할 만큼 아니고 덕분에 맛있게 먹었으면 다음에 또 한 번 먹어요.”
주머니에 손을 꽂고 뇌까리듯 말하는 남자는 모두 위에 군림하는 고양이 같다. 도도하고 오만하고 우아하고,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생각만큼 무서운 남자 아닌데.”
주혁은 천연한 낯으로 노곤한 눈언저리를 문질렀다.
“후배님께 그렇게 기억된다니 억울하기도 하고. 적어도 누명을 벗을 기회는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말과 달리 권태 어린 눈과 말이었다. 서은은 천천히 웃음기를 가셔 냈다. 입술을 다문다. 시선을 정지한다. 서은이 시선을, 입술을, 미소를 지그시 멈춤에 한 점의 바람도 가라앉는다.
서은이 답하지 않는 짧은 동안 주혁은 그들의 사이로 시간이 고여 정체하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고여 만든 공간은 뭍 아래 세상처럼 모든게 무겁고 느리지만 몇 발 위에 떠 있는 듯 나른하며 어찔하다.
그 기이한 흐름이, 주혁은 싫지 않았다.
얼마의 침묵 후 서은은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조건이 있어요.”
“조건?”
“ 네.”
“말해 봐요.”
“제 뒷조사 하지 말아 주세요.”
“......뭐?”
불시에 명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서정 인사 자료에서 절 찾아보시거나 사람 시켜서 저 몰래 제 뒷조사 같은 거 하지 말아 주세요. 그럼 밥한 끼, 먹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눈치가 빨라요. 뒷조사하고도 모른 척한다면 단번에 알아챌 만큼.”
하, 주혁이 짧은 숨을 터뜨렸다. 터무니없이 이어진 말들에 주혁은 잠시 어이가 없다가, 불쾌해지다가, 도리어 흥미가 생긴다.
“본인이 그만큼 매력 있다고 생각하나 봐요?”
“……아닌가요?”
“적어도 사람 시켜 뒷조사할 만큼은.”
“잘됐네요.”
서은의 목소리에 건조한 반색이 돈다.
“그 정도로 매력 있지 않은 여자 와 밥 먹고 차 마시는 것보다 시간을 유익하게 보낼 수 있는 것들이 상무님 주위에 많을 테니까요.”
찰나 주혁은 그를 향한 서은의 눈빛에 담겨 있는 적당한 무시와 무심한 예의와 가장된 진심을 놓치지 않았다. 그 불분명한 위화감 속에서 주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판단은 내가 하는 거지.”
여기서 서은을 더 몰아붙일 수도 있지만 관두기로 한다. 언뜻 담대하고 굳세 보이는 여자는 동시에 한없이 무방비하고 무모해 보이기도 했으므로. 무방비한 여자를 억지로 다그치고 넘어뜨려 우위를 점하고 싶진 않았다.
여자는 그의 후배이고, 회사 직원이고, 정서은이니까.
주혁은 시선을 거두고 몸을 틀었다.
"어쨌든 네가 허락했다는 사실은 기억할게.”
그리고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서은의 담담하지만 다급한 음성이 그를 붙들었다.
“진심이라면 눈을 맞춰 주세요.”
주혁은 다시 몸을 돌렸다.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눈가를 찡그렸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사람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불쾌해요. 그러니까, 제게 하시는 말씀에 거짓이 없다면 저와 대화를 할 때는 눈을 맞춰 주세요. 제가 상무님을 믿을 수 있게.”
대체 이건 무슨.
느슨해져 있던 신경이 팽팽히 날을 세운다. 주혁은 습관처럼 입 언저리를 매만지며 고개를 틀다가 다시 서은을 보았다. 서늘한 목덜미와 은밀한 눈동자를 가진 여자는 표정을 지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듯 무채의 얼굴이다.
정리를 하자면 이런 것이다. 정서은에게 서주혁은 무서운 존재이면서 저 몰래 자신의 뒷조사를 할 만큼 음흉하고 눈을 마주한 채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믿지도 못할.
그러니까, 최악.
내가, 너에게.
뜻밖의 결론에 관성 같은 웃음이 입가에 떠오른다.
“정중히 사람 파렴치 만드는 재주를 타고났나 봐.”
그러나 미소는 차가웠다.
“아님, 기어이 선 긋는 재주를 타고났든가.”
서은은 그 미소야말로 장난은 여기까지야, 라고 선을 긋는 듯하였다.
그래서 차라리 안도했다. 인내를 시험하듯 끊임없이 억지로 상대를 몰아가는 서은에게 이렇게 질린다면야,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좋아.”
하지만 언제나처럼 남자는 서은의 예상을 깨뜨린다.
“더 말해 봐.”
그는 유혹하고 구슬리듯 말을 이었다.
“뭐든 들어줄 테니까.”
“......상무님은 왜 제게-”
“말했지 않나. 심심해서라고.”
주혁이 가볍고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아, 방금 이유가 하나 추가됐어.”
"……."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도, 궁금해지네.”
고작, 널 위해서.
여자의 무정이 지긋하여 조금은 흠을 내고 싶어 던진 말이었다. 깊은 수면 속에 가라앉은 듯한 여자를 흠집이라도 내 끌어 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서은의 눈빛은 변함이 없다. 그를 무서워하고 못 미더워하면서 그를 무구히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무심하며, 절실했다.
그가 무섭다면서, 함부로 믿지 못할 존재라면서, 그럼에도 여백 없이 그에게 집중하는 모순된 눈빛. 그가 서은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눈이다.
여자가 몹시,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이번에도 흠집이 나 허우적대는 건 자신뿐이란 생각에 주혁은 스스로를 조소했다.
“하핫, 늦어서 죄송합니다. 화장실이 한 칸밖에 없더라구요. 건물에 화장실이 하나여서인지 줄이…….”
형식이 헛헛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의 묘한 눈빛과 표정은 사라지고 주혁은 다시 인심 좋은 상사로 돌아갔다.
“아닙니다. 영등포 쪽 산댔죠, 황 대리님. 정서은 씨는 어디 살아요?
데려다줄게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묻는 남자의 질문이 우습다. 형식은 이게 웬 떡이 냐 하는 표정으로, 두어 번 사양하는 척하다가 이내 감사합니다, 허리를 숙였다.
“전 괜찮습니다.”
서은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아, 왜, 서은 씨. 늦었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형식의 눈빛은 ‘네가 안 타면 나도 못 타지 않겠느냐’ 하는 원망의 재촉을 담고 있다. 서은은 깔끔하게 무시하기로 한다.
“아직 지하철 안 끊겼어요. 지하철 타면 금방이에요.”
아이 참 서은 씨이, 늘어지는 형식의 말을 잘라 낸 건 주혁이었다.
“그럼 됐습니다. 황 대리님, 타세요.”
주혁은 등을 돌리고 운전석에 올랐다. 서은도 등을 돌리고 역사를 향해 걸었다.
머리를 비우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뒤에서 번쩍이는 불빛이 서은의 앞길을 비추었다. 어두운 밤과 대조되는 강렬한 빛 속에서 찢긴낙 엽과 밟힌 은행이 선명했다. 점차 불빛이 희미해지고 서은은 이어폰으로 귀를 막았다.
제대로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다.
‘정서은.’
‘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아시다시피.’
‘아시다시피.’
‘그리고 보시다시피.’
‘보시다시피’
‘정서은이에요.’
‘정서은이라.’
말꼬리를 잡아 늘어지던 주혁은 ‘정서은이라.’하며 태없이 웃었다.
입매는 여전히 웃고 있는 채로 눈을 내린 남자는 잠시 이마와 관자놀이 사이를 매만졌다.
다시 눈을 올리고도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서은을 보다가, 형식이 오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연락할게.’
였다.
* * * * *
[사람이 성실하고 됨됨이가 괜찮다더라. 민정 아빠가 바쁜 중에 알아본 거야. 사진 보낼 테니 답 주렴.]
서은은 투박한 메시지를 한참 바라보았다. 별다를 것 없는 메시지를 여러 번 읽으며 상상도 해 본다. 경상도 억양이 밴 경희의 말소리를. 툭하지만 듣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서은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간결히 답장을 했다. 답을 하며 올해 도화가 꼈나, 하는 우스운 생각도 했다.
[그래. 감기 조심하고.]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경희는 완벽한 표준어를 구사한다 했다. 서은 이 어릴 적 신기해했던 경상도 억양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민정 아빠이자 경희의 두 번째 남편인 원규진 교수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사립대 정치학 교수였다. 원규진 교수는 학식이 깊고 인자했으며 경희는 아름답고 우아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무척 잘 어울렸다.
‘민정 아빠가 바쁜 중에 알아본거야.’ 하는 문장에 담긴 의미를 서은은 모르지 않았다. 서은이 기억하는 그녀의 어릴 적 경희와 지금의 경희는 달랐다. 지금의 경희는 더 아름답고 우아했지만, 더 말랐고 전에 없던 신경질을 부렸다. 경희는 부정할 테지만, 경희가 서은을 보는 눈빛 역시 그때와 다르다.
나보다 더 불쌍한 내 딸.
경희의 서은을 보는 시선에 담긴 의미는 바로 그런 거였다.
경희는 원규진 교수의 죽은 전처를 늘 의식했다. 지금은 사진으로 남은 전처의 아름다움과 건너 건너 들은 전처의 수준 높은 교양은 경희를 괴롭게 만들었다. 서은은 경희의 마음을 이해하기로 했고, 그래서 경희가 서은에게 연민의 눈길을 보낼 때에 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희는 서은을 하루빨리 누군가의 아내로 만들고 싶은 눈치였다. 부족하고 흠 있는 정서은을 정서은으로 소개하는 것보다 어느 회사의 무슨 직급을 가진 누군가의 아내인 정서은을 소개하는 편이 덜 민망하고 면이 설 테니까.
그런 경희의 시선에 기분 나빠하며 저항하고 맞서 싸우기에 서은은 적당히 지치고 적당히 나이가 들었다. 세상에 적당히 타협하고 순응하는 건 아빠에게 배운 태도였다.
아빠. 아빠.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걸레를 들었다. 거실을 닦고 부엌을 닦고 제방을 닦는데, 다시 아빠가 떠올랐다. 늘 눈이 초승달처럼 굽어 있고 손가락은 짧지만 손바닥이 넓었던 아빠. 서은이 하는 말을 하느님과 부처님의 말씀보다 더 믿어 주었던 아빠.
서은을 사랑해 마지않던 엄마가 사라진 것처럼, 서은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던 아빠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두 해 전 아빠는 몹쓸 병에 걸렸고,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손을 쓸 수 없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 서은은 아빠의 장례식장이었다.
걸레를 빨고 널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다 말고 부옇게 변한 거울을 닦아 보았다. 손가락 마디들로 툭툭 두드리자 차갑고 딱딱한 감각만이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데, 스프링에 걸린 듯 다시 눈이 뜨인다.
잠들고 싶은데 잠이 오지 않는 괴롭고 기이한 밤이다. 오랜만에 경희와 문자를 하여 그런가 보다. 오랜만에 아빠가 떠올라서. 야근을 해서, 국밥을 먹어서, 밤이 깊어서.
하지만 서은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뜨겁지만 차갑고, 차갑지만 뜨거울 남자의 음성이었다.
‘연락할게.’
다시, 도리 없이 남자가 궁금해진다.
눈을 감고 상상해 보았다. 다시 만난 서주혁을. 다시 만난 서주혁의 음성을, 웃음을, 숨소리를.
상상만 할 뿐, 알지 못한다. 듣지 못했으니까. 들리지 않으니까.
세월이 흘렀으니 십여 년 전보다는 좀 더 굵어졌겠지. 중후해졌겠지.
여전히 듣기 좋은 음성일 테지.
그런데, 십 년 전의 목소리는 어떠했더라.
이젠 기억이 나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 아빠의 목소리처럼, 주혁의 목소리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아 서은은 서글퍼졌다.
아빠는 당연한 거라고 했다. 매일같이 보는 사람의 얼굴도 돌아서면 흐릿해지는 법인데,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할 수 있겠느냐고. 더 이상 떠오르지 않으면 그냥 흘려보내라고 했다. 소리는 소리일 뿐, 본질은 아니라고도 했다. 소리가 없어도 바람은 바람이고, 아빠는 아빠이고, 서은은 서은이라고.
그래서 서은은 흘려보냈다. 소리가 들리지 않고, 떠오르지 않아 괴로 워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가끔씩 궁금해질 때는 상상했다. 언젠가 아빠는 그런 서은에게 진심으로 웃으며 말하였다. 서은의 세상에는 아름다운 소리만 존재할 거라고.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천상의 소리를 서은은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그건 사고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둔 스무 살의 어느 겨울에, 길에서 벌어진 우연한 사고. 그때에 서은은 갑자기 밀려오는 여러 소음들이 견딜 수 없게 어지럽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다시 일어났을 때 아빠는 울고 있었다. 간호사들이 몰려왔고 의사들이 다급한 얼굴로 무어라 말을 했다. 그런데 들리지 않았다. 귀에 들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의사가 전하길, 서은은 일주일 만에 일어났다 했다. 사고가 났을 때 대뇌의 청각중추에 손상이 간 것 같다 했다. 그런 경우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이 불가능하다 했다. 서은은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 했다.
믿을 수 없었고, 괴로웠고, 화가 났고, 슬퍼했고, 두려웠다가, 어느 순간 서은은 하나둘 내려놓고 하나둘 새로운 것을 얻었다.
대학에 들어가 언론 공부를 하는 것 대신 특수 시설에 들어가 아빠와 함께 구화를 배웠다. 소리를 듣고 소통하는 대신 사람들의 입 모양을 읽는 것으로 소통을 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에 슬퍼하는 것 대신 살아 있고 볼 수 있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장애를 부끄러워하는 것 대신 당당해지기로 했다. 움츠러들고 괴로워하는 것 대신 살자, 다짐했다. 뒤늦게 대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장애인 전형으로 입사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주혁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서은에게 소리는 상상으로 끝나는 것과 상상만으로 끝날 수 없는 것이 있다. 가끔씩 몸서리가 쳐질 만큼 궁금한 소리들이 있었다. 들을 수 없어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 같은 소리들. 즐겨 듣던 가수의 신곡이 그러했고, 길가의 도란대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러했고, 아빠의 목소리가 그러했다. 서은은 그 느낌을 좋아하지 않는다. 서은의 상실이 뼈끝까지 사무치는 느낌.
그런데 주혁의 소리가 그랬다.
그날, 홍은동에서 주혁이 말을 걸며 다가올 때부터 이건 상상만으로 끝날 수 없는 소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동시에 절대로 들켜선 안 된다는 생각도.
쓸데없는 오기와 자존심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아무렴 어때. 첫사랑에게 상처를 들키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한걸. 서주혁이 보낼 연민은 그 무엇보다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적어도 서주혁에게만큼은 온전한 정서은으로 남고 싶었다.
그때와 여전히, 보다 더 찬란하기 그지없는 남자 앞에서 서은은 그녀의 비밀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은은 서주혁이 궁금하다.
그래서 서은은 주혁이 무섭고, 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