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팔랑팔랑
복학생에 대한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았다. 일 년 복학했는데 어째서 나이는 두 살 많은 건지, 부터 중학생 때 선생님들 속을 무지하게 썩였다,라는 소문과 뒷동네서 담배 피우는 걸 본 적 있다는 어느 남자애의 말까지. 남이사 담배를 피우든 술을 먹든 서은과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스스로가 나름 반듯하게 자라 왔다고 생각한 서은으로서는 남자의 존재가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반장이니까 잘 대해 주어라, 하는 담임의 당부와 당분간 태우게 되었어, 라는 아빠의 말까지 모두 부담만 되었다. 어느 날은 남자의 어머니라는 사람이 서은을 불러 아들을 잘 부탁한다며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 주렴, 당부까지 했다. 그건 일종의 감시여서 서은의 부담은 배가되었다.
그래도 처음엔 이것저것 챙겨 줄 요량이었다. 나이 차 때문에 적응하지 못할 수 있으니까 친절히 대해 주어야지, 잘 보여야지, 그래야 아빠한테 해가 가지 않지.
주혁에 대한 첫인상은 조금 무섭고 차가웠다. 그래서 말 걸기가 꺼려질 만큼. 냉연한 눈빛과 무심한 분위기를 가진 남자였다. 그래도 서은은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시간표는 어떠하고 교과실은 어딨는지, 급식실은 어딨는지 따위의 것들. 학교가 끝나면 서은이 수업 시간에 필기한 노트를 건네기도 하고 다음 모의고사의 시험 범위가 적힌 쪽지라든지, 개념 정리 노트 같은 것들을 빌려주기도 했다.
처음에 남자는 의아하게 서은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군말 없이 서은의 것을 받았고 다음 날이면 돌려주었다. 사실 그런 것들을 건넬 때 서은의 마음은 애가 탔다.
네가 이런 걸 왜 줘? 핀잔을 놓거나 이런 거 필요 없어, 타박을 할까봐 그러다 주혁이 순순히 받아 들면 이유 모를 기쁨과 뿌듯함이 가슴을 가득 채워 그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주혁이 차갑게 대꾸하거나 무시할 때면 그날은 하루 종일 우울하였고.
그런데 남자는 의외로 모범적이었다.
자상하고 다정하고 친절하여 모두가 그를 좋아했고, 서은의 도움 같은 게 없어도 남자를 도와줄 이는 많았다. 어느 모의고사에서는 서은을 제치고 일등을 하였는데, 그러자 선생님들과 반 아이들이 묘하게 경쟁관계를 부추겼다. 서은은 주혁이 더욱 어색해졌다.
잘생기고, 성격 좋고, 농구를 잘하는 남학생이었다.
그런 남자가 부럽기도, 샘나기도, 신기하기도, 떨리기도 했다. 딱, 그 정도의 감정이었다. 잘생긴 선배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긴장되었고, 멀리 있으면 문득 궁금해져 흘끔 돌아보았던.
그런 남자를 싫어하자,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어느 날 그 집의 사람들로부터 질책을 받는 아빠를 보고 나서.
소리를 지르고 하대하는 사람들 앞에서 등을 구부리고 하염없이 죄송하다, 말하는 아빠를 보고 서은은 주혁이 싫어졌다. 굽이진 언덕길과 깜빡이는 가로등, 녹이 슨 철문과 낡아 바스러지는 벽돌, 그리고 해진 점퍼를 입은 아빠. 그 모든 것들이 한없이 초라했던 반면 서주혁은 한없이 찬란하게만 느껴져서.
그때부터 서은은 주혁을 싫어하기로 했다. 서은은 주혁이 그녀를 제치고 일 등을 차지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무엇이든 주혁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 홀로 열을 냈다. 주혁의 잘못은 아닐진대, 열여덟의 서은은 그랬다. 어리고 미숙했다.
주혁이 대뜸 서은에게 물어 온 것은 그즈음이었다.
‘넌, 내가 싫지?’
다들 널 좋아하는데 한 명쯤 널 싫어해도 상관은 없잖아.
서은은 답을 할 수 없어 막막히 바라보기만 했다.
대신 고요와 노을과 먼지와 빛의 산란 속에서 주혁이 말하였다.
‘난 좋은데’
그리고 남자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 서은은 처음으로 그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곧 싫어하고 싶었는데 싫어지지가 않았고, 그런 감정이 서은은 처음이어서 주혁이 무섭고, 두려웠다.
* * * * *
화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진한 물감 냄새가 밀려왔다. 못 보던 작품들이 벽에 걸려 있고, 화실 가운데 이젤에는 칠하다 만 캔버스가 올려져 있다. 서은은 캔버스로 가 허리를 숙여 자세히 그림을 살폈다. 인디안 블루의 하늘 속 레몬색의 달빛이 은은하게 깔려 있는 편안하고 포근한 분위기의 그림이었다.
어느 순간 묘한 기척에 몸을 돌리니 영란이 입을 크게 벌리고 반색을 하며 서은을 보고 있었다.
“웬일이야, 자기!”
물감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앞치마며, 손잡이가 떨어진 플라스틱 물통이며, 소녀 같은 웃음이며. 한 달전 모습 그대로였다. 사십 대의 나이 임에도 소녀 같은 영란은 이 작고 어지러운 화실의 주인이었다.
퇴사할 때까진 죽 바쁠 것 같다더니. 연락도 없이. 방금 막 밥 먹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먹을걸.
이 무심한 여자야.
영란은 말을 쏟아 내며 들고 있던 물통을 내려놓고는 의자를 끌어와 서은을 앉혔다. 서은이 사 온 쿠키 세트를 보고 와아, 좋아하는 영란 덕분에 서은도 기분이 좋아졌다.
“어, 근데 선생님, 살 빠지셨네요?”
서은의 눈이 동그래지고 영란이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다이어트 좀 했지. 그러는 자기는 좀 찐 것 같네? 조심해, 그러다 훅 간다?”
“말이 씨가 된댔어요. 그러다 진짜 훅 가면 책임져 주실 거예요?”
“어머, 큰일 날 소리 하네. 어떻게, 내가 남자 하나 소개시켜 줘?”
“됐습니다. 이미 훅 간 몸 갈 데까지 가볼래요.”
새치름하게 말하고 서은은 쿠키한 봉지를 뜯었다. 서은이 부리는 새침에 영란은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야. 부러워서 하는 말이었지. 근데 남자 소개시켜 준다는 말은 진담. 서은 씨 어떤 스타일이 취향이야?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 어때?”
“전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 싫어요.”
“왜?”
“예전에 아빠가 그랬거든요. 잘생긴 남잔 얼굴값 하고 돈 많은 남잔 꼴값을 한다구.”
“그거, 잘생긴 남잔 얼굴값, 못생긴 남잔 꼴값 아냐?”
“그랬나. 그럼 돈 많은 남잔 좋아해야지.”
영란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끝에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재작년 이맘때 서은이 남자 친구라며 화실에 남자 한 명을 데려온 적이 있었다. 같은 회사의 인턴이었는데 훤칠하고 인상이 좋아 서은에게 좋은 연인이 되어 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저 물통 버린다더니 아직도 안 버리셨어요?”
서은이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영란도 서은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버린다, 버린다 맨날 하는데 맨날 까먹고 아직도 이러고 있어. 그나저나 정말 웬일이야, 바쁘다더니.”
“선생님 보면서 힐링 좀 하려구요. 선생님이 제 힐링 비타민이시잖아요.”
“아부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헤헤거리는 서은 때문에 영란도 속절없이 웃었다.
“자기 이젤은 창고에 넣어 놨고, 물건은 그대로야. 귀찮으면 내 거 그냥 쓰고.”
“네에. 저 그림은 선생님이 그리신 거예요?”
“저거? 그리다 말았어. 외로운 노처녀가 소녀 감성으로 그린 달밤이라니, 처량하기 짝이 없지 않니? 서은 씨가 마저 완성하려면 가져다 작업해도 좋고. 참, 이번에 수강생이 선물로 준 모과차 있는데 마실래? 유기농에 직접 만든 거래. 쓰지 않고 달고 맛있어. 감기에도 좋다더라. 환절긴데 감기 조심해야지.”
서은이 답을 하기도 전에 영란은 티 포트를 끓이고 찻잔 세트를 꺼냈다. 서은은 천천히 말해 달라 웃으며 부탁하고 화실 안쪽의 창고로 향하였다.
뻑뻑한 창고 문을 열자 바람이 훅끼쳐 왔다. 창문이 열려 있고 그 옆의 낡은 커튼 자락이 펄럭였다. 이번에도 자주 덜렁대는 영란이 열어 놨다가 깜박 잊은 걸 테지. 서은은 어지럽혀져 있는 잡동사니들을 요리조리피해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닫으려다 문득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베이비 블루, 잎은 퍼머넌트 옐로, 구름은 멜란지 그레이. 창틀에 몸을 기대고 거리에 어울리는 색깔을 고민해 본다.
풍경을 보며 어울리는 색을 찾는 건 취미로 미술을 시작한 이후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하면서 자의로 시작한 일도 아니었던지라 연필도, 붓도, 도화지도 다 지겹기만 했는데 그럼에도 알록달록 색깔들을 담은 팔레트를 들고 앞에 놓인 도화지를 보면 가슴이 뿌듯해지곤 했다.
다시 거리에 어울리는 색을 고민한다.
그러다 남자를 떠올렸다.
남자는 블랙, 블랙, 블랙. 그레이, 그레이, 그레이.
아니, 그보단 좀 더 시퍼런...... 쇳조각.
파란 하늘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눈길이 멈춘 건 버스 정류장에서. 어정쩡한 오후의 어느 시간. 중년의 남성 한 명이 다리 하나를 허벅지에 걸쳐 놓고 건성건성 신문을 넘기고 있다. 바람이 더디어 구름도, 공기도, 시간도 느리게 흐르는 오후. 서은은 창틀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밥을 먹자 하였지.
주말이 심심하다고도.
무심결 남자의 말을 떠올리다 웃기다는 생각을 한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자는 남자는 독일에 가 있었다. 국제 가전 박람회를 위한 것이랬던가. 남자가 회사의 상무인 덕에, 서은이 그 회사의 홍보팀 직원인 덕에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자의 소식을 알게 된다.
그녀 말고도 친구는 많고 함께 밥먹을 이도 많고, 주말이 심심할 겨를 이 없는 남자일 테지만.
그래도, 함께 주말을 보내고 밥을 먹었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어느 수필집의 구절처럼 바라고 또 바라고 포기하지 않으면, 무슨 일
이 벌어질까. 1)
무의미한 상상을 하다가 다시 한번 우습다는 생각을 한다. 무얼 바라고 무얼 포기하지 않겠다는 건지 서은도 모르겠다.
다시 창문으로 내다본 거리는 예기치 않은 더위와 나른과 고요에 생기를 잃어 적막했다. 햇빛은 뜨거운데 공기는 건조하다.
계절이 애매하여 기분도 모호했다.
하여 창문을 닫고, 그곳을 나왔다.
* * * * *
표면적으로 주혁은 완벽한 모범생이었다. 담배를 끊고 싸우지 않고 공부를 하고 착실하게 학교를 다녔다. 태일은 그런 주혁의 모습을 좋아했다. 그의 어머니 난영도 기뻐하는 듯했다. 비단 집안사람들뿐만 아니라 교사도 학생도 모두.
그럼에도 이제까지의 습관을 한순간 바꾸는 건 힘들어서, 가끔 갈증이 날 때면 몰래 담배를 태웠다. 무리 속에서 웃고 떠들고 성실한 우등생 흉내를 내며 지내다가도 문득문득 스스로의 모습이 역겹고 피곤했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의 그와 함께 웃고 떠들었다. 익숙한 호의와 당연한 호감 속에서 그 여자애가 눈에 띈 건 의아한 일이었다.
정서은. 우리 반 반장. 집안의 고용인, 윤철의 딸. 그리고 그를 싫어하는.
처음부터 그를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처음에 서은은 주혁의 곁에서 재잘대는 일이 많았다. 학생 주임은 어떠한지, 교과별 교사들은 어떤 성격인지, 이 단원에선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다음 모의고 사 범위는 어디인지 따위의 것들. 처음엔 우습고 성가셨다.
반듯하고 알록달록한 글씨들로 채워진 노트들과 조심조심 주혁의 눈치를 살피는 서은의 시선 따위 귀찮기만 했다. 그래서 서은에게 일부러 차갑게 대꾸한 적도 있고 무시를 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서은은 기가 죽는 법이 없었다. 선배님, 선배님, 하며 그의 뒤를 쫓는 음성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 여자애의 눈치가 보여 태우고 싶은 담배도 맘껏 못 피웠더랬다.
그렇게 서은의 재잘댐과 눈짓들에 익숙해질 무렵, 서은은 주혁에게 거리를 두고 멀어졌다. 이유는 알지 못했다.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지도, 웃으며 인사를 하지도 않았다. 조금, 아쉬웠다.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여전히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엔 주혁이 서은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급식은 뭔지, 내일 날씨는 어떠한지, 시험 범위는 어디인지 따위의 것들.
그럼에도 서은의 무정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서은을 착하고 잘 웃고 상냥한 반장이라 했지만 주혁에게 서은은 고집이 세고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여자애였다. 제멋대로 그에게 말을 걸며 그를 귀찮게 하다가 제멋대로 그를 무시하여 그를 귀찮게 하는. 마침내 어느 순간 주혁은 인정했다. 서은은 그를 싫어한다고.
그러나 굳이 그 여자애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자애 한 명의 시선과 마음 따위.
그래도 문득문득 궁금했다. 아침마다 조용히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멀찍이 떨어져 그를 기다리고, 꼬박꼬박 존대를 하는 정서은은, 친절하고 상냥하고 공부를 잘한다는 정서은은, 왜 그토록 그를 싫어하는 걸까.
의문은 생각을 얽어매고 시선을 가두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정서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정서은을 바라보는 순간이 늘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주혁은 서은이 그를 싫어하는 게 싫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웃고 떠들다가도 그가 다가가면 묘하게 자리를 피하는 여자애. 반 아이들이 모두 그를 형, 오빠 하며 말을 놓았는데 유일하게 존대를 쓰는 여자애. 유일하게 그에게만 웃어 주지 않는 여자애가, 주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넋이 빠져 있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총을 내리고 물을 마시는 사이였다. 준경의 목소리에 주혁은 흘끔 곁눈질을 하다가 가볍게 대꾸했다.
“여자 생각.”
의외의 답이었다.
"요즘 만나는 여자 있었어?”
“만나는 여자는 없고.”
"……."
"어떻게 해 볼까 하는 여자는 있지.”
호오, 누군데. 준경의 눈썹이 들썩거린다. 주혁은 방아쇠를 만지작대며 잠시 답을 고민했다. 그러니까, 정서은. 연희동에서 일했던 고용인의 딸, 등하교를 같이했던 고등학교 후배, 지금은 홍은동의 동네 주민. 그러나 주혁의 입에서 나온 답은 지극히 간결했다.
“회사 직원.”
총을 겨누며 고개를 기울이던 준경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사내 연애, 좋지.
하지만 네가 하는 사내 연애는 금단이지.
아아, 내가 잘못 생각했네. 금단이라 더 끌리는 연애인걸.
주혁도 따라 웃었다.
“누군진 몰라도 애먼 여자 데리고 놀다 울리지나 말고.”
준경은 떠보려 한 말이었는데 주혁이 빙긋 웃는다. 준경이 이어 더 물어보려는 찰나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다. 총에 맞은 피젼의 파편들이 허공으로 떨어졌다. 곁에 있던 독일인 조교가 나이스를 연발하며 박수를 쳤다. 실탄이 더 필요하냐 물어 오지만 주혁은 사양하고 남아 있던 마지막 한 발을 공중에 쏘았다.
타앙, 울리는 소음과 울창한 나무숲이 흔들리는 찰나에서 주혁은 다시 서은을 생각한다. 여전히 크고 맑은 눈과 ‘무서우니까요.’하는 음성도 함께.
사내 연애, 좋지.
하지만 네가 하는 사내 연애는 금단이지.
아아, 내가 잘못 생각했네. 금단이라 더 끌리는 연애인걸.
그런 거였나. 기분 나쁘도록 매정한 여자에게 번호를 물어본 것도, 깍듯한 예의를 차리는 여자를 흩트리고 싶은 것도, 지금 다시 그 여자가 떠오르는 것도, 모두 그런 이유에서였나.
궁금했다. 기현에게는 그림을 그려 주고 카드를 써 주면서 어째서 그와는 밥 한번 먹기 싫다는 건지, 그가 싫은 건 아니면서 어째서 무섭다는 건지, 예전에도 지금에도 어째서 너는 나의 일상을 방해하는 건지, 나는 이런데 너는 어떠한지.
빽빽한 일정 속에서 서은은 종종 그의 의식을 흩트리며 영상처럼 밀려와 잔상을 남기고 가라앉았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도, 주혁이 유학을 가고 한국을 떠나고 시간이 흘렀던 그때에도 아주 가끔 서은이 떠올랐다. 그때에도 서은은 두서없이 떠오르다 두서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타인이 건네는 말 한마디에, 무심코 보이는 참새 한 마리에 한순간 의식의 표면 아래로 침잠해 버릴 만큼 미약하고 무력한 기억이기도 했다.
그래서 별것 아니라고 치부하였는데, 이제는 성가시다. 여전히 고집스럽고 제멋대로에 그를 방해하는 정서은이, 주혁은 몹시 성가시다가, 궁금하다가, 결국엔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잇새로 짧은 숨이 새 나왔다.
배알도 없나, 나는.
여자가 그토록 분명하게 거부의 의사를 표시했는데. 그냥 싫은 것도 아니고 뭣보다 무섭다는데. 준경의 말대로 애먼 여자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무섭다는 순진하고 애먼 여자는 건드리지 말고 그 자리에 두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생각은 대책 없이 정서은을 향하고, 그는 아직 흐르는 생각을 멈추는 방법을 알지 못하니. 어쨌든 지금은 서은을 생각해야겠다. 그러다 질리면 관두겠지.
생각의 끝에 주혁은 가벼이 웃었다.
준경의 마지막 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파편이 튀기는 들판에 어울리지 않는 나비 한 마리가 날아다닌다. 좌우로, 위아래로, 팔랑팔랑 움직이며 위태롭게, 느긋하게 총구 위를 날아다닌다.
이유 없이, 주혁은 그 나비에 시선을 빼앗겨 한참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