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쾌와 불쾌
비틀즈의 음악과 커피 향이 잘 어울리는 비 오는 수요일이다. 비 오는 수요일이면 아빠는 차 안에 꼭 비틀즈의 음악을 틀었다. 음악을 틀며 꼭빠뜨리지 않는 멘트도 있었다. ‘네가 배 속에 있을 때 엄마랑 많이 들었어.’와 ‘이래 봬도 아빠가 한땐 비틀즈 조지 해리슨 닮았다는 말 꽤 들었다니까.’ 하는.
서은이 태어나기 전 아빠는 기타연주가였다고 한다. 경산에서 음악인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혈혈단신의 몸으로 상경하여 밴드를 만들었다 했다. 무슨 가요제에 나가 상을 탄적도 있다고 했다.
엄마를 만나게 된 것도 그 기타 덕분이라 했다. 기타는 그 시절 흔한 악기가 아니었는데 기타를 계기로 엄마와 말을 트고 데이트 신청을 하고 청혼도 하였다고 한다. 결혼을 해서도 아빠는 음악인의 꿈을 키웠다.
결혼을 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열망이 더 커졌다 했다.
그러나 연예계 데뷔를 목전에 두고 사기를 당해 그길로 꿈을 접었다.
곧 아기가 태어날 예정이었고 돈이 필요했다.
새벽이면 집을 나가 일을 구했다. 공사판에서 막노동도 했고 공장에 들어가기도 했다. 어느 날 윤철의 성실함을 알아본 어느 사장의 추천으로 서정가(家)에 들어가게 되었다. 몸이 편해지고 월급이 올라 엄마가 기뻐했다. 홍은동에 집을 마련했다. 그럼에도 가난은 끈질기고 지리멸렬하여 결국 엄마는 윤철과 서은을 떠났다.
그래도 윤철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서은도 무너지지 않았다. 윤철의 손을 잡고 버티어 이겨 냈다.
지금도 서은이 사랑해 마지않는, 성실하고 자상한 아빠였다. 그 성실함과 사람 좋은 성격 덕에 아빠는 서정가에서 꽤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리 신뢰를 받고 신임을 얻었다한들 그들은 고용주였고 아빠는 피고용인이었다.
그리고 서주혁은 그 집의 둘째 아들이었다.
별로 유쾌한 사이는 아니었다. 불편하고 서먹했다. 서은이 볼 수 없는 풍경을 보고 서은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서은은 할 수 없던 것을 해 내는 남자를 보며 시샘을 한 적도 있었다.
서은이 사춘기에 접어들 즈음부터 그 집에서 일한 아빠였다. 그 집의 이야기를 듣고 그 집의 사람들을 보며 서은은 이른 나이에 세상의 불균형함을 깨달았다. 그럴수록 남자와의 사이는 더욱 어색해졌다.
가끔씩 그런 서은을 의아하게 혹은 불만스레 바라보는 남자의 눈길을 알았다. 그러나 서은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해서 모르는 척하였다.
그런 남자는 서은과 같은 학교를 다닌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떠나기 전 교실에서의 마지막 날. 느닷없이 서은에게 핸드폰 번호를 물었다. 묘한 일이었다. 우리는 그런 걸 묻고 답하는 사이가 아니었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서은은 그때 처음으로 핸드폰이 없어 서럽다는 생각을 했다. 설움을 감추고 핸드폰이 없다며 남자의 요청을 에둘러 거절했다. 어차피 곧 떠날 텐데. 어차피 곧 안 볼 사인데.
그런데 난 왜 그렇게 안타깝고 서러웠던 건지. 그럼에도 남자는 서은의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이번엔 이메일 주소를 달라며 고집을 피웠다. 그때, 서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메일 주소는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멋대로 들었다.
서울에 있을 땐 서먹하기만 했는데 메일로는 둘도 없는 절친처럼 편지를 주고받았다. 메일 속에서 서은은 남자에게 말을 놓았다. 남자와 주고받는 메일 속엔 시시콜콜하고 무용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남자와의 메일은 일상에 소소한 재미를 주었다. 남자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캘리포니아의 아몬드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캘리포니아의 하늘이 얼마나 새파란지, 캘리포니아의 해안도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같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연락을 하지 않게 되고, 서은은 남자를 잊었다. 한국에서 서은은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서은이 서정에 입사한 건 순전히 운이고 우연이었다. 더 나은 조건의 좋은 회사에 합격했더라면 망설임 없이 그 회사를 선택했을 것이다.
같은 회사를 다닌다는 것 외에 지난 십여 년간 별다른 접점이 없는 남자였고 앞으로도 없을 남자였는데.
왜 하필, 거기서 그렇게.
특유의 청명하고 시원한 웃음이 떠오른다. 회사에서 듣기로, 남자의 이미지는 그것보다 딱딱하고 차가웠는데. 실제로 보니 그렇지 않았다. 여름처럼 뜨겁고 짙푸르다. 이어 서은의 번호를 묻고 가지고 하는 말들도 떠올린다.
서은은 픽 웃었다. 모두 쓸데없는 생각들이다. 수요일에 비가 내려 생각이 샛길로 빠진 탓이다. 그날, 홍은동에서 남자와의 대화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다. 원래 그런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본가가 연희동이고 회사가 여의도에 있는 남자는 돈이 많고 심심하여 홍은동에 집을 구했다. 그만큼 남자는 무료했고, 때마침 서은을 보았고, 서은에게 말을 걸다가, 서은의 사소한 무언가가 남자의 자존심에 흠집을 내어 남자의 흥미가 동했을 뿐.
원래 그런 남자였다. 삶이 화려하여 인생이 심심한 것처럼 굴던 남자. 뭐든 흥미가 동하는 것은 건드려 봐야 직성이 풀리고 그렇게 흥미가 식으면 다음의 유흥거리를 찾아다닌다. 그러니 남자는 곧 서은도 잊을 것이다.
서은은 핸드폰에서 어플을 켰다. 여러 개의 메시지 창 중 서주혁을 찾아 눌렀다. 서은의 시간을 묻는 남자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시각은 간밤새벽.
번호를 따 간 지가 언젠데,
이제 와 시간을 묻는 건 너무 늦지 않았나요?
새침하고 도도하게 말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그날은 선약이 있어요. 시간 봐서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정중히 답장을 보냈다.
머리 좋은 남자라면 이쯤 눈치를 채고 알아서 연락을 끊겠지.
자존심에 흠이야 좀 가겠지만 서은이 상관할 바가 아니고, 예전처럼 남자는 곧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아 떠날 거였다.
* * * * *
빌딩 숲을 지나고 야트막한 언덕길을 지나고 작은 초록을 지나면 강철로 만들어진 집이 나온다. 모름지기 사람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라는 집주인의 신념을 따라 단층으로 넓게 자리 잡은 저택은 크게 세 덩이로 나뉘어져 있다.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편의를 위해 각각 우청재, 좌청재, 중앙재 이름을 붙였다.
그 모든 공간은 주인을 따라 고집스럽고 권위적이며 어딘가 사람을 위압하는 데가 있다. 담벼락이 성처럼 높고 그보다 더 높은 나무들이 성벽처럼 집을 지키는 곳이었다.
강철과 나무의 기괴하고 우아한 조화에 건축인들의 서적에 실린 적도 있다 했다. 그때마다 주인은 흡족해한다. 주인은 이 집의 모든 것을 마음에 들어 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비가 오는 날의 장관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물안개로 흡사 수묵의 그림 같은 미관이 펼쳐졌다.
어릴 적 주혁은 그 강철의 집이 무서웠다. 성처럼 높은 담벼락은 고압적이고, 철은 차갑기만 하다. 높고 울창한 나무들은 짙푸르다 못해 검었으며, 비가 오는 날은 음산했다. 철의 문 사이의 공간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모두 어린 주혁의 헛된 상상들이다.
주혁은 넥타이를 느슨히 하고 차에서 내렸다. 흙과 나무 냄새, 나뭇잎이 흔들리고 돌이 밟히는 소리 따위는 철문에 가까워질수록 희미해져 마침내 그 존재감을 잃어버린다. 주혁이 문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철컹, 문이 열렸다.
철 대문을 넘어 돌길을 건너고, 작은 연못을 지나 작은 돌계단을 올라야 비로소 그 집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집을 지키고 가꾸는 것이 어머니, 난영의 임무였다. 새벽부터 깊은 밤 잠들 때까지 난영은 그 넓은 집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문이 열린다.
난영 대신 최 씨가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주혁이 이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난영을 도와 살림을 한 고용인이다. 주혁의 재킷을 들고 어서 오누, 인사를 하고 필요한 것을 물어 오는것도 모두 최 씨였다.
“형은요?”
“진우 유치원에서 데려온다고 좀 늦는대.”
“아아. 진우 많이 컸어요?”
“그러엄. 잘 먹고 잘 자서인지 쑥쑥 커. 유치원 반에서 진우가 제일 크다더라.”
그의 형, 승혁도 키가 컸다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늘 키 번호가 마지막이 아닌 적이 없다 했다. 형을 닮아 조카도 키가 큰 모양이었다.
“묻지만 말고 자주 와서 들러. 하나뿐인 조카, 삼촌 얼굴 잊어버리겠다.”
최 씨가 주혁의 등을 살짝 때린다. 나이가 들어 예전 같지 않은 힘이었다.
“우리 최 여사님 손맛은 여전하시네.”
주혁의 능청에 최 씨가 껄껄 웃었다. 최 씨는 뒤이어 따라붙는 고용인에게 주혁의 재킷을 넘겼다. 주혁은 최 씨가 전하는 연희동의 일상을 들으며 좌청재를 지나 중앙재로 향했다. 중앙재의 복도에 다다랐을 때 주혁이 심상한 어조로 물었다.
“회장님 몸은 어떠세요?”
“요즘 입맛도 돌아오시고, 많이 괜찮아지셨어. 그래도 속은 어떠실진 모르지. 통 말씀이 없으신 분이시니.”
작년 겨울, 심근 경색으로 쓰러지셨다가 다시 기운을 차린 지 오래되지 않았다. 매주 주치의가 병환을 살피러 오긴 하지만, 고용인들도 고용주의 상태에 민감히 날이 서 있을 거였다. 주혁의 눈매가 완만한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매번 감사해요.”
“감사는 무얼.”
별스럽다는 듯 최 씨가 웃고 만다.
긴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게 커다란 병풍이었다. 그 병풍을 배경으로 주방에서 선미가 나왔다.
“일찍 왔네요?”
여전히 기품이 흐르는 차림새. 그녀는 주혁의 세 번째 어머니였다.
여든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시퍼렇게 날이 서린 두 눈과 꼿꼿한 대나무를 대어 놓은 듯한 허리는 그대로였다. 다만 얼굴에 깊어진 주름이 사내도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여 늙어 가고 있음을 일러 준다.
노인은 손자를 앞에 두고 난을 만졌다. 아주 간간히 서정의 일에 대해 물을 뿐, 고요와 침묵과 정적이 시간을 먹고 공간을 채웠다.
과일 내왔어요, 고운 목소리의 선미가 방 안에 들어왔다. 커다란 쟁반을 들여온 선미는 순서대로 접시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번 과일이 참 달아요, 이건 비타민 D가 풍부하대요, 이건 눈에 좋대요, 재잘대며 과일을 찍어 태일에게 내민다. 태일에 대한 선미의 공경과 봉양은 여전히 지극했다.
태일에게뿐만 아니라 만일 이 자리에 형과 조카가 있었더라면 그들에게도 포크를 집어 주었을 것이다. 그 다정한 손길과 눈짓이, 주혁에게는 향하지 않는다.
그건 주혁에 대한 선미의 견제이며 무시였다. 난영이 살아 있을 적부터 꽤 오랫동안 아버지 재형과 내연관계를 유지해 오던 선미였다. 첫 번째 며느리 난영을 깊이 신뢰했던 태일은 당연히 선미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눈 밖에 나 없는 사람 취급하겠다 내쫓은 아들 재형이었다. 그 아들의 내연녀 따위가 무어라고.
그런데 난영이 죽고 선미는 본인이 낳은 자식 석현을 내세워 이 집에 들어와 지극정성으로 태일을 모셨다. 태일의 면절과 타박에도 그녀는 바짝 몸을 숙이고 집안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청했다.
겉으로 그녀는 죽은 난영을 예우하는 듯 보였다. 돌아가신 큰형님을 대신해 승혁을 돕고 진우를 보살필 것이다, 그렇게 말했다. 말대로 선미는 승혁의 앞길에 해가 될까 싶어 석현을 외국에 보내고 승혁과 진우를 돌보았다.
그러나 주혁은 선미가 보살펴야 할 대상에 들어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서재형의 자식이 아니라 서재하의 자식이었으니까. 난영의 아들이되 아들이 아니었고.
서재하는 태일의 두 번째 아들이었다. 주혁은 본래 그 재하의 아들이 지만 재하가 죽고 재형과 난영 부부의 자식으로 입적되었다.
선미의 아들 석현도 본래는 인정받지 못하는 사생아였을 테지만, 은연중 선미는 석현과 주혁의 차이를 분명히 두었다. 석현은 태일과 재형으로부터 인정받아 번듯하게 재형의 호적에 올라가 있지만 주혁은 친자로서 인정받은 게 아니라 입양의 절차를 거쳐 호적에 올라가 있었다. 인정받지 못한 핏줄이었다.
태일이 선미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빈말처럼 툭 말을 던졌다.
“회사 일 바빠도 자주 들러. 와서 제대로 된 밥도 먹고.”
선미가 슬쩍 주혁의 눈치를 살핀다. 주혁은 넉살 좋게 여의도로 이사 오시면요, 답하였다. 이를 약하게 물며 선미는 가정 하나를 해 본다.
승혁의 다리가 멀쩡하였더라면.
그러면 주혁이 난영과 선미를 어머니라 부를 일도, 승혁을 형이라 부를 일도, 강철로 된 집에 들어올 일도 없을 터였다. 승혁의 대체품으로 들어온 아이.
선미가 좀 더 일찍 아이를 낳았더라면 주혁이 입양되는 일 따위도 없을 거였다. 불안정한 관계에 아이까지 만들고 싶지 않아 피임을 했고, 피임을 중지하자 임신이 어려운 몸이라는 걸 알았다. 시험관 시술을 늦게 결정한 게 이제 와 뼈저리게 후회가 된다.
하지만 그 다른 무엇들보다도, 입에 담기 상스럽도록 더러운 피. 서재형이 아닌 서재하의 피.
그러니 선미의 입장에서 주혁은 그녀의 아들 석현보다 아랫사람이었고, 그에 맞는 위치에서 그에 맞는 일을 해야 했다. 헌데 지금 주혁이 분수에 맞지 않는 위치에서 분수보다 넘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다리를 못 쓰는 승혁의 한계는 뚜렷해 보였고 주혁이 없다면 남은 몫은 모두 석현과 선미의 것이 될 터였다. 그 시퍼렇던 태일도 이제는 예전 같지 않은 몸이었다. 시들시들하는 요즘의 상태를 볼 때 남은 날이 그리 길지는 않아 보였다.
선미는 입매를 길게 늘였다.
“회장님 말씀처럼 자주 들러요. 좋아하는 반찬 많이 만들어 놓을게.”
“예, 어머니.”
웃으며 태연히 대꾸하는 꼴을 보라지. 얄미워라.
그때 덜컥 방문이 열리고 아이가 들어왔다. 아이는 풀과 흙냄새를 풍기며 태일에게 달려갔다. 왕할아부지, 끝 음을 길게 끌며 태일에게 달려가면 태일은 숨기지 못한 웃음을 귀에 걸고 아이를 품에 안는다. 품 안에서 아이는 종알종알 두서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오랜만이다. 어째 같은 건물에 있으면서도 얼굴 한번 보기가 어려워.”
뒤를 돌아보면 승혁이다. 승혁이 난영을 닮은 미소를 짓는다. 주혁도 반가워 웃었다.
향을 피웠다. 차례로 절을 올리고 술을 올렸다. 그 외에도 지루한 절차들을 치르는 동안 서정가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위용과 건재를 과시했다. 그들의 형수님, 혹은 어머니이자 주혁에게는 조모라는 사람의 제삿날이었다. 주혁은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처음 그들을 본 것도 조모의 제삿날이었다. 승혁의 옷과 비슷한 것을 입고 난영과 함께 낯선 그들을 맞이했다. 호의를 얻고자 짓는 미소에 그들은 침을 뱉듯 너무도 쉽게 생채기를 냈다.
‘이 꼴 보지 않고 돌아가신 게 차라리 다행이지.’
‘이래서야 회사 경영이 제대로 되겠어요. 얼른 후계 논의를 새로 해야 ? —어머. 제가 틀린 말했나요.’
‘그러니까 집안에 사람 한 명을 들여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건데. 줄줄이, 이게무슨 꼴이야.’
어린 주혁으로서는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들이 주혁과 난영과 승혁을 못마땅히 여긴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린 마음에 불쑥 화가 솟았다.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감히 눈초리를.
날카롭게 올라가는 목소리를 저지한 건 난영이었다. 주혁을 대신해 난영이 고개를 숙이고, 그런 난영에게 사람들은 다시 상처를 주었다.
난영은 주혁에게 과자와 장난감을 안기고, 동떨어져 누구도 찾지 않는 우청재의 깊숙한 방에 데려갔다. 주혁을 혼자 두고 그대로 나가려다 뒤돌아보고선, 서글픔이 밴 긴 숨을 뱉었다. 난영의 얼굴에 희미하지만 기형적인 미소가 잠시 떠올랐다.
그때 어린 주혁의 마음이 휘청, 휘었다.
그 순간 난영의 얼굴에 뒤엉켜 떠오른 감정을 주혁은 알았다. 체념과 탄식과 피로. 서재하의 애인이, 그러니까 친부의 애인이 주혁을 버리기 전에 자주 짓는 감정들. 그때마다 주혁은 울며 매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르게 난영에겐 그럴 수 없었다. 감히 그럴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난영이 무릎을 구부리고 앉더니, 주혁의 볼을 쓰다듬었다. 난 영의 손길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어떤 말을 할 줄 알았다. 어떤 말을 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난영은 결국 아무런 말도 않고 방을 나갔다.
난영이 떠나고 홀로 남겨진 주혁은 분하였다. 분노의 대상을 정의 내릴 순 없었다. 다만 분하기만 해서, 이를 물고 울었다. 소리를 내면 다시 또 그들이 난영에게 상처를 주리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조심히 가요. 선미가 짧은 인사를 마치고 등을 보인다. 짧은 새에 최 씨가 다려 놓은 재킷을 걸치고 넥타이를 조였다. 끝내 재형은 나타나지 않았다. 여전하다고, 주혁은 무심히 생각했다.
난영이 눈을 감은 날, 주혁은 세상의 모든 신을 저주했다. 어째서 서재형을 두고 난영을 데려가야 했나. 난영이 살아야 하는 이유는 수천, 수만 가지였다. 하지만 아버지 재형은, 아버지 당신은.
당신이 없었더라면.
난영은 행복했을 것이다. 아름답고 찬란한 삶을 누렸을 것이다. 재형과 선미와 재하, 그리고 주혁이 없는 세상에서.
돌계단을 내려가고, 연못을 지나, 돌길을 건너, 철의 문을 열었다. 검은 나무가 스산히 움직여 내는 소리들이 마음을 흩트린다.
차에 오르며 주혁은 오늘은 홍은동엘 가야겠다, 생각한다.
여의도가 아닌 홍은동에 몸을 누이는 날들이 늘어 간다.
* * * * *
새벽과 아침 사이, 여름과 가을의 사이였다. 멀리서 낯익은 풍경이 보여 주혁은 걸음을 멈추었다. 낮은 담벼락, 일렬로 늘어선 차들과 홍은동의 좁은 골목, 홍은슈퍼, 벽을 오르는 풀과 꽃, 아직은 짙은 녹음, 이슬, 고양이, 새, 그리고 서은이었다.
하양과 검정이 섞인 트레이닝복을 입은 서은은 한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다른 한 손엔 두둑한 검은 봉지를 든 채로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다.
여자를 향해 내리는 햇살이 물결처럼 흔들린다. 가슴속에서 오랜만 이네, 하는 미지근한 감정이 솟았다 가라앉는다. 주혁은 주머니 속 핸드폰을 톡톡 두드렸다.
서은의 문자를 받고 한 달 정도가 지났던가.
시간을 봐서 연락을 주겠다 하였지.
비식, 웃음이 나왔다. 연락을 하겠다는 여자는 그 말을 끝으로 어떠한 연락도 하지 않았다. 무시와 외면과 거절이다. 그래서 주혁은 더 이상 서은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았다.
처음 서은의 번호를 알아내고 며칠간은 여자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그다음 며칠은 지방 출장이었고, 그다음엔 신재료 생산 라인 투자 회의와 전략 회의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때마침 신제품이 출시되며 수시로 국내외 언론의 반응을 살펴야 했고 나타나는 부정적인 반응들을 캐치해 내 그다음 제품을 위한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잠시 여자를 잊었다.
다시 여자가 그의 일상에 툭 튀어나온 건 늦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차안에서 업무 보고를 받으며 저녁 모임을 빙자한 경제인 회의를 위해 이동하고 있을 때.
여의도 대로변에서 서은을 보았다. 서은은 길가의 벤치에 앉아 같은 부서 동료로 보이는 여자와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동료에게 볼을 잡혀 못난 얼굴을 만들기도 했다.
무심히, 지나쳤다.
잠시 쉬는 동안에, 커피를 마시는 중에, 회의 중간에, 늘어진 볼을 하고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했던 서은의 얼굴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일정이 끝나고 여의도의 오피스텔로 돌아왔을 땐 새벽이었다. 불현듯 밥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보낸 메시지였다.
새벽이었기에 여자에게서 답이 바로 오지는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여자의 사진들을 넘겨 보기도 했다. 바다, 야경, 꽃, 카페, 나무를 배경으로 한 사진들 속에서 서은은 웃으며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을 보고 왜 우는 걸까 궁금해하다가 연동된 SNS 스토리를 살펴보았다.
특별한 내용은 없고, 알 수 있는 것은 이름과 생년월일뿐. 그래서 더 궁금하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어도 저녁이 되었어도 아침이기에, 비가 내리기에, 저녁이기에, 하는 이유로 여자의 답을 기다렸다. 그러다 한참 만에 온 문자가 그거였다. 시간을 봐서 연락을 주겠다 하는. 다시 주혁은 기다렸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다시, 주혁은 서은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랬던 여자가 다시 눈앞에 있다. 특별한 사이도 아니었고 다시 만난날 이후 특별한 무언갈 한 것도 아니었지. 그래서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발칙하고 괘씸하였다.
어긋나는 시선을 고집스레 좇아본다. 몇 번의 아쉬운 비껴감 끝에 마침내 여자도 그를 보았다.
오만하고 도도한 여자는 눈빛마저 침착하고 단정하였는데, 주혁은 여전히 그 모습을 흐트러뜨리고 싶었다.
"연락은 언제 할 예정이에요?”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서 있었다. 남자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깔려 있다. 서은이 답을 않자 이번엔 고개를 살짝 비튼다.
“아직 기다리는 중인데.”
백련산을 올라 가빴던 숨이 어느새 가라앉고 등 뒤로 흐르는 땀방울이 서늘해져 도리어 상쾌했다. 서은은 모처럼의 일요일 아침 산책에 뿌듯해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느슨해진 호흡이 다시 팽팽해지고 목덜미가 서느렇게 식는다. 푸르고 붉은빛이 공존하는 부드러운 시간 속에 서 있는 남자가 낯선 바람을 몰고 온 기분이다. 장난기가 배어 있는 얼굴로 천연덕스레 말을 붙이는 서주혁에게 지금 자신은 무엇을 위한 존재일까 가늠해 보지만 답은 알수 없다. 서은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바쁘신 것 같아서요.”
“바쁘기야 했지.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십 년도 더 된 약속을 빌미로 말을 걸고, 서은보다 돈을 훨씬 더 많이 버는 남자이지만, 그는 염치없어하지도 않고 오히려 뻔뻔하게 “아침은 먹었어요?” 묻는다.
서은은 고민 없이 답하였다.
“네.”
아아. 주혁이 고개를 두어 번 주억이더니 난 아직인데, 덧붙인다.
“이따 점심 같이 먹을래요?”
“......제가 왜요?”
“딱히 할 일은 없는데 배는 고프고, 마침 후배님이 거기 서 있길래.”
즐겁고 가벼운 얼굴과 말이었다. 주혁의 수작이 가볍고 무의미해서 서은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저는 배가 불러서요.”
“그럼 나중에 배고플 때쯤 연락하면 되는 건가?”
“그때 연락 주시면 기프티콘 보내드리겠습니다.”
십 년도 더 되었다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서은의 새침에 주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선후배 사인데 매정하네, 아가씨.”
“......예전에도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서요. 저야말로 상무님께서 왜 이러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주혁이 웃음을 흘린다. 온화하게 굽혀진 눈매 사이로 남자의 눈빛이 나른하다.
“궁금하면 밥 먹고 차 마셔 보든지.”
말의 끝자락에 유혹의 기운이 서려 있다. 서은은 잠시간 말이 없다가 곧 단정한 목소리로 괜찮습니다,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정중히 답하였다. 재미없는 얼굴과 재미없는 답. 그가 거는 장난에 허투루라도 웃어 주는 법이 없다.
그런데도, 어쩌면 그래서 더 자꾸 장난을 걸고 싶어지니 그의 취미도 고약했다.
그런 주혁의 속내도 모르고 순진한 후배는 천연한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조심히 가십시오.”
상사와 사적인 용무를 만드는 건 부담스럽다 하였나.
매정하지만 현명한 후배의 깍듯한 인사다. 매정하고 현명한 후배는 다만 지나쳐 갈 뿐이다. 그마저도 매정하고 현명해서 웃음이 나왔다.
실없는 웃음의 끝에는 묘한 아쉬움이 떠올랐다. 무얼까, 이 감정은.
하지만, 그뿐이다. 그 무력한 감정의 정체를 추측하고자 무용히 시간을 쏟고 싶진 않았다. 주혁은 곧 돌아섰다.
차에 시동을 걸고 올라타다 스치듯 시선이 서은의 쪽으로 움직였다. 우연한 타이밍인지 서은의 시선과 마주쳤다. 서은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예의 그 깍듯한 태도로 묵례를 했다.
주혁은 발에 힘을 주고 순식간 속도를 내 달렸다.
창문 틈새로 들이치는 바람에 머리가 나부낀다.
차창을 굳게 닫았다.
* * * * *
“홍은동에 집 샀다며?”
기현이 물었다.
“홍은동? 그 동네는 왜?”
옆에서 또 석진이 묻고.
“얘 거기 고등학교 나왔잖아.”
답을 주혁 대신 기현이 한다.
“고등학교? 얘 미국에서 하이스쿨 다닌 거 아냐? 나랑 같이 졸업했는데?”
이 얼빠진 질문은 다시 석진.
“미국 가기 전에 한국에서 나랑 같이 고등학교 다녔거든? 하이스쿨 발음 굴리기는.”
역시 이번의 답도 기현이다.
주혁은 입 벙긋 않고 대답을 다한 셈이다. 대신 그는 남은 잔을 비우고 바닥에 떨어진 큐대를 주워 들었다. 먼저 자리를 잡고 서 있던 준경이 몸을 숙여 공을 치는데, 원하는 방향으로 굴러가지 않는지 혀를 찬다.
간만의 모임이었다. 기현의 개업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옆에 연희동도 있는데 왜 굳이 홍은동?”
큐대에 기대 선 준경이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돈이 남아돌아서.”
웃음기 없는 농담과 함께 주혁이 자세를 낮추고 한 팔을 뒤로 뺐다. 탕, 그의 큐대에 맞은 공이 요란히 굴러갔다. 동시에 준경이 더럭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미친놈.”
주혁도 따라 웃었다.
다시 상체를 숙이고 자세를 잡는데 하얀 공 위로 여자의 동글동글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왼쪽 검지 아래에 큐대를 밀어 넣는데 우산을 내밀던 여자의 하얀 손가락이 떠오르고.
하얀 공과 부딪힌 빨간 공이 데구루루 굴러가자 이번엔 여자의 무정한 뒤태가 떠오른다. 요즘 들어 그의 일상에 툭툭 튀어나오는 여자였다.
"이 일러스트 유니크하면서 괜찮네. 디자이너가 누구야?”
게스트용 안내 책자를 넘겨 보던 석진이 물었다. 디자인을 전공으로 한 석진이었다.
“아아, 그거. 후배가 개업 축하 선물로 그려 준 거야. 전문적으로 그리는 건 아닌 것 같던데.”
“그런 것치고 꽤 괜찮은데?”
“그래? 아. 주혁아, 너 기억나? 정서은. 걔가 그려 준 거야.”
툭,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주혁의 큐대에 맞은 공이 멋대로 굴러갔다. 옆에서 준경이 나이스, 작게 환호를 한다.
“전에 우연히 아, 됐다. 아무튼, 걔가 축하 겸 선물 겸 그려 준 거야.”
주혁은 당구대 옆 간이 테이블에 올려진 언더락 잔을 빙글 돌렸다. 센스 있는 점원 덕에 잔은 다시 채워져 있었다.
“졸업 후에도 계속 만났어?”
한 모금 술을 들이켜며 물었다. 주혁은 유학을 갔지만 기현은 그 고등학교를 계속 다녔다. 서은과 기현은 서로 학년과 반이 달랐어도 각자 학급 임원인 탓에 전교 임원회 멤버였다. 기현이 커피땅콩을 씹으며 대수롭지 않게 답을 한다.
“계속 만났다기보다 어쩌다.”
“어쩌다, 어떻게?”
“......어떻게는 무슨. 어쩌다는 그냥 어쩌다지. 동문이잖아, 동문.”
나도 동창이었는데, 시시한 불만이 미약하게 솟는다.
다시 여자의 무정한 눈과 새침한 속눈썹과 서늘한 목덜미가 떠오른다.
“이뻐?”
석진이 물었다. 기현이 어이없는 눈길을 보냈다.
“그 후배 이쁘냐고. 이 카드도 그 후배가 쓴 거지? 글씨체가 내 스타일이야.”
“신경 꺼. 너 같은 놈이랑 어울리지 않는 애야.”
석진이 농담도 못 하냐, 하며 카드를 툭 던졌다. 바 테이블 위에 미끄러지듯 빙 도는 민트색 카드를 주혁이 잡았다.
축하해요, 선배.
잘돼서 십 주년 파티 때 초대해 줘야 해요, 선배.
서은만큼이나 단정한 글씨였다.
상무님, 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상무님, 하며 선을 긋고 한 발짝 멀어지는. 그런데 기현은 선배라. 재밌다는 생각을 한다. 우습다는 생각도 뒤따라 잇는다. 주혁은 곧 잔을 비웠다. 얼음만 남은 유리컵이 날 선 마찰음을 내며 떨어지듯 테이블에 닿았다. 그 소리에 놀라 돌아보는 사내들에게 주혁은 도리어 뭘 그리 놀라느냐는 듯 여상히 물었다.
“뭐 해?”
커프스단추를 풀어 소매를 말아 접고 턱짓으론 큐대들을 가리킨다.
“게임 시작해야지.”
무심한 미소로 하는 말의 성격은 제안이 아닌 명령을 닮아 있다.
게임은 그의 승리였다.
* * * * *
법 위의 재벌, 그중의 꼭대기는 서재형. 주혁이 기사의 타이틀을 조용히 읊조리곤 신문을 접어 내렸다.
“명문이네요.”
칭찬이지만 무심하다. 기쁘지만 건조하고. 간밤 또래들의 모임에서 술을 진탕 하였다는 주혁은 언제나처럼 말끔한 얼굴이었다. 주혁은 다시 몸을 틀어 숟가락을 들었다. 고요한 다이닝룸에 그릇과 숟가락이 부딪혀 내는 소리가 선명히 울렸다. 그릇 위로 오르는 열기는 여전했다. 홍 실장이 아침 일찍 근처의 국밥집에서 포장해 온 것이다.
홍 실장이 식탁 위에 해장을 위한 아침을 세팅했을 때, 주혁의 얼굴에 언뜻 성가신 기색이 스쳤지만 그는 별다른 핀잔을 주진 않았다. 그저 고마워요, 엷은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넬뿐이다.
그건 감정 없는 다정이다. 명문이네요, 하는 칭찬 역시 그런 종류의 다정이었다.
홍 실장의 내심 실망스러운 속내를 읽었는지 주혁이 미소를 곁들여 말을 붙인다.
“마음에 들어요.”
홍 실장은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세대별 커뮤니티에도 서재형 부사장님에 대한 글들 게시했습니다.”
“반응은요?”
주혁은 홍 실장에겐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가지나물을 씹었다. 분명 위에서 내려 보고 있는 이는 홍 실장이지만, 아래의 남자는 낮은 위치에서도, 여상한 행위에서도 강렬한 존재와 위압을 발한다. 그걸 느낄 때마다 홍 실장은 새삼 유전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서주혁의 그것은 서태일 회장과 비슷한 종류의 분위기였다.
“기업인들 비리 터지는 거야 하루이틀이 아닌지라 피로해하는 반응도 여럿이었지만, 확실히 천안 공장에서의 노조 폭행 건엔 격분하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청와대 신문고에도 서재형 부사장님을 겨냥한 글들이 여럿 올라왔고요. 회장님께도 보고 올라갔을 겁니다. 그리고-”
홍 실장은 부러 잠시 말을 끊었다. 정말로 서주혁이 집중하길 바라는 말은 다음에 있었다.
“U캐피탈 측에서 상무님 뵙기를 청합니다.”
U캐피탈은 금융계 거물 몇몇이 활동하는 사모펀드사다. 서재형의 축출에 있어 가장 필요한 자본력을 갖춘 곳. 여론은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이었다. 실질, 방아쇠를 누르는 힘의 근원은 돈을 쥔 주주들에 있다. 그러나 서정의 수많은 주주들 중에서도 로열을 좌지우지할 만한 주주는 무척 적었는데, U캐피탈의 대표는 그 소수의 주주 중 하나였다.
주혁은 심상히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었다. 곧 국물을 삼키고 지시한다.
“다음 주쯤 일정 잡으세요.”
그것으로 용건은 끝이었다. 상무의 음식을 씹는 소리만이 공기처럼 부유한다. 홍 실장이 물러서야 할 지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직 그가 여의도의 오피스텔까지 찾아온 이유가 해소되지 않았으므로.
“기분이 어떠십니까?”
상사가 기뻐할 거라 생각하며 온 것이다. 굳이 전화로도 충분히 전할 수 있는 말을, 아침 일찍부터 부산을 떨며 상무의 오피스텔에 들어온 것은, 오랫동안의 숙원을 코앞에 둔 상무의 환희를 보고 싶어서였다.
U캐피탈은 긴 시간 서주혁이 마음을 쓰며 공들인 곳이다. 몇 해 동안 꿈쩍 않고 있던 U캐피탈을 흔들기 위해 그간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는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 그곳은 도리어 서주혁과 서재형의 사이를 간 보듯 굴었다. 그랬던 U캐피탈이 비로소 서주혁 쪽에 추를 올린 것이다. 적어도 홍 실장은 U캐피탈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 가슴에 벅찬 환희가 차올랐다. 오랫동안 같은 목표를 위해 달려왔던 상사 역시 그러리라, 생각하며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온 것이었다.
“오랜 바람이셨잖습니까.”
큰아버지이자 부친인 서재형을 내쫓는 건. 주혁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운다.
“글쎄요. 아직 실감이 안 나서.”
밥을 뜨는 주혁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방금 전의 말은 실감을 기다리거나 기대하는 투가 아니었다. 주혁은 예사로이 말을 이었다.
“그간 고생하셨는데 홍 실장님도 좀 쉬세요.”
“저는-”
“주말이잖아요. 즐겨야지.”
무엇인가 주혁의 잇새에서 아삭이며 씹힌다. 그 소리 사이로 “워커홀릭도 적당해야 매력 있는 거죠.” 무심한 농담이 흘렀다. 남자의 가벼운 농에 홍 실장은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식사를 마쳤는지 주혁이 식탁에서 일어났다. 홍 실장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마침내 마주한 서주혁의 눈은 언제나처럼 가볍고, 건조하며, 아름다운 빛을 낸다.
흡사 사람을 홀리는 탕아의 눈이다.
그 눈이 가늘어지며 감정 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어냈다.
“나도 좀 쉬어야겠고.”
완곡하여 자상하고 무심하여 매정한 축객령이었다. 주혁은 홍 실장을 지나쳤다. 홍 실장의 시선이 자연스레 상무의 뒤를 좇는다. 남향의 테라스를 가로지르는 햇살이 매끄럽게 사내의 등을 비추었다. 그 눈부심이 아름답고도 따가워, 결국 눈을 돌렸다.
* * * * *
서은은 규칙적인 속도로 종이를 뱉어 내는 인쇄기를 응시했다. 인쇄기의 헤드에 손을 올리자 뜨거운 온도와 위잉대는 진동이 전해진다. 서은은 곧 덧없이 손을 내렸다. 모두 공연한 움직임들이다. 토요일 아침 출근에 아직 정신이 멍한 탓이었다.
서은은 인쇄된 종이 뭉치를 들어 테이블에 올렸다. 의자에 앉아 온기가 남은 종이들을 한 장, 한 장 곱게 접어 봉투에 넣는다. 오는 명절 여러 언론사와 포털사의 주요 임원들에게 보낼 편지들이었다.
작성도 서은이 하고, 봉투의 포장도 서은이 하지만, 서은은 한 번도 편지의 대상인 그들을 본 적이 없다. 이 편지와 함께 보내지는 물건이 무엇인지 역시, 서은에겐 기밀이다. 그럼에도 공들여 편지를 쓰고 포장을 하니, 참으로 의미 없이 부지런한 개미의 삶이다.
서은은 자신이 생각해 낸 기막힌 비유에 홀로 웃었다. 서은에겐 무의미한 일일지라도 서정의 높은 곳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직접 하기에 이 기계적인 일은 몹시 지루하고 하찮으니.
이런 일들을 하라고 서은을 고용한 것이겠지, 하는 다소 회의적인 생각도 하였다. 입사한 지 삼 년 가까이 되었으나 팀의 이런 잡일들은 여전히 서은의 몫이었다. 이제는 딱히 불만도 솟지 않았다.
그렇게 한창 봉투를 포장하는데 갑작스레 부장이 등장했다. 그 등장에 서은이 화들짝 놀라 봉투 하나를 떨어뜨렸다. 부장은 짜증스레 물었다.
“서은 씨, 핸드폰 안 봐요? 계속 불렀잖아.”
그는 본인이 직접 이곳까지 걸어와야 한다는 게 무척 성가신 기색이었다. 서은이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지만 부장은 매정히 말을 잘랐다.
“됐고. 어제 회의 보고서 확인 좀 합시다.”
그는 냉기를 풍기며 돌아섰다. 서은도 뒤따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지를 한 아름 안고 서은의 PC가 있는 자리로 향하는데 문득 벽창 너머 보이는 하늘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이유 없이 걸음도 멈추고 잠시 그 세상을 바라본다.
하늘이 새파랗다. 또한, 고요했다.
낮술을 했다. 토요 출근을 서러워하며 함께한 팀원과 낮부터 고기를 굽고 소주를 따 먹었다. 저녁에 데이트가 있다는 팀원과 헤어지고 서은은 홀로 홍은동으로 돌아왔다. 술 냄새를 폴폴 날리며 멜로디가 없는 허밍을 하고 걸었다. 노을이 져 난색으로 물든 동네가 유난히 예뻐 보인 건 술기운이 남아서일 거였다.
해서 처음엔 앞에 보이는 남자도 술기운이 만들어 낸 환영 같은 거라 생각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고 머리가 작고 팔다리가 긴 남자였다. 완벽한 실루엣을 가지셨군요, 하는 감탄도 술기운에서 말미암은 거였다. 그 남자가 서주혁이란 걸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걸 깨닫자 훈훈하던 노을빛이 따갑게 뺨을 쏘는 느낌이었다. 선선하던 저녁놀 바람이 옷 사이를 파고들어 살갗을 후비는 느낌이었다.
서은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남자가 앞서 걸었고 서은이 뒤따라 걸었다. 사는 동네가 같으니 가는 방향이 같았다. 걸음을 빨리해 남자를 제친다면 서은을 알아차릴 거란 생각에 서은은 가만가만 뒤를 따르는 중이었다. 걷는 동안 노을이 지고 푸른빛의 어둠이 사위를 물들였다.
남자의 걸음이 멈추었다. 못 보던 스포츠카의 앞이었다. 신기하게 생긴 차였다. 뜬금없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모양의 차였는데 무엇보다 서은의 시선을 잡아끄는 건 차체의 오묘한 색감이었다. 푸른 감이 섞인 독특한 진회색이 늑대의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감으로 어떤 색들을 섞어야 저런 색이 나올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주혁의 존재를 잠시 잊었다.
모두 술기운 탓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올렸을 때 남자는 서은을 내려 보고 있었다.
아래서 올려 보는 남자의 정제된 눈빛이 낯설도록 권태롭다. 대치하듯 시선이 얽혀 서은은 눈동자의 방향을 틀지도 못하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 움직임을 따라 남자의 머리칼이 살며시 흔들린다.
“밥 한 끼는 곧 죽어도 안 먹을 것처럼 매정히 굴더니.”
잿개비 같던 눈동자에 웃음기가 어리는가 싶었다.
“왜 자꾸 날 따라다니지?”
실제로 남자를 따라다닌 적은 없건만 서은은 가슴이 따끔거린다. 아마도 남자의 짙은 눈빛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서은은 어이가 없다.
나 혼자 잘 살고 있던 동네에 이사를 온 건 그쪽인데요. 라는 말을 못하고,
“......산책 중입니다.”
작게 말하고는,
“술이 덜 깨서.”
변명처럼 덧붙였다.
“주말엔 뭐 해요?”
서은은 거짓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순순히 답하였다.
“아직 딱히 정해진 건 없습니다.”
“그럼 나랑 밥 먹으면 되겠네.”
“싫어요.”
아차. 답이 너무 빨랐다. 게다가 비격식체. 남자가 피식 웃는다.
“왜?”
서은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다이어트 중입니다.”
하하, 이번엔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는다.
“밥이 싫으면 차를 마시든가.”
“차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거짓말. 커피 들고 가는 거 봤는데.”
또 한 번 아차.
“......친하지 않은 사람과 차를 마시는 건 불편해서요.”
회사도 아닌데, 근무 시간도 아닌데. 지겹고 따분한 격식체 따위.
“친해질 기회를 주고 말하면 그 답에 수긍할게요.”
서은의 수런대는 마음과 달리 주혁의 답엔 일말의 막힘도 동요도 없다. 남자의 주위엔 특유의 나른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짙게 깔려 있다. 목소리 또한 그런 남자를 닮아 나직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울림일 것이다.
서은의 걸음걸이가 느려졌다. 남자의 걸음걸이도 서은을 따라 천천히.
손에 힘을 주고, 용기를 내 보았다.
“상무님은 왜 저와 밥을 드시고 싶으세요?”
“심심하니까.”
가볍고 허탈한 답이었다. 남자의 당연한 능청엔 배려가 없다. 남자가 짓궂고 심술맞아 얄미웠다.
“정서은은?”
주혁은 그따위 답을 하고 이제 자격을 갖추었다는 듯 고집스레 물어왔다.
“그러는 정서은 씨는 왜 나랑 밥먹고 차 마시기 싫습니까?”
서은은 다시 벙어리가 되었다. 소리의 여백은 다시 소리로 채워질 것이다. 발에 채어 나뭇잎이 흔들리고 공기가 움직여 바람이 불었다. 곧이 어 서은은 다시 예의를 갖추어 무미건조한 투로 말하였다.
“좋고 싫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상무님과 사적인 용무를 만드는 건-”
“거짓말.”
날 선 얼굴이 서은의 거짓을 비웃는다. 서은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뻣뻣이 했다. 끝내 버티던 해가 사라지고 가로등의 하얀 불이 켜졌다. 그는 피로한지 엄지로 잠시 눈가를 눌렀다. 손을 떼며 다시 서은에게 눈을 맞춰 온다. 어딘가 지치고 무심한 눈빛에 웃음이 엷게 깔렸다.
“넌, 내가 싫지?”
주혁의 그 말 위로 예기치 않게 과거의 한 장면이 겹쳐졌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주혁은 홀로 책상 위에 팔을 괴 엎드려 있었다. 왜인지 서은은 주혁을 깨워야 했는데 깨우기가 꺼려져 옆에 앉아 문제집을 펼쳤다. 한창 문제를 푸는데 자는 줄 알았던 주혁이 불쑥 말을 붙였다.
뭐 해, 였던가. 여전히 엎드린 채로 시선만 서은에게 주면서. 그때 서은은 대강 답을 하고 용건을 말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문제를 푸는데 주혁이 물었다.
‘넌, 내가 싫지?’
돌연 떠오르는 기억에 당황하여 선뜻 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주혁이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이런. 진짠가 보네.”
그저 장난이라는 듯, 농담이라는 듯.
“그래도 나는 가끔 궁금했는데. 정서은이 날 그렇게 싫어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
주혁은 상처받았다는 듯 혹은 받지 않았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서은은 홀리듯,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기이한 인력에 어느 순간 발을 멈추었다. 주혁도 서은을 따라 걸음을 멈추고 서은을 내려 본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머리칼 아래, 남자의 명도 높은 눈동자가 위험한 빛을 띠웠다. 기묘할 만큼 밝은 눈동자가 강렬하게 시공간을 장악한다. 여전히 가벼운 얼굴과 말이건만, 묘하게도 눈빛만은 깊고 진해서, 서은은 맞춰야 할 장단을 잃고 해야 할 말과 행동을 잊어버렸다.
그 틈을 비집고 남자의 말이 들어찬다.
“싫어해도 가끔 이렇게 놀아나 줘.”
“…….”
“어려울 것 없이 넌 계속 하던 대로하면 되고.”
“난 늘 거절당하면 되고.”
남자의 눈빛에 언제나처럼 가벼운 웃음이 번졌다.
이토록 당당한 실연의 예고라니.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을 하는 남자지만 얄밉게도 그 모습이 얄밉지 않았다. 얄밉지 않아 더 얄미웠다. 남자는 다정하지만 거만하고 상냥하지만 차갑다.
서은은 억울해졌다.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지그시 서은을 향하는 시선이 묵직한 공이 되어 가슴을 짓누르지만, 이겨 내고, 말을 이었다.
“싫어한 적 없습니다.”
“그럼?”
“무서우니까요.”
“…….”
“......저는 상무님이 무섭습니다.”
주혁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지워진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내가, 무섭습니까?”
“네.”
서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하였다. 불빛에 반사된 눈망울이 젖어 있는 것도 같다. 가방끈을 쥔 여자의 두 손이 힘겨워 보인다.
내가 어디가 그렇게.
날카롭게 되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짧은 순간 새 나온 숨 덩이는 방향을 잃고 어지러이 흩어졌다.
그런 그를 두고 서은이 돌아섰다. 그러나 주혁은 움직이지 못하였다. 무서우니까요, 사라진 음성이 주혁의 발을 휘감고, 여자가 사라진 공간엔 낮고 기이한 웃음이 차오른다. 느닷없이 때늦은 웃음을 터뜨리며 주혁은 여자의 뒤태를 응시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바람이 심술궂게 마음을 건드리고 여자는 부재로서 존재를 선명히 드러내니.
유쾌와 불쾌가 뒤엉키어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