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전망 하나는 기가 막히죠. 언덕길이라 조금 불편하긴 한데, 차 있으시죠? 그럼 걱정 없으실 테고, 덕분에 전망은 끝내준답니다. 뒤에 백련산이 있어서 공기도 맑고 운동하기도 좋고. 요즘은 미세 먼지다 뭐다, 환경이 안 좋아서 공기 질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서울에서 이렇게 공기 좋은 곳도 드물 거예요. 저기 앞마당은 텃밭으로도 활용 가능하고요. 전 세입자는 상추며 고추며 호박이며, 뭐든 주렁주렁.......”
주혁은 말하기 좋아하는 중개인을 뒤로하고 계단을 올라 테라스에 나가 보았다. 중개인이 자랑하는 전망은 그저 그랬다. 낡은 빌라들과 특별할 것 없는 골목길, 아무렇게나 주차된 차들이 만드는 무질서한 풍경은 그저 평범했다.
여름의 초입임에도 백련산을 뒤로해서인지 벌레 소리는 우렁우렁하고, 골목이 좁아 교통은 불편하니, 필시 팔기 쉬운 집은 아닐 거였다. 중개인이 제시한 가격이라면 강남 한복판 아파트는 안 돼도 서울 교통 좋은 목에 이 정도 연식 된 아파트는 살 만할 테니. 그럼에도 가격을 낮출 수 없는 건 리모델링한 인테리어와 이 정도 넓은 평수가 아까워서일 거였다.
이어 중개인도 주혁을 따라 테라스에 들어왔다. 중개인이 또 무어라 떠들려는 찰나, 학교 종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아, 저기 고등학교가 하나 있어요. 이제 애들 하교 시작하겠네. 아직 미혼이시니 상관은 없겠지만, 이 동네가 학군도 나름 괜찮아요. 저 고등학교가 옆 동네 부촌이랑 학군이 겹쳐서 부잣집 애들도 몇몇 있답디다.”
멀리 운동장과 교문이 작게 보였다. 그리고 하나둘 건물을 나오는 고등학생들도. 잘은 보이지 않지만 익숙한 교복이 눈에 띄었다.
주혁이 저 학교를 다녔던 게 벌써 십 년도 더 된 일이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무어라 웃고 떠들며 골목길 사이사이를 지나다닌다. 방랑하던 주혁의 시선이 멈춘 건 어느 여학생에게서였다. 책을 손에 들고 고개를 묻다시피 숙인 채 홀로 걷는 여학생.
“집주인이 가격을 좀 낮출 생각도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제가 어떻게 말 좀 잘해 보면 지금 가격보다 일이 천 정도는 더 낮출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별로 말이 없는 주혁의 태도가 불안하였는지 중개인이 아까 전의 기세 좋은 목소리보다 조금 뭉개진 투로 말을 붙였다.
시끄럽다, 생각하며 주혁은 그가 원하는 답을 해 주었다.
“계약하겠습니다.”
“네, 네?”
“계약 가능한 날짜와 시간, 알려주세요.”
중개인의 입이 귀에 걸리는 모습을 담담히 바라보며 주혁은 집을 나왔다. 녹이 슨 철문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여닫힌다. 사실 이 집의 대문을 볼 때까지만 해도 계약할 마음 같은 건 없었다. 애초, 이 동네에 집을 보러 온 것 자체가 순간적인 충동이었으니까.
시작은 지겨움이었다. 사내 술꾼으로 알아주는 구조조정본부장과 회식을 한 새벽, 그는 쉽사리 잠들지 못하였다. 결국 아예 밤을 새 버리자, 작정하고 부엌에 들어가 물을 들이켰다. 그렇게 식탁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다 문득 어스름히 보이는 모든 것들이 지겨워지고, 그다음엔 그가 그곳에서 산 시간들을 헤아리다가 이사를 가야겠다, 생각했다. 이사를 간다면 어디로, 자문했을 때 불현 듯 떠오른 동네가 이곳, 홍은동이었다.
대문을 나오자 중개인이 볼멘소리를 한다.
아니, 누가 이 앞에 차를 대 놨어.
문 앞에 어울리지 않는 값비싼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다. 중개인은 희한하다는 생각을 하며 슬쩍 주혁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 이 동네가 이렇게 경우 없이 막 차 대 놓고 하는 동네가 아닌데, 하며 말을 흐리는데 그 차에서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오고 주혁에게 묵례를 한다. 어라라. 중개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계약하기로 하셨습니까?”
“네.”
“그럼 제가.......”
“아뇨. 홍 실장님은 별로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그래도-”
“사장님, 여기서 주는 명함은 받지 마시고 여기로 연락 주세요.”
주혁이 퍽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연락처를 건넸다. 옆에 홍 실장이라는 사람이 가슴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려다 아쉽게 집어넣는다. 중개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혁의 명함을 받았다. 곧 주혁이 묵례를 하고 차에 오른다. 홍 실장이라는 사람도 주혁을 따라 중개인에게 묵례를 했을 때, 중개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중개인은 저들의 세련된 차가 낡은 길을 빠져나가는 광경을 아연히 바라보다가 뒤늦게 명함을 확인했다.
꼴깍, 침을 삼켰다.
* * * * *
출근 없고 야근 없는 아름다운 주말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서은은 세탁기에 이불을 넣고 돌렸다. 이제 좀 있으면 더워질 테니 얇은 이불을 꺼낼 요량이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때늦은 아침을 먹고 베란다에서 선풍기를 꺼내 와 먼지를 닦았다. 이불을 널고 청소를 하고, 그러다 유월의 햇살이 나른하여 다시 또 낮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땐 오후 네 시였다. 정서은 너 정말 잉여롭구나,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백련산 산책 길이라도 한 바퀴 돌려다가, 덥고 귀찮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발을 돌렸다. 그러다 결국 도착한 곳이 홍은슈퍼였다.
이 동네의 거의 모든 것들이 다 오래되었지만 그중에서 제일 오래된 게 아마 이 슈퍼와 주인 부부일 것이다. 서은의 식구들이 이곳에 터를 잡기 전부터 있었던 홍은슈퍼.
아저씨, 아줌마였던 주인 부부는 어느덧 할아버지, 할머니라 불리어도 무색하지 않을 나이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이사를 가고 오기를 반복하는 중에도 이곳 홍은슈퍼만은 꿋꿋하게 자리를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홍은슈퍼의 주인 부부는 이 동네에서 거의 유일하게 서은과 인사를 주고받는 이웃이기도 했다.
서은이 슈퍼에 들어서자 주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랜만이네. 한 동안 안 보이더니. 느리게 움직이는 입술을 보며 서은은 멋쩍게 웃었다.
바빴어요, 대충 대꾸하고는 가판대에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를 까먹었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에 산 지 몇 년째더라. 초등학생 무렵부터였으니, 십 년이 훨씬 더 넘었네. 전세와 월세를 전전하다가 처음 ‘우리 집’을 갖게 되었을 때. 아빠는 소년 같은 얼굴로 뿌듯이 웃으며 ‘여기가 앞으로 서은이 집이야.’ 말하였다.
생각을 하다 서은은 허허로이 웃는다. 지금은 그 집도 팔고 근처의 빌라에 다시 세를 얻었다.
조금 덥기는 했어도 게으르게 흐르는 시간과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좋았다. 서은은 아이스크림 입구를 물어 쪽 빨았다.
길바닥 위로 아물아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고, 돌담에 몸을 기대어 잠든 고양이 한 마리를 보다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 갈 즘 서은의 시선이 머문 곳은 오르막길에 있는 주택이었다. 서은의 빌라와는 열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는.
그 집의 테라스 창문에 못 보던 커튼이 펄럭였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참외 한 봉지를 사며 물었다.
“저 집, 팔렸어요?”
“응. 꽤 오래 비워져 있다 싶더니 드디어 팔렸나 봐. 소문으론 저 집 산사람, 부자라대. 근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저기 첨 가구 들였을 때가 벌써 한 달도 더 전이야. 그 뒤로 두어 번 트럭도 왔다 갔다 했는데. 근데 사람이 안 보여. 저 집이 돈 장난하기 좋은 집도 아니고, 안 살 거면 집은 왜 샀나 몰라.”
돈이 많아서 돈지랄하는 갑지. 플라스틱 의자에 파리채를 들고 앉아있던 주인아저씨가 하는 말이었다. 입이 커서 항상 과장되게 말하는 아저씨였다. 아저씨의 구수한 말투를 상상하며 서은은 살풋 웃음을 지었다.
참외 봉지를 달랑대며 집으로 향했다. 집의 대문 앞에 다다랐을 때 간장을 사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망설이 다가 이 내 슈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자를 보았다.
조금 전의 서은처럼 가판대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물고 핸드폰을 보는 남자를.
발을 멈추었다.
남자가 고개를 일으켜 눈이 마주치려던 찰나, 서은은 조용히 몸을 돌리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홍은슈퍼 주인아줌마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 남자가 언덕 위 집의 주인이라 했다. 하지만 진짜 집은 따로 있고, 홍은동은 어쩌다 가끔씩 들르는 집이라고. 그렇게 자주도 아니고, 남편 말대로 돈 많은 놈이 돈지랄이 라도 하는가 보다고.
다행이었다.
* * * * *
작은 일탈이었다. 모처럼 일정이 비어 있는 토요일에 차를 끌고 홍은동으로 간 건, 다분히 충동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야근을 했는데 눈을 뜨니 오전 열 시였고 출출한데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놨던 쪽지를 발견한 것 역시 우연이었다. ‘홍은동 음식, 가구 모든 준비 다 되었습니다.’ 하는. 신경 쓰지 말라 했는데 기어코.
홍은동에 집을 사 놓고도 일이 바쁘고 거리가 멀어서 자주 찾지 못한 터였다. 여전히 그가 몸을 누이는 집은 여의도의 오피스텔이었다. 그래도 집이랍시고 샀는데 한번은 가 봐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였다.
그가 없는 동안 틈틈이 홍 실장이 사람을 보내 놓았는지 집은 제법 사람 사는 집 같았다. 냉장고엔 가지각색의 반찬이 들어가 있고 테라스엔 커튼을 달아 놓고 가구에는 먼지 같은 것 없이 깔끔하게.
쓸데없는 일을 했네,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중개인이 자랑했던 백련산이라도 올라 볼까 하였다.
하지만 곧 오후에 애널리스트와 약속이 잡혀 있다는 걸 떠올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홍은동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애초에 이곳에 집을 사는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발길을 돌리다 슈퍼 하나를 보았다. 이 더위에 맥주 한 캔이 간절했지만 운전을 해야 하니 안 되고, 대신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잠시 파라솔 아래 가판대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며 메일을 확인했다.
첨부된 기사와 그래프를 확인하고 짧게 답장을 보내고,
그러다
여자를 보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 이리로 오고 있는 듯했는데, 어느 순간 몸을 돌리고 빠르게 어디론가 가 버리는 여자를.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여자의 긴 머리와 등과 뒷모습이 익숙하였다.
누구지.
기억을 제대로 더듬기도 전에 여자는 멀리 점이 되어 사라졌다.
1. 홍은동
이상한 일이다. 이 동네에서 저 여자의 뒷모습을 보는 게, 이번이 세 번째였다. 자주 오는 동네도 아니었다. 첫 번짼 홍은슈퍼에서였고, 두 번째는 한 달 전쯤. 주혁은 차 안에 있었고, 여자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온전히 얼굴을 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류장의 광고판을 바라보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을 뿐. 그러다 신호등이 바뀌고 주혁은 무심히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오늘이 세 번째였다.
여전히 보이는 건 여자의 뒷모습뿐이지만 그 뒤태만으로도 지난번의 그 여자라는 걸 알았다. 어째서 뒤태만으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저 뒷모습을 보면 또 ‘그 여자네.’ 하는 감상이 불쑥 솟는다. 뒤이어 ‘이번에도 뒷모습이고.’ 하는 생각이 유유히 스쳐 갔다.
소낙비가 내리는 날, 동네의 작고 오래된 면옥집이었다. 메뉴라고는 냉면과 칼국수밖에 없었는데 나름 동네 사람들에게 소문난 곳인지 식당 안이 제법 붐볐다.
오른편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평상에 좌식 테이블들이 모여 있고, 왼편엔 2인용 식탁들이 교실 안의 책상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리고 주혁의 사선 방향의 앞자리가 바로 여자의 자리였다.
어수선한 소란과 진동하는 비 냄새 속에서 여자의 뒤태가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건 묘한 일이었다.
여자의 하얀 손목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어느 순간 긴 머리가 방해되었는지 손목의 머리끈을 빼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린다. 다시 젓가락을 든 여자는 슬쩍슬쩍 고개를 움직이며 면을 삼켰다.
주혁은 찰나 푸른 안광을 띤 눈을 내리고 눈길을 틀었다. 유리창 밖 빗소리가 유난하다. 한낮, 후덥고 질척이는 공기는 불쾌했다.
그저 무료해서일 것이다. 피로가 몰려 헛생각에 빠지는 탓이고, 이 지루한 동네에 마땅히 신경 둘 곳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갈무리하지만 건조한 시선이 결국 멈추는 곳은 역시나 여자였다.
그의 눈빛에 무심한 자조가 스쳤다.
별수 있나.
본능이 이끄시는데, 따라 주어야겠지.
분명 흔한 일은 아니었다. 여자의 뒤태가 이토록 그의 신경을 잡아끄는 일도, 그의 가슴이 기이한 긴장으로 매섭게 박동하는 일도. 해서 말이나 걸어 볼까 하였다. 이것도 인연인데, 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뻔한 말로 번호를 묻고 가지고, 뒷모습이 아닌 앞모습을 보면서.
주혁은 우스운 생각을 하며 들이마시듯 면을 삼켰다. 뒷모습만 보고 그 여자라 확신하는 허점 많은 생각도 우스웠다.
그릇의 바닥이 보일 즘이었다. 여자가 그의 옆을 스쳐 간 것은. 그때 주혁은 핸드폰으로 U캐피탈 대표에게 문자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는 곧 어떤 결심을 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저 여자의 앞모습을 봐야겠다, 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한다. 주혁이 계산을 하는 동안 여자는 자판기 옆의 바구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먹고 우산 통에 다가갔다. 그때 단체로 들어왔던 손님들이 일시에 빠져나가며 주혁의 몸이 앞으로 밀렸다.
소란에 여자도 고개를 돌리고, 처음으로 여자의 옆모습이 보였다. 사탕을 물어 볼이 불룩했다. 이마에서 시작되는 선이 부드럽고, 머리를 넘기는 손가락이 길고, 순간순간 드러나는 목덜미는 투명하다. 무엇 하나 진한 데 없는 파스텔 톤의 여자였다. 그럼에도 여자는 선명히 존재를 드러낸다.
그 모순이 의아해 주혁은 무신경한 낯을 하면서도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이쿠,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여자를 밀친 중년 남성의 사과였고 여자의 말이었다. 낮지도 높지도 않아 억양이 없는 목소리. 여자가 다시 고개를 돌린다.
아쉬웠다.
여자는 우산 통에서 하늘색의 접이식 우산을 꺼냈다. 주혁의 것과 똑같은 색깔의 우산이었다. 주혁도 우산 통에서 우산을 꺼냈다. 여자의 것처럼 하늘색 우산인데, 다만 주혁의 것엔 손잡이 부분에 리본 비슷한 모양의 천 조각이 달려 있었다.
어라.
그런데 주혁이 집은 것엔 천 조각이 없다. 다시 여자를 보았다. 여자의 손에 잡힌 우산 손잡이에는 천 조각이 달려 있다. 주혁의 것이다.
잘됐네.
희미하게 웃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주혁이 여자를 불렀다.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앞을 보여 주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는 듯했다. 다시 여자의 어깨를 가벼이 두드렸다. 마침내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비갠 후의 습기가 더럭 가슴을 적신다면 그런 느낌일까.
너무 가까웠는지 여자의 신발이 주혁의 구두를 밟았다. 여자가 짧은 탄성을 뱉으며 서둘러 발을 뗐다.
“죄송해요.”
요란 속에서 여자의 음성이 점점 뚜렷해지는 것 역시 기이한 일이었다.
여자를 부른 건 주혁이었는데, 정작 주혁은 이유 없이 말문이 막혀 잠시 말을 하지 못하였다.
묘한 전율이, 긴장이, 감각이, 빠르게 그의 몸을 휘감는다.
주혁이 말을 않자 여자가 의아하게 묻는다.
“......괜찮으세요?”
“......우산.”
“네?”
“그거, 내 거라서요.”
여자가 우산을 내려 본다. 주혁이 쥔 우산과 자신의 것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다른 점을 발견했는지 눈으로 멋쩍게 호선을 그렸다. 이어 “죄송합니다.” 정중히 말하며 우산을 건넨다. 여자는 주혁에게 우산을 건넸음에도 내민 손을 빼지 않았다. 자신의 우산을 돌려 달란 뜻이다.
그러나 주혁은 무시하고 여자를 응시했다.
뭘까, 이 느낌은.
어느 순간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가시고, 여자도 의아하게 조금은 덤덤하게 주혁을 보았다.
주혁은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곧이어 가물거렸던 인상이 완벽하게 짜 맞추어지고, 마침내 여자의 이름을 떠올린다.
아아, 그래.
그러니까, 정서은.
어느덧 비가 그쳤다. 빗물이 말라붙은 유리창으로 빛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길을 막지 말라는 주인의 말에 둘은 가게 밖으로 나온 터였다. 빛을 등지고 서은이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제 우산.......”
“오랜만이네.”
손을 뻗던 서은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묻는 시선으로 그를 본다. 그 시선마저 익숙하다. 주혁은 시간을 세어 봤다. 그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였으니 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러나 물끄러미 주혁을 향한 여자의 표정은 여전히 덤덤했다.
“기억 안 나는 건가?”
여자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래도 몇 초간 여자는 말이 없었는데, 왜인지 주혁에게 그 수 초는 수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아뇨, 알고 있습니다. 서주혁 상무님.”
의아한 눈빛과 모순되는 순종적인 말투였다. 서주혁 상무, 그 직함을 여자의 입에서 들을 줄은 몰랐는데. 이번엔 주혁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한다. 눈치 빠른 여자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서정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서정? 전자?”
“네.”
"어느 부서?”
“......홍보2팀입니다.”
서은의 말투가 퍽 사무적이다. 방금 전의 순한 미소는 사라지고, 목소리와 얼굴에 겹겹으로 낯선 무언가가 덧칠된다. 서은은 주혁이 기억했던 것과 다르게 낯선 분위기를 풍겼다. 어릴 적엔 좀 더 친근하고 밝은 이미지의 소녀였는데 성인이 된 서은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시선을 틀어도 여운을 남겨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서은은 그의 후배이자 동급생이면서 고용인의 딸이었다. 서은의 아버지는 주혁의 집에서 갖가지 일을 돕는 고용인이었다. 기계를 수리하기도 했고, 물건을 나르기도 했고, 정원을 정리하기도 했고, 운전을 하기도 했다. 이름이, 아마 윤철이었을 거다. 정윤철.
주혁은 윤철의 차를 타고 등하교를 하였는데 그럴 때면 그 옆자리에 서은이 앉아 있었다. 윤철의 딸, 서은과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 탓이었다. 주혁이 초등학교를 일 년 늦게 들어가고 또 고등학교를 일 년 휴학 후 복학한 덕에 서은은 그의 후배이자 같은 반 동급생이기도 했다.
그 고등학교를 다닌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주혁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따지자면 불편했다. 시은이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가끔은 싫어한다 생각이 들 만큼. 부모들이 고용인과 고용주의 사이어서인가 보다고 짐작은 했지만, 무슨 이유든 미움을 받는 건 싫었다. 그래서 그도 서은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나이 차가 있어도 동급생이므로 다른 아이들은 모두 그에게 말을 놓았다. 처음엔 선배,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형, 오빠가 되어 있었고.
그런데 서은만이 그에게 꼬박 존대를 하고 선배님, 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이상한 여자애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면 그래서 더 눈길을 끌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싫은가. 내 어디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미국으로의 유학이 결정되고 마지막 등교일이었다. 주혁이 사물함 속 물품 정리를 하고 학급 임원이었던 서은이 담임의 지시로 주혁을 돕고 있을 때에, 불쑥 주혁은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왜인지 서은을 두고 아직 떠나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서은을 붙잡고 말했다.
너, 핸드폰 번호 좀 알려줘.
......저 핸드폰 없는데요?
왜 난 이제껏 이 애 핸드폰 없는 것도 몰랐나. 스스로에게 드는 한심함을 감추고 다시 뻔뻔하게 요구했다.
그럼 이메일 주소.
왜요?
가서 편지하게.
......왜요?
심심할 것 같으니까.
말하며 주혁은 그의 입을 한 대치고 싶었던 기억이 있다. 어리고 미숙했던 시절이다.
서은이 거절할 거라 생각했다. 반쯤은 거절할 걸 알면서 물은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은이 공책에서 종이를 찢어 메일 주소를 적어 주었다.
건네는 서은의 얼굴이 미묘하게 달싹였다. 다른 아이들에겐 상냥하고 친절해도 그에게만큼은 무뚝뚝하고 무덤덤한 여자애였는데 그때 서은의 얼굴은 묘하게 어딘가 울 것도 같았고, 무언갈 참는 것도 같았고,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다 만 것 같기도 했다.
종이를 받으며 주혁이 물었다.
왜?
그가 달라고 했으면서, 왜를 묻다니. 스스로 묻고도 어이가 없었다. 서은은 한참간 답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멀리서 누군가 주혁을 부르고, 주혁이 고개를 돌렸을 때.
나도 심심할 것 같아서.
서은이 말하였다.
미국에서 틈틈이 서은에게 메일을 보냈다. 답장은 하루 내지 이틀이면 돌아왔다. 한국에 있을 땐 나누지 않았던 대화를 미국에 가서야 나누었다. 별다른 내용은 아니었다. 오늘 우리 급식은 이거였는데 그쪽 네 급식은 맛있는지. 영어는 많이 늘었는지, 친구는 생겼는지. 새 학년의 새담임은 어떠한지, 서울과 캘리포니아는 어떠한지. 각자의 풍경이 담긴 사진을 주고받기도 했다.
어느 순간 서로의 일상이 바빠지고, 메일을 보내고 받는 기간이 길어졌다. 각자 대입 준비가 한창이었을 때라 서로 이해해 주었다. 주혁의 대학이 먼저 결정되었고, 그다음으로 서은의 학교가 결정되었다. 서로 축하를 했다. 맥주잔과 소주잔 사진을 보내며 메일 속에서 짠, 건배도 했다.
서울에서 만나면 서은이 밥을 사고 주혁이 술을 사기로 약속도 하였다.
그리고 그즈음이었다. 주혁이 메일을 보내자 없는 주소라고 반송되었다.
나쁜 계집애. 매정한 계집애.
말 한마디 없이, 이렇게.
다시,
흐르는 시간과 분주한 일상 속에서 그는 서은을 잊었다.
그 정도의 인연이었다. 얕지는 않고, 깊지도 않은.
그렇게 잊히고, 앞으로 잊는다 해도 별로 아쉬울 게 없는.
“저 이제 가 봐야…….”
“매정하시네.”
여전히.
서은은 돌렸던 몸을 다시 주혁에게로 틀었다. 그래도 동창인데. 남자가 낮게 읊조리는가 싶었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습관처럼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가 익숙했다.
“반가워서 인사나 좀 하려 했더니 바로 내빼시고..”
무색하다는 듯 말하지만 여유가 흐르는 눈빛이 연기임을 알려 준다.
이어 다정한 눈이 도발하듯 꽂혀 왔다.
“나는 네가 반가운데, 너는 반갑지 않은가 봐?”
남자의 밝은 눈동자가 나뭇잎 사이의 빛살을 튕겨 낸다. 튕겨진 빛살이 따갑게 가슴을 치는가. 서은은 우산을 쥔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여전히 당당하고 솔직하구나, 싶었다. 여전히 키가 크고 잘생겼고. 오만한 듯 우아하고. 유려한 듯 나른하고. 서은의 관찰하듯 살피는 시선에 기분 나빠할 법도 한데 남자는 외려 보란 듯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비에 젖어 싱그러운 풀 냄새가 바람과 함께 코끝에 스몄다. 소낙비가 내려 더위가 누그러지고, 내리는 태양빛은 투명하고 찬란했다. 그 향과 태양이 남자를 닮았다.
“......그럴 리가요.”
말하며 서은은 선선히 웃었다. 순한 듯 서늘한 웃음이 주혁의 가슴에 고요한 파랑을 일으키다 가라앉는다.
“여기서 잘 보이면 상무님 라인타는 건데, 반갑지 않을 리가. 곧 퇴사할 예정이라 아쉬울 뿐입니다.”
서은은 담담한 어조로 농담인 듯 아닌 듯, 조금 속물적이고 조금 당돌하게 말하였다. 주혁은 서은의 말에 감추어진 속뜻을 짐작한다. 퇴사하면 곧 너와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게 될 테니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어때, 하고 선을 긋는.
서은의 의도된 속물과 숨겨진 의도에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묘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가벼이 웃었다.
“많이 컸네.”
“......딱 상무님 나이 드신 만큼만 컸습니다.”
“아직 나이 드실 정도의 나이는 아닌데.”
“저도 많이 컸다는 말 들을 정도의 나이는 지나서요.”
“이런, 내가 잘못했네.”
주혁의 능청에 서은이 잔잔한 웃음을 흘렸다. 줄곧 여자를 감쌌던 기묘한 공기의 울타리가 깨지는 듯했다. 주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미팅까진 넉넉하다. 그렇게 손목을 들고 내리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오늘 이렇게 뵈어서 반가웠고,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서은이 홀로 인사를 마치고 등을 보인다. 그 약빠른 동작을, 주혁은 낮게 조소했다.
“데려다줄게.”
서은이 몸을 돌린다. 무슨 뜻이냐는 얼굴이다.
“데려다준다고. 방향이 어디야?”
“아뇨, 괜찮습니다. 약속이 있어서요.”
“그럼 거기까지.”
“그러실 필요는, 바로 앞에서 만나기로 해서.......”
“그럼 그 바로 앞까지 배웅해 줄게, 라고 말하면 넌 또 다른 핑계를 대겠지.”
단번에 속내를 읽혔지만 서은은 부정도 않고 죄송합니다, 고개를 기울였다. 다시 얼굴엔 겹겹의 가면이 씌워진 채로.
“상무님과 사적인 용무를 만드는 건 부담스러워서요.”
스스로도 조금 안타깝다는 듯 짓는 서은의 표정은 정중을 가장한 거짓처럼 느껴졌다. 그 거짓이 불쾌함과 동시에 그를 자극했다.
문득 시선을 내렸다. 서은의 두손이 우산을 공손히 쥐고 있다. 마디마디가 불룩한 것이, 두 손에 힘을 준듯했다.
다시 여자의 손등과 손목을 타고 천천히 시선을 올린다. 어쩌면 그를 보는 것이 여자에겐 무료한 일상의 일부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사내 통신을 통해 그를 곱씹고 홍보자료를 만들며 그의 얼굴을 되새길 거였다.
그런 상사를 이곳에서 이렇게 만난다 하여도 하등 놀랄 것이 없겠지. 그를 앞에 두고 속을 감추느라 애쓰는 게 마뜩찮았지만 여타 직원들과 다를 것 없이 하늘 높은 상사를 앞에 둔 부하의 고충이라 치부할 수 있었다.
흥미 없어 보이는 여자를 앞에 두고 홀로 흥을 내며 광대놀음 하는 데에 열을 내고 싶진 않다.
성가시고, 무의미한 일.
그래.
서은이 안개 같은 미소를 짓지 않았더라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지루한 합쇼체를 쓰지 않았더라면, 홍은동에서 서은을 세 번이나 만나지 않았더라면. 하다못해 서은이 그의 것과 같은 색의 우산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는 서은을 그대로 보냈을 거였다.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그러지 않은 서은의 잘못이었다.
주혁은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언젠가의 서러움을 끄집어냈다.
"메일주소 바뀌었던데.”
“......네?”
“그것도 모르고 난 계속 기다렸거든.”
“죄송합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진부한 핑계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혁은 빙긋 웃었다. 웃고 있지만 묘하게도 겉으로 드러나 읽히는 감정은 없다.
“밥 사기로 했던 것도 기억 안 나요?”
그는 서은을 따라 말에 예의를 갖춰 보았다. 서은이 이런 깍듯한 예의를 원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맞추어 줄 수 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서요.”
약속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말이다. 말을 마치고 서은은 눈으로 더 하실 말씀 없나요,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없으면 이만 가도 될까요, 하는 얼굴이다.
여전히 어림없는 일이었다.
"메일은 씹고, 오랜만의 인사는 모르는 척 연기하고, 내 우산을 가져가고, 내 신발도 밟고, 전에 했던 약속은 기억이 안 난다라.”
“......죄송합니다.”
“그뿐?”
“......고등학교 졸업할 즘 메일을 해킹당해서 주소를 없앴어요. 알고도 모르는 척한 건 아니고, 혹시나 했지만 확신이 안 들었습니다. 우산과 신발은, 제 불찰입니다. 우산은 돌려드렸고 신발은 수선비를 드리는 게 당연한데 수선비를 필요로 하진 않으실 것 같아서요.”
“뭐든 성의를 보이는 게 중요한거죠.”
“......수선비를 드리겠습니다.”
“돈은 필요 없고.”
서은의 이마에 주름이 잡힌다. 주혁을 올려 보는 서은의 얼굴이 아주 오래전 ‘왜요?’ 할 때의 그 얼굴과 닮아 있다.
“그럼, 뭘 원하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끝까지 저 깍듯한 경어체라니. 주혁의 안에서 불쑥 충동이 일었다.
“일단은.”
서은의 지루한 합쇼체를 깨뜨리고 싶다. 서은의 한숨 같은 미소를 흩트리고 싶다. 서은의 가면 같은 얼굴을 벗겨 내고 싶다.
“번호나 줄래요?”
주혁이 얼굴에 천연한 미소를 띠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