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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129)화 (130/133)

129화

멜라니의 눈치가 보여 거절해야 하는데, 답이 궁금한 모양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겠지. 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자면 얼마나 힘들겠어.

“안 궁금하면 됐고.”

“구…… 궁금해요!”

“맨입으로?”

“제발, 제 무례를 사과드릴 테니 알려 주세요. 부탁드려요.”

나는 종이를 꺼내 위치를 메모한 다음 소피아에게 건넸다.

“여기로 가면 작은 무덤이 있을 거야. 한 달에 한 번 무덤 앞에 음식을 가져다 둬. 딱 1인분이면 돼.”

“감사합니다……!”

쪽지를 받아 든 소피아가 다시 멜라니의 눈치를 보더니 슬쩍 내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좋아, 한 명은 넘어왔네. 그럼 다음 타깃은 누구로 한다.

나는 새로 따른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소녀들이 긴장 어린 표정으로 몸을 움찔 떨었다.

‘아니, 무슨 사람을 귀신 보듯 그렇게 쳐다본담?’

그러던 중에 딱 알맞은 타깃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머리를 길게 기른 차가운 인상의 소녀였다. 나는 두 번째 타깃에게 말을 걸었다.

“음, 너는…… 로즈 양?”

“왜 그러시죠?”

로즈가 눈에 힘을 주고 딱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로즈 양도 고민이 있구나.”

“왕녀님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게는 고민이랄 것이 없답니다.”

“정말? 데니스냐 빈센트냐 고민하고 있지 않아?”

로즈의 얼굴이 한순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이런. 약혼자 데니스와 최근에 알게 된 남자 빈센트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단 사실은 비밀이었던 모양이다.

“어, 어, 어떻게 그걸……. 왕녀님, 설마 제 뒷조사를 하신 건가요?”

“에이, 그럴 리가. 내가 뭐 하러 로즈 양의 뒷조사를 하겠어?”

그냥 수천 시간 동안 <마.왕.꾸>를 플레이한 기억과 상태창을 활용했을 따름이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빈센트의 집이 최근에 압류당했다지?”

“……!”

“잘 생각해 봐. 최근에 빈센트가 유독 돈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예를 들어, 상회에 투자하라든가, 보석 광산을 사라든가…….”

“그, 그 망할 자식……!”

덜컹!

집히는 곳이 있는지, 로즈가 입술을 짓씹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곧바로 티 파티 장소에서 빠져나가려는 로즈를 붙잡았다.

“진정해, 로즈 양.”

“놔주세요. 왕녀님의 말씀이 사실인지 당장 확인해 봐야겠어요!”

“어차피 빈센트는 지금 집에 없을걸? 새벽까지 도박장에 있었을 테니까.”

“……!”

파삭!

로즈의 손에서 부채가 부러졌다.

나는 계속해서 티 파티 참석자들의 고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마.왕.꾸>의 지식이나 상태창이 있다 한들 모든 참석자들의 고민을 알 수는 없었다. 마땅한 정보가 없는 경우에는, 적당히 돈을 벌기 좋은 투자 정보를 조금씩 흘렸다.

“왕녀님, 감사합니다……!”

“흑, 그 자식, 죽여 버릴 거예요!”

그냥 티 파티의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 시작한 거지만, 이거…….

‘솔직히 재밌는데?’

SSS급 흑막 왕국을 만들고 목표를 모두 달성해 흑막 왕녀를 그만두게 되면 상담소를 차리고 싶을 정도였다. 열중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대부분의 소녀가 내 편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내게 적개심을 비치는 사람은 단 한 명만 남았다. 나는 소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생긋 웃으며 그 한 명을 보았다.

“표정이 어두워 보이네, 멜라니 양.”

“……흐, 흥. 잡기로 저를 회유하려 하셔도 소용없어요.”

멜라니의 사나운 눈빛이 나를 향했다.

“그래? 그럼 멜라니에게는 다른 걸 알려 줘야지.”

덜커덩!

나는 일부러 의자 소리를 크게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멜라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주위의 시선이 쏠리고, 멜라니가 흠칫 놀랐다.

다른 사람에게는 대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나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멜라니, 네 출생 서류.”

“……!”

“마구간의 말구유 아래, 비밀 바닥을 열어야 해. 그 안에 네 출생 서류 원본이 있어.”

탁!

멜라니가 내 손을 붙잡았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그 손을 떼어 낸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뭘, 얼마나 알고 계시는 거죠.”

“요즘 날씨가 건조해서 그런가? 불이 잘 난대.”

“……네?”

핏발이 선 눈이 나를 노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손에 턱을 괴고 생긋 웃었다.

“건초 더미에 불이 붙으면 작은 마구간 하나쯤은 금방 다 타더라고.”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 줬는데 아직도 못 알아듣다니. 어쩔 수 없나. 미래의 흑막 왕녀인 내가 관대하게 이해해야겠지.

나는 손가방에서 작은 성냥갑 하나를 꺼내 멜라니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 줄게. 최근에 데네브 왕국 축제 기념으로 만든 기념품 성냥이야.”

“…….”

멜라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 멜라니는 능력을 인정받아 알레사 백작의 양자가 되었다.

이렇게만 말하면 훈훈한 미담 같지만, 실제로 백작과 멜라니의 관계는 훈훈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멜라니는 자신의 출생을 치부로 여기고 감추고 싶어 한다.

알레사 백작은 멜라니의 바로 이 점을 이용한다. 출생 서류의 원본을 숨겨 두고 멜라니에게 여러 지저분한 일을 시킨다. 멜라니는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벗어날 수 없으며, 백작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녀가 치부로 생각하는 출생 서류가 사라진 뒤에도 맹목적으로 충성스러울까. 그녀의 목줄을 조이기 위해 출생 서류를 말구유 밑에 숨긴 사람에게도?

그렇다고 해서, 내가 대단히 착한 마음을 먹고 멜라니에게 출생 서류의 위치를 알려 준 것은 아니다.

별 타격은 없다고 하나 멜라니는 내게 텃세를 부리려 했다.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없지.

다만…….

‘멜라니가 계속 알레사 백작가에 있으면 곤란하거든.’

그녀는 지나치게 맹목적일지언정 유능하다. 이대로 두면 데네브 왕국에 여러 모로 방해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회를 보아 멜라니를 백작가에서 빼내고 싶었는데, 마침 그 기회가 왔달까.

나는 다시 손에 쥔 성냥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멜라니 양, 이거 필요 없을까?”

“…….”

탁!

한참을 침묵하던 멜라니가 내 손에서 성냥을 받아 갔다. 그 모습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선택을 하든 멜라니의 몫이다. 자유를 찾아서 어디로든 가 버리렴.

‘우리 왕국만 말고.’

나는 ‘맹목적인 광신도(B)’ 특성은 좀 부담스럽거든. 다른 데로 가, 다른 데로.

그런데 성냥을 받아 챙긴 멜라니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귀중한 물건을 받았으니 보답을 드려야지요.”

“응?”

멜라니가 손짓으로 시종을 부르더니 무어라고 말했다. 곧 시종이 쟁반을 들고 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쟁반 위에는 웬 초대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건 뭐야?”

“다음 달에 열리는 사드르 전람회의 초대장이에요. 각국의 명사가 모두 모이는 큰 행사랍니다.”

“흐음.”

아까 떠들어 대던 그 전람회인가. 예술가를 후원하고 예술품을 전시하는 행사라니, 크게 관심이 가지는 않지만…….

“그분이 주최하시는 행사이니, 무척 엄청난 규모일 거예요.”

“그분이라니?”

“그야, 오늘 이 티 파티에도 참석하시는…….”

그때, 입구를 지키던 시종이 이쪽을 향해 말했다.

“도착하셨습니다.”

정원의 입구 쪽이 잠시 소란스러워진다. 차와 디저트 따위를 서빙하던 시종들이 긴장된 낯빛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조곤조곤 떠들던 소녀들도 잡담을 멈추고 입구 쪽을 주목했다.

정적에 휩싸인 정원 안으로 나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또박또박…….

신경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규칙적인 발소리 끝에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나타나셨군.’

나는 오늘의 주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깃털이 달린 화려한 드레스, 보석으로 치장한 머리카락,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화려한 치장으로도 감출 수 없는 싸늘한 눈.

다프네 선왕비다.

그렇다. 나는 오늘 다프네 선왕비를 만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오늘 이 티 파티의 초대장은, 성령제 초대장이 도착하기 며칠 전에 내게 도착했다.

처음에는 티 파티 장소도 아카데미가 아닌 다른 곳이었고, 다프네 선왕비가 참가할 예정도 없었다.

나는 원래 티 파티 초대를 거절할 예정이었다.

굳이 참석할 이유가 없다고 해야 하나. 뭣하러 먼 동네까지 가서 친분도 없는 후원자들과 차를 마시겠는가. 그 시간에 우리 집 박쥐랑 놀아 주는 게 낫지.

그런데 세이르가 보낸 성령제 초대장이 도착한 다음 날, 정정된 티 파티 초대장이 왔다. 장소는 아카데미의 별관으로 변경되었고, 다프네 선왕비가 참석한다고 적혀 있었다.

완전 수상한 상황이다.

엄청나게 꿍꿍이가 있을 듯한 느낌이랄까.

아무런 속셈이 없으면 오히려 반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하필 세이르가 있는 아카데미에 다프네가 온단 말인가. 그것도 소수나마 외부 사람들이 드나드는 성령제 기간에.

그리하여 결국 나는 티 파티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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