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그래서 일부러 오늘은 로코와 모코조차도 떼어 놓고 혼자서 왔다.
베나토르 아카데미의 별관은 원로들의 집무실, 이사회, 문서고 따위가 있는 작은 건물이었다.
1층에는 커다란 유리 온실이, 그 옆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는데, 이 정원이 바로 오늘의 티 파티 장소였다.
조금 긴장된다. 나는 유리 온실 앞에 멈춰 서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 정원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를 지키던 사람이 나를 깍듯하게 맞이했다.
“안젤리카 왕녀님,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이 각 잡힌 태도라니, 역시 후원회에 상당한 돈을 쏟아부은 일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뜻밖의 곳에서 일어났다.
시종이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하게 나를 자리에 안내한 다음 의자를 빼 주었다. 당연하지만 꽤 상석이다. 그런데 의자에 앉는 순간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
오늘의 티 파티에 참가한 소녀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잠깐이었지만,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을 읽어 내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호오.’
나는 가까운 테이블을 슬쩍 둘러보았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살짝 많은 소녀들이었다.
그리고 그중 중심인물처럼 보이는 소녀는 보란 듯이 부채를 탁 펼치며 측근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여러분, 다음 달에 열리는 전람회에는 다들 참석하시죠?”
“당연하죠. 얼마나 멋진 작품이 많을지 벌써 기대 중이에요.”
“저도 초대받아서 너무 기뻐요!’
전람회라고?
‘<마.왕.꾸>에서는 없던 행사인데 뭐지?’
나는 호기심을 느끼고 불쑥 물었다.
“흐음, 어디서 열리는 전람회인데?”
“…….”
“…….”
그러나 돌아온 것은 침묵.
소녀들은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주동자의 경계 섞인 시선만이 나를 향할 따름이었다.
‘이거 그건가. 텃세?’
오늘의 티 파티에 참가하는 사람은 대부분 어느 왕국의 귀족이거나 부유한 집안 출신, 혹은 ‘그 사람’의 장학생. 그러니 변방의 데네브 왕국에서 온 데다 신참자인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특히 분위기를 주도하는 중심인물인 저 소녀의 이름은 멜라니. <마.왕.꾸>에서 꽤 비중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
[이름 : 멜라니 알레사
직위 : 알레사 백작가의 후계자
소속 : 베나토르 아카데미
레벨 : 27
특성 : 맹목적인 광신도(B)]
나는 멜라니의 상태창을 확인해 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멜라니는 원래 가난한 집안 출신인데, 능력을 인정받아 알레사 백작가에 입양되었다.
그녀의 상태창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특성 ‘맹목적인 광신도(B)’다. 이 특성은 그녀가 주인으로 섬기는 자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왕.꾸> 플레이어로서 말하자면 멜라니는 잘 쓰면 대박, 못 쓰면 쪽박인 캐릭터랄까.
능력치는 높은데 ‘맹목적인 광신도(B)’ 특성 때문에 어디로 튀어 나갈지 모르는 구석이 있었다. 제때 멘탈을 관리해 주지 않으면 파국을 맞이한다.
‘능력치가 뛰어나도 내가 영입하고 싶지는 않은 타입이지.’
뭐, 아무튼.
지금 멜라니가 내게 텃세를 부리는 것도 그 비뚤어진 충성심 때문이겠지. 굳이 나누자면 리어 왕국의 알레사 백작가는 나와 적대하는 입장이니까.
‘쯔쯔쯔, 다들 어린 나이에 안 좋은 것만 배워 가지고 말이야. 미래의 흑막 왕녀를 못 알아보고, 쯧.’
속으로 꼰대 같은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티 파티에서 텃세라니 처음 겪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데네브 왕국 사람들은 어디 한군데가 이상할지언정 다들 착하니 말이다.
내 목적인 오늘의 메인 게스트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시간이 꽤 남았다.
그럼 그동안 얘네들을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인데…….
그때, 멜라니가 시종을 부르더니 뭐라고 말했다. 곧 시종이 따뜻한 차 포트를 가지고 왔다. 멜라니는 갑자기 생글생글 웃으며 직접 찻잔에 차를 따르더니 내게 권했다.
“안젤리카 왕녀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멜라니라고 해요.”
“늦은 걸 알긴 하는구나.”
“……이 차는 아카데미의 명산품이랍니다. 왕녀님께 맛보여 드리기 위해 준비했어요. 한번 드셔 보세요.”
손바닥 뒤집듯 바뀐 태도하며 내게 쏟아지는 묘한 시선하며. 멜라니의 의도가 빤히 보였다.
내 앞에 놓인 이 차에 손을 썼겠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살짝. 예를 들자면, 차가 엄청나게 맛이 없다거나.
그때.
띠링!
[<히든 퀘스트> 티 파티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
멜라니가 싸움을 걸어오는군요.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루트 1. 차를 마시기
루트 2. 차를 멜라니에게 끼얹기]
[<루트 1. 차를 마시기>
티 파티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차를 마십니다.
과연 차의 맛은 어떨까요?
보상 : 희귀 아이템]
[<루트 2. 차를 멜라니에게 끼얹기>
참을 수 없다. 차를 멜라니에게 끼얹습니다.
속은 시원하지만 티 파티의 분위기는 싸늘해집니다.
보상 : 플레이어 안젤리카의 마법 능력치 + 20]
선택지가 왜 다 이 모양이람.
내 선택이라면 당연히 이거지.
‘에휴우, 머나먼 변방 왕국에서 온 힘없는 왕녀가 이런 텃세를 어떻게 버티겠어. 눈물을 머금고 차를 마실 수밖에.’
[……]
[……]
이어 나타난 창이 마치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냐는 듯 기막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생긋 웃으며 찻잔을 손에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
입 안이 얼얼할 정도로 짜릿한 신맛이 느껴졌다. 새콤한 향이 확 풍겨 나왔다. 깊은 차 맛과 어우러지는 신맛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이 차는 어제 세이르가 내게 끓여 준 차와 같은 종류였다.
어제 세이르가 차를 끓여 주면서 뭐라고 했더라. 분명 상급생들이 신입생에게 사 주는 전통이 있다고 했었지.
‘설마 그 전통이란 게 신입생들한테 텃세 부리기였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찻잔의 차를 전부 마셨다. 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맛이었다. 그리고 빈 찻잔을 내려놓자 옆에서 경악스러워 하는 반응이 들려왔다.
“어, 어떻게 저 신 차를 한 번에 마실 수가 있죠?”
“저는 한 모금 마시고 울었는데…….”
“……무서운 분이군요.”
무슨 텃세를 정면 돌파하는 독기 넘치는 사람 보듯 하는데, 정말 차가 맛있었던 것뿐이다.
나는 진심을 담아서 멜라니에게 말했다.
“권해 줘서 고마워. 이 차 진짜 맛있다. 돌아가기 전에 좀 사 갈까 봐.”
“네에……. 왕녀님의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응. 아, 한 잔 더 마셔도 되지?”
“그, 그럼요. 여기 따라 드릴게요.”
새로 따른 차도 즐겁게 마시는데, 웃는 멜라니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차를 다 마신 뒤 생각했다.
‘이 분위기 어쩔 거야.’
멜라니는 기가 한풀 꺾였는지 더 이상 유치한 장난을 치지 않았다. 대신 다시 나를 무시하기로 했는지 보란 듯이 측근들하고만 떠들어 댔다.
티 파티 테이블 주위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는데 이런 사소한 신경전 따위에 정신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 그 방법을 써야겠어.’
나는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면서 적당한 타깃을 물색했다. 마침 멜라니의 옆에 앉은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마른 체구였고,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었다.
“저기, 얘, 이름이…… 아, 소피아 양?”
이름까지 불렸는데 대답을 피할 수는 없다. 소피아는 마지못한 듯 어색하게 대답했다.
“무, 무슨 일로…….”
“요즘 꿈자리가 사납지?”
“……!”
화들짝 놀란 소피아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매일 밤 악몽을 꾸지? 가위 눌린 적도 많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소피아는 크게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밤중에 자주 이상한 소리가 들릴 거야. 꼭 노랫소리 같은.”
소피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슬쩍 멜라니의 눈치를 보았다. 멜라니가 비뚜름하게 웃으면서 내게 핀잔을 주려 했다.
“왕녀님, 아무리 대화에 끼고 싶으시더라도 뜬금없이 괴담을 이야기하시는 건 어떨까 싶네요.”
나는 멜라니의 말에 어깨만 으쓱하고 이어 말했다.
“노랫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 보면 아무것도 없지? 대신 근처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리고.”
“어, 어떻게 그걸……!”
내가 갑자기 귀신 보는 능력이 생겨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고. 소피아의 상태창을 보고 짐작한 사실이었다.
‘얘 사는 곳, 노래 부르는 토용(土俑) 무덤 바로 근처거든.’
노래 부르는 토용 무덤.
현재는 완전히 유원지가 되어 버린 우리 왕국의 고대 던전과 비슷한 장소다. 즉, 고대 던전이다.
이름 그대로 안에는 노래 부르는 토용이 잔뜩 있다. 이 흙 인형들은 딱히 사람에게 큰 위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그냥 밤마다 악몽을 꾸게 하는 노래를 부를 뿐.
이 노래 부르는 토용 무덤의 노래를 멈추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
소피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