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 *
사라는 엄청나게 엄청났다.
그녀의 거침없으면서도 꼼꼼한 손길은 정말이지 엄청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연금술 연구실에서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사라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꾸며 주었다.
나는 내게 이렇게 많은 액세서리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어쩐지 아카데미에 올 때 마차에 짐이 많더라니,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나 보다.
사라는 늘 그렇듯 내게 상냥했지만, 치장을 적당히 마무리하고 싶다는 말만은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한참 동안 그녀에게 몸을 맡겨야 했다.
그나마 아직 열네 살이라 화장은 거의 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고…….
“자, 이제 다 되셨어요.”
사라가 자신의 작품에 흡족해하는 예술가처럼 웃으며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진이 빠져서 가볍게 투덜거렸다.
“무도회 두 번만 갔다간 죽을 거 같아.”
“오늘은 정식 사교계 데뷔가 아니라, 아카데미에서 주최하는 연회라 가볍게 끝냈어요.”
“……가볍게?”
내가 모르는 사이에 ‘가볍게 끝내다.’라는 말뜻이 바뀐 건가.
사라가 나를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거울 속에는 레이스와 리본과 보석의 덩어리처럼 화려한 차림의 소녀가 있었다. 힘들긴 했지만 무척 예뻤다.
나는 방에서 느긋하게 뒹굴뒹굴하고 있던 로코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로코, 언니 어때 보여?”
“피이, 피이이……?”
얘 방금 나 못 알아본 것 같은데?
“끼이잉, 끼잉…….”
모코는 평소처럼 상자 안에 틀어박혀 있어서 반응의 차이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상자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물었다.
“모코, 너도 같이 데려가 줄까? 너도 무도회에 갈래?”
“끼잉?! 끼잉, 끼이잉!”
모코는 격렬하게 고개를 휘휘 저었다. 거부 반응이 엄청나다. 무도회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 데려갔다간 문턱도 밟지 못하고 쓰러질 기세였다.
“알았어. 그렇게 놀라지 마. 안 데려갈게.”
나는 이 가련한 내향형 고슴도치를 도로 상자에 넣어 주었다.
이어 사라는 루카의 채비도 도왔다.
길게 자라난 검은 머리카락을 멋들어지게 빗어 넘겨서 반듯한 이마를 드러냈다. 평소보다 살짝 화려한 차림이 잘 어울렸다.
“으으, 왜 나까지 이런 옷을 입어야 하는 건데…….”
본인은 매우 어색한지 1분에 서른 번 정도 옷깃을 만지작거렸지만.
니키의 경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아서 스텔라가 농업 연구실로 데리러 갔다.
돌아온 니키는 품에 커다란 상자를 안고 있었는데, 농업 연구실에서 직접 키운 채소가 가득 들어 있었다. 좋은 시간을 보낸 모양이다.
니키는 드레스 대신 셔츠와 바지 차림을 했다.
니키의 드레스도 준비한 사라가 매우 아쉬워했지만, 니키는 드레스를 입고는 한 발짝도 걷지 않겠다고 했다. 사라는 못내 아쉬워하며 대신 니키의 옷깃에 화려한 리본 타이를 하나 매어 주었다.
이 긴 과정을 끝마치고 나니 딱 무도회 장소로 출발할 시각이 되었다. 사라의 시간 계산이 정확한 셈이었다.
시간에 맞추어 다시 우리를 찾아온 스텔라가 무도회 장소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무도회 장소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랐다.
이 거대한 학원 도시의 중심부. 천장을 크리스털 돔으로 만든 연회장이 있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엄청난데?’
아카데미는 학문의 산실이면서, 동시에 각국의 유력 인사들이 미리 친목을 다져 놓는 사교의 장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1년에 한 번 열리는 이 성령제 무도회에 무척 힘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 예상의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는 화려함이었다.
‘<마.왕.꾸>에서도 이랬었나? 화려하긴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연회장 주변은 마석을 아낌없이 쓴 램프와 꽃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었다. 엷은 어둠이 깔리는 시각, 은은한 불빛이 분위기를 환상적으로 만들었다.
이만하면 어중간한 왕국의 왕실 연회보다도 성대한 규모였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연회장 입구에서 초대장을 내밀고 입장했다.
이 무도회는 아무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아카데미에서 발부하는 초대장이 있어야 한다나.
“그럼 들어가실까요. 이쪽입니다.”
“응, 안내 고마워.”
스텔라의 안내에 따라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니, 곧 세이르와 만난다는 실감이 났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인정하자.
편지의 답장이 온 지 오래되어서 속상한 나머지 솔직하지 못했지만, 나는 세이르를 만나고 싶었다.
세이르가 졸업할 때까지 만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니까, 초대장을 받고 기쁜 마음도 있었다.
‘내가 열넷이니까 세이르가 지금 열일곱인가.’
나의 3년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이곳에서 보낸 세이르의 3년은 어떠했을까. 염세주의를 완전히 버리고 난 그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뭐……. 곧 만나면 알 수 있겠지.’
무도회 장소는 내부도 물론 화려했다.
중앙에는 춤을 추기 위한 댄스 플로어가 있었으며, 천장은 수정으로 만든 샹들리에로 장식했다. 한쪽 벽면을 따라서 다양한 핑거 푸드가 즐비했고, 또 다른 쪽에는 악단이 대기 중이었다.
홀 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소년 소녀들이었고, 성인인 외부 손님은 소수였다.
“……히힛.”
연금술 연구실에서 만났던 좀비의 모습도 보였다. 옷은 화려했으나 퀭한 눈과 흐느적거리는 발걸음이 정말 좀비 같았다.
세이르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외부에서 시험을 친다고 했지. 아직 안 끝난 건가.’
성령제 기간인데 시험이라니, 학생도 고달픈 일이 많구나 싶었다.
“어? 안젤리카 님, 나 잠깐만!”
뜻밖에 니키는 가득한 음식보다 다른 일에 더 관심을 보였다. 바로 농업 연구실에서 만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 즐거운 모양이다. 나는 니키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다.
활달하고 적극적인 소녀들이 루카를 보고 말을 걸고 싶어 한 것이다.
“저기, 처음 보는데 이름이 뭐예요? 이따가 같이 놀래요?”
그러나 루카는 이런 장소가 어색한지 내 옆에만 딱 붙어 있었다. 소녀들이 아쉬운 얼굴로 물러났다.
‘흐음…….’
하긴 이 녀석도 이렇게 보면 꽤 귀엽게 생겼단 말이지. 입 다물고 있으면 분위기도 있어 보인다.
내 시선에 루카가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뭐, 뭘 그렇게 봐?”
“우리 루카, 많이 컸다 싶어서.”
“지금은 내가 너보다 더 키 크거든?!”
아직 본격적으로 무도회가 시작되기 전이다. 이렇게 루카와 잡담이나 나누는데, 근처에서 하는 대화가 들려왔다.
“이야, 올해는 작년보다 더 화려해진 것 같은데?”
“학생회장님이 올해 신경 많이 썼대.”
“맞아. 그래서 공예부 애들이 빵가루처럼 갈려서 연금술 연구실에서 영양제 받아 먹더라.”
“뭐? 그 영양제를? 그거 괜찮아?”
그들의 대화에서는 학생회장에 대한 미약한 두려움과 존경심이 느껴졌다.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오랜 게임 플레이 경험과 감에 따르면, 이렇게 일처리가 꼼꼼하면서 철저한 사람은 흑막일 가능성이 높았다.
일 못하는 흑막 본 사람? 없을걸!
어쩌면 그 학생회장이라는 사람은 겉으로는 훌륭한 사람인 체하면서 뒤로는 아카데미를 지배하는 흑막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큰일이다. 요즘 나는 아빠 대신 내가 흑막이 되어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니까. 이 대륙 최고의 흑막을 지망하는 사람으로서 경계해야 하는 인물이 분명했다.
“스텔라, 궁금한 게 있는데.”
“하문하십시오.”
“학생회장은 어떤 사람이야?”
“……아. 이미 아시는 줄 알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응?”
스텔라가 다시 뭐라고 말하려는 그때, 연회장 입구 쪽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이거 놔! 내가 왜 안에 못 들어간다는 거지?”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어떤 사람이 전형적인 대사로 꼬장을 부리며 연회장 안에 들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가로막는 사람들과 격하게 몸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나딘. 연금술 연구실에서 본 전 부학생회장이었다.
“에이잇! 이거 놔!”
“……어! 잡아!”
나딘은 자신을 막는 사람을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스텔라가 황급히 그쪽으로 다가가 나딘을 제지했다.
“물러나세요, 학생회에서 퇴출된 사람은 참석할 수 없습니다.”
“이이익, 누구 멋대로! 나는 여기 부학생회장이야!”
“횡령과 뇌물로 퇴출된 전 부학생회장이죠. 죄목을 다시 읊어 드릴까요?”
저 비리 전 부학생회장, 아까도 그렇고 유독 스텔라에게 시비란 말이지. 마음에 안 든다. 슬그머니 다가가 살짝 발이라도 밟아 줄까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나딘은 내 앞에 멈춰 서더니 갑자기 이상한 말을 지껄였다.
“오오, 아름다운 레이디.”
“……?”
뭐? 방금 뭐라고?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 베나토르 아카데미의 부학생회장 나딘이라고 합니다.”
아니, 말은 바로 해야지. 뒷돈 받아서 잘린 전 부학생회장이잖아.
“옥석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한 학생들 사이에서 저를 알아보시다니 단연 현명하고 아름다우시군요.”
아니, 난 그냥 발을 밟아 주려고…….
나딘은 재킷 주머니에 꽂혀 있던 꽃 한 송이를 뽑더니 과장스러운 동작으로 내게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니 오싹 소름이 돋았다.
‘으윽, 속이 안 좋아…….’
못생긴 엑스트라 악역을 지나치게 가까이에서 보니까 속이 울렁거린다.
그러나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돌리는 내 동작을 나딘은 다르게 해석했는지 다시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쑥스러워하는 모습도 아름다우시군요.”
더 이상 못 참겠다. 나는 스텔라에게 눈짓했다.
스텔라가 눈치 빠르게 나딘을 힘으로 끌고 가 밖에 던져 버리려는 찰나였다.
슈욱, 팟!
갑자기 나딘이 내게 내민 꽃이 부서지더니 가루가 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그 순간, 웅성거리던 연회장 안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주위 사람들이 입을 딱 다물고 어느 한곳을 쳐다본다.
“……?”
뭐지? 왜 갑자기 조용해진 거지?
“히힛, 학생회장이 오셨군.”
근처에서 좀비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나서야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나의 고개도 자연스레 사람들을 따라 돌아갔다.
훤칠하니 큰 키에 잘생긴 금발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눈앞이 환해지는 듯한 미모에 걸음걸이가 우아하고 가지런했다.
금발 남자가 나를 향해 생긋 웃었다.
방금 본의 아니게 본 악역 엑스트라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잘생긴 얼굴이기는 한데, 왜 나를 보고 저렇게 웃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안젤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