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그러는 동안, 뒤늦게 도착한 니키가 발소리를 죽이고 슬그머니 공부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내 숙제를 살펴보던 알렉산드라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왕녀님, 오늘도 또…….”
“네? 왜 그러세요?”
“숙제는 100쪽까지라고 말씀드렸을 텐데, 오늘도 또 150쪽까지 하셨군요.”
나는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훌륭한 사람, 즉, 흑막이 되기 위해서는 매일 끝없이 노력해야 하니까요!”
“왕녀님…….”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은 알렉산드라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왕녀님의 재능과 노력을 그냥 두고 볼 수 없군요. 저와 손을 잡고 암흑가의 주인 자리를 노리지 않으시겠어요?”
벌써 수십 번은 들은 말인데 들을 때마다 굉장히 혹하는 제안이었다. 암흑가의 주인이라니, 야망 넘치고 흑막답고 멋지니까.
그러나 나는 알렉산드라의 손을 놓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알렉산드라. 나한테는 다른 목표가 있으니까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왕녀님의 그 목표…… 다정흑막이었던가요. 그보다는, 저와 함께 암흑가의 제왕이 되는 쪽이 쉽지 않을까요?”
“윽,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흑막의 길을 포기하지 않겠어요!”
“아쉽군요. 언제든 왕녀님 스스로 어둠의 제왕이 되고 싶거든 연락 주세요.”
옆에서 이 대화를 듣던 루카와 니키가 한 마디씩 보탰다.
“나 선생님이랑 안젤리카 님이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나도. 애초에 흑막이 뭔데?”
“헉, 루카, 안 돼! 안젤리카 님한테 그 질문을 하면…….”
“니키, 다 들리니까 사람을 흑막에 미친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
그렇게 숙제 검사를 마치고 알렉산드라가 수업을 시작했다.
오늘의 수업 주제는 각국의 세력 확장에 따른 권력관계 변화였다.
나는 눈을 빛내며 열심히 들었다. 앞으로 어디를 개발하고 누구를 포섭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으니까.
한참 수업이 무르익었을 무렵, 밖에서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알렉산드라가 책을 덮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어, 아직 수업 시간 남았는걸요.”
“으으으, 안젤리카 님…….”
애달픈 소리에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수업을 1분이라도 더 계속했다간 쓰러질 지경인 니키와 루카의 모습이 보였다. 어쩔 수 없나.
“저도 더 많은 것을 가르쳐 드리고 싶지만, 좋은 소식이 있는 모양이에요.”
“좋은 소식이요?”
창문 너머로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아빠다!
* * *
“안젤리카, 수업은 잘 들었니?”
“네!”
공부방 문을 열고 나가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빠가 나를 맞이했다.
3년이 흐르는 동안 아빠의 미모는 여전했다.
은빛 머리카락은 반짝반짝했고, 이목구비는 조화로웠으며, 푸른 눈은 맑은 날의 하늘처럼 싱그러웠다.
데네브 왕국이 크게 발전하면서 왕국 안팎은 3년 전과 달리 복잡해졌다.
그러나 고용인을 늘리는 데도 한계가 있다. 자연히 아빠는 격무에 시달리는 일이 많아졌는데, 바쁜 와중에도 늘 완벽한 모습이 감탄스러웠다.
문제는 아빠의 성격도 여전하다는 데 있었다.
실은 나는 요즘, 한 가지 철학적 문제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내용은 바로 이러하다.
‘흑막’이란 상태인가, 행위인가?
철학이랑 아무 상관 없는 거 아니냐고?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대충 넘어가자.
물론 <마.왕.꾸>를 플레이할 때는 흑막이 상태를 의미하는지 행위를 의미하는지 따위 생각할 필요 없었다. 크로셀 데네브는 흑막스러운 상태였으며 당연히 흑막스러운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흑막스러운 상태를 갖추었으나 흑막다운 행위를 하지 않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면서 나는, 아빠가 착하기만 한 호구가 아니라 실은 흑막스러운 성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빠를 새로운 흑막, 즉, ‘다정하고 상냥한데 실은 흑막’으로 만들려고 마음먹었다.
아. 지난했던 지난날들의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안젤리카, 이건 뭐니?”
“앞으로 아빠를 새로운 흑막으로 만들기 위한 교재예요!”
“그, 그렇구나…….”
“네, 우선 가볍게 뒷공작부터 시작하죠! 앞에서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뒤에서는 음모를 꾸미는 거예요!”
“안젤리카, 그런 일을 하면 네가 위험해질까 봐 걱정이구나.”
……여기 터가 안 좋나? 왕성에 음이온이라도 나오는 걸까? 수맥이 흐르는 거 아냐?
이런 과정 끝에 나는 이런 고민에 다다랐다.
‘역시 내가 흑막이 되는 수밖에 없나?’
내가 흑막의 외동딸이 아니라, 아빠가 흑막 왕녀의 아빠가 되는 거다. 대충 비슷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아빠가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말했다.
“안젤리카, 수업이 어려웠니? 고민이 많은 얼굴이구나.”
“아! 아니에요, 아빠. 그보다 무슨 일이에요?”
“안젤리카 앞으로 편지가 왔더구나.”
“편지라고요?”
아빠가 내민 편지를 받아 들고 나는 깜짝 놀랐다. 고급스러운 겉봉에는 ‘베나토르 아카데미’라고 쓰여 있었다.
“어!”
“자, 중요한 소식일 수도 있으니 얼른 확인해 보렴.”
“고마워요, 아빠!”
나는 편지를 손에 쥐고 후다닥 달렸다.
* * *
편지를 들고 내가 향한 곳은 공방이었다.
갑자기 베나토르 아카데미에서 편지라니, 뜻밖이다. 대체 무슨 일일까? 이 편지 세이르가 보낸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두근두근해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공방에 가서 차분한 분위기에서 편지를 뜯어봐야겠다.
“피이이잇!”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던 로코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나를 맞이했다.
그리고…….
“끼이잉…….”
상자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고슴도치가 후다닥 몸을 감추었다.
이 고슴도치는 숲에서 주운 이후로 결국 내가 키우게 되었다. 이름은 모코다.
‘나는 고슴도치 싫어하지만, 진짜 싫어하지만…….’
달리 맡길 곳도 마땅치 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이 고슴도치 모코는 좀 이상했다.
상자에 톱밥을 깔아 집을 만들어 줬더니 도통 밖에 나오지 않는다. 먹이를 줄 때만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가 금방 다시 안에 들어간다.
장장 3년째 이 모양이라, 키우는 동안 모코의 모습을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거, 그건가? 히키코모리?
‘고슴도치도 히키코모리가 될 수 있는 건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 이럴 게 아니라 먼저 편지부터 읽어 봐야지.
나는 잠깐 사이에 집 안으로 숨어 버린 고슴도치 모코를 내버려 두고 편지 겉봉을 뜯었다. 그리고 내용물을 읽고 얼굴을 찡그렸다.
“베나토르 아카데미의 성령제에 초대한다고?”
편지는 세이르가 아니라 아카데미 운영부에서 보낸 것이었는데, 금박을 입힌 고급스러운 종이에 쓰인 초대장이었다.
베나토르 아카데미의 성령제는 1년에 한 번 열리는데, 1년 중 외부인이 아카데미에 드나들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재학생에게 초대받아 공식 초대장을 소지한 극소수의 사람만 가능했다.
초대장에 적힌 글귀에 따르면, 세이르가 나를 그 성령제에 초대했다는데.
“으음…….”
나는 못마땅한 기분으로 편지를 다시 훑어보았다. 그때 마침 공방 안에 들어온 루카가 내 손에 들린 편지를 보고 물었다.
“왜 그래? 그 편지 뭔데?”
나는 루카도 읽을 수 있도록 편지를 건네주며 대답했다.
“베나토르 아카데미의 성령제 초대장이야.”
“성령제가 뭔데?”
“간단하게 말하면 학교 축제 같은 거야. 무도회랑 전람회 같은 걸 해.”
“그런데 왜 그렇게 부루퉁한 표정인데?”
루카를 쳐다보니, 내가 왜 아까부터 못마땅해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거 알아? 세이르 녀석, 몇 달째 내 편지에 답장을 안 보냈다고.”
“응, 전에 들었어. 그런데?”
“내 편지에 답장은 안 보내면서,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초대장만 보내다니 이상하다고.”
게다가 내가 준 마법 전서구는 어쩌고, 왜 우편부를 통해 초대장을 전달한 거지? 전서구를 쓰면 하루 만에 편지를 보낼 수 있는 데다가 보안도 유지되는데?
초대장을 훑어본 루카가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즉, 세이르가 걱정되는데 답장이 안 와서 속상하다는 거잖아.”
얘는 내 말을 어떻게 이해했길래 이런 터무니없는 결론을 도출한 걸까.
“아이참,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럼 이 성령제라는 거 안 갈 거야? 나는 가고 싶은데.”
“뭐어, 왜?”
“그야 그 녀석, 본 지 오래됐는걸. 보고 싶잖아.”
“나는 별로…….”
나는 루카의 시선을 피하며 모호하게 말끝을 흐렸다. 루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말했다.
“나는 보고 싶은데! 초대장도 받았잖아? 안젤리카, 같이 가자.”
“…….”
난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루카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