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과연 유니콘의 피를 이은 말. 복슬이는 정말 잘 달렸다.
낙마 방지(C) 특성을 얻지 않았더라면 당장 위에서 굴러떨어질 속도로 숲길을 달려 나간다.
복슬이는 금방 사라와 루카의 말을 추월하더니, 카틀란 황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섰다. 사라와 루카의 모습이 순식간에 작아졌다.
이렇게나 빨리 달리는 말이었다니……. 평소에 나를 태우고 느리게 다니느라 복슬이가 많이 갑갑했겠다 싶었다.
“흐아아악!”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으로 흩날렸고, 바람이 마구 뺨을 때렸다.
내가 고삐를 꼭 붙잡고 비명만 지르자 복슬이가 살짝 속도를 늦췄다. 이대로 달려도 괜찮겠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복슬이의 등 위로 더욱 바짝 매달리며 말했다.
“괜찮아! 복슬아, 봐주지 말고 마음껏 달려!”
“히히히힝!”
‘네 뜻이 정 그렇다면.’
복슬이가 이렇게 말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복슬이는 한층 더 속도를 높였다.
“으아아아악!”
너무 빨라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나는 복슬이의 안장 위에서 마구 흔들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곧 카틀란 황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어, 저기!”
데네브 왕국의 북쪽, 깎아지른 벼랑을 끼고 있는 땅. 풀이 거의 자라지 않아 삭막하고 스산하다.
그 황야에 검은 상복을 입은 기사들과 세이르의 모습이 보였다. 멀지만 바로 알 수 있었다. 햇빛 아래에서 저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은 흔치 않으니까.
그런데…….
“……!”
나는 복슬이의 고삐를 세게 잡아당겼다. 여태껏 지치지도 않고 빠르게 달려온 복슬이가 발을 멈췄다.
커다란 돌 뒤에 복슬이와 함께 몸을 숨기고 앞을 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끔찍한 광경이 보였다.
기사 한 명이 검을 빼어 들더니 세이르가 탄 말을 주저 없이 찔렀다. 말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그 충격에 세이르의 몸이 공중에 내던져졌다.
다행히 세이르는 바닥을 한 번 구르기만 했을 뿐 가볍게 착지했다.
스르릉.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더니, 쓰러진 세이르를 향해 곧장 휘둘렀다.
챙! 채앵!
세이르는 이런 상황을 이미 짐작했던 듯 능숙하게 대처했다. 성검을 꺼내 들어 기사들의 검을 막고, 곧장 몸을 일으켜서 반격 태세를 취한다.
다섯 명 대 한 명의 대치.
처음에는 세이르가 힘에서 밀리는 것 같았지만, 곧 상황은 반대가 되었다.
성검이 하얗게 빛났다.
“크윽……!”
가장 앞에서 세이르를 공격하던 기사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얀빛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검기……! 세이르, 검기를 쓸 수 있게 된 거야!’
이 세계에서 검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알려진 사람 중 최연소가 서른다섯 살이었던가.
채 스무 살도 안 되어 검기를 쓰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다.
상황이 긴박한 와중에도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저 하얀빛이, 아무리 불합리한 환경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세이르의 잠재력을 보여 주는 것 같아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기사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기사는 다섯이고 세이르는 혼자다. 곧 자신감을 되찾은 기사들이 세이르를 에워싸고 공격했다.
기사의 공격을 막으며 세이르가 외친 말이 귓가를 두들겼다.
“누가…… 누가 이런 데서 죽을 줄 알고!”
세이르는 정말 잘 싸웠다.
재빨리 몸을 움직이며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막아 낸다. 마치 등 뒤에 눈이 달린 듯한 날렵함이었다. 그러면서도 힘 있는 공격으로 적을 압박해 나간다.
검기가 맺힌 검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푹!
섬뜩한 소리가 났다.
세이르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한 기사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세이르는 쓰러진 적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다음 적을 상대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기사들이 쓰러진다.
승기는 세이르에게 있는 것 같았다. 세이르의 움직임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고, 지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네 명의 기사가 쓰러졌고, 단 한 명의 기사만이 남았다.
“크크큭……. 무의미한 반항을 하는 꼴이 보기 좋군.”
자신의 동료가 전부 쓰러졌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사는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던지더니, 새로운 검을 뽑아 들었다.
검날에 기이한 광택이 감돈다. 보통 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챙! 채앵!
세이르와 기사의 검이 부딪혔다.
마지막 남은 기사는 다른 기사들보다 월등히 강했다. 세이르의 검을 여유 있게 받아넘기면서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안 돼…….’
이대로라면 세이르가 질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세이르를 구해야 해.’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이런 곳에서 저런 비열한 놈에게 죽게 둘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떻게?
말을 달려서 세이르에게 간다고 내가 도움이 될까? 저 기사에게 인질로 붙잡혀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렇다면…….’
나는 황급히 복슬이의 안장에 달아 둔 가방을 열어 보았다.
오늘은 그냥 소풍을 하러 와서 많은 물건을 챙기지 않았다. 가방 안에 쓸 만한 것이라고는 마법 폭탄뿐이었다. 그것도 단 하나.
‘이 폭탄을 던지면……. 아, 안 되겠어.’
세이르가 폭발에 함께 휘말릴 가능성이 컸다.
재빠르게 공격이 오가고 있었기에 둘의 거리가 벌어진 틈을 노리기도 힘들었다. 이 폭탄을 쓸 기회는 한 번뿐이다. 신중해야 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정신을 집중했다.
‘생각해.’
생각해야 한다. 지금 여기서, 세이르를 도울 방법을. 분명 방법이 있을 거다. 분명 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다.
고민할 여유는 없다. 나는 상태창을 열어 재빠르게 모든 항목을 눈으로 훑었다. 그중 지도를 볼 수 있는 패스파인더 특성을 켜고 주위를 훑자 길이 보였다.
‘저거라면…….’
황야의 주위에는 우뚝 솟은 언덕이 하나 있었다. 언덕과 산의 중간쯤 되는 높이였다. 나는 그 언덕의 꼭대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복슬아, 너 저기 올라갈 수 있겠어?”
“……히힝.”
복슬이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 정도쯤 식은 죽 먹기라는 투다.
“그럼 가자.”
나는 기사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레 언덕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정상을 향해 올랐다.
언덕은 가팔랐고, 자갈과 나무뿌리 때문에 올라가기 힘들었다. 복슬이는 험한 길을 조심스레 뚫고 나를 위로 데려가 주었다.
내 목적은 언덕의 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바위였다. 바위는 아래쪽이 좁아 위태위태하게 놓여 있었다.
저 바위의 아래쪽에 마법 폭탄을 터뜨리면, 황야로 바위를 떨어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윽…….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복슬아, 여기서 기다려.”
“히힝…….”
언덕의 정상 부근까지 복슬이를 타고 빠르게 올라갔지만, 더 이상은 말을 타고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복슬이의 등에서 내린 뒤 다시 길을 올랐다. 자갈 때문에 걷기 힘들었고, 붙잡을 만한 나뭇가지 따위도 마땅히 없었다. 그래도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윽…….”
조금만.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닿을 것 같은데…….
나는 목표하는 바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슬아슬하게 폭탄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였다. 폭탄은 단 하나뿐이니 신중해야 했다. 나는 바위를 향해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으아앗……!”
작은 자갈을 밟고 몸이 뒤로 쭉 미끄러졌다. 뾰족한 돌에 긁힌 손바닥이 아파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아파하고 있을 틈도 없다. 나는 바닥의 나무뿌리를 붙잡고 겨우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서…….
‘제발……!’
겨우 언덕의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거리와 방향을 가늠한 뒤 있는 힘껏 마법 폭탄을 던졌다.
쾅! 콰앙!
폭탄이 터지면서 굉음이 들렸다. 애초부터 불안정한 위치에 놓여 있던 바위가 폭탄에 맞아 쩍 갈라졌다.
커다란 바위의 파편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이르, 피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지른 소리가 세이르에게 닿았는지 못 닿았는지는 모르겠다.
세이르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바위의 파편들을 보자마자 뒤로 물러나 몸을 피했다.
기사 역시 한 박자 늦게 머리 위를 보고 방어 자세를 취하며 피난했다. 그러나 그는 상황을 알아차리는 것이 늦은 통에 허점을 보였다.
정말 잠깐의 틈. 그 잠깐의 틈이면 충분했다.
콰콰콰쾅!
황야에 추락한 바위의 파편이 뿌연 흙먼지를 일으켰다. 시야가 차단된 기사가 잠시 당황했다.
그 틈을 타 세이르가 검을 들고 달려들었고, 온통 뿌연 황야에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윽고…….
푹!
검이 살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크아아악……!”
비명이 점점 멀어졌다.
흙먼지가 완전히 잦아들었을 때, 기사는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추락한 다음이었다.
* * *
세이르가 기사를 물리치는 모습을 확인한 뒤, 나는 다시 복슬이를 타고 언덕을 내려왔다. 그리고 곧장 세이르를 향해 달려갔다.
세이르는 내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피가 묻은 재킷을 급히 벗어 검날에 묻은 피를 닦더니 버린다. 그리고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안젤리카, 왜 따라온 거야?”
나는 기가 막혀서 크게 소리쳤다.
“그렇게 가 버리는데 어떻게 안 따라가?!”
“……위험할 수도 있었어.”
뭐? 위험할 수도 있었다고?
내가 위험할 수도 있었으면, 세이르는? 본인은 방금 죽을 뻔했으면서 그게 할 말이야?
어이가 없어서, 이번에야말로 세이르의 등짝을 후려갈기고 싶어졌다.
내가 복슬이의 등에서 내려오려 하자 세이르가 나를 받아 주었다. 능숙한 동작이었다.
“…….”
“…….”
우리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세이르는 언덕을 오르느라 흙이 묻은 내 손을 부드럽게 털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이제 돌아가자느니, 소풍이 엉망이 되어 버렸으니 다음에 또 오자느니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덤덤하게 미소 지을 뿐. 해야 하는 말이 있는데 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 나는 알아 버린다.
세이르는 이제 데네브 왕국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구나.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거구나.
나는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뜬 뒤 물었다.
“세이르,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