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상복을 입은 기사가 세이르를 향해 엄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 표정은 너무 과장된 탓에 되레 우스꽝스러운 느낌이 났다.
기사는 말에 매어 둔 커다란 근조 깃발을 가리키며 침통하게 말했다.
“세이르 소공작님, 그레고리 폐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
아. 기사들의 옷차림을 본 순간부터 든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았다.
그레고리 폐하라면 리어 왕국의 현 국왕, 세이르의 큰아버지를 지칭하는 말. 그가 갑자기 죽었다고?
‘하지만 왜 지금?’
비록 허수아비 왕이라고는 하나 아직 건강한 나이일 텐데? 원작에서도 없던 전개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세이르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갑작스럽군. 수년 동안 뵙지 못했지만…… 폐하께서는 건강하셨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측근들과 여우 사냥을 가셨다가……. 사고가 있었습니다.”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왕의 죽음을 애도하며 묵념했다. 흠 잡을 데 없는 왕실 예법이었다.
짧은 묵념이 끝나고, 기사들의 대표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흘 뒤, 폐하의 장례가 치러질 예정입니다. 급히 귀국하시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하여 저희가 세이르 소공작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기사의 말은 일견 타당하게 들렸다.
리어 왕국 사람들에게 장례식은 무척 중요한 의식이다. 하물며 국왕의 장례다. 왕족이라면 어떤 사정이 있든 즉시 귀국하여 장례식에 참석할 의무가 있었다.
리어 왕국의 국왕이 죽은 이상, 세이르의 귀국을 막을 명분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너무도 위화감이 들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직감이 경고음을 울렸다.
리어 왕국의 그레고리 왕이 여우 사냥을 나갔다가 죽었다고? 그 허수아비 왕, 소심해서 벌레 한 마리 못 죽이지 않았던가?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사안이 시급한 건 알겠지만 너무 갑작스러워.”
“……안젤리카.”
내 목소리에 세이르가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계속 말했다.
“세이르 뮨 엘레인은 현재 우리 왕국에 구금된 몸이야. 이렇게 절차 없이 데려갈 수는 없어.”
기사의 삐죽한 삼백안이 나를 향했다. 말씨만 정중할 뿐, 시선은 베일 듯이 날카로웠다.
“국장입니다, 왕녀님. 왕녀님과 소공작님 사이에 어떤 거래를 하셨든, 저희는 소공작님을 모셔 갈 권리가 있습니다.”
“귀국이 이렇게 숲에서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텐데? 적어도 왕성으로 돌아간 다음 아빠에게 말해야…….”
“아니요, 지금부터 급히 말을 달려도 시일이 빠듯합니다.”
짜증이 확 치솟아 올랐다. 눈앞의 기사들이 당장에라도 세이르를 끌고 갈 것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가 있다 한들 이건 데네브 왕국을 우습게 보는 행동이다. 나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세이르는 구금 중이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
‘모셔 가겠다’, ‘안 된다’ 실랑이를 벌이는 척하면서 나는 기사들을 관찰했다.
리어 왕국의 문양이 들어간 상복 차림에, 근조 깃발을 들고 기사답게 행동하고 있었으나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세이르를 데리러 왔으면 곧장 왕성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다른 데도 아닌 이 폭포 앞에서 우리를 찾아낸 거지?
우리가 오늘 이 시각, 파와리스 폭포에 온 것은 소풍을 가자는 내 제안 때문이다.
기사들이 하필이면 소풍 장소 근처를 지나가다가 마침 소풍을 나온 세이르를 마주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이게 우연일까? 그럴 리가 없지.’
오히려 세이르가 왕성 밖으로 나오는 순간을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쪽이 합리적이다.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은밀하게 세이르를 데려가기 위해.
“…….”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애초에 이자들이 진짜 리어 왕국의 기사는 맞나?
만약 이자들이 진짜 기사가 아니라면, 대체 정체가 뭐지?
‘……아.’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닥쳤다. 아주 거센 바람이었다.
기사들은 온통 검은 상복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그런데 바람 때문에 아주 잠깐이었지만 한 명의 소매 안쪽 피부가 드러났다.
기사는 곧장 소매를 다시 여몄지만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피부에 박힌 잿빛의 탁한 마석을.
“……세, 세이르.”
역시 이자들, 보통 기사가 아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지만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렸다. 소매 안쪽을 드러냈던 기사가 나를 살피는 기색이 느껴졌다.
기사들은 언제든지 검을 빼어 들 수 있는 자세로 서 있었다. 여차하면 나를 위협해서라도 세이르를 데려가겠다는 기세가 역력했다.
적어도 저들의 목적이, 세이르를 무사히 장례식에 참석시키는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폭포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여기로 사라를 불러야 하나? 만약 사라가 오면, 저 기사들을 막을 수 있을까? 어떡해야 하지?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운 그때.
“루카, 안젤리카를 부탁할게.”
“……세이르?”
세이르가 나를 막아서며 한 걸음 기사들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홀가분한 듯하게도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폐하께서 서거하셨다니, 조카 된 도리로 당연히 장례식에 참석해야지.”
“세이르, 잠깐만. 하다못해 사라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이 기사들 이상해. 평범한 왕국 기사가 아닌 것 같아. 이대로 가면 위험해.’
그런 뜻을 담아 세이르의 소매를 붙잡아 당겼지만.
세이르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조심스럽게 내 손을 떼어 놓았다. 그리고 다 안다는 듯 나를 보며 살짝 눈짓했다. 물러나 있으라는 신호다.
그러고는 기사들에게 자신을 안내하라 일렀다.
세이르가 어떤 의도인지는 단번에 알았다.
내가 바로 눈치챈 기사들의 위화감을 세이르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기사들을 따라 곧장 귀국하겠다고 말하는 속이 빤했다.
나와 루카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저 기사들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여기서 저항하면 나와 루카가 위험해질까 봐 순순히 가려는 거다.
본인은 위험에 처해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예전, 지하 수로에서 몬스터에게 쫓긴 일이 생각났다. 그때도 세이르는 나를 보호하겠답시고 도망을 포기하고 몬스터 앞을 막아서려 했다.
세이르는, 그날 그때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세이르 소공작님. 자, 말을 준비해 놨으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세이르가 순종적으로 행동하자 그제야 기자들이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기사 중 한 명이 말을 끌고 왔다. 말은 기사의 말과 가죽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 같았다.
말에 올라타기 직전, 마지막으로 세이르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 표정 하지 마. 그냥 장례식에 참석하러 가는 것뿐이니까.”
“…….”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숨이 막혔다. 가만히 서서 세이르를, 그리고 그의 뒤에 위협적으로 서 있는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저런 식으로 웃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세이르는 아쉬운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에 올라탔다.
기사들은 세이르를 데리고 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거친 움직임이었다.
* * *
어?
이대로?
정말 이대로 가는 거야?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곳에, 저 수상한 자들과 같이?
네가 있고 싶은 만큼 여기 있어도 좋다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떠날 수 있는 거야?
머리가 차게 식었다.
어찌나 서둘렀는지 기사들은 이미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세이르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입술만 잘근 씹었다.
그때.
“히히히힝!”
저편에서 복슬이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복슬이의 뒤로는 함께 묶어 두었던 말 두 마리가 보였다.
“안젤리카 님, 괜찮으세요?!”
이어 달려온 사라가 나를 보고 일순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세이르가 없는 것을 보고 곧 한숨을 삼켰다.
“기사 여럿이 카틀란 황야 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세이르 님은 그들과 함께 가신 모양이군요.”
“리어 왕국의…… 그레고리 왕이 죽었다고 해.”
“……아.”
사라의 낯빛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기사들이 어떤 명분으로 세이르를 끌고 갔는지 짐작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카틀란 황야라면…… 반대쪽이군요.”
“……응.”
사라의 말이 맞다. 카틀란 황야는 여기서 리어 왕국과는 반대쪽에 위치한 삭막한 땅이었다.
기사들이 카틀란 황야로 향했다면, 목적이 장례식은 아닌 셈이다.
“히히힝!”
복슬이가 자꾸만 콧김을 뿜으며 내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러나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라 복슬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루카가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복슬이의 고삐를 끌어당겨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안젤리카.”
“으, 응?”
“타! 얼른 쫓아가자.”
“…….”
내가 쫓아가서 뭘 할 수 있겠어. 고작 기사 다섯 명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세이르를 보내 버린걸. 세이르는 나 때문에 그 녀석들을 따라서 간 거잖아.
그러나 그런 투정 따위는 말할 틈도 없었다. 루카가 너무나도 분명한 확신을 담아 내게 말했기 때문이다.
“일단 가자. 이대로는 찜찜하잖아? 나도 그래. 그 녀석 멋대로……. 이대로는 가게 못 둬.”
루카가 날렵한 동작으로 자신의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꼭 따라와야 해!”라고 덧붙이고는 말을 달렸다.
“안젤리카 님, 제가 쫓아가 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사라 역시 이렇게 말하며 말을 타고 달렸다.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세이르가 나를 염려해서 저항하지 않고 떠났다는 걸 알아. 그의 마음은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세이르의 마음 따위 알 바냐. 하마터면 그만 착해져서 남을 배려할 뻔했네.
훌륭한 흑막의 외동딸이라면, 위험을 무릅쓰는 한이 있더라도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나는 복슬이의 안장 위에 앉아 고삐를 꽉 쥐었다.
“복슬아, 쫓아가자. 최대한 빨리 달려!”
“히히히힝!”
복슬이는 뽐내는 듯 경쾌하게 울더니…….
“흐갸아아악!”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