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 *
열린 벽 뒤쪽에는 작은 방이 있었다. 책상 하나와 책으로 꽉 찬 책장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나는 빽빽한 책장에서 일단 아무 책이나 꺼내어 펼쳐 보았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어린이용 글자 교본이었다.
세이르와 사라 역시 책을 꺼내 펼쳐 보더니 곧 덮었다.
“이건 요리책이야.”
“이건……. 종교 경전이군요.”
루카는 어쩐지 면목 없다는 투로 말했다.
“아마 평범한 책들 사이에 비밀 자료를 숨겼을 거야……. 그 인간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
“하긴 이므시 백작은 글씨도 못 쓸 것 같고 요리와 종교도 잘 모를 것 같긴 했어.”
“어디에 어떻게 숨겼는지까지는 몰라. 미안…….”
이 수많은 책들 사이에 내가 찾아야 하는 세 개의 힌트가 있다 이거지. 그러나 이 책을 일일이 확인하다간 한없는 시간이 들 테다.
“이럴 때는 이걸 써야지.”
나는 배낭을 열어 안을 뒤적뒤적했다. 그리고 돋보기 하나를 꺼냈다.
“쨔잔! 수상한 곳을 알려 주는 돋보기야.”
옆에서 세이르가 황당한 듯 물었다.
“그런 건 어디서 가져오는 거야?”
“응? 당연히 내가 만들었지?”
오늘을 위해 어제 급히 왕국 포인트를 투자해서 만들었지. 쓸 일이 생겨서 다행이다.
나는 돋보기로 책장을 비춰 보았다. 꼼꼼하게 이곳저곳을 살피자 곧 반응이 있었다.
띠링!
[비밀 저택의 첫 번째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1/3)]
“찾았다, 이거야!”
나는 돋보기로 비추었을 때 반짝거리던 책을 꺼냈다. 표지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검은 책이었다.
“……윽.”
곧장 내용을 훑어보다가 나는 눈을 찌푸렸다.
검은 책의 내용은 오래된 실험 기록이었다.
이므시 백작은 오래전부터 끔찍한 실험을 벌여 왔다. 주로 몬스터를 만들어 내는 실험이었다.
그리고 실험 기록 안에는…….
내가 입술만 잘근거리며 책을 노려보자 사라가 걱정스레 물었다.
“안젤리카 님, 괜찮으세요?”
“아, 아니야. 좀 어려운 내용이 많아서. 이건 이따가……. 아빠한테 봐 달라고 해야겠다.”
나는 책을 빠르게 덮고 배낭 안에 넣으려 했다. 그런데 서두른 탓에 그만 책을 놓쳐 버렸다.
툭!
바닥에 떨어진 책이 펼쳐지며 안의 내용이 드러났다. 옆에서 루카가 책을 집어 들었다.
“……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책을 돌려 달라고 말하려 했지만, 루카는 이미 안의 내용을 봐 버린 다음이었다.
실험 기록 뒤에는 루카에 대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
루카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스카트 마을이라는 곳 출신이었다.
스카트 마을은 주로 나무꾼이나 약초꾼 등, 숲의 자원을 채취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그 마을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흉포한 몬스터 떼가 마을을 습격했기 때문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사망했으며, 화를 피한 소수의 아이들은 노예 상인에게 팔려 갔다.
모두 이므시 백작이 벌인 끔찍한 실험 때문이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미 죽은 이므시 백작을 후려 패고 싶어서였다.
심지어 이므시 백작은 살아남은 아이 중 루카를 데려다 마족 부활 실험에 써먹기까지 했다.
“…….”
“…….”
잠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려서 기억하지 못했던 끔찍한 과거를 알게 된 루카의 기분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는 책에 쓰인 루카의 인적 사항을 다시 훑고는 입을 열었다.
“루카, 너.”
움찔.
루카가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다. 자료를 읽은 내 입에서 나올 말을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오해해서 미안해. 너 열 살 맞았구나.”
“뭐어?”
루카는 지금 그게 중요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차피 나는 생일 지나서 열한 살이니까, 내가 누나인 건 똑같지 않나?”
“그게 무슨 상관이야…….”
“왜애? 말했잖니. 나는 연공서열을 중요시한단다.”
루카는 어쩐지 맥이 탁 풀린 표정으로 책을 덮어서 내게 내밀었다.
“이제 됐어……. 이거, 책이나 얼른 가져가.”
[비밀 저택의 두 번째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2/3)]
두 번째 단서는 책상 서랍에서 나왔다. 서랍의 바닥에 난 작은 홈에 동전을 끼워 돌리자 바닥이 열렸다. 그 안에는 수북이 많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흠, 어디 보자. 첫 번째 편지는…….”
겉봉에는 가명일 것이 뻔한 우스꽝스러운 이름뿐, 주소도 인장도 없었다. 그리고 내용은…….
[나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밑도 끝도 없는 문구 한 줄. 정석적인 협박 편지였다.
나는 빠르게 편지를 읽어 보았다.
편지 상대는 이므시 백작의 몬스터 실험에 대해 알고 있다며, 이므시 백작을 협박했다.
협박 편지는 꾸준히 이어졌다. 편지 상대는 때로는 채찍, 때로는 당근으로 이므시 백작을 조종했다.
목적은 이므시 백작에게 마족 부활 실험을 시키는 것.
이므시 백작은 처음에는 협박에 의해 마족 부활 실험을 했지만, 점차 이것이 진짜 자신의 의지라고 믿게 되었다. 마족 안드라스만 부활시키면 나와 아빠를 해치우고 왕국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엄청난 세뇌였다.
나는 편지 더미를 챙기면서 생각했다.
‘역시 다른 배후가 있었어.’
기이한 스태프며 마족의 영혼을 제공한 사람도 이 편지 상대겠지.
[비밀 저택의 세 번째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3/3)]
마지막 단서는 바로 비밀 장부였다. 편지 상대는 주기적으로 상당한 금화를 보냈고, 이는 대부분 실험에 사용되었다. 마족 부활 실험에 고가의 마석이 엄청나게 들었기 때문이다.
‘즉, 상당히 돈과 힘이 있는 배후가 있었다는 거네. 마족을 부활시키고,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그런데 로날드는 누구지?”
장부에는 로날드라는 사람에게 꾸준히 돈을 보낸 기록이 있었다. 다 하면 몇천 골드는 되겠는데, 어떤 용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등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로날드는 듀란 시종장의 가명이란다.”
“……아빠!”
아빠였다. 막 던전 쪽에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우리 천사, 여기 있었구나.”
아빠가 성큼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생긋 웃으며 설명했다.
“듀란 시종장은 잔재주가 많거든. 로날드라는 이름으로 이므시 백작에게 접근한 김에 돈을 좀 뜯어냈단다.”
그러고 보니 아빠가 이므시 백작한테 돈을 준 일이 있었지. 듀란을 보내서 그 돈을 회수한 건가.
‘그랬구나…….’
이렇게 알아서 잘 흑막다웠던 아빠를 순진한 호구라고 생각한 내가 기가 막혔다.
‘아니, 아빠가 웃으면서 돈을 주는 모습을 보고 누가 흑막이라고 생각하겠어. 그때는 진짜 순진한 호구 같았다고!’
나는 억울하다.
그나저나 이제 이곳의 단서는 다 찾은 셈인데…….
아빠가 갔던 비밀 던전 쪽은 내 추측대로 이므시 백작의 실험 장소였다. 아빠가 나를 안에 데려가 주었지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상태창에 나온 단서를 전부 찾긴 했으나, 다시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정보가 중간에서 뚝 끊긴 느낌이랄까.
그저 이므시 백작에게 배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 단서만으로 배후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원래 떡밥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져야 하는 거 아냐? 상태창, 뭐 더 없어?’
속으로 클레임을 걸었지만 상태창은 잠잠하기만 하다. 마치 지금의 내게는 이 이상의 답을 줄 수 없다는 듯이.
진짜 배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역시 힘을 길러야겠지. 더 강해져야 한다.
‘부국강병밖에 답이 없어……!’
나는 다시 한번 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그나저나 빠르게 단서를 다 찾았더니 약간 시간이 남았다.
‘……이참에 거기도 한번 가 볼까?’
나는 곧장 돌아가자고 하는 대신 아빠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아빠, 여기까지 온 김에 저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그래? 말해 보렴. 아빠가 데려다주마.”
“스카트 마을이라는 곳에 가 보고 싶어요.”
* * *
잠시 뒤, 우리는 스카트 마을이었던 곳에 도착했다.
완전히 폐허가 된 마을에는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다 부서진 집의 잔해가 수풀에 뒤덮여 있었다.
루카는 착잡한 표정으로 마을의 흔적을 돌아보았다.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옛날이라고는 하나 원래 루카가 살던 곳. 복잡한 기분인 모양이었다.
나는 루카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빠, 여기에 마을을 만들고 싶어요.”
이 주위는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서 목재와 약초, 버섯 따위가 풍부했다. 그러니 사람과 시간만 있으면 발전시킬 수 있을 테다.
처음에는 목재와 약초를 채취하다가, 인구가 늘면 숲을 개간해서 목장을 만들어야지!
“이곳에 마을을?”
“네, 훌륭한 흑막 왕국이 되기 위해서는 자원을 개발해야 하니까요!”
“흑막이랑은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
“아니요, 이건 충분히 흑막스러운 일이에요!”
생일날, 아빠에게 엄마에 대해 들은 이후로 계속 생각하던 일이 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계속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
‘역시 엄마는 나 때문에 없어진 것이 아닐까.’
나만 없었으면 엄마 혼자서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을 테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 어딘가가 꽉 조이는 듯 아파 왔다.
언젠가 꼭 엄마를 찾아내야지.
찾기만 하면, 무사히 만날 수 있기만 하면…….
내가 황금 동상도 만들어 주고, 금화로 목욕도 할 수 있게 해 줘야지. 딸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 줄 테다.
그러니까 그날을 위해 미리미리 왕국을 발전시켜 둬야 했다.
아빠가 부드럽게 내 머리를 토닥였다. 그리고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은 생각이구나.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