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안젤리카.”
“하하, 하. 아빠.”
“지금쯤 방에서 아침을 먹고 있어야 할 우리 천사가 어쩌다 의자 안에서 자고 있을까?”
무섭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짜 흑막보다도 아빠가 무서웠다.
“……어,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거 알았어요?”
나는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차는 가도 중간에 멈춰 선 상태였고, 마차 창문 밖으로 사라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말을 타고 마차를 쫓아왔다고 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편지 남겨 놓고 왔는데.”
“안젤리카 님, 보통 편지만 두고 사라지는 상황을 가출이라고 한답니다.”
전말을 파악한 아빠가 손가락 끝으로 미간을 꾹 누르면서 말했다.
“사라가 데려다줄 테니 말을 타고 돌아가렴.”
“아, 아빠, 그게, 나 큰 말은 무서워서 못 타겠어요!”
내가 했지만 엄살 티가 아주 팍팍 나는 말이었다. 내 엄살에 아빠는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마차를 되돌리라고 해야겠구나.”
“으아앙! 아빠, 그것만은 제발!”
할 수 있어, 안젤리카. 힘내자.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해야 하는 법. 비정한 흑막의 외동딸답게…….
……빌자!
“얌전히 있을게요! 몰래 던전 안 들어갈게요! 진짜 안전한 데만 있을 건데! 이번에 같이 데려가 주면 절대 몰래 안 갈게요!”
그냥 단서 세 개만 보게 해 주면 되는데!
아빠는 더욱 골치가 아프다는 듯 다시 미간을 손으로 꾹 눌렀다. 그러면서도 내가 거듭 떼를 쓰자 결국 한발 물러섰다.
“……알겠다. 지금 되돌아가 봐야 다음에 또 숨어들 생각이구나.”
“아하, 하……. 그런 건 아닌데요…….”
“위험한 곳은 아니니 괜찮겠지. 대신 정말 얌전히 있어야 한다.”
“네! 진짜 얌전히 있을게요!”
아빠가 손을 뻗어 나를 쑥 들어 올렸다. 오래 웅크려 앉아 있었던 탓에 다리가 저렸다.
“아, 아야야! 다리가……. 다리가 저려요, 아빠.
“몰래 따라온 벌이란다.”
“힝…….”
마차 의자에 앉아 저릿저릿한 발을 쭉 폈다가 오므렸다가 하는데, 아빠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우리 천사, 혼자 왔을까?”
“…….”
나는 세이르와 루카만이라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입을 딱 다물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사라, 뒤쪽 마차도 확인해 보지.”
“네.”
결국 나와 세이르, 루카는 얌전히 마차 의자에 앉아서 비밀 거처에 가게 되었다.
* * *
목적지인 이므시 백작의 비밀 거처는 울창한 숲속에 있었다.
(구) 이므시 백작령의 경계 부근에 있는 이 숲은,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탓에 지형이 매우 복잡했다.
거기다 원래는 비밀 거처 주위에 따로 미로 마법이 걸려 있어서, 침입자는 무조건 길을 잃게 되어 있었다.
듀란 할아버지가 쉽게 비밀 거처를 발견하지 못할 만도 했다.
‘그 미로 마법은 방금 아빠가 간단하게 해치웠지만.’
그리하여 도착한 비밀 거처는…….
‘비밀 거처’라는 명칭이 주는 인상과 달리, 번듯한 2층 저택이었다. 화려하지만 묘하게 촌스러운 장식을 덕지덕지 붙여 둔 것이 과연 이므시 백작의 소유다웠다.
‘인테리어 점수로 따지면 13점 정도일까.’
그리고 저택에서 이어지는 좁고 긴 비밀 통로를 지나면 비밀 던전이었다. 입구를 봉인해 둔 비밀 던전이라니 수상한 냄새가 팍팍 났다.
아빠는 함께 온 병사들을 먼저 비밀 던전 입구 쪽으로 보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안젤리카는 이쪽이란다.”
“네에…….”
빨리 크든가 해야지. 어린애 서러워서 살겠나.
아빠는 나와 세이르, 루카를 비밀 거처의 1층으로 데리고 갔다.
1층에는 커다란 벽난로와 푹신한 소파가 놓여 있었다. 사라가 재빨리 벽난로에 불을 붙였고, 곧 훈훈한 열기가 방 안을 감쌌다.
아빠는 먼저 소파에 나를 앉히고는 사라에게 말했다.
“사라, 안젤리카를 부탁하지.”
“네, 맡겨 주세요.”
“안젤리카, 아빠가 먼저 던전을 살펴본 뒤 데려가 줄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네에…….”
“세이르, 루카도 안젤리카를 잘 부탁한다.”
내 양옆에서 세이르와 루카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던전 쪽으로 떠났다.
“안젤리카 님, 여기서 저랑 함께 크로셀 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리셔야 해요?”
“응, 알았어.”
“몰래 어디 가시면 안 돼요?”
“응…….”
이렇게 된 상황이 아쉽긴 하지만.
나의 명예를 위해 앞서 밝히자면, 나는 아빠 말대로 얌전히 방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정말로 정말이다.
[<시나리오 퀘스트> 비밀 거처를 탐험하기]에서는 이므시 백작의 ‘비밀 저택’에서 단서를 세 개 찾으라고 쓰여 있었다.
즉, 내가 조사해야 하는 곳은 던전이 아니라 저택 쪽. 굳이 던전 안까지 들어갈 필요 없이, 아빠가 돌아오면 함께 저택을 조사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루카다. 이곳에 도착한 뒤로 루카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추측이지만, 이므시 백작은 이곳의 비밀 던전에서 마족을 부활시키기 위한 실험을 한 것 같았다. 던전에 들어갔다가는 루카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곳에 무리해서 루카를 데리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나는 주위의 세 명을 안심시키기 위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밀착 감시 안 해도 던전에 안 들어갈 거거든?”
“정말이시지요?”
“응, 아빠가 올 때까지 얌전히 놀고 있을게.”
“네, 안젤리카 님.”
웃으며 대답하면서도 사라는 내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신뢰받지 못하는 삶은 고독한 거구나…….’
그런데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던 나는 곧 지루해졌다. 이곳에는 마땅히 흥미를 끄는 물건도 없거니와 놀 거리도 없어서였다.
‘로코라도 데려올걸.’
울음소리 때문에 아빠한테 들킬까 봐 방에 남겨 두고 와 버렸다.
“안젤리카, 뭘 하려고?”
내가 갑자기 배낭을 열어 뒤적거리자 세이르가 의아한 듯 물었다.
“뭐 놀 거리가 없나 하고.”
나는 오늘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는 온갖 물건을 챙겨 왔다. 그러니 이 중 뭐 하나는 노는 데 도움이 되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마법 폭탄이랑 함정 탐지기, 초급 포션 세트, 마석을 연료로 하는 손전등 따위로 뭘 하고 놀 수 있단 말인가.
배낭에 던전 탐험 도구가 아니라 트럼프 카드나 보드게임 따위를 챙겨 왔어야 한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너무 늦은 일이었다.
나는 도로 배낭을 닫은 뒤 세이르와 루카에게 물었다.
“세이르, 루카, 너희는 혼자 있을 때 주로 뭐 해?”
내가 얘들을 여기저기 끌고 다니기는 하지만 이십사 시간 내도록은 아니다. 혼자 있을 때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물어보면,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내 질문을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세이르가 먼저 대답했다.
“으음, 주로 검술 연습?”
내게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답이었다. 나는 기대를 품고 루카 쪽을 쳐다보았지만 이쪽은 더 심각했다.
“글쎄……. 아무것도 안 하는데.”
“뭐?”
“별로 뭘 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
안 되겠다. 다음에 루카한테 3000 피스짜리 지그소 퍼즐이라도 하나 구해다 줘야겠다. 내 부하 1호, 2호가 이렇게 재미없게 지내는 줄은 처음 알았다.
나는 세이르와 루카에게서 답을 구하기를 포기하고 그냥 소파에 등을 기댔…….
……다가, 다시 일어났다.
‘맞다, 이게 있었지.’
[<특성 : 패스파인더(B)>
분류 : 지도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변의 지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주변의 지도를 볼 수 있는 특성이다.
왕성에 있을 때는 어차피 길을 다 아니까 쓸 일이 없었지만, 지금은 도움이 될 테다. 어차피 지루하던 차, 나는 곧장 특성을 활성화해 보았다.
‘오, 뜬다.’
상태창에 내 주위의 지도가 나타났다. 게임의 미니 맵을 연상시키는 형태였다. 아직 특성의 숙련도가 낮아서인지 범위는 좁고 MP가 많이 소모되었다.
지도의 범위 끄트머리에 하얀 점이 깜빡거렸다. 하얀 점은 천천히 한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점의 위치와 움직임으로 보아 아빠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아빠 쪽은 별문제 없는 모양이네.’
그 외에는 이 저택의 구조가 나와 있을 뿐, 지도에 특이 사항은 없었다.
‘어……?’
그때 한군데 이상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나는 지도에서 눈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도에 그려진 저택의 형태와 실제로 보이는 벽 모양이 다른 것 같았다.
‘저쪽인가?’
폴짝!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벽난로에서 조금 떨어진 벽 앞으로 향했다.
사라, 세이르, 루카가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지만, 멀리 가지 않을 기색이자 굳이 나를 막지는 않는다.
“흐음…….”
내가 움직이자, 내 움직임에 따라서 지도의 표시 영역이 바뀌었다.
나는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며 지도와 실제 모습을 비교해 보였다. 역시 지도보다 앞으로 툭 튀어나온 벽이 있었다.
“흐으으음…….”
내가 계속 벽면을 노려보며 서 있자 사라가 가까이 다가와서 물었다.
“안젤리카 님, 그쪽에 뭔가 있나요?”
“여기, 벽이 좀 이상한 것 같아서. 뒤에 뭔가 있는 거 같아.”
사라는 손으로 벽을 통통 두드려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벽과는 재질이 다르군요. 하지만 이 저택은 이미 듀란 시종장이 조사한 곳이라……. 그냥 쉽게 열리는 문은 아닐 것 같아요.”
“그렇구나.”
그 최강 NPC 듀란 할아버지가 찾지 못했다면 그리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비밀 장소는 아니겠지.
일단 아빠가 돌아오면 다시 이야기해 볼까. 아빠라면 이 벽의 장치를 풀 수 있지 않을까.
그때, 세이르와 루카도 내 쪽으로 다가왔다. 세이르가 자신의 검 자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부숴 볼까?”
“아니, 괜찮……. 잠깐, 루카!”
루카는 말도 없이 곧장 벽을 쾅 두들겼다. 나는 깜짝 놀라서 루카를 뜯어말렸다.
“루카, 그만! 그만해.”
“어? 부수려던 거 아니었어?”
“아니야……. 장치를 풀 방법을 찾아봐야지.”
얘들이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극단적이람. 이런 장치는 힘이 아니라 지능으로 풀어야지!
일단 다시 소파로 돌아가려던 그때였다.
기우뚱!
등에 짊어진 배낭 때문에 무게 중심이 뒤로 쏠린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다가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았다.
“……안젤리카 님!”
“아야야…….”
깜짝 놀란 사라가 나를 일으키기 위해 다가왔다.
사라를 붙잡고 일어나려던 내 손에 뭔가 차가운 금속 버튼 같은 것이 눌렸다. 소파 뒤쪽에 달려서 거의 보일 듯 말 듯 한 아주 작은 장치였다.
“어?”
그때.
쿠쿠쿠쿵!
큰 소리와 함께 벽이 열렸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그 광경을 보다가 깨달았다.
‘세상……. 힘도 지능도 아니고 그냥 운빨이 최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