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나는 먼저 상태창을 열어 왕국 포인트를 확인했다.
[보유 왕국 포인트 : 6000]
한동안 포인트를 쓰지 않고 모아 둔 덕에 꽤 많은 양이 쌓여 있었다. 다음으로 왕국 포인트 특성 상점에 접속했다.
[<왕국 포인트 특성 상점>
승마 중급자(D) : 비매품
마장마술 초심자(E) : 비매품
단거리 경주의 제왕(C) : 비매품
…….]
‘어라…….’
그러나 승마 관련 특성은 전부 비매품이었다. 퀘스트를 클리어하거나 승마 관련 경험치를 쌓아야만 획득할 수 있는 듯했다.
‘흑, 그렇게 쉽게 날로 먹게 해 주지는 않는구나.’
그래도 포기하기는 이르다. 나는 승마 관련 특성 외에도 쓸 만한 것이 없나 특성 상점을 둘러보았다.
‘어, 이거다.’
페이지를 한참이나 뒤로 넘기자 딱 맞는 특성을 찾을 수 있었다.
[<특성 : 조랑말의 친구(D)>
분류 : 동물
조랑말의 마음을 약간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정 확률로 조랑말과 소통에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조랑말과 교감하기 위한 기초 특성입니다.
가격 : 1000 왕국 포인트]
가격에 비해 효과를 설명하는 어투가 모호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 특성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는 곧장 특성을 구입하고 활성화했다.
[동물복슬이와의 소통에 성공했습니다. 복슬이의 마음을 약간 알 수 있습니다.]
‘아……!’
순간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면서, 내가 타고 있는 이 말의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히히히힝!”
복슬이는 지금…….
‘아, 못하는 인간 태우니까 재미없다. 집에 가고 싶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이익, 내가 꼭 너 타고 만다!”
오기가 생긴 덕분인지, 몇 번 더 연습하자 처음보다 말을 잘 탈 수 있게 되었다. 느린 속도라면 돌아다녀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히히힝!”
‘불쌍해서 내가 봐줬다.’
복슬이는 이런 생각을 하며 울었지만 뭐 어떤가. 말을 타고 걸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내 승리지.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세이르는 승마장을 실컷 돌고 온 루카와 뭐라 뭐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좋아, 이참에 한 바퀴 돌고 올까?’
빨리 연습해서 퀘스트를 깨 버려야지. 이 말을 잘 타게 되면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그렇지?”
“피이잇!”
복슬이의 머리에 앉아 있던 로코가 기운차게 대답했다.
참고로 로코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복슬이를 꺼려 했다.
복슬이는 로코 앞에서 콧대 높게 굴었고, 로코는 자신에 비해 몸집이 큰 복슬이에게 기가 죽은 것 같았다.
나는 로코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그동안 감춰 왔던 사실을 알려 주었다.
“로코, 너는 사실 드래곤의 알에서 태어난 박쥐야!”
“……피이잇?!”
“껍데기가 드래곤의 알이랑 똑같았다니까! 그러니까 복슬이가 크다고 쫄지 마!”
“피잇……. 피, 피잇…….”
로코는 잠시 출생의 비밀에 충격받았지만, 곧 자신감을 되찾고 복슬이에게 적응했다. 지금은 복슬이 머리 위에 앉아 느긋하게 날개를 파닥거렸다.
그럼 얼른 승마 연습을 하고 와 볼까.
“자, 가자, 복슬아. 천천히, 마치 달팽이처럼 천천히 가는 거야. 알겠지?”
“히히히힝!”
“흐아악!”
처음에 복슬이가 빠르게 달리는 바람에 놀랐지만 곧 속도에 적응할 수 있었다. 복슬이는 정말 똑똑한 말이었고, 나는 점점 능숙하게 말을 탔다.
[누적 주행 거리 : 1000m]
나는 실컷 달리다가 1000m를 채우고 다시 세이르와 루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것 봐, 나도 이제 잘 타지?”
“그래, 많이 늘었네.”
세이르는 내가 내리기 편하도록 발 받침을 대어 주었다. 발 받침을 딛고 복슬이의 등에서 내리는 바로 그때였다.
마침 왕성으로 들어온 마차가 승마장 바로 근처에 멈췄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듀란 할아버지였다.
‘흐으음?’
듀란 할아버지는 나를 발견하지 못한 듯 곧장 중앙 현관으로 들어갔다. 다급한 발걸음이었다.
‘흐으으음?’
그러고 보니 생일 파티 때 듀란 할아버지가 없었지. 그냥 다른 일이 있나 보다 생각했었는데.
충성스러운 암살자이자 모략가인 듀란 할아버지가 자리를 비웠다가 갑자기 돌아오다니…….
느낌이 왔다. 이건 뭔가 있다. 아주 비밀스러운 사건의 냄새가 난다.
“안젤리카, 어디 가려고?”
“얘들아,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나는 듀란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내 예상대로 듀란 할아버지는 곧장 아빠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근처로 다가가자, 열린 문틈으로 듀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씀하신 장소에서 이므시 백작의 비밀 거처와 비밀 던전의 입구를 발견했습니다.”
‘뭐, 뭐라고? 비밀 던전?’
굉장히 신경 쓰이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이어 아빠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흐음. 지난번에 찾지 못한 이유는?”
“거처에 미로 마법이 걸려 있었던 데다 비밀 통로로만 접근할 수 있어서 발견이 어려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 비밀 던전에서 이므시 백작이 실험을 벌인 것 같습니다. 입구가 봉인되어 있어 안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처벌해 주십시오.”
듀란 할아버지는 아빠가 화를 낼 거라고 짐작했는지, 긴장된 낯빛으로 차렷 자세를 했다. 그러나 아빠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할 따름이었다.
“안을 확인해 봐야겠지.”
“크로셀 님이 직접 가십니까?”
“……그래. 내일 아침에 출발할 테니 사람을 차출하고 마차를 준비시켜 놓게.”
“네, 알겠습니다.”
이므시 백작의 비밀 거처라. 이름만 들어도 수상한 냄새가 팍팍 풍긴다. 엄청나게 뭔가 있을 듯한 느낌!
아직 완전히 밝혀내지 못한, 이므시 백작의 배후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띠링!
“……!”
기다렸다는 듯 눈앞에 상태창이 나타났다.
[<시나리오 퀘스트> 비밀 거처를 탐험하기
빠바바밤!
충성스러운 듀란이 이므시 백작의 비밀 저택을 발견했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궁금해하는 귀중한 단서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단서를 찾아봅시다.
남은 시간 : 10일
달성 조건 : 비밀 저택에서 세 개의 단서 발견하기 (0/3)
보상 : 경험치 800exp, 랜덤 왕성 조경 1개
실패 시 : 슬픔]
퀘스트 달성 조건이 세 개의 단서 찾기라니. 그렇다면 비밀 거처에서 이므시 백작의 배후에 대해 최소 세 개의 단서는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군.
그럼 정해졌네.
‘어떻게 해서든 나도 비밀 거처에 함께 가야겠어.’
그때, 듀란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아빠가 갑자기 일어났다. 그러더니 집무실 문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아차.’
나는 후다닥 집무실 문 앞에서 멀어지려 했지만, 아빠가 더 빨랐다.
달칵.
“안젤리카, 왔으면 얼른 들어오지 않고.”
“아하하……. 그게, 아빠가 듀란이랑 이야기하고 있어서요.”
“괜찮다. 우리 천사가 제일 중요하지. 자, 이리 오렴.”
아빠가 나를 번쩍 안아 들고는 안으로 데리고 갔다. 듀란 할아버지는 아빠와 내게 인사하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래서 우리 딸, 무슨 일일까. 아빠랑 같이 놀까?”
“아빠, 내일 그 비밀 거처에 나도…….”
“안 된단다.”
“힝.”
“그렇게 귀엽게 쳐다봐도 안 된단다.”
“히잉…….”
어째서 우리 아빠는 이럴 때만 칼같은 걸까?
물론 아빠에게 거절당했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그 방법’을 쓸 수밖에.’
“안젤리카, 몰래 가는 것도 안 된다.”
“히이잉…….”
* * *
다음 날.
동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 오는 이른 아침.
“으하아암…….”
“안젤리카, 그 커다란 가방은 뭐야?”
세이르가 크게 하품을 하던 내게 물었다.
나는 편한 옷을 입은 뒤 등에 거의 내 몸집만 한 배낭을 멘 상태였다. 배낭의 내용물은 여러 마법 도구와 비상식량 따위였다. 그 바람에 무게 중심이 뒤로 쏠려 걷기 힘들었다.
“다 필요해서 챙긴 거야, 필요해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곳이야.”
“그럼 안 가면 될 텐데.”
“세이르는 남아 있어도 돼. 나는 갔다 올 테니까.”
“……말을 말자.”
“저기, 방금 굉장히 문제아를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들켰네.”
“…….”
우리가 있는 이곳은, 마차 승차장과 가까운 쪽문 앞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바깥을 살펴보았다. 이른 시간이라 오늘 사용할 마차 두 대 주변에는 아직 사람이 없었다. 완벽한 타이밍이다.
밖으로 나가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루카를 돌아보았다.
“루카, 정말 같이 안 와도 되는데.”
당연하지만 내 목적은 아빠와 함께 이므시 백작의 비밀 거처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루카는 자신이 그 비밀 거처에 가 본 적이 있는 듯하다고 밝혔다. 강제로 끌려간 탓에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하지만, 이상한 저택에 간 적이 있었다고.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할 것 같아서 나는 루카에게 왕성에 남아 있어도 된다고 말했다.
“……상관없어. 괜찮아.”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루카가 대답했다.
결국 일행은 나와 세이르, 루카 이렇게 세 명이 되었다.
“좋아, 그럼 가자. 이따 봐.”
나는 한 번 더 신중하게 주위를 살핀 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쪽문을 열었다. 그러곤 두 개의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내가 앞쪽 마차에, 세이르와 루카가 뒤쪽 마차에 각각 나누어 숨는 계획이었다.
인원 배치가 이렇게 된 데에도 이유가 있다.
먼저, 내 배낭이 부피가 큰 탓에 우리가 한데 모여 숨기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세이르와 루카 모두 아빠가 타는 쪽 마차에는 숨고 싶지 않아 했다.
자연히 내가 아빠가 타는 쪽 마차, 세이르와 루카가 다른 쪽이 되었다.
나는 세이르와 루카가 무사히 마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확인한 뒤,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 좌판을 당겨서 여니, 딱 나만 한 아이와 배낭 하나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좋아, 완벽해.’
나는 의자 안으로 들어가 배낭을 끌어안고 앉았다. 의자 좌판을 닫으니 어둡고 아늑한 공간이 되었다.
이대로 마차가 출발해 비밀 거처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얼마간 기다리니, 아빠가 왔는지 마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더욱 더 숨을 죽였다. 곧 마차가 출발하면서 덜그럭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성공이다……!’
그런데 숨 쉬기도 조심스러운 상태로 어두운 곳에서 가만히 있으려니 너무 지루했다. 거기다 덜그럭덜그럭 규칙적인 마차의 진동이 마치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으으, 마차에 몰래 타려고 너무 일찍 일어났더니 졸려…….’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겁다.
나는 꾸벅꾸벅 졸다가 배낭에 머리를 기대고 스르륵 잠이 들었다.
…….
…….
“으, 으음……?”
어두운 곳에 갑자기 빛이 비쳐 들어와서 눈이 부셨다.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비볐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아빠가 빙그레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