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응? 무슨 뜻이니?”
아빠가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떠오른 상냥한 미소를 보니 내 생각에 더욱 확신이 들었다.
나는 지금 떠오른 생각을 당당하게 선언했다.
“아빠는 다정한 흑막이 되어야 해요!”
“으, 응……?”
아,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여태껏 나는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하기만 하면 SSS급 흑막 왕국에 도달하리라고 생각했다.
그야 <마.왕.꾸>를 플레이할 때는 사악한 흑막 크로셀 데네브를 잘 써먹기만 해도 SSS급 흑막 왕국을 달성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아빠는 처음부터 흑막스러웠다. 흑막인데도 데네브 왕국은 쫄딱 망하기 직전이었다.
즉, 아빠를 ‘그냥’ 흑막으로 만들기만 해서는 멋진 흑막 왕국을 만들 수 없단 뜻이다.
‘새로운 트렌드에 맞는 흑막을 만들어야지……!’
이 세계는 2회차라고 했다. 2회차가 되었으면 게임을 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나는 과거 <마.왕.꾸>를 플레이한 기억대로 아빠를 사악하고 잔인한 흑막으로 만들려고만 생각했다.
‘아빠 적성엔 안 맞는 것도 모르고 말야. 그러니 잘될 리가 없지.’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흑막이 필요한 법이에요!”
“으…… 으응?”
아빠가 어딘가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보았다.
“상냥하고 다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진짜 흑막! 이것이 아빠에게 딱 맞는 흑막 타입이에요. 줄여서 다정흑막!”
분명 엄마를 노린 놈은 엄청난 힘을 지녔겠지. 아빠조차도 아직까지 배후를 밝혀내지 못할 정도니까. 어쩌면 뒤에서 상상도 못할 끔찍한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 안젤리카 데네브의 엄마를 노린 놈을 가만히 둘 수 없지.
엄마를 찾고, 복수를 하고, 뭔지 모를 세계의 위기를 해결하고, 흑막 엔딩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역시 힘이 필요하다.
그러니 아빠를 새로운 타입의 흑막으로 만들고, 왕국을 더더욱 발전시키자.
마족 안드라스는 세계가 올바른 결말에 도달해야 하며, 올바른 결말이란 내가 생각하는 결말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지 않나.
바로 흑막 엔딩이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빠, 우리 부국강병을 목표로 해요!”
“우리 천사는…… 어려운 말도 잘 아는구나. 똑똑하기도 하지.”
목표를 정하자 힘이 났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내일부터 다시 흑막 트레이닝을 시작하겠어요. 아빠, 다정하고 멋진 흑막이 되는 거예요.”
“아빠는 이대로도 괜찮은데…….”
“먼저, ‘크크큭!’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흑막 웃음이 아니라, 새로운 흑막 웃음을 연습하죠!”
“그, 그래……. 우리 천사, 기운을 차려서 다행이구나.”
이상하다. 이렇게 멋진 계획을 세웠는데, 아빠는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명백히 화제를 돌리려는 기색으로 내게 손을 내민다.
“다들 기다리겠다. 이제 돌아갈까?”
뭐, 본격적인 트레이닝은 내일부터니까.
“네, 돌아가요.”
나는 아빠의 손을 잡으려다가, 잊고 있던 물건을 떠올리고는 멈칫했다.
“아빠, 저 드릴 게 있어요.”
“안젤리카 생일인데 아빠한테 선물을 주면 어떡하려고.”
“이거예요.”
나는 품에서 낡은 은제 로켓을 꺼냈다.
파와리스 폭포에서 찾은, 크로셀 데네브의 이름이 적혀 있던 로켓이다. 아빠의 물건인지, 아빠가 누군가에게 준 물건인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물건 같았다.
전에는 아빠가 피하는 바람에 주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괜찮을 거란 느낌이었다.
“얼마 전에 파와리스 폭포에 갔을 때……. 그, 주운 물건이에요.”
아빠는 은제 로켓의 안을 보고 한참이나 굳어 있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 듯 아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와리스 폭포는…… 아델리아의 마차를 발견한 곳이다.”
“네?! 정말요?”
“그래.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 앞에 부서진 마차와…… 우리 천사가 있었단다.”
아. 그래서 파와리스 폭포의 이야기를 했을 때 아빠가 피한 거구나. 괴로운 기억일 테니까.
그런데 엄마가 습격당한 장소 근처에 이 로켓이 있던 것은 우연일까.
“아빠가 전에 준 금화 펜던트 있지. 지금 가지고 있니?”
“네, 맨날 차고 다녀요.”
나는 목에 건 펜던트 줄을 당겨서 아빠에게 보여 주었다.
“잠시만 이리 주렴.”
아빠는 내게 금화 펜던트를 받아 가더니 로켓 안에 끼웠다. 금화 펜던트 뒷면의 무늬가 로켓에 맞물리면서 딱 맞게 들어갔다.
“어……!”
“이건 이렇게 두 개가 하나의 물건이란다.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아델리아와 내가 하나씩 나눠 가졌지.”
“…….”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둘 다 없어져 버렸단다. 금화는 어떻게 찾았지만, 이 로켓은 도무지 찾을 수 없었는데…….”
로켓을 만지는 손길에서 짙은 그리움이 느껴졌다.
“이렇게 우리 천사의 손에 들어오다니, 무슨 인연인지도 모르겠구나.”
아빠는 금화 펜던트를 안에 넣은 로켓을 내게 걸어 주며 빙그레 웃었다.
“자, 안젤리카에게 주마. 받아 주겠니.”
“……네.”
나는 펜던트와 하나가 된 로켓을 소중하게 꼭 쥐었다.
* * *
북쪽 회랑을 떠나 아빠와 함께 다이닝 룸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어쩐다. 이거 완전 진상이네…….’
지금 그거지.
기껏 준비한 생일 파티를 시작하자마자 파티 주최자와 주인공이 함께 나가서 한동안 돌아오지 않는 상황. 케이크며 음식이며 촛불 장식이며 다 그대로 내버려 둔 채로!
‘어떡해. 세상의 모든 음식을 먹어 치우고 싶어 하는 니키가 얼마나 슬퍼하겠어!’
“아빠, 우리 빨리 가요.”
“안젤리카, 조심해야지. 뛰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빨리 파티를 계속하고 싶어서요. 빨리요.”
나는 후다닥 다이닝 룸으로 돌아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다들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나와 아빠를 쳐다보았다. 사라가 내 손을 잡고 케이크 앞으로 데려갔다.
“와아, 안젤리카 님, 오셨군요. 자, 케이크의 촛불을 끌 시간이에요.”
눈가가 붉었을 텐데 모르는 척해 줘서 고마웠다.
“생일 축하드려요. 자, 후 하세요.”
케이크가 워낙 커서 꼭대기에 있는 촛불을 불어 끄기 위해서는 발 받침이 필요했다. 나는 사라가 가져다준 발 받침 위에 올라가서 촛불을 훅 불어 껐다.
주위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니키가 다시 폭죽을 팡 터뜨렸다. 폭죽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나부끼는 꽃가루들이 황금빛 나비로 변했다. 가슴이 두근두근한 광경이었다.
“케나스, 고마워. 이 케이크 진짜 맛있어 보인다.”
“저야말로, 안젤리카 님 덕분에 왕성 요리사가 될 수 있어서…… 흑……. 죽어도 잊지 않겠…….”
아니, 죽지 마, 죽지 말자고.
케나스가 케이크를 큼직하게 잘라 접시에 담아 주었다. 곧 모두에게 케이크 한 조각씩이 돌아갔다. 나는 아빠 옆자리에 앉아 케이크와 파티 음식을 맛보았다. 정말 맛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파티가 무르익었을 때쯤, 니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떤 물건을 내 앞에 내어 놓았다.
“안젤리카 님, 이거. 생일 선물이야!”
“어, 정말? 안 그래도 되는데……. 고마워.”
나는 니키가 준 꾸러미를 풀어 보았다. 프릴이 달린 에이프런과 토시가 들어 있었다. 실용적이면서도 예쁜 선물이었다.
“잘 쓸게. 고마워.”
“사실 내가 키운 거대 틸라를 선물로 주고 싶었는데…….”
아. 그 틸라 밭 근처에 있던 내 허리까지 오는 커다란 틸라 말이구나. 어쩌다 저렇게 크게 키웠나 했다.
“생각보다 안 커져서. 내년에는 진짜 크게 키워 줄게!”
“아니, 충분히 커 보이던데……? 거기서 더 키운다고?”
어쨌건 나는 의지를 불태우는 니키를 응원해 주었다.
“저기, 이, 이거…….”
이번에는 루카였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한참 내 주위를 서성이더니 불쑥 작은 물건을 내민다.
작은 토기 화분에 파란 꽃이 피어 있었다. 꽃은 아주 싱싱하고 아름다웠다.
“루카가 키운 거야?”
“뭐……. 그런 셈이지.”
“고마워.”
화분을 받아 들고 꽃을 쳐다보다가 나는 흠칫했다. 식물에 강력한 힐링 효과가 있는지 내 마음이 순식간에 말랑말랑해져 버린 것이다. 위험한 꽃이다. 자칫해서 착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키워야겠다.
“피잇! 피이이!”
그때, 테이블 위에 얌전히 앉아 있던 로코가 날개를 파닥거리면서 다가왔다.
“로코, 왜 그래?”
“피이이……. 피잇!”
가만 보니 로코는 발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내게 건네려는 듯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 로코도 언니 선물 주려는 거야? 아이참, 똑똑하기도 하지. 고마워.”
나는 무심결에 손을 내밀다가 멈칫했다.
아니, 잠깐. 잠깐만?
저거…… 묘하게 광택이 나는 작은 몸집에 다리가 여러 개 달려 있는데? 설마 ‘그거’야? 아니지?
“으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피이이잇!”
그러나 이 박쥐는 또 사냥 놀이를 하는 줄 아는지 나를 쫓아왔다.
“로코, 그거 버려! 제발!”
“피이잇…….”
저 표정은 내가 왜 선물을 안 받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슬퍼하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그렇게 귀엽게 쳐다봐도 벌레 시체는 못 받겠다.
“고마운데, 진짜 고마운데 마음만 받을게.”
“피이이잇!”
“으아아앙, 저리 가! 로코, 한 번만 봐주자. 진짜 봐줘!”
나는 내게 선물을 주려고 날아오는 로코를 피해 케이크 주위를 빙빙 돌았다.
이 소동은 아빠가 공중의 로코를 확 낚아챈 뒤 로코가 들고 있는 ‘그것’을 창밖으로 던져 버린 뒤에야 진정되었다.
그러던 중에 로코가 케이크에 머리를 처박는 바람에 다시 난리가 났다.
안 되겠다. 나는 크림 덩어리가 된 로코를 젖은 수건으로 팍팍 닦아 준 뒤 선언했다.
“이제 파티는 끝이야, 끝! 다들 해산!”
벌컥!
그때, 갑자기 다이닝 룸의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 서 있던 사람은 뜻밖에도 로디였다.
“……로디?”
“허억, 헉……. 아슬아슬했군요…….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아니요, 늦으셨어요. 파티 시작하기 전에 도착했어야지요.”
늘 상냥한 사라가 로디에게 퉁명스럽게 핀잔을 주었다.
“휴우, 한 번만 봐주세요……. 진짜 힘들었다고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로디도 내 생일에 와 준 거야? 그건 고맙지만, 왜 그렇게 뛰어온 거야?”
“그게……. 헉, 헉…….”
그때,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로디에게 사라가 차가운 물을 가져다주었다. 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린 로디가 아빠에게 눈인사를 한 뒤 내게 말했다.
“안젤리카 님, 잠시 밖으로 나와 보시겠어요?”
“어엉? 지금?”
“로디가 무슨 볼일이 있나 보구나. 아빠랑 같이 가 볼까?”
아빠는 이미 로디의 용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 빙그레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