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아빠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엄마는 데네브 왕국에서의 근무가 끝나 다른 지역으로 떠나게 되었다. 순례 길을 따라 대륙을 한 바퀴 도는 머나먼 여정이었다.
아빠는 조금만 더 데네브 왕국에 머무르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엄마는 단호했다. 꼭 가야만 한다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떠날 준비를 했다.
“나는 속이 상한 나머지 아델리아에게 화를 냈다. 아주 크게 냈지.”
“너무해요!”
“그때는 아빠가 젊고 혈기 넘쳤어서……. 조금, 그, 거칠었단다. 지금은 후회한다.”
나는 머릿속에서 아빠의 젊은 모습 상상도를 조금 조정했다. 진심을 그대로 전하지 못하고 화를 내고, 상대를 상처 입힌 뒤에야 후회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때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 세상에 신관이 아델리아만 있는 것도 아닐진대, 왜 굳이 아델리아가 가야만 하는지 말이야.”
“…….”
“아델리아는, 해야 할 일을 마치면 돌아오겠다고, 돌아오면 할 말이 있다고 하고 떠났고.”
여기까지 말하고 아빠는 한참이나 침묵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마치 달콤한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아빠의 얼굴에서 풋풋한 쑥스러움이 사그라졌다. 남은 것은 그저 짙은 그리움이다.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빠는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러 달이 지난 뒤, 아델리아가 데네브 왕국으로 돌아온다는 편지를 받았단다. 아빠는 어쨌건 아델리아를 만나서 싹싹 빌 생각뿐이었지. 그런데 오기로 한 시간이 되어도 마차는 도착하지 않았고…….”
머뭇거림과 함께 말이 끊겼다.
아빠는 나를 꼭 껴안고 뺨을 맞대었다. 아빠의 떨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가 무척 괴로운 기억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몬스터가 습격했다.”
“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빠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그 속에 담긴 슬픔은 감춰지지 않았다.
“나는 곧장 아델리아의 마차를 수색했다. 그리고 왕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차를 찾아냈지. 다 부서진 마차 앞에는 몬스터의 시체가 있었고, 피가…….”
“…….”
“아델리아는 강한 사람이란다. 그 성격도 그렇지만……. 신성 마법을 쓸 수 있는 뛰어난 신관이야. 어지간한 몬스터는 혼자서 처리할 수 있어. 그런데도…….”
거대한 몬스터의 습격에 마차는 반파 상태였고, 안에는 피가 흥건했다. 말은 몬스터에게 물려 죽어 있었다. 그러나 엄마의 시신은 마차 안에서도, 그 주변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마차 안에는 포대기에 싸인 작고 예쁜 아기가 남아 있었단다.”
“설마, 그 아기가…….”
“그래, 우리 천사란다. 포대기 안에는 이름과 출생일을 적은 쪽지가 있었지.”
나는 떨리는 숨을 삼켰다. 아빠는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주위를 한참 수색했지만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빠는 아델리아가 살아 있다고 믿고 오랫동안 이 사건의 배후를 밝혀내려 했다.”
“…….”
“이므시 백작을 당장 처리하지 않고 살려 둔 것도 그래서였지만…….”
아빠는 엄마의 마차를 습격한 범인으로 제일 먼저 이므시 백작을 의심했다. 이므시 백작은 오래전부터 몬스터를 이용한 실험을 벌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이므시 백작을 제멋대로 하게 놔두면서 듀란을 붙여 행적을 조사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몬스터로 마차를 습격한 범인은 이므시 백작이 맞았다. 엄마는 혼자서 몬스터를 해치웠지만 상처를 입었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나 때문에 안젤리카를 위험하게 만들어 버렸어. ……미안하다.”
“아니에요! 나는, 아빠가 와 줘서 괜찮았어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세요.”
내 말에 아빠가 살짝 웃음 지었다. 너무나도 슬픈 미소였다.
“이상한 일이지. 현실적으로 이미 가망 없다는 걸 알아. 아는데, 그런데도…….”
“…….”
“지금도 아델리아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만 같아.”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아빠는 내가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주려는 듯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나는 고개를 들어 엄마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삐걱거리던 기억과 정보들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아빠는 혼자 나를 키우게 되었구나. 그래서 이따금 쓸쓸한 표정을 지었구나. 그런 슬픈 깨달음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이윽고 생각은 원작의 크로셀 데네브에게도 가닿았다.
흑막 크로셀 데네브는 결코 안젤리카에게 다정하지 않았지만, 안젤리카를 죽이지도 않았다.
크로셀 데네브의 안젤리카에 대한 모호한 행동들이 엄마의 실종으로 인한 것이었다면?
그렇잖아. 엄마가 그렇게 시신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는데, 혼자 살아남은 딸을 어떻게 사랑하겠어.
나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내가 미운 적은 없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니.”
고개를 돌리니 깜짝 놀란 아빠의 얼굴이 보였다.
아,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 잘못 나왔다고 얼버무렸지만, 아빠는 물러서지 않고 재차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나는 마지못해 조심스럽게 내 생각을 말했다.
“나라면 그랬을 거 같아요. 엄마는 사라지고, 나만 남아 있었다면서요.”
“그래, 그랬지.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니.”
“엄마는 나를 지키려다가 몬스터에게 당한 건 아닐까. 그러면 나만 없었다면…… 엄마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마차 안에, 내가 아니라 엄마가 남아 있어야 했는데.”
“……안젤리카!”
갑자기 난 큰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단 한 번도…….”
“…….”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 안젤리카.”
아.
흔들리는 아빠의 눈을 보는 순간 알았다.
아빠는 방금 내 말에 상처받았다. 내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버렸어.
“너를 보는 순간 내 딸임을 알아봤단다. 정말 천사 같았지. 내가 결코 좋은 아빠는 아니었지만……. 과거에도,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다.”
“그래도…….”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원망할 대상을 찾게 되지 않을까. 한 번쯤은 부당한 원망을 하고 싶지 않을까. 나조차도 지금 내가 원망스러운데, 아빠가 어떻게 나를 좋아하겠어.
그러나 아빠는 다정함만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속삭였다.
“안젤리카,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한다. 네가 태어난 날을 진심으로 축하한단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토록 다정한 축하에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아빠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한참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동안 피해 다닌 거 죄송해요. 그냥……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하하……. 괜찮다. 안젤리카가 얼마든지 피해 다녀도 아빠가 기다릴 테니.”
아빠가 내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긴 이야기를 끝낸 아빠는 아까보다 조금은 편해 보였다.
한결 부드러워진 정적 속,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빠,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응?”
“전에, 내가 아파서 오래 잠들어 있었다는 거요. 나 얼마나 잠들어 있었어요?”
아빠는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1년 정도 되는 것 같구나.”
휴, 생각보다 긴 기간은 아니구나. 이 몸에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것도 그렇고, 듀란 할아버지의 모호한 말도 그렇고. 내가 한 10년 누워 있었나 싶어 걱정했었다.
“왜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건…….”
아빠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과거를 훑는 눈빛이 아련하다.
“안젤리카가 아픈 기억을 짊어지지 않길 바랐단다. 좋지 않은 건 모두 나 혼자 질 테니, 우리 천사는 늘 평화로웠으면 했다.”
“나는 그런 거 싫어요.”
“…….”
아빠는 무슨 뜻이냐는 듯 가만히 나를 보았다. 속눈썹 그림자가 엷게 드리워졌다.
“저기, 아빠……. 루카 일 말인데요.”
아빠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리고 이 화제를 꺼내고 싶지 않다는 듯 빠르게 말했다.
“그 소년은……. 아빠가 더 간섭하지 않을 테니, 안젤리카가 원하는 대로 하렴.”
“아니, 그게 아니에요.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
“아빠가 나를 걱정해서, 내가 다치지 않길 바라서 루카를……. 그, ……처리하려 한 거, 알아요.”
아빠가 조심스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를 껴안은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냥 평화롭게만 살고 싶은 게 아니에요.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 가고 싶어요. 그러니까, 아빠가 좋지 않은 일을 혼자서 전부 짊어지는 건…….”
“……하하하!”
가만히 내 말을 듣던 아빠가 도저히 못 이기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웃음이었다.
“아빠……?”
아빠는 어깨를 떨며 한참이나 웃었다. 내가 두어 번 더 부른 뒤에야 겨우 아빠가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우리 천사, 엄마랑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네?”
“아델리아도 데네브 왕국을 떠날 때 그런 말을 했단다. 그냥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며 살고 싶다고. 그래서 지금은 떠나야 한다고.”
“정말요?”
“하하, 이제 보니 안젤리카는 얼굴 말고도 엄마를 많이 닮았구나.”
이상한 기분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엄마를 닮았다는 말이 이렇게나 기쁘게 느껴지다니.
피가 흥건한 마차의 잔해, 발견되지 않는 시신……. 현실적으로 엄마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높지 않겠지.
하지만 마족 안드라스는 내게 엄마를 찾으라고 말했다.
그 말은, 이 세상 어딘가에 엄마가 살아 있다는 뜻이 아닐까. 엄마를 찾으면 이제껏 풀지 못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엄마를 찾자.’
머릿속이 맑아졌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사건에는 분명 이므시 백작 이상의 배후가 있다. 어떤 작자인지는 몰라도 나, 안젤리카 데네브의 엄마를 해치고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길. 반드시 찾아내서 족쳐 줄 테다.
아직 풀지 못한 의문도 많다. 마족 안드라스의 알 수 없는 말이며, 내가 왜 잠들어 있었고 또 왜 깨어났는지. 그리고 이 세계에 감춰진 수많은 비밀들까지.
언젠가 반드시 다 알아낼 테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아빠, 내가 잘못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