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9장. 에메랄드빛 리본
왕성의 뒤뜰, 니키의 ‘훌륭한 틸라 밭(A)’.
그동안 크게 성장한 이 밭은, 처음 내가 호미질로 일군 작은 텃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최첨단이었다.
밭의 절반에는 최근에 개발한 새 작물인 틸라순무, 나머지 절반에는 일반 틸라가 자라고 있다. 마석으로 작동하는 스프링클러가 자동으로 물과 영양분을 분사한다. 그리고 다 자란 작물은 자동 수확 기계가 알아서 수확하고 분류했다.
‘여기만 엄청나게 최첨단이네…….’
조금 있으면 아예 스마트 팜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째 데네브 왕국이 점점 첨단 농업 국가에 가까워지는 느낌인데.
니키는 무슨 볼일이 있는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나는 최첨단 밭 근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괴었다.
무게가 실리니 테이블의 상판이 삐걱거린다. 지난번, 이므시 백작이 습격한 일로 한번 부서졌기 때문이다. 새 테이블을 살까 하다가, 그냥 상판 아랫부분에 보강재를 대어 고쳤다.
이 테이블이 제일 모양도 재질도 취향에 맞단 말야. 내 키에 딱 맞게 만들어져서 쓰기도 편하고.
“피이잇!”
로코가 살짝 기울어진 테이블의 경사를 이용해 신나게 미끄럼틀을 탔다.
그래, 로코도 좋아하니까, 뭐.
아무튼.
‘으으으…….’
내 앞에는 하얀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제일 윗줄에 적은 ‘아델리아’라는 글자 외에 종이는 텅 비었다.
나는 요 며칠 엄마에 대해 알아보는 중이었다. 마족 안드라스가 남긴 엄마를 찾으라는 말 때문이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이므시 백작과 대화할 때 아빠가 꺼낸 ‘아델리아’라는 이름뿐.
그러나 아무리 알아보려 해도 아델리아가 어떤 사람이며, 왜 데네브 왕국을 떠났는지 힌트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내 <마.왕.꾸> 지식도 도움이 안 되었다. 게임 시작 시점에 이미 엄마는 데네브 왕국을 떠난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렇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수 있는 건가……?’
급히 마법 전서구를 만들어 알렉산드라에게 편지도 보내 보았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엄마에 대해 그 이상 아는 것은 없다고 미안하다는 답장을 보냈다.
“……안 되겠다.”
나는 새하얀 종이에 줄만 죽죽 긋다가 결국 펜을 놓았다. 그리고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결심했어.”
“피이잇?”
“가자, 로코!”
“피이이!”
로코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서 내 주머니 안에 쏙 들어왔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 봤자 소용없다. 혼자서 머리를 싸매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다. 더 이상 피하지 말고, 아빠에게 엄마에 대해 물어보자.
길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내가 서 있는 장소를 모르기 때문이다.
마족 안드라스가 한 올바른 결말이니 세계가 멸망한다느니 운운하는 말의 진의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엄마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엄마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빠일 테니까. 피하기만 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쓸데없는 고민을 했네. 고민할 시간에 행동하는 것이 훌륭한 플레이어의 자세지.
그래, 엄마에 대해 알아낸 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목표를 세우자.
“이야압!”
“피이잇!”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기합을 넣은 뒤 힘차게 걸어 나갔다.
조금 걷다 보니 마침 뒤뜰 반대쪽에서 트리스탄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침 잘됐다. 트리스탄에게 아빠가 지금 어디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트리스탄! 아빠 어디 있는지 알…….”
“어, 어이쿠! 오늘 뒷문 경비 담당인데 늦을 뻔했네! 빨리 가야지!”
“어엉……?”
연극적인 투로 혼잣말을 한 트리스탄이 황급히 오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어째 영 수상쩍다. 애초에 트리스탄이 가는 방향은 뒷문 쪽도 아니었다.
‘왜 저러지?’
좀 의문스러웠지만, 나는 일단 아빠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길이 엇갈리기라도 했는지 아빠는 집무실에 없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는 이왕 마음먹은 김에 아빠를 찾아다니기로 했다. 그러다 누구라도 마주치면 아빠가 어디 있는지 물어봐야지.
그런데…….
집무실을 나와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나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어어엉……?”
왕성 안인데 이렇게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건가? 어떻게 사람이라곤 한 명도 안 보이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마법 도구 공방과 암흑 기사단에도 가 보았다. 일단 세이르랑 루카를 찾아봐야겠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세이르와 루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암흑 기사단에 아직 따뜻한 찻잔이 놓여 있는 걸 보니 방금까지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다들 이상했단 말이지.’
사라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내 시중을 들어 주지만, 뭔가 감추는 것이 있는 느낌이었다. 어제는 은근슬쩍 내게 어떤 드레스가 가장 마음에 드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사라가 골라 주는 드레스는 전부 예쁘고 내게 잘 어울렸기 때문에 나는 다 좋다고 했다. 하지만 사라는 내 대답이 성에 차지 않는지 끈질기게 물었다.
“그럼 보라색이랑 빨간색 중에서는 어느 쪽이 좋으세요?”
“어? 글쎄……. 그러면 빨간색?”
“네, 빨간색을 좋아하시는군요. 후후.”
케나스는 오늘따라 다양한 요리를 조금씩 내고는 어떤 것이 제일 맛있는지 집요하게 물어보았다.
다 맛있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맛있다고 대답했는데 그는 거의 울려고 했다. 거듭 뭘 좋아하는지 묻는 통에 결국 몇 가지를 골라 주었다.
신제품 선호도 조사는 지난번에 다 끝냈을 텐데? 또 신제품이라도 기획하는 건가.
로디는 까다로운 의뢰가 하나 들어왔다며 요즘 왕국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거짓말은 아닌 듯했지만 이쪽도 신경 쓰였다.
평소에는 부르지 않아도 ‘돈 되는 이야기가 있다.’느니 ‘왕녀님, 뭐 정보 없으신가요…….’라면서 불쑥불쑥 나타나더니 말야. 대체 누구의 무슨 의뢰길래 코빼기도 안 보이지?
대체 뭔데? 뭔데 나만 빼놓고 다들 의뭉스럽게 구는 거람?
으으, 무시하려 했지만 역시 신경 쓰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홱 돌렸다.
이럴 때는 가장 거짓말을 못 할 것 같은 사람을 찾아야지. 바로 그 사람 말야.
최첨단 틸라 밭 근처로 돌아가 잠시 기다리자 곧 타깃이 내 앞에 나타났다.
니키는 손에 웬 짐을 잔뜩 들고 밭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잠시 몸을 숨겼다가 불쑥 니키 앞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니키, 안녕?”
“흐아아악!”
투두두둑!
니키는 너무 놀라는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짐을 바닥에 다 떨어뜨렸다.
“노…… 놀랐잖아, 안젤리카 님!”
“미안,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어.”
“괘, 괜찮아. 그보다 나는 일이 좀.”
정말 바쁜 일이라도 있는 건지, 니키는 굉장히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바닥에 떨어진 짐을 주워 주려고 했다.
“이거 내가 주워 줄…….”
탁!
“니키?”
“미, 미안, 안젤리카 님! 이거…… 아무튼 미안!”
니키는 내 손에서 물건을 낚아채더니 급히 바닥의 짐을 주웠다. 어찌나 서두르는지 내 얼굴을 한번 보지도 않았다.
“그럼 나 가 볼게!”
후다닥 니키가 달려갔다.
“…….”
이렇게 왕성 사람들이 자꾸 나를 피하거나 이상하게 구니 나는 단단히 골이 났다.
나는 유일하게 내 옆에 있어 주는 로코를 붙잡고 다짐을 받았다.
“로코, 너는 언니한테 감추는 거 없지?”
“피이…… 피이잇?”
“너는 언니한테 비밀 만들면 안 돼. 알았지? 그러면 간식 안 줄 거야.”
“피이잇…… 피…….”
좋아, 로코에게 다짐도 받았겠다. 나가자.
나는 곧장 아빠를 찾으려던 계획을 변경해서 왕성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기분도 상했겠다, 마을에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흥, 다른 사람들이 없어도 로코랑 같이 놀 거다, 뭐.’
왕성에서 나와 제일 처음으로 향한 곳은 역시 늘 가던 잡화점이다.
예전 축제 날에 잡화점에서 마음에 드는 리본을 봤었다. 그때는 보기만 하고 사지 않았었지만, 이참에 살 생각이다.
‘까짓것 충동구매 좀 해 버리지, 뭐.’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잡화점 카운터에 제랄드 아저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디드리크 신관님?”
“어, 안녕하세요, 왕녀님.”
바로 얼마 전부터 데네브 왕국에서 근무하게 된 신관 디드리크였다. 그는 무척 자연스럽게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손님들에게 돈을 받고 있었다.
“신관님이 왜 여기 계세요?”
“아까 신전에서 쓸 잡화를 사러 왔는데, 제랄드 씨가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하면서 카운터를 부탁했어요.”
잠깐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그러나 능숙하게 물건을 정리하는 디드리크의 모습은 꽤 오래 카운터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
“얼마나 됐는데요?”
“글쎄요. 한…… 세 시간쯤?”
“네에에?!”
무슨 급한 사정인지는 몰라도, 손님에게 세 시간이나 카운터를 맡기는 것은 너무 심하다. 나는 깜짝 놀라서 디드리크를 만류했다.
“그렇게 오래 가게를 맡기다니 너무 심해요! 그냥 가게를 닫고 돌아가세요. 내가 제랄드 아저씨한테 말할게요.”
“걱정 마세요. 일한 시간만큼 돈으로 받기로 했으니까요.”
“아항.”
아니, ‘아항’이 아니지 ‘아항’이.
“그치만 신전 일도 있잖아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신전에 찾아오는 방문객도 거의 없고.”
나는 지난번에 가 본 마을 광장 근처의 신전을 떠올렸다. 확실히 작고 방문객이 많지 않은 느낌이긴 했지만…….
‘그 신전…… 괜찮은 건가?’
보통 판타지물이면 신전은 돈도 많고, 높은 확률로 뒤에서 나쁜 짓도 하고 그러지 않아?
<마.왕.꾸> 설정집에 여명교가 청빈한 삶을 추구한다고 나와 있기는 했지만, 원래 앞에서만 다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디드리크에게서는 조금도 돈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디드리크는 수줍게 웃으며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여기서 일한 돈으로 이번 달의 식비를 낼 수 있겠군요.”
‘그 신전…… 진짜 괜찮은 거 맞나?’
나는 다음에 신전에 찾아가 유사 타로 카드점이라도 봐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나는 오늘 사려고 마음먹은 물건을 찾아 잡화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에 본 예쁜 리본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내가 찾는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신관님, 혹시 여기 있던 물건은 팔렸나요?”
“아, 리본 말씀이시죠? 네, 아까 팔렸어요.”
“그래요…….”
“누가 사 갔는지 알려 드릴까요?”
“네? 아니, 아니에요!”
이미 팔렸는데 알아서 뭐 하겠나. 사 간 사람한테 다시 팔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그렇잖아. 상대가 거절하기도 힘들 텐데. 리본은 이미 서른 개쯤 있으니까 충동구매는 그만두자.
나는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텅 빈 매대에서 고개를 돌렸다.
* * *
나는 별 열의 없이 잡화점을 구경하다가 도로 왕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사려던 물건도 사지 못한 데다, 혼자서 구경하니 솔직히 별로 재미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잠깐 뭣 좀 먹고, 아빠가 어디 있는지나 찾아봐야지.’
이상한 기분이다. 원래 혼자서 돌아다니기도, 혼자서 계획 세우기도 좋아하는데 오늘따라 재미가 없었다.
세이르와 루카가 안 보여서 그런가. 어쩐지 허전하고 속상한 것 같기도 하고.
‘으음,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다 아직 밥을 못 먹어서 그래.
“로코, 밥 먹으러 가자!”
“피이잇!”
왕성으로 돌아간 다음 내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부엌이었다.
거하게 식사를 차려 달라고 하기도 번잡스럽다. 그냥 부엌에서 적당히 먹을 만한 걸 챙겨서 방으로 가야겠다.
그런데 부엌은 평소와 달리 온갖 집기가 다 꺼내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지저분하지는 않았지만, 꼭 조금 전까지 대량으로 요리라도 한 느낌이다. 이래서는 내가 먹을 것을 찾기는 어려울 테다.
‘오늘은 어째 이해할 수 없는 일만 일어나네.’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그냥 시종을 불러서 식사를 내 와 달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내가 다이닝 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팡! 파팡!
큰 소리와 함께 폭죽이 터졌다. 폭죽에서 터져 나온 꽃가루가 팔랑팔랑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대로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