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물론 리어 왕국에서 곧이곧대로 10억 골드를 들고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그들이 낼 리 없는 금액을 불렀다.
하지만 1000 골드라도 들고 찾아와서 세이르를 돌려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단 말이지. 세이르네 집에서 돈을 내면서 소공작을 내놓으라고 사정사정하면 생각해 보는 척 정도는 하려고 했는데.
나는 확인차 세이르에게 물어보았다.
“세이르, 세이르네 집에서 연락 온 거 아직 없어?”
“응.”
짧고 분명한 대답이었다.
나는 아이스티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S급 성검 때문에라도 당장 찾아올 줄 알았는데.”
<마.왕.꾸> 내에서 유일무이한 S급 성검 루크바트가 우리 왕국에 있는데 신경 쓰이지 않나? 나라면 자다가도 “성검!” 하고 외치면서 깨어날걸.
그런데 세이르는 내 반응이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애초에 내 검이 성검이라는 걸 알아본 사람은 안젤리카뿐이야.”
“그…… 그랬었나?”
<마.왕.꾸> 게임에서는 아이템 정보 창에 떴고, 지금도 나는 상태창을 볼 수 있으니까 당연히 성검에 대해 알았다. 거기다 <마.왕.꾸>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세이르=성검’이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도 다 성검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비밀이었나.
세이르가 나를 의심스러워하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어? 그건…….”
‘사…… 상태창! 그거! 빨리 그거!’
[특성 ‘내 말을 들어!(E)’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나는 얼른 상태창을 열어 특성을 켰다. 그리고 당황을 감추고 능숙하게 얼버무렸다.
“그, 그야. 딱 봐도 특별하게 생겼잖아! 디자인도 예쁘고!”
“이게?”
세이르가 자신의 검을 쳐다보았다. 날은 잘 관리되어 있었지만 검집은 낡았고, 손잡이도 군데군데 칠이 벗겨졌다. 심지어 파멀의 보석 장식은 떨어진 채였다.
솔직히 성능은 좋다지만 겉모습은 빈말로도 예쁘다고 말할 수 없는 검이었다. 하지만 나는 뻔뻔하게 주장했다.
“요즘은 이런 디자인이 유행이라니까! 그러니까…… 응, 그거. 아방가르드하면서도 고전적인 양식미를 잊지 않은 디자인!”
“하아……. 뭐, 됐어. 네가 모든 걸 말해 주리라 생각하진 않았어.”
이상하다. 방금 엄청나게 능숙하게 얼버무렸는데 어떻게 알았지?
다행히 세이르는 나를 더 추궁할 생각은 없는 듯, 더 묻지 않고 허리에 찬 검을 풀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낡은 검집을 손으로 살살 쓸었다. 오랜 과거를 떠올리는 표정이 착잡하다.
“이건……. 예전에 공작령에 방문한 여행자에게 받은 물건이야.”
“어, 그래?”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마.왕.꾸>는 어떤 루트를 밟더라도 항상 세이르가 유일한 S급 성검의 주인이었기 때문에, 세이르가 검을 입수한 경위까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 여행자는 어떤 사람이었는데?”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S급 성검 같은 엄청난 물건을 어린 세이르에게 턱 주고 찾지도 않는단 말인가.
“이제는 너무 오래전 일이라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 꼭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그냥 이 검이 내게 길잡이가 되어 줄 거라고만 했지.”
“…….”
은둔 고수와의 기연 같은 이야기였다. 세이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거든 사달멜리크로 오라는 말도 했었어.”
“……아.”
예전에 상업 도시 사달멜리크의 경매장에서 세이르와 마주쳤을 때구나. 어디를 급히 가는 것 같더라니, 그 여행자를 찾아가던 길이었나.
“성과는 없었지만. 하긴, 생각해 보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대뜸 그 큰 도시에서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렇구나.”
“내가 순진했어.”
“…….”
세이르는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말이 없었다. 사달멜리크에 갔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으아아, 저러다가 염세주의가 또 도지겠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성검에 대해 이야기하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휴양 도시 엘나스에서 세이르가 독에 쓰러졌을 때, 나는 성검의 파멀에 붙어 있던 보석 뒤에서 해독제를 꺼내 먹여 그를 살렸다.
그리고 그 전날, 해독제로 세이르를 살리려고 노력하던 낯선 사람이 나오는 꿈을 꾸었지. <마.왕.꾸>의 여러 루트 중 한 갈래처럼 보이던 이상한 꿈이었다.
세이르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무래도 꿈속에 나온 사람이 여행자 같았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행자는 세이르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세이르, 엘나스의 별장에서 네가 독을 먹고 쓰러졌을 때 말인데. 그때 마침 해독제가 있어서 살았잖아.”
“……아.”
“그 해독제, 네 성검의 파멀에서 꺼낸 거야. 파멀의 보석 장식 뒤에 해독제가 들어 있었어.”
“여기에……?”
세이르가 멍하니 눈을 깜빡깜빡했다. 당시 독 때문에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였기에, 세이르는 내가 해독제를 어디서 구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세이르는 품속에서 성검에 달려 있던 보석 장식을 꺼냈다. 장식을 원래 달려 있던 자리에 끼워 보려 했지만, 안쪽에 공간이 남아 고정할 수가 없었다. 해독제가 들어 있던 자리다.
“그 해독제, 네가 말한 여행자가 넣어 둔 것 아닐까?”
“…….”
초록빛 눈 안에서 파문이 일었다. 내 말을 의심하면서, 한편으로는 믿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분명 세이르가 무사하기를 바라서 미리 넣어 둔 거야.”
“……어떻게?”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원래 그런 방랑하는 은둔 고수는 뭐든지 알고 있는 법이거든. 그래, 분명 미래를 알고 세이르를 걱정한 거라고.”
“……하하.”
어차피 진실 같은 건 이제 와서 알아내기 불가능하다. 그러면 멋대로 좋은 쪽으로 믿어 버리지, 뭐.
애써 긍정적인 추측을 말한 보람이 있게도 세이르는 약간 기운을 차렸다. 휴, 다행이다. 염세주의 레벨이 더 올라가는 사태만큼은 막아 냈다.
짧은 침묵 속,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화제를 돌렸다.
“세이르,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아?”
물론 세이르는 내 부하 1호이자 우리 왕국에 구금된 상태니까 풀어 줄 생각은 없다.
그래도 정 집에 가고 싶다고 하면 잠깐 휴가를 줄 생각은 있었다. 나는 관대하니까 말이지.
“아니.”
하지만 세이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호한 눈빛에 그가 얼마만큼 진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짧게 물었다.
“왜?”
“내가 죽기를 바랄 테니까.”
휴양 도시 엘나스에서 세이르를 죽이려 한 배후의 인물은 높은 확률로 다프네 왕비겠지. 그런데 세이르는 왕비 쪽이 아닌 엘레인 공작가도 꺼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세이르네 집, 엘레인 공작가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떠올려 보았다.
전대 엘레인 공작이자 리어 국왕의 여동생인 어머니는 오래전에 사망했다. 현재 공작가에는 세이르의 아버지 혼자만 남아 있을 테다.
이름이 로베르트였던가, 슈베르트였던가.
평민 출신으로 공주와 결혼에 골인한 남자인데, 그 밖에 능력적으로 눈에 띄는 부분은 없었다. <마.왕.꾸>에서 비중도 거의 없다시피 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방금 세이르의 반응으로 보아 별로 믿음직한 아버지는 아닌 모양이다.
‘……하긴.’
자식이 다프네 왕비에게 학대를 당하는데도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자식이 다른 나라에서 지내고 있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다.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군.’
세이르가 염세주의 꼬맹이가 되는 데 한 몫 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속으로 로베르트인가 슈베르트인가 하는 인간이 길 가다가 넘어지기를 빌어 주었다.
다프네 왕비가 세이르를 노리는 이유는 물론 왕위 계승권 문제겠지.
비록 다프네 왕비의 자식들이 둘이나 있다고는 하나, 세이르의 능력으로 보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왕위를 노릴 수 있을 테니까.
보통 세이르와 같은 상황이라면 옆에서 왕위를 노리자고 속살거리는 사람들도 있을 법한데.
‘흐음…….’
여기 앉아서 로코에게 간식이나 먹이고 있는 세이르는 조금도 왕위를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불쑥 물었다.
“세이르는 왕이 되고 싶어?”
세이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고요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마치 어떤 답을 갈구하는 듯한 신중한 표정이었다.
“내가 대답하면 믿어 줄 거야?”
나는 또박또박, 진심을 담아서 대답했다.
“믿을게.”
세이르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말했다.
“되고 싶지 않아.”
“…….”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떠한 이유도 부연하지 않은 짧은 답이었다. 그래도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방금의 답이 한 점 거짓 없는 진실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는 대답을 고민하면서 잠시 세이르를 마주 보았다. 내 부하 1호가 왕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하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이다.
“그렇구나. 그럼 계속 여기 있어. 네가 있고 싶은 만큼.”
“……그럴게.”
세이르가 환하게 웃으면서 순순히 대답하자,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만들다 만 점토 무더기를 괜히 쿡 찌르면서 덧붙였다.
“뭐, 10억 골드가 걸려 있지만 말야!”
“하하……. 그래, 그래.”
그때, 공방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루카가 들어왔다. 루카는 커다란 들통 한가득 찰흙을 들고 있었다.
“어, 루카, 돌아왔구나.”
“이 정도면 어떨까?”
나는 들통 안을 확인해 보았다. 점성이 적당하고 입자 크기가 고르다. 도자기를 만들기에 딱 좋은 양질의 찰흙이었다.
“충분해, 고마워.”
“……이 정도쯤이야.”
루카가 어깨를 으쓱했다. 애써 감추려 하지만 얼굴에 뿌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루카가 가져온 찰흙을 작업대 위에 놓고 양손으로 주무르며 모양을 잡았다. 루카도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가세할 준비를 했다.
세이르만이 테이블에 비딱하게 턱을 괴고 앉아 의아한 듯 물었다.
“안젤리카, 그래서 그거 뭘 하는 거야?”
“마법 도자기를 구울 거야.”
“손 더러워질 텐데.”
“음, 그건……. 에잇!”
나는 틈을 노리다가 세이르를 기습해 손을 붙잡았다.
“……안젤리카.”
“으헤헤.”
깍지를 껴서 꽉 붙잡았다 놓으니 세이르의 손에도 잔뜩 흙가루가 묻었다.
“자, 이러면 됐지? 세이르도 도와.”
“나도 할게.”
지기 싫은지 루카가 찰흙 더미에서 자기 몫의 찰흙을 떼어 갔다.
“피이잇! 피!”
로코는 신나게 찰흙 위에 자기 발자국을 남겼다.
“로코, 언니 도장 찍기 놀이 하는 거 아니야. 아악! 안 돼, 찰흙 위에서 뒹굴면 안 돼!”
주인을 닮아서 똑똑하고 천재적이지만 말은 안 듣는 박쥐가 완전히 흙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내 참……. 못 말리겠네.”
마지 못한 듯 세이르가 찰흙 빚기에 가세했다. 내키지 않아 하는 말과 달리 표정에선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드러난다.
같이 놀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하면 될 텐데, 정말 솔직하지 못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