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네, 세이르 님! 제발 안젤리카 님을 말려 주세요!”
세이르는 왕성의 공터에서 검술 연습을 하고 있었다. 케나스에게는 이 어린 소년이 거의 구세주처럼 보였다. 애처로운 얼굴로 거듭 말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런 부탁을 드릴 사람은 세이르 님밖에 없어요.”
“안젤리카가 제 말이라고 듣겠어요?”
세이르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케나스는 마지막 희망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세이르 님이라면 혹시 모르잖아요!”
“나라고 뭐, 안젤리카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언뜻 말간 소년의 낯에 낙담이 비친다. 그러나 케나스는 현재의 상황에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는 나머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안젤리카 님이 가장 총애하는 분 아니십니까!”
“네? 아니, 잠깐, 잠깐만요.”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총애라고 표현하니 영 어감이 이상했다.
세이르는 엷은 한숨을 내쉬고는 케나스를 바라보았다.
성실하고 선량하지만 멘탈이 지나치게 약한 요리사다. 며칠만 더 이 상태가 지속되었다간,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던질 것 같았다. 그랬다가는 안젤리카가 크게 낙담하겠지.
그러잖아도 안젤리카가 왜 이상하게 구는지 궁금한 참이었다. 세이르는 결국 마지못해 케나스의 부탁을 수락했다.
“너무 기대하지 마시고요. 일단 왜 그러는지 물어볼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안젤리카 님이 크로셀 님을 피하시는 이유라도 알 수 있다면…… 어흐흑.”
“그거 이리 주세요.”
세이르는 케나스의 손에서 간식이 든 쟁반을 받아 든 뒤 안젤리카의 공방으로 향했다.
* * *
“으음.”
“피이이.”
“으으으음…….”
“피이이이…….”
간식도 먹고 실컷 놀아서 기분 좋은 로코의 울음 소리만 들리는 공방.
얼마 전, 나는 인테리어 점수를 모아 자연 친화적 콘셉트의 도자기 세트 레시피를 손에 넣었다. 당장 만들어 보기 위해 지금 찰흙을 빚는 중이다.
그 때문에 작업대 위가 흙으로 엉망진창이었다.
“피잇! 피!”
“로코, 언니 촉감 놀이 하는 거 아니야. 흙 묻으면 더러워져.”
“피이이?”
방금까지는 루카도 옆에 있었지만, 지금은 찰흙을 더 푸러 밖에 나갔다. 좋은 찰흙을 가져오겠다며 잔뜩 기합이 들어 있었다.
루카는 처음보다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앞으로 만날 일 없을 거라던 말이 정말이었는지, 신전에 다녀온 날 이후로 마족 안드라스가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겉보기에 루카는 그냥 평범한 소년 같았다.
말할 때 두 번에 한 번은 존댓말이 튀어나오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여전히 주위 눈치를 많이 보는 데다가, 워낙 큰일이 있었던 만큼 다른 고용인들과는 어색하긴 하다.
‘이것만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지. 무슨 중소기업 사장처럼 회식하자고 할 수도 없고.’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차차 나아지리라 생각한다.
‘계기는 역시, 전에 그 일인가.’
일일 퀘스트를 하면서 앞뜰에 만든 꽃밭.
볕이 좋아 며칠이 지나니 금방 싹이 움텄다. 루카는 꽃밭을 보고 깜짝 놀라 나를 불렀다.
“이거 봐! 뭐가 났어!”
“응? 그야 씨를 뿌리고 물을 주었으니 싹이 나겠지?”
“지…… 진짜?”
그 반짝반짝하는 눈빛이라니.
아. 이렇게 식물 키우기가 주는 힐링 효과에 한 명의 어두운 영혼이 당해 버렸군.
나는 마족 안드라스를 불러내기 위해 퀘스트를 하느라 꽃밭을 만들었을 뿐이다. 더 이상 꽃밭을 만들 예정은 없었다. 그러나 차마 루카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크흠, 크흠! 그럼 꽃밭을 잘 가꾸도록 해. 자연 친화적인 콘셉트니까, 꽃밭을 하나 더 만들어도 좋아.”
“……응, 알았어.”
그 이후로 루카는 뭘 시키든 곧잘 했다. 오늘만 해도, 도자기를 빚을 예정이라고 했더니 잽싸게 찰흙을 푸러 갔다.
무섭다. 식물 키우기의 힐링 효과.
나라도 더 착해지지 않기 위해 식물 키우기를 멀리해야겠다.
어쨌건, 마족 안드라스도 깊이 잠든 듯해 당장 크게 걱정되는 점은 없다.
‘요즘은 오히려, 세이르 쪽이 이상한데.’
묘하게 어딘가 달라졌단 말이지. 내가 부르면 피하지는 않은데, 뭔가 감추고 있는 느낌.
‘게다가 요즘 검술 연습을 너무 많이 해.’
무리하지 말라고 말려도 그때뿐. 틈만 나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술 대회라도 나갈 생각인가? 하지만 향후 1년 안에 열리는 검술 대회는 딱히 없는데? 내년 축제에는 검술 대회를 열자는 무언의 어필?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공방 문이 열렸다.
“안젤리카, 여기 있었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세이르였다.
“뭐야, 왜 공방이 흙투성이야?”
“아하하, 그럴 만한 일이 있어.”
“피이이!”
세이르는 손에 간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었다. 흙이 묻지 않은 곳을 찾아 쟁반을 내려놓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자, 뭘 하는진 모르겠지만 이거 먹고 해.”
“와, 고마워! 마침 출출했는데. 그런데 왜 이걸 세이르가 들고 와?”
“오다가 케나스 씨를 만났어.”
“아항…….”
간식은 과일 향이 나는 아이스티와 레몬타르트였다.
나는 한참 주물럭대던 찰흙을 내려놓고 개수대에서 손을 씻었다. 그리고 찰흙에 발자국 모양을 신나게 찍은 로코의 발도 닦아 준 다음 포크를 들었다.
“세이르도 먹어.”
“아니, 난 괜찮아.”
나는 먼저 타르트를 포크로 잘라 입에 넣었다. 새콤한 맛이 확 퍼져 나온다. 그리고 상큼한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시니 머리가 명징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세이르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왜 요즘 크로셀 님을 피해?”
“……쿨럭, 쿨럭!”
나는 크게 사레가 들렸다. 목을 부여잡고 캑캑거리자, 깜짝 놀란 세이르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안젤리카, 괜찮아?!”
“피이이! 피이이이!”
“괜찮…… 캘록. 로코, 진정해. 언니 암살당한 거 아니야.”
“피이잇!”
한참만에 겨우 사레가 진정되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고 아이스티로 목을 축였다.
“휴, 죽는 줄 알았네.”
“그래서 크로셀 님은 왜 피하는 건데?”
“어? 세이르도 참, 무슨 말을. 안 피했는데?”
“…….”
세이르는 그저 무언의 시선을 내게 보냈다. 스스로도 알지 않느냐는 식이다.
이런. 아닌 척해 보려 했는데 이미 다 들켰군.
그렇다. 나는 아빠를 며칠째 피해 다니는 중이었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마족 안드라스를 불러내서 들은 말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고, 아빠 몰래 엄마에 대한 정보를 찾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아빠를 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왕 세이르가 말을 꺼낸 김에, 고민 상담을 해 봐야겠다. 털어놓고 나면 속이 좀 시원해지겠지.
“들어 줄래? 나 요즘 큰 고민이 있거든.”
“그래? 뭔데?”
세이르가 자세를 바로 하고 나를 보았다. 언제든 편하게 이야기하라는 배려가 느껴졌다.
나는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뜬 뒤 진실을 실토했다.
“아빠가 흑막 같아서 어색해.”
“뭐……?”
세이르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테이블에 비딱하게 턱을 괴고 말을 이었다.
“나는 아빠를 흑막으로 만들고 싶었거든?”
“……알아.”
“그런데 실은 아빠가 흑막이었어.”
“그런데?”
이상하다. 여기가 누구든 깜짝 놀랄 만한 충격적인 반전 포인트였는데, 왜 안 놀라는 거지.
내 말을 들은 세이르는 살짝 어이없어하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 이야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아이참, 섬세한 기분의 문제가 있다고!”
마족 안드라스의 말을 듣고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이제까지 마음 한구석에서 이 세계는 게임이니까 진짜가 아니라고 여겼던 것 같다. 나 역시 빙의했을 뿐, 진짜 안젤리카가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쉽게 아빠를 흑막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게임 속 세상이니까, 흑막 엔딩을 보면 되잖아?’
물론 나는 매 순간 열심히, 진심으로 흑막 왕국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런 생각이 조금이나마 있었다.
그런데 마족 안드라스의 말에 따르면 내가 진짜 안젤리카라고 한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는데 일단은 그렇다고 한다.
모든 것이 진짜라고 생각하니, 가장 신경 쓰이는 사람은 바로 아빠였다.
원작의 사악한 흑막 크로셀 데네브도, 사기꾼에게 뜯어먹힐까 봐 걱정되는 착하고 무른 아빠도 아닌, 진짜 아빠.
이런 아빠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할까. 낯설다고 할까.
‘그래서 일단 엄마에 대해 알아보려 했는데, 나오는 게 없고…….’
내 말을 들은 세이르는 살짝 어이없어하는 말투로 물었다.
“언제는 아빠를 흑막으로 만들겠다며?”
“그건 그런데! 그건 그렇긴 한데!”
“그런데?”
“어쩐지 아빠가 낯설게 느껴지는 느낌! 세이르도 이해하지?”
“글쎄, 난 잘 모르겠는걸.”
세이르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다. 그 모습을 보니 고민할 필요 없는 일을 붙잡고 끙끙댄 것 같아서 맥이 탁 풀렸다.
“아무튼……. 염세주의 꼬맹이는 이해하지 못하는 섬세한 감정의 문제가 있다니까?”
“으음, 뭐. 너한테 별일 없는 거면 됐어.”
세이르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초록빛 눈에 담긴 표정이 부드럽다.
나는 남은 타르트를 먹으면서 잠시 세이르에 대해 생각했다.
세이르가 우리 왕성에 머물기 시작한 지도 꽤 되었다. 요즘 좀 이상하긴 하지만, 대체로 잘 지내고 있다.
‘몸값 10억 골드를 내놓지 않으면 세이르를 돌려보내지 않겠다…… 라.’
그 당시에는 상황상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역시 이웃 나라 소공작을 납치하는 일은 여러모로 무리가 있다.
대륙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드러눕기.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 한 마디로 억지랄까.
그런데 아직까지 리어 왕국에서도, 세이르네 집에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