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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95)화 (96/133)

95화

8장. 마족님에게 물어봐!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늘 보던 내 방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피이잇, 피이!”

“로코, 내 옆에 있어 준 거야? 감기 옮는다니깐.”

“피이이…….”

머리가 온통 멍한 가운데, 드문드문 기억이 났다.

몸살인지 뭔지 열이 들끓는 바람에 나는 이틀이나 누워 있었다. 도무지 몸을 가누기 힘들어서, 자다가 일어나서 약 먹고, 다시 자다가 일어나서 약 먹고의 반복이었다.

“으으으…….”

“피이이?”

또 어려진 정신 연령으로 아프다고 막 칭얼거린 것 같은데. 으,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면 민망할 뿐이다.

열은 내렸지만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므시 백작이 음모를 꾸미다 사망했고, 루카의 몸에서는 웬 마족이 나타났다.

이 세계는 2회차일지도 모르고.

……그리고, 아빠가 루카를 죽이려 했다.

나의 아빠는 사실 내가 멋대로 생각한 것처럼 착하고 무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일단 일어나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우선 루카가 어떤 상태인지부터 확인하자.

아빠가 루카를 놓아주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거의 바로 정신을 잃었다. 도중에 깨어났을 때 무사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저 그뿐. 자세한 상황까지는 듣지 못했다.

[<시나리오 퀘스트> 암흑화를 완료했습니다.

……]

이런 시스템 알림이 와 있으니 일단 저주는 해결된 것 같은데.

나는 상태창을 열어 볼까 하다가 그냥 그만두었다. 상태창으로 알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다. 얼른 루카 본인부터 만나 봐야겠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멍하고 나른하기는 했지만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었다.

사라를 부를까 하다가, 급한 마음에 실내복 위에 겉옷만 대충 걸치고 방문을 열었다.

……가, 깜짝 놀랐다.

쾅!

“아야야…….”

“……세이르? 미안!”

문 바로 앞에 세이르가 서 있던 것이 화근이었다. 내가 갑자기 문을 여는 바람에 세이르가 이마를 부딪혔다.

세이르는 얼굴을 찌푸린 채 이마를 문질렀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왜 안 들어오고 거기 있어?”

“네가 자고 있는데 어떻게 들어가?”

“그럼 내가 일어날 때까지 거기 서 있으려고 했어?”

내가 언제 일어날 줄 알고? 아무리 내 부하 1호라지만 그런 일은 안 시켰는데?

세이르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고는 대답했다.

“그냥 사라 씨에게 네가 괜찮은지 물어보려던 것뿐이야.”

“난 괜찮아.”

“그래, 괜찮은 거 봤으니 나는 이만 돌아갈게.”

“자, 잠깐, 잠깐만, 세이르.”

나는 그의 손을 잡아끌고 도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날, 세이르도 유리 조각을 뒤집어쓴 데다 이므시 백작의 공격을 받았다. 상처 입은 모습이 기억에 선명했다. 나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그에게 물었다.

“세, 세이르는 아픈…… 아픈 데 없어? 괜찮아?”

“괜찮아. 네가 쓰러진 동안 의사한테 치료받았어.”

세이르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지만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어째 얼굴이 핼쑥해진 것 같단 말이지. 나는 세이르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보여 봐.”

“뭐?”

“등 멀쩡한지 보여 줘.”

“안젤리카, 그건 좀.”

“빨리! 아프진 않아? 흉터 안 남았어? 의사 말 잘 들어야 하는 거 알지? 얼른!”

당황한 나머지 세이르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자, 잠깐만,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 앞에서 옷을 벗는 건 좀 그런데.”

“아, 왜!”

나는 세이르의 셔츠 자락을 마구 잡아당겼다. 세이르는 내 손길에서 자신의 옷을 방어하면서 애원했다.

“봐줘, 이번만 봐줘, 안젤리카.”

“피이, 피이이!”

“로코, 언니 지금 사냥 놀이 하는 거 아니야.”

“피이이잇!”

“아니다. 로코, 세이르 붙잡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박쥐한테 붙잡히지는……. 으하하, 그만해. 그만하라니까.”

세이르가 너무 거세게 반항하는 바람에 결국 등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거듭 당부했다.

“세이르, 앞으로 다치지 마.”

“조심할게.”

“조심하는 게 아니라 다치지 말라고 하는 거야.”

“그게 마음대로 돼?”

“네가 어떤 몸인데! 마음대로 안 돼도 어떻게든 하란 말야!”

“내가 어떤 몸인데?”

기세 좋게 소리쳤는데 정작 세이르가 그렇게 반문하자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잠시 당황했다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10억 골드!”

“응?”

“몸값 10억 골드가 걸려 있잖아. 그러니까 10억 골드짜리 몸이란 거지.”

“그게 뭐야, 하하하하!”

역시 이 말은 무리수였나. 세이르는 한참이나 웃다가, 내가 그만하라고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쿡쿡 찌른 뒤에야 멈췄다.

“그보다 세이르, 루카는 어디 있어? 루카를 보러 가야겠어.”

“응, 안내할게. 그런데 그 전에…….”

“응?”

“저분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셔서.”

“으응?”

나는 세이르가 가리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활짝 열린 문 앞.

“오랜만입니다, 안젤리카 님.”

웬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인사했다.

* * *

나를 찾아온 사람은 머리카락과 수염이 새하얀 노인이었다. 나이가 무척 많아 보였지만 허리가 꼿꼿하고 걸음걸이는 힘이 있었다. 그는 나를 잘 아는 듯 온화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낯선 얼굴이라 잠시 당황했지만, 나는 곧 그가 누구인지 떠올렸다.

“시종장 할아버지……?”

“예,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이 왕성의 시종장이라면, 내가 빙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분명…….

‘아빠한테 돈을 받은 뒤 잠적했잖아? 심지어 다른 고용인 몇 명과 함께!’

나는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5천 골드나 들고 잠적한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설마 아빠가 시종장을 용서하고 받아 준 건 아니겠지?

시종장이 정중한 말씨로 내게 말했다.

“그동안 크로셀 님의 명을 받아 오래 왕성을 떠나 있었습니다. 이제 복귀했으니, 언제든 편히 불러 주십시오.”

“잠깐, 아빠의 명을 받았었다고? 그 말은……. 아빠가 일을 시켜서 그동안 없었던 거야?”

돈을 횡령하고 잠적한 게 아니었어?!

“네, 그렇습니다. 아, 저는 듀란이라고 합니다. 편히 듀란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띠링!

그때 눈앞에 듀란 할아버지의 상태창이 나타났다.

[이름 : 듀란

직위 : 시종장(D)

소속 : 데네브 왕국

레벨 : 47

특성 : 충성스러운 암살자(D), 모략가(D)]

“읍, 쿨럭, 쿨럭!”

상태창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사레가 들렸다. 옆에서 세이르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뭐? 충성스러운 암살자(D)라고?

이거, 보통 왕국에서 비밀스러운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자한테 붙는 특성인데? 거기다 모략가(D) 특성까지? 한 마디로 왕국의 어두운 일 전담?

심지어 레벨도 높아!

뭔데. 이 ‘인자한 할아버지가 사실은 최강 NPC임’ 같은 조합!

“저기, 혹시나 해서 묻는데……. 예전에 아빠한테 5천 골드를 받아 갔었잖아?”

“아, 예, 그랬지요. 그렇습니다.”

“혹시 그것도, 그…… 일 때문에 필요했던 거였어?”

“그렇습니다. 비밀스러운 용도였기 때문에 마구간 수리 및 정원 조경비라는 명목이었지요.”

“…….”

아빠가 사기당한 게 아니었구나.

그동안 속으로 몇 번이나 시종장의 장수를 빌어 주었는데 취소해야…… 아니, 장수 기원이니까 취소하면 안 되나?

가만, 그 말은…….

이 세계에 막 빙의했을 때 내가 아빠가 호구가 되었다고 생각한 이유는, 세 명의 사기꾼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이러하다.

사기꾼 상인은 그때 바로 처리했으며.

이므시 백작은 끔찍한 끝을 맞이했고.

듀란 할아버지는 아빠의 명을 받고 떠나 있었을 뿐이다.

아빠는 딱히 호구 잡히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역시 아빠는 내가 멋대로 생각한 것처럼 착하고 무른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

나는 충격에 머릿속이 뒤엉키는 것을 느꼈다.

“……안젤리카 님?”

“아, 아니야. 그래서, 듀란 할아버지, 나를 왜 찾아온 거야?”

“……아. 안젤리카 님이 들이신 그 루카라는 소년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그 소년을 보러 가시기 전에 들으시는 것이 좋을 듯하여.”

듀란 할아버지는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다며 나와 세이르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중요한 이야기면 나는 듣지 않는 게 낫겠어. 기다릴 테니까 편하게 이야기하고 와.”

“세이르 님도 함께 들으시지요. 들으셔도 괜찮습니다.”

“맞아. 세이르, 너는 내 부하니까 같이 들을 필요가 있어!”

“……그래.”

듀란 할아버지는 나와 세이르에게 따뜻한 차와 간식을 준비해 준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자다 일어나서 그런가 배가 출출했다. 나는 레몬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가, 듀란 할아버지의 다음 말을 듣고는 먹는 것도 잊고 입을 딱 벌렸다.

“저는 어제까지 이므시 백작의 저택에 있었습니다. 오늘 새벽에야 겨우 돌아왔지요.”

“뭐? 정말?”

충성스러운 암살자이자 모략가가 이므시 백작의 저택에 있었다는 것은…….

“네, 이므시 백작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벌인 짓의 증거도 확보하고요.”

“…….”

“그 과정에서, 그 루카라는 소년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이어진 이야기는 끔찍했다.

정말로 끔찍해서, 이미 죽은 이므시 백작을 다시 한번 죽여 버려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루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불법 노예 시장에서 이므시 백작이 사들였으리라고 추측된다.

이므시 백작은 각지에서 루카 정도의 어린아이들을 모아, 어떤 실험을 시작했다.

바로 마족의 영혼석을 이식하는 실험이었다.

“마족의 영혼석이라고?”

“네. 안젤리카 님, 천 년 전에 마족이 이 대륙에서 사라진 일은 아시지요?”

“응.”

“그중에 극히 일부가, 영혼이 봉인된 채 이 땅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마족의 영혼석입니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끔뻑였다.

순간 당황했지만, 예전에 이 비슷한 이야기를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다. <마.왕.꾸> 유저 커뮤니티에서 새벽마다 올라오던 게시 글이었다.

마족의 영혼은 어딘가에 봉인되어 있다. 그 영혼을 찾아서 캐릭터에게 이식하면 엄청나게 강해진다.

분명 이런 내용이었었지.

하지만 실제로 게임상에서 마족의 영혼을 찾아낸 사람이 없었기에, 그저 헛소문으로만 취급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영혼이 담긴 돌을 이므시 백작이 손에 넣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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