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90)화 (91/133)

90화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일이 얼마 만이었더라.

예상 밖의 일이라, 애써 관심 없는 척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다 인기척이 들린 순간 도망쳤다.

사실은 분홍색 머리카락의 여자애가 말을 걸어줘서 기뻤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무 뜻 없는 말 몇 마디에 들뜬 자신을 누군가가 비웃을 것만 같았으니까.

부모도 형제도 없이 버려진 자신을 그 인간, 이므시 백작이 노예 상인을 통해 사들였다.

그 때문에 루카는 기억이 있는 순간부터 이므시 백작의 노예였다. ‘보통 생활’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도 예전에는 곁에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이 있어서 괜찮았다. 이므시 백작은 노예 상인을 통해 어린아이를 많이 사들였으니까.

감시가 심해 말을 나누기 힘든 환경이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은 위안이었다.

……이제는 모두 죽어 버렸지만.

혼자 살아남은 루카는 매일 이므시 백작이 주는 ‘약’을 먹어야 했다.

무슨 약인지, 애초에 약이 맞기는 한지, 아무것도 모른다. 루카가 거부해도 아무런 설명 없이 억지로 먹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 약을 먹으면 온몸이 타는 듯이 아프고 머리가 멍해졌다. 자신의 몸속 어딘가에 다른 존재가 숨어 있다는 위화감이 들었다.

언젠가 그 무서운 존재에 자신이 잡아먹힐 것만 같다.

그런 공포감을 호소하면 이므시 백작은 기뻐하며 약을 더 먹이곤 했다.

저항하면 스태프를 휘둘렀다. 그 스태프는 무슨 요사스러운 힘이 있는지, 도무지 저항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이므시 백작은 내가 그 무서운 존재에게 잡아먹히기를 바라는 거야.

아무리 도움을 구해도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루카는 자연히 타인을 꺼리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남.

루카는 자신이 어떻게 이 왕성에 오게 되었는지 모른다.

항상 그랬다.

그 인간은 평소에 자신을 가둬 두다가, 필요가 생기면 멋대로 어디론가 보냈다. 그 인간이 자신을 내보내면 언제나 안 좋은 일이 생겼다.

폭주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폭주는 아주 끔찍한 경험이다. 먼저 가슴께가 뻐근하게 아파 오고, 호흡부터 시작하여 육체를 이루는 모든 것에 고통이 느껴진다. 고통은 몹시 커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면 주위는 초토화되어 있고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자신의 곁에 남은 것이라곤 죽음의 냄새뿐.

루카는 알았다.

자신의 안에는 끔찍한 것이 들어 있다.

아주 끔찍한 것. 아마 인간이 아닌 것. 세상 만물을 찢어발길 수 있는 사악한 것.

그리고 이 끔찍한 것은 자신의 몸을 찢고 나오고 싶어 한다.

고통은 나날이 강해진다. 아마 자신은 머지않아 이 끔찍한 것에게 잡아먹힐 것이다. 그 전에는 ‘그 인간’에게 실컷 이용이나 당하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빨리 죽여 주면 좋을 텐데.

죽으면 이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텐데.

그날, 그 인간에 의해 도착한 어둡고 낯선 공간. 루카는 폭주를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이므시 백작이 약을 먹인 뒤, 폭주가 일어나기 직전에 자신을 낯선 곳에 밀어 넣었으니까.

그때 루카는 발작이 시작되려는 징조를 느끼며,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단 한 번 마주쳤던 분홍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눈앞에 있었다. 잊을 리가 없다.

심장이 이상을 감각한다.

이대로라면 다시 폭주가 일어나고, 또 끔찍한 일을 겪게 된다.

“도망쳐…….”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가…… 가까이 오지 마!”

그때, 루카는 처음으로 폭주에 저항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

안젤리카는 느닷없이 루카에게 약을 건넸다.

처음에는 다시 절망하고 싶지 않아 망설였지만, 약을 마시는 순간 놀랍도록 고통이 사그라졌다. 몸 안을 가득 채운 기분 나쁜 것이 사라진 듯했다.

안젤리카는 자기 일처럼 기쁘다는 표정으로 루카를 보고 있었다.

‘……진짜 이상한 애야.’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저 작은 애보다는 한두 살 많을 것이 분명한데, 누나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것도 그렇고.

정말 나을 수 있을까.

이제 그런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될까.

이므시 백작의 스태프는 무섭다. 그 스태프가 저 이상한 애를 상처 입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루카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므시 백작한테는 거역할 수 없어. 나는…….’

바스락.

침대 위에 걸터앉아 무릎을 끌어안는데,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아까 안젤리카가 멋대로 주고 간 레몬사탕이다.

“…….”

루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사탕을 집어 들었다. 포장지를 벗긴 뒤 입 안에 사탕을 넣는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윽, 크읍! ……시잖아!”

사탕은 엄청나게 시었다. 레몬사탕이 아니라 생 레몬즙을 몇 배로 농축해 둔 것 같다.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뱉어 내기도 마땅치 않아서, 루카는 눈을 꼭 감고 사탕을 이로 부숴 먹었다. 그런데도 짜릿한 맛이 남았다.

안젤리카는 대체 이런 걸 어떻게 먹은 거지?

“아, 하…… 하…….”

루카는 자신이 어이없는 나머지 웃음을 흘렸다.

방금까지 어두운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지금은 사탕이 시다는 생각 따위나 하고 있다. 입 전체가 얼얼해서 어두운 생각 따위는 전부 까먹어 버렸다.

그 애가 주는 약을 먹으면 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므시 백작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의식적으로 기대를 가지지 않으려 했다.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의 절망이 너무 크니까.

그런데 지금은 희망을 품고 싶어졌다.

“하하, 하…….”

진한 레몬 향이 곁에 남았다.

* * *

다음 날에도 나는 아침에 루카를 찾아가 정화의 샘물을 먹였다.

“안녕, 루카. 약 먹을 시간이야.”

“알았어.”

“약을 잘 먹는 착한 어린이한테는 사탕을 줄게.”

“……그건 필요 없어.”

달그락. 벌컥 벌컥-.

손가방에서 레몬사탕을 꺼내기도 전에 루카는 오늘치 정화의 샘물을 다 먹어 버렸다.

“어라? 벌써 다 먹었어?”

비장의 수단을 쓰지도 않았는데?

…….

…….

또 그 다음 날.

“안녕, 루카. 약 먹을 시간이야.”

“……알았어.”

“사탕은? 필요 없어? 그럼 내가 먹어야지.”

손가방에서 레몬사탕을 꺼내 먹는데, 루카의 시선이 따가웠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 세이르도 사탕 먹을래?”

“아니, 괜찮아. 나도 그 사탕은 좀…….”

떨떠름한 세이르의 말에 루카가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나만 빼놓고 둘이서만 벌써 친해진 거야?

…….

…….

그리고 또 다음 날.

“안녕, 루카. 오늘도 사탕은 필요 없어?”

“너는 입맛에 문제가 있어.”

“루카, 갑자기 사람을 비방하면 못써.”

그럼 내가 먹어야겠다. 루카가 네 번째 정화의 샘물을 먹는 동안 나는 레몬사탕을 입에 넣었다.

옆에서 세이르가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안젤리카, 그냥 네가 먹고 싶은 거 아냐?”

“아, 들켰네.”

한번 정화의 샘물의 효과를 봤기 때문인지, 루카의 새침한 태도도 꽤 누그러졌다.

왜인지 내가 아끼는 레몬사탕을 볼 때마다 흠칫거리기는 했지만…….

[루카 안드라스의 저주 ‘암흑화’가 치유됩니다.

치유 진행률 : 4/5]

앞으로 한 번만 더 정화의 샘물을 먹이면 루카의 치료는 끝이 난다.

이제까지는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데, 즉, 루카를 치료하는 데만 집중하느라 앞으로의 일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아빠한테는 루카를 치료할 때까지만 왕성에 머무르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저주 ‘암흑화’가 완전히 낫고 난 뒤에는 루카를 어떡해야 할까.

‘이므시 백작한테 돌려보내는 건……. 그것만큼은 절대 안 돼.’

루카를 여기 내버려 두고 후다닥 돌아간 이므시 백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신경 쓰였다. 그 인간성에 그냥 가만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러니 슬슬 이므시 백작도 처리해야 했다.

만약 루카를 풀어 주면 갈 데는 있을까? 으음, 애초에 루카는 멋대로 내 공방에 침입했잖아? 그 핑계로 여기 계속 머무르게 해 버릴까.

그때, 루카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기니 신경 쓰인 모양이다.

“내일이 마지막이야. 내일 봐, 루카.”

나는 아무 일도 없는 척 루카에게 인사를 하고 방문을 닫고 나왔다.

일단은 루카를 완전히 치료한 다음에 생각하자. 좋은 방법이 떠오르겠지.

그리고 세이르와 헤어져 내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안젤리카.”

“어, 아빠!”

복도 맞은편에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안젤리카, 어쩐지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구나.”

“그런가요?”

아빠가 잠시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으윽…….’

오랜만에 보는 아빠의 쓸쓸한 표정은 임팩트가 엄청났다. 말간 얼굴에 엷게 떠오른 허전함이 아빠를 더욱 청순가련하게 만들었다.

“요즘은 아빠랑 놀아 주지도 않고. 이제 아빠하고 노는 건 지루해졌니? 우리 천사, 벌써 그렇게 커 버린 걸까?”

“네? 그런 건 아닌데! 요즘 루카 일 때문에…….”

“전에는 아빠 뒤를 몰래 졸졸 따라다니더니.”

“……윽.”

내가 빙의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다.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할 힌트를 얻기 위해 나는 아빠를 밀착 체크했었다.

‘아빠가 철저하고 틈이 없다는 사실만 알고 끝났지만…….’

그때 내가 따라다닌 거 알고 있었구나.

이상하다. 절대 들키지 않도록 완벽하게 안전거리를 유지했는데.

아빠는 내게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물었다.

“그래, 전에 체스를 연습하기로 하지 않았니? 안젤리카, 지금 어떠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