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니키의 예전 생활이 어땠는지 짐작케 하는 말이었다.
나는 눈을 잔뜩 찌푸린 채 문풍지를 노려보았다. ‘모험 일지! 두 번째!’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어, 정말이다. 이거, 모험 일지 뒷장이야.”
우리는 문풍지에 고개를 바싹 붙이고 내용을 읽어 보았다. 내용은 이러했다.
[위대한 모험 왕의 모험 일지! 두 번째!
으하하, 성스러운 샘물을 병에 담아서 가져왔다!
이 샘물이 있으면 버섯을 먹어도 안심!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모험에 지친 고단한 이 몸에게 잠시간의 안식을 허락하고 일어났더니!
나의 귀염둥이 깜찍이 여동생이 샘물을 쏟아 버렸다!
아아, 니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른 채 ‘밥 줘!’라고 외치는 동생!
가련한 영혼이여!
너의 행동 때문에 저녁 반찬으로 버섯을 먹지 못하게 되었단다!]
“…….”
“…….”
“피이…….”
“나, 난 모르는 일이야.”
나와 세이르, 로코의 시선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니키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과거의 일을 실토했다.
“한 달이나 안 돌아오다가, 선물이랍시고 웬 물 한 병만 주잖아. 화나서 몰래 쏟아 버린 적은 있지만…….”
이럴 수가.
그러고 보니 전에 화나서 오빠가 가져온 물건을 던져 버렸댔지. 하필이면 그게 정화의 샘물이었다니.
“설마 비싼 거야? 아…… 아니지?”
이제껏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전설급 아이템이니까 부르는 게 값일 테다. 사달멜리크 경매에 내놓으면 최소로 잡아도 10만 골드쯤 아닐까.
이미 없어진 물건의 가격을 알아서 무엇 하겠나. 마음만 아프겠지. 나는 생긋 웃으며 선의의 거짓말을 해 주었다.
“아니야. 그냥 물인데 그런 게 왜 비싸겠어. 신경 쓰지 마.”
그러나 내 선의의 거짓말은 니키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안젤리카 님, 거짓말 진짜 못하는 거 알아? 어…… 얼마짜린데? 설마 한 백 골드쯤 해?”
“…….”
“…….”
“으아아! 무서우니까 둘 다 그렇게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지 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설령 이 모험 일지에 나오는 성스러운 샘물이 정화의 샘물이 맞고, 니키가 쏟지 않았다고 해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을 테다.
어차피 이 오빠라는 인간이 독버섯을 먹은 뒤 홀라당 마셔 버렸겠지.
그리고 만약 오빠가 가져온 독버섯을 니키가 먹었다면 지금 여기 없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우리 왕국의 틸라 농업에도 큰 지장이 생겼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그 전에.
정화의 샘물을 구했으면 팔면 되잖아? 그랬으면 수상한 버섯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부유해졌을 텐데.
“니키…….”
“으, 응? 왜 그래?! 왜 그렇게 아련하게 쳐다보는 거야?”
토닥토닥.
나는 패닉에 빠진 니키를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이상한 오빠 옆에서 잘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뜻이었다.
이어서 다음 문풍지도 읽어 보았다.
[하지만 안심하라구!
최고의 모험가인 나!
이럴 때를 대비해서 무지갯빛 돌을 하나 더 챙겨 왔지!
평범한 힐링 포션에 이 돌을 갈아서 넣으면! 짜자잔!
나쁜 놈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돌을 빼앗아 가겠지!
하지만 안심하라구!
돌은 내가 잘 숨겨 놨으니까!
숨겨 둔 곳은…….
다음 편에 계속☆]
일지는 여기서 끝이었다.
갑자기 끊기 신공? 중요한 내용은 한 번에 다 써 주면 안 돼?!
나는 갑갑증을 느끼며 크게 외쳤다.
“다음 장 찾자!”
“피이이잇!”
다시 오두막을 한참 살핀 뒤에야 다음 페이지를 찾을 수 있었다.
모험 일지의 마지막 장은 갓 구운 틸라 봉투 안에서 발견되었다. 니키가 이따 간식으로 먹으려고 가져왔다고 한다. 뜨거운 틸라를 감싼 꼬깃꼬깃한 종이를 펴자 다음 내용이 보였다.
‘휴우, 다행이다. 조금만 늦었으면 틸라 껍질이랑 같이 쓰레기통행이었겠네.’
모험 일지의 마지막 장에는 드디어 원하는 정보가 있었다. 틸라 껍질에서 묻어 나온 검댕 때문에 군데군데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내용을 판독할 정도는 되었다.
“어디, 뭐라고 쓰여 있지…….”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내용을 읽어 보았다.
[무지갯빛 돌을 숨겨 둔 곳은 바로 바로!
파와리스 폭포!
후후후, 깜짝 놀랐지?
폭포수 위 달의 세 번째 기둥
자격 있는 자에게 문이 열린다.
찾는 사람이 임자!
어디 한번 잘 찾아보라구☆]
‘……너였냐.’
그 난해한 암호문 네가 쓴 거였냐!
암호문에 나오는 장소를 찾으려고 내가 얼마나 손가락 아프게 클릭해 댄 줄 알아?
나는 잠시 여기에 없는 니키의 오빠가 얼른 돌아오기를 빌어 주었다. 돌아오면 의자에 묶어 놓고 올바른 암호문 작성법을 숙지할 때까지 가르쳐 줄 테다.
하지만 암호문에 등장하는 폭포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큰 진보였다.
‘파와리스 폭포라…….’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폭포다. 규모가 작아 그리 유명한 곳은 아니었다.
‘흐음…….’
머릿속으로 파와리스 폭포까지 가는 위치를 가늠하는데, 불쑥 세이르가 말을 걸었다.
“……안젤리카.”
“응? 왜?”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설마 이 장소에 직접 가려는 건 아니지?”
당연히 갈 생각이었지만, 나는 일단 시치미를 뗐다.
“아니이?”
“아직 검증되지 않은 정보야. 누군가가 저 장소로 너를 불러내려고 하는 걸 수도 있어.”
세이르도 참, 염세주의 꼬맹이 아니랄까 봐 걱정이 많구나.
세이르의 마음은 알겠지만, 함정일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한다.
“여기 있지도 않은 니키네 오빠가 어떻게 함정을 파?”
“우리 오빠는 그렇게 안 똑똑한데?”
니키가 변호인지 비방인지 모를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좀 더 조사해 보는 게 좋겠어. 먼저 왕성 경비병들에게 조사를 맡기고 결과를 기다리는 게 어때?”
세이르의 의견은 무척 합리적이었다. 낯선 장소에 대뜸 가 보는 것보다는 경비병들을 보내는 쪽이 낫겠지.
그래서 나는 끝내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응, 그, 그렇지? 그래야겠어.”
“정말이지?”
“응, 정말이지. 세이르, 나 못 믿어?!”
“…….”
“…….”
“피이이…….”
아니, 세이르랑 니키는 그렇다 치고, 로코 넌 또 왜 나를 불신의 눈빛으로 보는 건데?
로코, 너마저!
* * *
다음 날.
나는 왕성의 정문으로 향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앞을 지키던 트리스탄이 말을 걸었다.
“안젤리카 님, 어디 외출하시나요?”
“응, 잡화점에 다녀오려고.”
“오늘은 세이르 님이랑 함께 안 가세요?”
“내가 무슨 맨날 세이르랑 노는 줄 알아? 오늘은 혼자 갈 거야.”
나는 냉정하게 대꾸했고, 트리스탄이 호쾌하게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하하하하! 네, 알겠슴다. 잘 다녀오세요.”
“응, 이따 봐!”
나는 트리스탄에게 손을 흔든 뒤 왕성 앞 마을로 나갔다. 그리고 평소처럼 잡화점 쪽으로 걷다가 중간에서 방향을 틀었다.
“헤헤, 아무한테도 안 들켰지?”
다시 마을 광장으로 돌아온 다음 왼쪽 길로 들어서려는 찰나였다.
“안젤리카.”
“으아악!”
“왜 그렇게 놀라?”
세이르가 앞에 서 있었다.
“가…… 갑자기 튀어나오니까 놀라지!”
얘는 왜 발소리가 안 나는 거 같지? 검사의 보법, 뭐 그런 건가? S급 성검 소유자라 인기척도 내지 않고 불쑥불쑥 나타나는 거야?
내가 놀라거나 말거나, 세이르는 살짝 웃으면서 물었다.
“어디 가는 길이야?”
“잡화점에 가던 길이었어.”
“잡화점은 반대쪽인데?”
이럴 때는 도리어 뻔뻔하게 나가야 한다. 나는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 큰소리를 쳤다.
“세이르, 몰라? 식후 적당한 운동은 건강에 좋아. 마을을 한 바퀴 돈 다음 잡화점에 가려던 참이었어.”
“너 거짓말 못하니까 무리하지 마. 그 파와리스 폭포라는 곳에 가 보려는 거지?”
“으으…….”
이제 보니 처음부터 다 알고 나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나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세이르에게 말했다.
“난 갈 테니까 비밀로 해 줘. 느긋하게 기다릴 시간이 없단 말이야.”
그랬다.
지금 이 순간에도 퀘스트의 남은 시간은 차츰차츰 줄어들고 있다.
저주 ‘암흑화’는 계속 진행 중이고, 그만큼 내 목숨 줄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 모험 일지의 내용이 영 미심쩍다고 해도, 한시라도 빨리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직접, 그 무지갯빛 돌이라는 물건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어떤 <마.왕.꾸> 플레이어도 손에 넣지 못한 미지의 아이템.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리가 없다.
“걱정하지 마. 이거 봐, 호신용품도 준비했어. 짠!”
나는 손가방을 열어 안을 보여 주었다. 안에는 내가 정성 들여 만든 마법 폭탄이 종류별로 각각 다섯 개씩 들어 있었다.
[<소형 마법 폭탄>
마법의 힘을 응축해 만든 소형 폭탄.
투척 시 적에게 마법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강도 : ●●○○○]
[<소형 마법 섬광탄>
마법의 힘을 응축해 만든 섬광탄.
투척 시 강력한 빛이 터져 나옵니다.
범위 : ●●○○○]
[<소형 향신료 주머니>
마늘과 후추, 양파를 배합해 만든 호신용 무기.
투척 시 상대방의 눈을 맵게 할 수 있습니다.
맵기 : ●●○○○
※ 마법하고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 요리용으로 사용하지 마세요!]
“어제 늦게까지 공방에서 뭘 만드나 했더니……. 이거였어?”
세이르는 어쩐지 어이없어하는 반응이었다.
“엄청 만들기 힘들었다고.”
특히 마지막 것이 가장 힘들었다. 재료를 구하려고 밤에 불 꺼진 부엌에 갔다 와야 했단 말야.
마법 폭탄을 넉넉하게 준비해 뒀으니 안심이다. 나는 세이르에게 인사하고 곧장 목적지로 떠나려 했다.
“그럼 비밀 지키기다? 나 갈게, 이따 봐.”
그런데 세이르는 내 뒤를 계속 따라왔다.
“거기까지 걸어가려고?”
“응?”
“그 폭포, 꽤 멀잖아. 걸어갔다간 밤이 되어 버릴걸.”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한두 시간…… 아니, 세 시간 정도만 걸으면 되는데.”
“하아……. 이리 와 봐.”
“으응?”
세이르는 갑자기 내 손을 붙잡더니 마을 광장의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웬 말 한 마리가 묶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