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저 마기가 루카의 이성을 무너뜨리고 공격성을 자극한다. 심장의 마기를 없애지 않으면 완전히 잠식당해 몬스터가 되는 거다.
‘저 마기를 어떻게든 해야 하지만…….’
보통 사람은 심장을 다치면 죽는다.
과연 생명에 지장 없이 심장에서 마기만 제거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세이르?”
그때 침대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루카에게 세이르가 다가가더니.
퍽!
성검을 검집째 들고 루카의 목덜미를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쳤다.
“윽……!”
루카는 그대로 기절했다. 잠시 살펴보았지만 깨어날 기미는 없었다. 숨소리가 고른 것으로 보아 잠이 든 것 같았다.
‘방금 성검이 빛났던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보려는데, 세이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가자.”
“으. 응?”
“얘를 살릴 방법을 찾을 거잖아?”
* * *
세이르와 나는 일단 마법 도구 공방으로 갔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조용한 곳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였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나는 작업대 앞에 턱을 괴고 앉아,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세이르, 어떻게 내가 약을 만들려는 걸 알았어?”
세이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안젤리카는 저런 애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하니까.”
“‘저런’ 게 뭔데?”
“음, 나 같은 애?”
“이거 스무고개야?”
“아하하!”
세이르는 웃기만 하고 그 이상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루카를 구할 수 있는 약을 찾으려던 건 맞아서 나도 더 묻지 않았다.
‘사실 루카가 걱정된 거면서 아닌 척하기는.’
쯔쯔쯔, 세이르도 참 솔직하지 못하구나.
문제는 루카의 저주를 치료할 약을 어떻게 구하느냐는 건데.
흔히 사용되는 포션의 제조법은 내가 전부 알고 있다. 당연하다. 나는 <마.왕.꾸>를 엄청나게 한 슈퍼 플레이어니까. 힐링 포션의 제조법은 기본 소양이지.
하지만 ‘암흑화’라는 생소한 저주를 치료하는 포션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으음…….”
루카의 저주를 치료하지 못하면 죽는다고 해 놓고, 아무런 힌트도 없이 너무 망망대해를 떠돌게…… 아!
맞다, 상태창!
아까 이므시 백작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확인 못 했는데 상태창이 떴었지.
나는 얼른 상태창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확인했지만…….
[※ 원 포인트 레슨 : 암흑화를 치료하는 방법
(1) 약의 제조법을 알아낸다.
(2) 약에 들어가는 재료를 모은다.
(3) 제조법에 따라 올바르게 제조한다.
(4) 용법에 따라 환자에게 약을 먹인다.
(5) 치료 끝!]
“…….”
응, 이건 나도 알아.
누구 이거 모르시는 분? 정보값이라고는 없는 힌트를 굳이 상태창으로 띄우다니, 나를 놀리려는 거야?
그 약의 제조법을 알려 달라고!
암흑화를 치료하는 약이라. 약, 약을 만드는 법……. 잠깐, 설마!
나 알고 있잖아? 암흑화를 치료하는 약!
드르륵!
나는 의자를 뒤로 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소리가 나자 세이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거라면 루카를 치료할 수 있을지도! 아니, 치료할 수 있어!”
“그거? 그게 뭔데?”
“정화의 샘물!”
기쁜 마음에 커다랗게 외쳤지만 세이르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정화의 샘물이라니……. 그거, 전설 속 아이템 아냐?”
“그렇지. 하지만 나는 만들 수 있어.”
“정말……?”
나를 쳐다보는 세이르의 눈에 미심쩍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았다.
정화의 샘물이란, <마.왕.꾸>에 등장하는 최고 등급 회복 아이템이다.
천 년 전의 고대 왕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는 전설 속의 포션. 이 아이템은 목숨만 붙어 있으면 어떤 독과 저주든 치료할 수 있었다.
전설 속 아이템이라는 표현에서 짐작 가능하듯, 게임상에서 이 아이템을 얻기란 아주 어려웠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고인물 플레이어들이 정화의 샘물을 손에 넣기 위해 게임 속 지도를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정화의 샘물이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이 플레이어들 사이의 정설이었다.
게임상에서 정화의 샘물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은 맞다.
그러나 ‘만들’ 수는 있다.
나는 다시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처음에는 아무런 정보값도 없이 나를 약 올린다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잘 읽어 보니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마.왕.꾸>를 플레이하면서 정화의 샘물 레시피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 레시피를 사용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가만, 만약 내가 정화의 샘물을 만들어서 암흑화를 치료하면…….’
<마.왕.꾸>의 고인물 플레이어들 아무도 모르는 저주를, 아무도 손에 넣은 적 없는 아이템으로 치료한다?
그거…… 엄청 끝내주는 업적 아니야?
실로 SSS급 흑막 왕국을 만들 흑막의 외동딸에게 어울리는 업적이다.
좋아. 확실히 결심했다.
약을 만들어서 루카도 살리고, 퀘스트를 클리어해 나도 살고, 살아남아서 아빠를 흑막으로 만들어야지.
“세이르, 정화의 샘물을 만들자!”
“신기해.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네가 말하니까 진짜 할 수 있을 것처럼 들려.”
“당연하지. 진짜 할 건데?”
“그래, 그래. 그럼 뭘 먼저 하면 될까.”
“도와줄 거야?”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언제는 내가 네 부하 1호라며?”
맞아, 그랬지. 갑자기 많은 일이 생기는 바람에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
“좋아. 가라, 부하 1호! 일할 시간이다.”
“이상한 말투를 쓰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아무튼 알았어.”
* * *
물론 내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대뜸 정화의 샘물을 만들자고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승산이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해 볼 만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하는 거다.
과거, 나는 <마.왕.꾸>를 플레이하면서 정화의 샘물을 만들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데네브 왕국 문서고에서 발견한 낡은 수첩 때문이다.
‘문서고에서 책 읽기를 실행하면 0.1% 확률로 얻을 수 있었지.’
손가락이 저릴 정도로 마우스를 클릭해야 얻을 수 있을 만큼 극악한 확률이었다. 그 때문에 이 수첩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메모의 내용은 다름 아닌 정화의 샘물을 만드는 레시피였다. 작성자는 미상.
그러나 그 메모만 읽고 정화의 샘물을 만들어 내기란 불가능했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재료가 이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107. 18. 37. 99. 413. 238. 55. 48. 21. 296. 162.
66. 138. 61. 88. 366. 25. 253. 393. 70. 379. 188. 216.
풀 수 있으면 어디 한번 풀어 보라는 식의 느닷없는 암호문.
수천 시간 동안 <마.왕.꾸>만 플레이한 슈퍼 플레이어인 내 승부욕을 자극하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머리를 싸매고 수열이니 함수니 온갖 수학적 지식을 동원했지만 암호를 풀 수 없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이거 김××가 낚시한 거 아냐?”
……라며 암호 해독을 포기하려 했을 무렵, 암호를 푸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건 바로 <마.왕.꾸> 설정집 한정판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즉, 암호의 시작 부분인 107은 설정집의 107번째 글자를, 18은 18번째 글자를 대입하는 식이었다.
뭐 이딴 자본주의적으로 복잡한 암호를 넣어 놓은 건데. 그냥 한정판 설정집 비싸게 팔아먹으려는 상술 아냐?
물론 나는 누구보다 상술에 약한 인간이었다. 한정판 설정집을 예약 구매 해서 암호를 푸는 데 참여했고, 결국 답을 얻었다.
폭포수 위 달의 세 번째 기둥.
자격 있는 자에게 문이 열린다.
그리하여 나온 답이 또 새로운 암호문이었다.
해석은 육하원칙에 따라 이해하기 쉽도록 썼으면 좋겠다.
폭포수, 달, 세 번째 기둥……. 나는 게임 내에서 암호문과 관련 있어 보이는 장소들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러나 끝내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정말 뼈아픈 기억이다.
“후후후, 과거의 복수를 할 때가 왔군.”
지금 나는 <마.왕.꾸>의 세계 안에 있다. 게임 속에서 직접 그 낡은 수첩을 손에 넣으면 새로운 정보를 찾을 수 있겠지.
그때는 실패했지만, 이번에야말로 정화의 샘물을 만들어내서 설욕하고 말 테다.
먼저, 나는 세이르에게 마을에 가서 필요한 재료를 사 와 달라고 요청했다. 모두 흔히 구할 수 있는 재료였다.
목록을 본 세이르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이런 걸로 전설의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고?”
“응, 마지막 재료 하나만 더하면 돼!”
“그게 뭔데?”
“그건 이제부터 찾아볼 생각이야.”
미심쩍어하는 세이르를 보낸 뒤 나는 왕성 문서고에서 낡은 수첩을 찾아보기로 했다.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있어서 별로 가고 싶지는 않지만…….”
빙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왕성 문서고에 들어갔었다. 과거의 회계 장부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왕성 문서고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텅 빈 장부가 너무나도 악몽 같았으니까. 점점 줄어드는 숫자가 꿈에 나올까 봐 무서웠다고!
지금 우리 왕국은 꽤 많은 돈을 벌었다. 더 이상 잔고 3 골드의 쪼들리는 왕국이 아니다.
그래, 용기를 가지고 문서고에 들어가자.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거야.
하지만 혼자 가려니 불안하다.
“로코, 이리 와. 같이 가자.”
“피이잇?”
나는 로코를 품에 안은 채 왕성 문서고를 향했다.
그리고 약 두 시간 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피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