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아빠는 여전히 착하지만, 데네브 왕국은 꾸준히 발전해서 얼마 전에 ‘그럭저럭 먹고살 만한 왕국(D)’에 도달했다.
내 레벨도 12로 오르면서 HP도 70이나 되었다.
틸라 농업과 고대 경영 던전이라는 안정적인 수입원을 바탕으로 왕국의 경제적 사정도 많이 나아졌으며, 앞으로 열심히 마법 도구를 만들 예정이다.
즉, 아직 갈 길이 멀다고는 하나 훌륭하게 초반 진행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이만하면 되지 않았어? 이제 비밀 아지트에서 혼자 음흉하게 웃으면서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할 방법만 궁리해도 되는 거 아니야?
아무리 왕녀가 몸빵 직군이라지만 너무하지 않아?
내 <마.왕.꾸> 라이프 왜 이렇게 가시밭길인 건데?
‘아냐, 진정하자. 진정…….’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해 보자.
‘암흑화’라는 저주는 어젯밤에 본 루카의 이변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온몸이 마기에 뒤덮였고, 이성을 잃은 채 나를 공격했다. 놀랄 만큼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이대로 저주를 풀지 않으면 자아를 잡아먹힌다니, 정말 무시무시한 저주였다.
“어,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건데!”
탁!
루카가 마주 잡은 내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아차. 악수를 하다 생각에 잠기는 바람에 손을 잡은 그대로였구나.
“미안, 미안. 동생이 반가워서 그만.”
“누가 네 동생이야?!”
“그래? 루카 너 몇 살인데?”
“…….”
“말 못 하는 거 보니까 나보다 동생 맞네, 뭐.”
“누구 멋대로……!”
루카는 버럭버럭 화를 내기는 했지만, 지금은 폭주의 기미도 없고 멀쩡해 보였다.
어제 루카가 나를 공격했다고는 하나 본의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저주의 영향일 테지.
이렇게 조그마한 보통 애가 완전히 자아를 잡아먹히게 된다니 소름 끼치는 느낌이다. 이대로 모르는 척했다가는 꿈자리가 사나워질 것 같다.
그러니 꼭 퀘스트가 아니더라도 저주를 풀어 주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암흑화’라는 저주를 어떻게 푸느냐인데.’
‘암흑화’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있다. <마.왕.꾸> 위키에 나와 있었다.
하지만…….
<암흑화/저주>
분류 : 두근두근 마법 왕국 꾸미기>게임 내 콘텐츠>시스템
마기에 의한 저주.
해당 항목에 대한 정보가 부족합니다.
아시는 분 정보 추가 바랍니다.
내용은 고작 이것이 전부. 이 저주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단 이야기다.
또한 실제로 <마.왕.꾸>를 플레이하는 동안 암흑화가 나타난 적도 없었다. 그러니 치유법을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그런데 어디서 들어 본 것 같단 말이지…….’
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으음, 모르겠다. 뭔가 생각날 듯 말 듯 하면서 팍 오는 게 없단 말이지.
‘힌트 없어, 힌트? 뭐라도 알려 주고 퀘스트를 시키던가!’
띠링띠링!
[※ 원 포인트 레슨 : 암흑화를 치료하는 방법
……]
내 애원이 닿은 건지 시의적절하게 새로운 상태창이 떴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암!
나는 당장 상태창의 내용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벌컥!
“루카 네 녀석!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게냐!”
갑자기 이므시 백작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게을러터진 놈! 얼른 일어나지 못해?!”
그것도 상당히 무례한 방식으로.
아무리 아빠의 친형이자 백작위를 받은 자라고 해도, 아침부터 아무런 기별 없이 왕성에 들이닥치다니 너무 무례하다. 그것도 아빠가 자리를 비운 이때에.
‘과연 분수를 지지리도 모르는 임시 백작.’
이므시 백작의 등 뒤를 보니, 트리스탄과 사라가 고구마를 서른다섯 개쯤 먹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알 만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 그동안 이므시 백작의 존재를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언젠가 치워 버려야 할 날파리 같은 놈이기는 한데, 당장 처리할 필요가 없다 보니 그만. 매일매일이 바쁜데 어떻게 잔챙이한테까지 신경 쓰겠는가.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하는 데 성공해서, 훌륭한 흑막이 된 아빠가 직접 이므시 백작을 처리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뭐, 이왕 이므시 백작이 나타난 김에 루카에 대한 정보라도 캐내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돌리는데.
퍽! 퍼억!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이므시 백작이 손에 든 기괴하게 생긴 스태프로 루카를 마구 때리기 시작한 것이다.
“뭘 미적거리고 있는 게냐!”
“윽……!”
아까의 새침한 모습은 어딜 갔는지, 루카는 잔뜩 긴장한 채 이므시 백작의 거친 행동에 당하고만 있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퍽!
“잘못……. 우윽, 용서해 주세요…….”
루카는 몸을 옹송그리고는 잘못을 빌었다. 이므시 백작의 폭력과, 그의 손에 들린 스태프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고통을 견디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문다.
보다 못한 나는 앞으로 나섰다.
“그만두세요!”
“어엉?”
“아직 아픈 애한테 무슨 짓이에요?”
“네가 알 바 아니다. 끼어들지 마라.”
느닷없이 남의 왕성에 쳐들어온 인간이 하는 말치고는 퍽 안하무인이었다.
그래도 나는 일단 참으려고 했다. 온건하게 이므시 백작이 루카를 데려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 정말이다.
“루카는 어제 이 왕성에 무단으로 침입해서 문제를 일으켰어요. 아버지께서 돌아오셔서 처분을 결정할 때까지 돌려보낼 수 없습니다.”
“처부운? 이놈은 내가 키우는 노예다! 내가 데려가서 알아서 하마.”
“네?”
루카가 이므시 백작의 노예라고?
그렇다면 어제 루카를 왕성에 보낸 사람이 이므시 백작일까?
아니, 그 전에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나는 떨리는 숨을 삼킨 뒤 날카롭게 말했다.
“대륙법에 따라 노예 제도는 금지되었어요.”
“……뭣?”
이므시 백작이 불쾌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쯧, 크로셀이 그리 가르치더냐. 어른한테 따박따박 대들라고?”
“……네?”
나의 명예를 위해 부연하자면, 나는 정말 참으려고 했다. 그래도 아빠의 친형이면 나한테 큰아버지니까 가능한 한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최강이자 최악의 흑막(이 될 예정)인 크로셀 데네브의 외동딸인 내가 저런 개소리도 참아 넘겨야 할까?
답은 물론, ‘아니다’였다.
고구마도 참을 가치가 있을 때나 참고 먹는 거지. 이므시 백작을 상대로 참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서서 비딱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이므시 백작님, 말씀이 좀 짧으시네요.”
“뭣?”
“아버지께서 이므시 백작님께 작위를 내리셨죠. 말하자면 군신 관계. 그런 아버지의 하나뿐인 딸인 저한테 계속 말끝이 짧으신 것 같아서.”
“너, 백부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나가세요.”
“뭐, 뭐…… 뭐? 너 지금 나를 쫓아낸다는 거냐?”
나는 입술 끝을 최대한 끌어 올렸다. 비뚜름한 웃음을 입에 머금고 이어 말했다.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하는 무뢰배를 손님으로 둔 적은 없어서. 하긴 구걸하는 거지가 인사하는 모습도 본 적도 없네.”
“뭐, 구걸……!”
“이므시 백작님 말대로 그래도 제 백부이신데, 힘으로 끌어내기는 그렇잖아요?”
크, 내가 말했지만 진짜 재수 없다.
친척이고 나이 많은 어른이고 다 모르겠고, 오로지 지위와 신분으로 사람 깔보기. 그야말로 흑막의 외동딸다운 재수 없음이다.
이므시 백작이 ‘이 재수 없는 꼬맹이를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따위의 생각을 하는지 손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다 보였다.
이런 이므시 백작한테 이제껏 화 한 번 내지 않다니, 우리 아빠는 세상 평균보다도 훨씬 착한 것이 분명하다.
‘내가 걱정이 많다, 진짜.’
에휴, 우리 아빠, 착하기만 해서 어떡한담. 이제껏 우리 아빠가 착하게 대해 줬으니 내가 깐죽거리는 걸로 세상의 균형을 맞춰 줘야겠다.
“그나저나 어제 원탁회의가 열리지 않았나요? 회의 장소에서 여기까지는 거리가 먼데 어떻게 이렇게 아침 일찍 오셨어요?”
“…….”
이므시 백작이 흠칫 굳었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손뼉을 짝 쳤다.
“아, 설마 초대 못 받으셨어요?”
“아니, 그건 사정이…….”
나는 이므시 백작의 뒷말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긴 각 나라와 자유 도시의 대표자만 불러도 상당한 인원일 테니까요. 단승 작위 하나뿐인 일개 백작까지 부르기에는 회장이 좁았겠어요.”
내가 말했지만 정말 재수 없는 빈정거림이다. 이므시 백작의 표정을 보니 대미지가 제대로 들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게 선빵을 치지 말았어야지.
그나마 훌륭한 흑막이 된 아빠가 이므시 백작을 직접 처리하길 바라서 그냥 빈정거리기만 하는 거다. 이 얼마나 관대한 흑막의 외동딸이란 말인가.
“저, 원탁회의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거든요. 다음번에 참가하시면 어떤 곳인지 이야기 좀 해 주세요!”
“그, 그래. 다음에…….”
“아, 하지만 자기 영지조차 제대로 관리 못해서 아버지께 돈을 빌리러 온 사람이 초대받을 일은 없겠죠. 됐어요.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이, 이,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이므시 백작이 들고 있던 스태프를 휘두르려는 그때.
“안젤리카, 무슨 일이니? 왕성이 소란스럽구나.”
아빠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