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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78)화 (79/133)

78화

7장. 어둠에 물든 기사

실컷 재미있게 마을 축제를 즐기고 나니 어느덧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왕성 정문 앞에서 세이르, 니키와 헤어진 뒤 내 방 쪽으로 걸어가다가 나는 문득 생각했다.

‘아빠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원래 나는 오늘 아빠랑 같이 축제를 구경하러 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에게 급한 볼일이 생겼다.

“안젤리카, 미안하다. 아빠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어딜 좀 다녀와야겠다.”

“네? 정말요?”

“그래. 안젤리카와 축제를 구경하기로 한 날인데……. 꼭 가 봐야 할 일이 생겼구나.”

원래 흑막은 자신의 거처에서 잘 벗어나지 않는 법이다. 진정한 흑막이라면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뒤에서 상황을 조종해야지.

여기저기 쏘다니는 흑막 본 사람? 없을걸! 아무 데나 쉽게 얼굴을 내비치면 흑막이 아니라 그냥 아웃도어형 인간이잖아.

그래서 <마.왕.꾸> 최악이자 최강의 흑막(이 될 예정)인 아빠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왕성을 잘 떠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일까.’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곧 답을 찾아냈다.

‘아, 그거인가? 벌써 그거 할 때가 되었나.’

여러 왕국이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마.왕.꾸>의 세계.

그러나 각국이 허구한 날 서로 견제만 하는 것은 아니다. 몇 년에 한 번, 여명교 최고 신관의 주최로 여러 왕국과 도시의 유지(有志)가 참석하는 회의가 열린다.

일명 원탁회의.

쉽게 말하면 다른 왕국과 기 싸움도 하고 정보도 캐내는 모임이다.

내가 <마.왕.꾸>의 흑막 루트를 플레이할 때도 원탁회의는 열렸다. 게임 전반과 후반, 두 번이었다.

그중 첫 번째로 열린 회의에 크로셀 데네브는 참석하지 않았다.

크로셀 데네브가 제일 강한데 뭐 하러 다른 왕국과 기 싸움을 하고 정보를 캐낸단 말인가. 번거롭기만 하지. 원래 흑막은 그런 거 쿨하게 제끼는 법이다.

그리고 두 번째 회의는…….

‘귀찮게 하는 놈들을 한 번에 다 처리해 버렸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적들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크로셀 데네브의 표정이란. 정말 흑막다웠지, 우후후.

나랑 축제 구경을 하기로 한 오늘이 하필이면 그 첫 번째 원탁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번에는 아빠가 참석하려고 하나 보네.’

초청장을 읽어 보지도 않고 불참했던 원작 전개와는 달라지지만 괜찮다.

사이가 좋지 않은 여러 왕국과 도시의 대표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으니 당연히 원탁회의의 분위기는 좋지 않다. 그중에는 아빠한테 재수 없게 구는 놈들도 있겠지.

그 어리석은 작자들이 여전히 착하고 다정한 아빠에게 흑막의 마음을 일깨워 줄 수도 있으니까.

즉, 원탁회의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빠가 흑막으로 개화할 가능성이 있는 소위 꿀 빠는 이벤트다.

그런 중요한 시점에 마을 축제가 대수겠는가.

“정말 미안하구나. 아빠도 오늘 안젤리카와 함께 축제를 구경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미안해하는 아빠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후후, 괜찮아요.”

“안젤리카?”

“중요한 일정인데 어쩔 수 없지요. 저는 걱정 말고 잘 다녀오세요!”

이런 연유로 아빠는 함께 올 수 없었지만, 아무튼 오늘 하루 재미있게 놀았다. 내일부터 다시 SSS급 흑막 왕국을 위해 열심히 해야지.

방으로 돌아가자 사라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안젤리카 님, 축제는 즐거우셨어요?”

“응!”

“피곤하시죠? 곧 목욕물을 준비할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응. 고마워, 사라. ……어라?”

방으로 돌아온 뒤 나는 깜짝 놀랐다.

“안젤리카 님, 왜 그러세요?”

“내 노트가 없어.”

“노트요? 안젤리카 님이 늘 들고 다니시는 그 노트 말씀이세요?”

“응, 그거.”

SSS급 흑막 왕국을 만들기 위해 <마.왕.꾸> 정보 따위를 메모해 둔 노트다. <데네브 왕국 발전을 위한 제안서> 초안도 쓰여 있다.

모두 고급 정보라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해 둔 중요한 노트인데.

“……아.”

나는 곧 노트를 어디다 두었는지 기억해 냈다. 축제에 가기 전에 잠시 마법 도구 공방에서 메모를 하다가 그대로 깜빡한 모양이다.

“공방에 두고 왔나 봐. 잠깐 가지고 올게.”

“벌써 밖이 어두워요. 여기 계시면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그, 그건 안 돼!”

“안젤리카 님?”

내가 크게 당황하자 사라가 깜짝 놀랐다.

안 돼, 사라를 공방에 들어가게 둘 수는 없다.

마법 도구 공방에서 소형 마법 주머니를 대량으로 만드는 중이란 말야. 다 만든 다음에 선물하면서 깜짝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노트를 가지러 들어가면 들키잖아.

“가까운데 뭘. 그냥 내가 갔다 올게.”

하지만 사라도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오늘은 크로셀 님도 안 계신데, 안젤리카 님이 혼자 나가시면 제가 걱정된답니다. 그럼 제가 함께 가게 해 주세요.”

“그건 뭐……. 좋아. 대신 앞에서 기다려야 해. 공방 안에 들어오면 안 돼!”

“후후후,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안에서 안젤리카 님이 무얼 하시는지 모르는 척…… 아니, 모르니까요.”

“알았어. 그럼 얼른 갔다 오자.”

그때 자기 침대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로코가 갑자기 날개를 파닥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피이잇, 피!”

자기도 데려가 달라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로코에게 냉정한 말투로 말했다.

“로코, 놀러 가는 거 아니야.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피이이이……. 피잇!”

“아이 참, 그렇게 졸라도 안 돼. 산책 가는 거 아니라니깐.”

“피이이, 피! 피이이잇!”

평소에 안 그러던 애가 갑자기 떼를 쓰네. 이 버릇없는 박쥐 같으니. 나는 결국 로코를 안아 들었다.

“알았어, 데리고 가 줄게. 데리고 갈 테니까 얌전히 있어야 돼?”

“피잇…….”

그렇게 주머니에 로코를 넣고 사라와 함께 공방으로 갔다.

“그럼 가지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네, 얼른 다녀오세요.”

“절대 안에 보면 안 된다?”

“네, 절대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모른답니다.”

나는 공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 생각대로 노트는 공방의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다행이다. 역시 여기 있었네!”

얼른 노트를 챙기고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였다.

삐걱.

가까이에서 마룻바닥을 밟는 소리가 났다.

어라?

이 공방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세이르와 니키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 허락을 얻은 뒤에 들어올 수 있도록 잠금장치를 걸어 두었다.

니키는 공방에 흥미가 없는지 거의 오지 않았고, 세이르는 지금 자기 방에 있다. 그러니 이 시간에 공방에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설마 귀신…….

“…….”

“피이…….”

“로코, 쉿.”

목덜미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야, 진정하자. 귀신은 무슨. <마.왕.꾸>의 세계에서 무서운 것은 파산이지 귀신이 아니다.

어디서 동물이 길을 잃고 들어온 게 아닐까?

예를 들어 고양이라던가. 나 고양이 키우고 싶었는데!

그래, 괜히 귀신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빨리 확인해 버리자.

탁.

작업대 옆에 올려 두었던 등잔에 불을 켠 순간, 안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움찔거렸다. 그쪽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얘, 거기서 뭐 해?”

벽장 옆에 자그마한 소년이 숨어 있었다.

소년은 얼추 나랑 비슷한 나이거나 나보다 어려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 눈을 덮었다.

주위가 어둡기도 해서, 얼굴을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오직 보인 것은 붉게 빛나는 눈.

“얘, 여기 맘대로 들어오면 안 돼.”

내 말에 소년이 화들짝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소년의 호흡이 비정상적으로 거칠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벽에 몸을 기대더니 몸을 덜덜 떨었다. 붉은 눈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너 괜찮아?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그건…… 마, 말 못해……. 저리, 가…….”

“일단 나가자. 어디 아픈 거면 의사 부를 테니까. 잠깐, 일단 사라한테…….”

그때.

“도망쳐…….”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가…… 가까이 오지 마!”

퍽!

소년이 나를 있는 힘껏 뒤로 밀쳤다. 왜 그러느냐고 화를 낼 틈도 없었다.

“크으으윽…….”

소년이 몹시 괴로워하며 신음을 뱉었기 때문이다.

“얘, 왜 그래? 어디 아파?”

“오, 오지……. 으, 크아아악!”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소년이 몸을 거세게 떨더니 어느 순간 뚝 멈추었다.

소년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연기는 점점 늘어나더니 이윽고 소년의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소년은 붉은 눈을 제외하고는 마치 검은 덩어리처럼 보였다.

‘말도 안 돼. 마기……?’

뭐지? 인간에게서 마기가 나오다니…… 들어 본 적 없어.

마기. 쉽게 말하면 마계의 기운.

천 년 전까지 마족이 살던 이 대륙에는 곳곳에 마기가 남아 있다. 하지만 마기는 흙이나 마석 등 몇몇 아이템에 저장될 뿐,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런데 소년은 마치 몸에서 마기를 뿜어내는 것 같았다.

“크으으, 으윽……!”

소년이 비척비척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검게 물든 손으로 나를 붙잡으려 했다.

“안젤리카 님!”

“……사라!”

그때, 이상을 눈치챈 사라가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사라는 주저 없이 단검을 꺼내 소년을 향해 던졌다.

푹!

단검이 소년의 복부에 정확히 꽂혔다.

그러나 소년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놀랍게도, 소년의 복부에 박힌 단검은 곧장 새까만 재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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