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77)화 (78/133)

77화

“어, 왕녀님이다! 왕녀님!”

“샐리, 안 돼, 아는 척하면. 왕녀님은 지금 암행을 나오신 거란 말야.”

“암행이 뭔데?”

“신분을 감추고 돌아다니면서 나쁜 놈들을 찾는 거야.”

“우와, 넬리 언니, 똑똑해!”

아니, 그냥 놀러 온 건데…….

바로 옆에서 아이들이 나를 모른 척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다 보였다. 나는 세 자매에게 다가갔다.

“안녕, 얘들아.”

첫째, 마거릿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왕녀님. 동생들이 좀…… 시끄러웠죠.”

“아니, 아니. 건강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이건?”

세 자매는 이번 축제에 노점을 냈다. 책상에 천 한 장을 깔았을 뿐인 작은 노점이지만 꽤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판매하는 물건은 천으로 만든 10cm 크기의 인형이었다. 그사이에 손재주가 더 좋아졌는지 인형은 꽤 귀여웠다.

마거릿은 인형 세 개를 집어 우리에게 내밀었다.

“작은 물건이지만……. 이거 받아 주세요.”

“어? 아니야, 파는 건데.”

“감사의 뜻이에요. 인형을 팔 수 있게 도와주셔서……. 동생들도 무척 기뻐했어요.”

마거릿의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나는 결국 인형을 받아 들었다.

“그럼……. 고마워.”

마거릿은 세이르와 니키에게도 인형을 건넸다.

“그리고 세이르 님, 니키 님도.”

“흐아악!”

갑자기 니키가 기겁을 하며 풀쩍 뛰어올랐다.

“……니키?”

“그, 나는 그렇게 부르지 말아 줄래? 높임말 들으니까 닭살 돋아.”

그 격렬한 반응에 넬리와 샐리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더니 니키를 둘러쌌다.

“니키 님!”

“니키 님이다!”

“흐아아악! 제발 그만!”

이렇게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문득 걱정이 들었다. 축제를 맞아 많은 사람이 마을에 드나들 텐데, 이 아이들을 마족 혼혈이라고 백안시하는 사람이 나타나지는 않을까.

“……괜찮아?”

짧은 물음이었지만 마거릿은 내 뜻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심지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차분하게 대답한다.

“계속 숨어 살 수는 없으니까요.”

“…….”

마거릿은 매대 위에 가득 놓인 작은 인형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건 마법 인형이 아니라서 그렇게 비싸게 팔리진 않지만, 돈을 모아서 동생들에게 책을 사 주고 싶어서요.”

“…….”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노점 앞에서 몸을 돌렸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안젤리카, 어디 가려고?”

“금방 올게.”

마거릿의 노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점이 있었다. 소설 등 대중적인 책 위주로 파는 곳이었다.

뭐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어서, 주인에게 제일 인기 있는 책을 추천받아서 샀다. 그리고 책을 들고 다시 노점 앞으로 돌아왔다.

“이건 마거릿 거야. 동생들에게는 아직 어려우니까 마거릿이 읽어.”

마거릿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조심조심 책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표지를 보고는 더욱 감격했다.

“가, 감사합니다. 이거……. 굉장히 읽고 싶던 책이에요.”

“그래? 어떤 내용인데?”

“사악한 흑막 남주가 햇살 여주를 만나 착해진 다음 후회하는 내용이에요.”

“그렇, 구나…….”

이럴 수가, 악역물을 달라고 할걸. 흑막이 착해지는 이야기가 인기 있다니, 요즘 유행은 이해하기 어렵구나.

“정말 감사해요. 소중하게 읽을게요.”

뭐, 마거릿이 좋아하니 됐다.

그렇게 계속 노점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잡화점 앞에 도착했다.

제랄드의 잡화점은 장사가 너무 잘되는 바람에 최근 증축을 했다. 옆으로는 함께 가게를 차린 여관, 식당, 기념품 가게, 꽃집도 성업 중이었다.

“어, 안녕하십니까, 왕녀님!”

잡화점 앞에서 손님들을 안내하던 제랄드가 나를 보고 말을 걸었다.

“제랄드 아저씨, 안녕하세요.”

제랄드는 내 뒤를 유심히 살핀 뒤, 불안해하며 물었다.

“세 분이서 오신 거 맞죠? 다른 분은 없는 거 맞죠?”

“네, 아빠는 같이 안 왔어요.”

“휴…….”

그제야 안심한 듯 제랄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랄드는 아직까지 우리 아빠를 무서워한단 말이지. 아빠는 여전히 착하기만 한데 왜 그런담.

그래도 세상에 아빠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사실은 기쁘다. 머지않아 전 대륙 사람이 무서워하게 될 테니까 조금 일찍 무서워한다고 해도 문제는 없겠지.

우리는 잠시 잡화점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특별히 살 물건은 없지만, 구경만 해도 시간이 잘 간단 말이지.

나는 로코의 새 장난감을, 니키는 모종삽을, 세이르는 검대를 충동구매 했다. 니키는 웬 반짝거리는 물이 담긴 유리병을 보면서 감상에 젖기도 했다.

“어, 이거, 전에 오빠가 가져온 물이랑 비슷하게 생겼어.”

“오빠? 니키네 오빠?”

동생만 내버려두고 연락이 없는 그 답 없는 모험가 오빠?

“응. 무슨 성스러운 샘물이라나? 마시면 아픈 게 다 낫는댔어.”

“헤에……. 효과 있었어?”

“몰라. 화나서 집어던져 버렸거든.”

하긴 집에 잘 돌아오지도 않는 가족이 그런 수상쩍은 물건만 들고 오면 화가 날 만하지. 이해한다.

그리고 잡화점의 구석에 놓인 매대를 구경하던 중이었다.

‘어, 이거 괜찮다.’

구석에 놓인 물건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예쁜 리본이었다. 좋은 비단을 썼는지 손에 닿는 느낌이 부드럽고 좋았다.

‘살까?’

가격이 싸지는 않지만, 이걸 살 수 있을 정도의 용돈은 있었다.

‘으음……. 아니야, 그만두자.’

왕성에 내 머리 장식만 서른 개는 있었다. 확실히 예쁜 리본이지만, 굳이 리본을 또 살 필요는 없지.

그때 세이르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안젤리카, 뭘 그렇게 봐? 그건?”

“어? 아니야. 슬슬 시간 됐네, 가자.”

이제 오늘 축제의 하이라이트만 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마을 광장에서 열리는 거대 틸라 콘테스트다.

이 콘테스트의 시상자는 바로 니키였다. 원래 나한테 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지만, 직접 틸라를 키우는 사람이 맡는 쪽이 뜻깊을 것 같아서 거절했다.

‘그리고 농업이 주는 힐링 효과에 나도 모르게 착해지면 어떡해. 조심해야지.’

참가자들이 직접 키운 각양각색의 틸라를 선보였고, 1등은 팔뚝만 한 크기의 틸라를 키워 낸 마을 사람 토마스였다.

니키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시상을 하러 무대 위에 올라갔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왼팔과 왼 다리가 같이 나갔다.

그리고 우승자에게 상금과 상패를 전달한 뒤, 팔뚝만 한 틸라를 보며 경쟁의식을 불태웠다.

“다음에는 내가 1등할 거야! 나도 이만큼 크게 키울 거니까!”

아니, 그거 안 돼. 안 돼, 니키.

짧은 기간 안에 그럭저럭 먹고살 만한 왕국(D)에 도달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하면 진정한 <마.왕.꾸> 슈퍼 플레이어가 아닌 법.

멋진 축제지만, 오늘 실컷 즐겁게 즐겼지만……!

‘이 목가적이고 훈훈한 분위기, 내년에는 꼭 탈피해야지!’

내년에는 더더욱 왕국을 발전시켜서 더 크고 더 흑막스러운 축제를 열 생각이다.

그리고 거대 틸라 콘테스트 같은 훈훈한 이벤트 말고, 흑막 왕국에 걸맞은 이벤트를 기획할 테다.

뭐가 좋을까. 흑막스러운 대사 말하기 대회? 검은 망토 핏 콘테스트?

다 그냥 그렇군. 시간은 있으니 좀 더 생각해보자.

그리고…….

나는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에 비하면 많이 화려해진 마을 광장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빠, 내년에는 제가 동상 만들어 드릴게요……!’

저 마을 광장 한가운데에 금박을 씌우고 보석을 박은 흑막 아빠 동상을 세우고 말겠다.

가만히 열의를 불태우는 내게 세이르가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 해?”

세이르가 빙그레 웃었다. 햇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초록빛 눈동자가 무척 아름답다. 아름답지만, 뭐랄까. 어딘가 평소와 달라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오늘 하루 어째 조용했지. 그래도 축제는 빠짐없이 돌아다니며 즐기기는 했는데.

“…….”

상태창에 변화가 없으니 염세주의가 더 강해진 건 아닌데.

“……안젤리카?”

어디 아픈 건 아닌 모양이니 괜찮겠지. 나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년에는 무슨 축제를 할까, 하는 생각.”

“……아, 내년.”

아직 올해 축제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내년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 세이르는 모호한 반응이었다.

“응, 올해도 재밌었지만 내 취향에는 너무 목가적이야. 내년에는 좀 더 흑막스러운 축제로 기획해야겠어.”

“흑막스러운 축제가 대체 뭔데……?”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야지. 세이르도 같이 생각해. 너도 내년에 참가할 거 아냐.”

“아하하하…….”

세이르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콘테스트를 보려는 사람들로 주위가 북적거렸기 때문에, 우리의 거리는 가까웠다.

아직 웃음을 머금은 초록빛 눈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세이르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러게. 생각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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