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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75)화 (76/133)

75화

크로셀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이어진 말은 세이르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다.

“안젤리카는 아파서 오랫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아주 오랫동안.”

“안젤리카가…… 잠들어 있었다고요?”

세이르는 깜짝 놀랐다. 크로셀이 말하는 투로 보아 그 ‘오랫동안’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안젤리카 본인에게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안젤리카는 나이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을 알지 않던가.

크로셀이 입술 끝만 끌어당겨 웃었다. 세이르는 그가 억겁의 세월을 견뎌 온 것처럼 피로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푸른 눈에 언뜻 짙은 슬픔이 비친 것 같았다.

“안젤리카는 이제껏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요.”

“그 아이는 몰라. 나는 앞으로도 그 아이가 몰랐으면 한다.”

자신이 아파서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그게 가능한가? 그런 의문도 잠시.

“그러니 안젤리카에게는 비밀로 해 주겠니.”

나지막한 부탁에는 켜켜이 쌓인 깊은 세월이 담겨 있었다. 세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흐으음…….”

“피이이?”

“흐으으음…….”

“피이이이……?”

다음 날.

나는 마법 도구 공방에서 편지 봉투를 앞에 두고 혼자 앉아 있었다. 어제 아빠에게 건네받은 그 편지다.

원래 곧바로 편지를 읽으려고 했는데, 다른 일에 정신을 빼앗기는 통에 아직 뜯어보지 못했다.

그 다른 일이 뭐냐면…….

‘대체 아빠가 세이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 걸까.’

어제 아빠랑 저녁 식사를 하면서 물어볼까 했는데, 어쩐지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 물어보지 못했다.

‘신경 쓰여.’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신경 쓰인다. 별일 아닐 수도 있겠지만, 엄청나게 별일인 것 같은 분위기였단 말야.

“으으으으…….”

“피이이이?”

휴, 아니야. 지금 생각해 봤자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이따가 세이르한테 물어보기로 하고, 일단 편지부터 뜯어보자.

뜻밖에 내게 편지를 보낸 사람은 디드리크였다. 휴양 도시 엘나스에서 내게 유사 타로 카드 점을 봐 준 신관 말이다.

나는 편지 봉투를 뜯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런데 용건 또한 굉장히 뜻밖이었다.

“어디 보자, 내용이…… 마법 인형을 사고 싶다고?”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마왕 인형의 인기가 휴양 도시 엘나스의 신전까지 전해진 걸까.

디드리크는 내가 만든 인형을 직접 보러 오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며 아쉬워했다. 그리고 신전에 장식하고 싶으니 마법 인형 하나만 팔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사람의 요청이었다면, 마법 인형을 더 만들 생각이 없다며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디드리크에게는 신세 진 게 있단 말이지.’

휴양 도시 엘나스의 호텔에서 기사들이 세이르를 강제로 데려가려 해서 내가 납치를 시도했을 때, 디드리크가 신관으로서 내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면, 곧장 기사들을 쫓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세이르를 납치할 방법은 있었겠지만.’

귀찮은 일은 피하는 게 상책인 법. 디드리크의 도움이 컸다.

‘으음, 신세를 져 놓고 갚지 않는 것도 찜찜하고.’

나는 상태창을 열어 퀘스트 화면을 확인해 보았다.

[<서브 퀘스트> 마법 도구 공방 꾸미기 (1)

축하합니다. 드디어 마법 도구 공방을 완성했습니다.

멋진 마법 도구를 마구 만들면 호화로운 보상이 팡팡팡!

남은 시간 : 7일

달성 조건 : 마법 도구 공방에서 아이템을 10개 제작하기 (8/10)

보상 : 경험치 500exp, 왕국의 기술 레벨 1 상승, 새로운 마법 도구 레시피

실패 시 : 없음]

마법 인형 세 개와 소형 마법 주머니 다섯 개를 만들어서 서브 퀘스트의 80%는 달성했다.

하지만 이 서브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아직 마법 도구 두 개를 더 만들어야 하는 상황. 퀘스트를 깰 겸해서 인형을 만들도록 할까.

나는 서랍에서 재료를 꺼낸 다음 마법 인형 만들기를 시작했다. 이왕 마음먹은 김에 오늘 퀘스트를 전부 끝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하암.”

“피이잇?”

평소에는 부르지 않아도 공방에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오늘따라 조용하다. 혼자서 공방에서 인형을 만들고 있다 보니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흐아아암…….”

나는 바느질을 끝마친 인형 안에 솜을 집어넣으면서 길게 하품을 했다.

‘안 돼. 정신 차려야 하는데…….’

아직 마석에 마력을 주입하는 단계가 남았단 말야. 졸지 말고 완성해야 하는데…….

“…….”

내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

…….

“안젤리카. ……안젤리카.”

곁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눈을 떴는데도 앞이 깜깜했다.

“안젤리카, 왜 여기서 얼굴에 로코를 붙이고 자는 거야?”

세이르가 내 얼굴 위로 날개를 늘어뜨리고 자고 있던 로코를 치워 주었다. 그제야 앞이 제대로 보였다.

“으, 로코, 잠은 침대에서 자야지…….”

이 박쥐 녀석, 아무리 내가 좋아도 그렇지 잘 때까지 붙어 있으려 한다니까.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 세이르가 눈을 깜빡거리며 남은 잠기운을 쫓아내는 나를 향해 말했다.

“졸리면 방에 가서 자지 그래?”

“으, 하암. 아냐, 이제 다 깼어. 세이르, 언제 온 거야?”

“방금.”

눈앞에 퀘스트 완료를 알리는 상태창이 떠 있었다. 잠들어 버린 탓에 기억이 불분명한데, 나도 모르게 마력 주입까지 다 했던 모양이다.

두렵다. 무의식의 영역에서도 인형 만들기를 끝낸 나의 능력이 두렵다.

물론 <마.왕.꾸>의 슈퍼 플레이어인 나에게 이 정도쯤 식은 죽 먹기지만!

[<서브 퀘스트> ‘마법 도구 공방 꾸미기 (1)’를 완료했습니다.

(1) 경험치 500exp를 획득하여, 플레이어 ‘안젤리카 데네브’의 레벨이 10 → 11로 올랐습니다.

(2) 왕국의 기술 레벨이 1 → 2로 올랐습니다.]

(3) 새로운 마법 도구 레시피 세트를 획득했습니다. [공방]­[제작]­[레시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상태창의 내용을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그 전에, 나는 재빨리 인형을 무릎 위에 놓고 담요를 덮어 숨겼다. 다행히 세이르는 내가 무엇을 감추었는지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어제부터 궁금하던 것을 세이르에게 물어보았다.

“세이르, 어제 아빠랑 무슨 이야기 했어?”

“응? 아.”

세이르가 살짝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초록빛 눈동자는 차분해 보였다.

“여기서 지내면서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물어보셨어.”

“그래?”

정말일까?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지는 않은데, 뭔가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방금 꼭…….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평소랑 다른 느낌인데.’

내가 계속 빤히 쳐다보자 세이르가 먼저 눈을 피했다.

“왜 그렇게 봐?”

“정말이지?”

“응. 그게 다였어.”

“으음……. 그럼 됐어.”

“그런데 안젤리카, 무릎 위에 숨긴 건 뭐야?”

이런. 전광석화처럼 빨리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봤구나.

서프라이즈도 힘든 일이다. 나는 무릎 위로 숨겼던 마법 인형 두 개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세이르 선물이야.”

디드리크에게 보내 주기 위해 마법 인형을 만들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거릿과 동생들에게는 인형과 주머니를 선물했고, 이제 소형 마법 주머니를 잔뜩 만들어 왕성 사람들에게도 선물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내 부하 1호인 세이르에게 아무것도 안 주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진정한 흑막의 외동딸이라면 측근에게는 후해야 하는 법이니까.

마침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 만들어야 하는 인형 개수는 두 개. 하나는 디드리크에게 보내 주고, 다른 하나는 세이르에게 선물하면 딱 좋을 거 같았다.

갑자기 인형 선물이라니 뜬금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꽤 잘 만들어졌단 말이지.’

이번에는 상태창이 제공하는 기본 도안을 따르지 않고 디자인을 바꿔 보았다. 그랬더니 혼자서도 괜찮게 만들 수 있었다.

‘역시 내 손이 아니라 상태창이 문제였어, 음하하!’

마음 가는 대로 디자인을 고치다 보니 하나는 짧은 금발, 하나는 분홍색 긴 머리 인형이 되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약간 나와 세이르를 닮았다.

뒤늦게 세이르가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마워.”

“……아.”

세이르가 테이블 위의 인형을 집어 들었다.

“마음에 든다. 소중하게 간직할게.”

왜 하필 인형이냐고 한 마디 핀잔이라도 줄 줄 알았는데, 조금의 장난기도 없는 진지한 대답이었다.

쟤가 갑자기 진지해지니까 분위기가 머쓱해진다. 으윽, 나는 이런 간지러운 분위기에 약하단 말야.

“크, 크흠! 그냥 만들다 남아서 주는 거야. 남아서.”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늘어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이르는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하나 문제가 있었다.

세이르에게 세이르를 닮은 인형을 줄 생각이었는데, 세이르는 옆에 있는 분홍색 머리 인형을 가져갔다.

원래 주려던 인형이랑 바뀌었지만, 저렇게 좋아하는데 다른 걸로 가져가라고 하기도 그렇고. 뭐, 상관없나.

진작 줄 걸 그랬다. 저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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