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응? 보면 알잖아. 호미질하는 중이야.”
니키가 호미질이 끝난 밭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밭에 호미질 안 해도 되는데?”
“뭐? 왜?”
“이쪽으로 와 봐. 아, 세이르 님도 같이 와.”
니키는 나와 세이르를 뒤뜰 모퉁이에 있는 다른 밭으로 데려갔다.
“……어?”
“으헤헤, 어때?”
틸라 밭의 모습은 내 기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밭에 수도관을 설치해서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물이 분사되었다. 동력원은 마석. 마석으로 작동하는 스프링클러라고 할 수 있겠다.
수확을 마친 밭을 갈아엎고 모종을 심는 일도 자동화되었다. 넓고 긴 갈퀴가 알아서 움직이며 밭을 갈았고, 다음으로 팔 달린 상자처럼 생긴 물건이 모종을 심었다. 완벽한 자동화 농법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상태창을 확인했다.
[<가동 중인 생산 시설>
훌륭한 대형 밭(A) : 자동화 시스템을 갖춘 멋진 밭입니다. 흙이 마기에 오염되었습니다.
배치 : ‘농사 담당자’ 니키
호화도 : 200
현재 심은 작물 : 틸라, 틸라순무
※ 농사 담당자의 보너스 효과로 더 다양한 작물을 기를 수 있습니다.
※ 이틀에 한 번 틸라, 틸라순무를 수확할 수 있습니다.
※ 생산 시설이 최고 등급에 도달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휴가를 마치고 왕국으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그저 그런 텃밭(E)’였는데, 어느새 ‘훌륭한 대형 밭(A)’이 되어 있었다.
니키는 쑥스러운 듯 웃으면서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었다.
“안젤리카 님이 내가 태양의 축복을 받았다고 했잖아. 그래서 생각해 봤더니 밭을 더 좋게 고칠 수 있을 거 같아서 손 좀 봤어.”
즉, 내 말을 듣고 자신의 재능에 눈을 뜬 니키가 실력 발휘를 한 건가.
밭의 변화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니키, 틸라순무라는 건 뭐야?”
“아, 응. 밭을 자동화했더니 시간이 남아서 틸라랑 순무를 섞어 봤어. 다 되면 보여 줄게. 다음에는 당근이랑 해 보려고.”
아무리 마법이 있는 세계라지만, 교잡종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되는 건가?
무섭다. 그녀의 재능이 실로 무섭다.
그때,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상태창이 떴다.
[<이벤트> ‘농사 담당자’ 니키가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칭호목가적인 왕국(D)을 획득했습니다.]
[<칭호 : 목가적인 왕국(D)>
분류 : 농업
풍요로운 밭, 목가적인 풍경이 당신을 맞이합니다.
농업 분야에서 왕국이 약간 평가치 보너스를 받습니다.]
새로운 칭호가 생겼다.
그건 좋은 일이지만…….
SSS급 흑막 왕국이 아니라 SSS급 농업 왕국에 한발 가까워진 듯한 건 기분 탓일까.
‘아, 아니야. 지금은 이렇게 평화로운 분위기지만, 곧 흑막 왕국이 될 거야. 진짜 될 거니까……!’
뭐, 그건 그거고.
이제 다음 퀘스트를 하러 떠날 시각이었다. 다음 일일 퀘스트에서는 세이르에게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말겠다.
“세이르, 따라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예이…….”
* * *
[(2) 주방에서 요리를 1개 완성하기 (0/1) (미달성)
장소 : 왕성 주방 / 보상 : 200 왕국 포인트]
일일 퀘스트의 두 번째 단계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세이르를 데리고 곧장 왕성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직접 요리를 하겠다고 말하자 케나스는 당황해서 나를 뜯어말렸다.
“안젤리카 님, 제가 만들겠습니다. 제발 저한테 시켜 주세요.”
“아니야, 직접 만들려고. 그러니까 케나스는 잠깐 쉬고 있어.”
“안젤리카 님, 차라리 죽여 주십시오!”
“으, 응? 내가 케나스를 왜 죽여?”
“어차피 제 요리는 다들 좋아하지도 않고…….”
아차. 내가 갑자기 요리를 하겠다고 하니까 케나스가 자신의 요리는 필요 없다고 오해한 모양이다.
나는 세이르를 툭 치며 소곤거렸다.
“세이르, 케나스가 충격 받았잖아. 빨리 위로해 줘.”
“내가……?”
“응. 케나스한테 빵이랑 햄 한 쪽만 주면 된다고 했다며? 분명 그것 때문에 충격받은 거야. 얼른 이제 많이 먹을 거라고 말해.”
“그게 중요한 거야?”
“당연히 중요하지!”
세이르는 그다지 납득한 기색은 아니었지만, 내가 시키는 대로 이제부터 밥을 잘 먹겠다고 말했다. 그제야 케나스가 마음을 추슬렀고, 필요한 재료를 찾아 주었다.
“그래서 무슨 요리를 할 건데?”
“아, 그건 말이지.”
퀘스트에 무슨 요리를 하라고는 지정되어 있지 않았으니 달걀프라이 하나만 해도 괜찮겠지만.
내가 고른 요리는 더 복잡한 것이다.
“수플레팬케이크를 만들 거야.”
왜냐하면 수플레팬케이크에는 머랭이 들어가니까.
손으로 머랭을 만들기란 굉장히 성가시고 힘든 일이다. 아무리 휘저어도 도통 단단해지지 않는 달걀흰자와 씨름하다 보면 생각이 사라진다. 일종의 명상 상태랄까.
즉, 머랭 만들기란 몸을 바쁘게 해서 생각에 잠길 틈을 없애겠다는 목표에 잘 부합하는 행위였다.
나는 세이르의 앞에 달걀흰자가 담긴 볼을 놓았다.
“내가 다른 재료를 준비할 테니까, 세이르는 머랭을 만들어 줘.”
“알았어.”
세이르는 내 제안을 거부하지 않고 손에 거품기를 쥐었다. 그리고 잠시 뒤.
“다 했어.”
“벌써?!”
빠르다.
볼을 뒤집어도 거품이 흐르지 않는다. 완벽한 뿔 형태의 머랭이었다. 심지어 세이르는 그렇게 머랭을 빠르게 치고도 조금도 힘들지 않아 보였다.
[<일일 퀘스트>
주방에서 요리를 1개 완성하기 (1/1) (달성)
보상으로 200 왕국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나는 완성된 수플레팬케이크를 포크로 한 조각 떠서 먹었다. 푹신푹신하게 부풀어 오른 팬케이크가 입 안에서 스르륵 녹아내린다. 달콤하고 부드럽다.
어쨌거나 수플레팬케이크는 맛있었다.
* * *
[(3) 잡화점의 물건을 고대 던전까지 배달하기 (0/1) (미달성)
장소 : 데네브 왕국 마을 잡화점 / 보상 : 300 왕국 포인트]
마지막 일일 퀘스트는, 잡화점에서 고대 던전까지 물건을 나르는 일이었다.
고대 던전 앞에는 왕국 방문 기념품을 판매하는 노점이 있다. 이 노점은 전 모험가 겸 현 잡화점 주인인 제랄드 아저씨가 위탁 형식으로 맡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기념품이 잘 팔리는 바람에 노점 쪽에 물량이 부족한 상황. 일손이 달렸는지, 제랄드 아저씨는 우리가 도와준다고 하자 무척 기뻐했다.
“무겁진 않으세요?”
“이 정도쯤이야. 맡겨 줘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참, 제랄드 아저씨가 왜 나한테 갑자기 경어를 쓰냐고?
이건 여담인데,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
제랄드 아저씨는 뒤늦게 내가 데네브 왕국의 왕녀 안젤리카 데네브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꼬, 꼬마 아가씨가 그 안젤리카 데네브라고요? ……그러니까, 왕녀님?”
일부러 정체를 감추고 잠행 놀이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입으로 먼저 왕녀입네 소개하는 것도 그렇잖아. 꼭 뭐 되는 거 같고. 나는 민망해하며 대답했다.
“아니, 나는……. 드레스 입은 거 보고 눈치챌 줄 알았죠.”
“그럼 전에 뵌 그, 은발에……. 그, 아버님은.”
“네, 크로셀 데네브. 데네브 왕국의 국왕이에요.”
“제가 전에…… 마왕을 해치우는 용사가 되고 싶었다는 말을 했던가요?”
“네, 했죠.”
“저……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잠깐, 제랄드 아저씨, 잠깐만!”
갑자기 야반도주를 준비하는 제랄드 아저씨를 막느라 애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결국 전 재산을 털어 차린 이 잡화점을 지키기로 한 모양이다.
생계는 중요하지, 암.
고대 던전 앞까지 날라야 하는 짐은 작은 꾸러미 두 개였다.
꾸러미는 나도 거뜬히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웠다. 세이르와 나는 각각 꾸러미 한 개씩을 들고 고대 던전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걷기만 하는 것은 심심하다. 퀘스트에는 스릴이 있어야 하는 법. 몇 걸음 안 가서 나는 세이르를 불렀다.
“세이르, 있잖아.”
“하지 마.”
“응? 내가 뭘?”
“지금 네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할 거란 예감이 들어서.”
정확하게 맞혔다.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눈치가 빨라지다니. 세이르 뮨 엘레인, 방심할 수 없는 인재구나.
하지만 들켰다고 해서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우리 던전 앞까지 경기하자.”
“뭐? 안젤리카!”
“그럼 출발!”
나는 세이르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대뜸 꾸러미를 품에 안고 달려 나갔다.
허를 찔린 세이르가 몇 초 뒤에 나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나를 앞질렀다.
괜찮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나일 테니까.
“헉, 허억…….”
[HP가 10 감소합니다. 현재 HP : 40/50]
[HP가 10 감소합니다. 현재 HP : 30/50]
맞다, 나 HP 50밖에 안 되었지. 얼마 뛰지 않았는데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HP가 쭉쭉 닳기 시작했다.
후후, 하지만 흑막의 외동딸인 내가 정정당당하게 승부할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지름길을 알아 뒀지.’
나는 마을 외곽으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방향을 틀었다. 고대 던전은 이쪽이 빠르다. 이 지름길을 통해 세이르를 앞질러야겠다.
“하아, 하아…….”
수 분 뒤, 나는 발을 멈췄다.
‘어라? 여기는 어디지?’
도중에 길을 잘못 든 모양이다. 고대 던전이 아닌 낯선 숲이 내 앞에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