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대화는 힘겹게 이어지다가 트리스탄이 돌아가면서 끝났다.
이어 나타난 니키의 경우는 더욱 더 의아했다.
니키는 세이르를 발견하자마자 화들짝 놀라더니, 아예 뒷걸음질을 치며 피했다.
“흐으으음?”
“피이이이……?”
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이 묘한 분위기는 설마, 텃세?
에이, 말도 안 된다. 우리 왕성 고용인들은 한 군데씩 이상할지언정 다들 좋은 사람들인걸.
‘좀 의아하긴 하지만, 못 본 척할까.’
세이르가 내 부하 1호라고 해도 인간관계에까지 간섭할 수는 없다. 그냥 어색할 뿐이지 큰 문제는 없는 것 같고. 세이르에게는 세이르의 인간관계가 있겠지.
“로코, 가자. 공방에 새 장난감 갖다 놨어. 오늘은 사냥 놀이 하자.”
“피이이, 피잇!”
나는 로코를 껴안고 마법 도구 공방을 향해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궁금해서 미치겠다!
뭔데? 대체 왜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인 건데?
생각해 보니, 나는 원래 궁금함을 오래 참는 성미가 아니었다.
나는 공방 앞에서 몸을 홱 돌렸다.
제일 입이 가벼울 것 같은 사람은…… 역시 그 사람이지.
* * *
“쉿, 로코, 얌전히 있어야 해.”
“피이잇…….”
나는 적당한 위치에 가서 때를 기다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타깃이 내 앞에 나타났다.
타깃은 바로, 이번에도 세이르를 멀리 피해 가려고 하는 니키.
나는 그녀가 발뺌할 수 없는 순간에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니키, 안녕?”
“으아악!”
니키가 깜짝 놀라 제자리에서 풀쩍 뛰었다.
“왜 그렇게 놀라?”
“가, 갑자기 앞에서 튀어나오면 당연히 놀라지!”
서론은 필요 없다. 나는 니키가 진정하자마자 곧장 본론을 꺼냈다.
“니키, 왜 세이르를 피해 다녀?”
“어, 어어? 아…… 아닌데?”
니키는 거짓말을 참 못했다.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정말? 방금 피하는 거 다 봤는데?”
“아, 아닌데! 안 피해 다녔어.”
“그럼 저쪽 길 놔두고 왜 이쪽 길로 가?”
“그건…… 저기, 잠깐 부엌에 볼일이 있어서.”
“부엌은 저쪽 길이 더 빠른데?”
“그, 그건…… 길이 헷갈려서.”
말과 표정이 다르다. 니키는 세이르를 피하지 않았다면서도 불만을 감추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재차 물어도 그 불만이 무엇인지 말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니키가 그렇게 말한다면 됐어.”
본인이 아니라는데 억지로 캐낼 수도 없는 법이고.
“믿어 주는 거야?”
“응. 대신, 나랑 세이르한테 인사하러 가자.”
“…….”
나는 니키를 데리고 세이르가 검술 연습을 하는 장소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니키는 나를 따라오는 대신 입술을 삐죽대더니 한참만에 작게 내뱉었다.
“내가 더 여기 빨리 왔는데…….”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니키, 세이르에게 텃세라도 부리는 거야?”
“아, 아니야. 텃세라니, 그런 거 안 해!”
“그러면?”
“그건…….”
니키가 부루퉁한 얼굴로 툭 내뱉었다.
“나도 안젤리카 님 부하 하고 싶은데, 왜 내가 부하 1호가 아니라 세이르 님이 1호야?”
“어, 엉?”
퍽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나는 잠시 눈만 끔뻑거리다가 곧 답을 내어놓았다.
“고용인이 더 좋잖아. 정해진 시간 동안 일하면 월급 꼬박꼬박 나오고 유급 휴가도 주는데?”
“아니, 부하 1호가 더 멋있어.”
대체 왜 그걸 하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대안을 찾아냈다.
“그럼 부하 2호는 어때?”
“내가 안젤리카 님하고 더 친한데! 2호는 싫어.”
그렇게 말해도, 이제 와서 세이르를 찾아가서 ‘너는 2호야.’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거야말로 진짜 텃세 같잖아!
“크흠! 미안하지만 니키, 너는 내 부하 1호가 될 수는 없어.”
“어째서?!”
충격을 받은 니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먼저, 니키는 태양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야.”
“내가?”
“응, 쉽게 말하면 농사를 잘 짓는 체질. 그러니까 너는 내 부하를 하기에는 아까운 인재야. 이 왕국의 농업이 네 손에 달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거든.”
이렇게 차분하게 설명했지만…….
“그래도 부하 1호가 더 좋은데!”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 방법밖에 없나? 나는 팔짱을 끼고 서서 니키에게 선언했다.
“그리고 니키는 우리 식구잖아.”
“식구?”
“응. 한집에 살면서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을 식구라고 해. 그리고 또 다른 뜻은…….”
“와, 그럼 나 안젤리카 님 식구 할래!”
아니, 나 아직 끝까지 다 말 안 했는데…….
내가 말하려던 뜻은 ‘같은 조직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이었는데, 이미 니키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띠링!
[<이벤트> ‘농사 담당자’ 니키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500 왕국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방금 한 말 때문에 호감도가 오른 거야?
어이없기는 했지만……. 어쨌건 니키의 기분도 풀렸고 포인트도 생겼으니 좋은 일이다.
가만. 들어 보니 니키는 엄청 개인적인 사유로 세이르를 어색해했던 거잖아. 그러면 다른 고용인들하고 세이르는 왜 어색했던 거지?
* * *
조금 더 관찰해 보니 대강 상황을 알게 되었다.
왕성 고용인들은 세이르에게 친절하게 대하려 했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집을 떠나 홀로 왕성에 왔으니 여러모로 챙겨 주고 싶었을 테지.
그런데 세이르 쪽에서 선을 그었다. 생글생글 잘 웃기는 하지만 그저 그뿐. 보이지 않는 막이 세이르를 감싼 것 같았다.
심지어 세이르는 식사로 빵과 햄 한 쪽이면 충분하다고 말해서 케나스를 울릴 뻔했다.
이걸 어쩐다. 아빠한테 말해서 회식이라도 하자고 할까?
……으음, 아니야. 나 방금 엄청 중소기업 중간 관리직 같은 발상을 할 뻔했다. 갑자기 밥 한 끼 먹었다고 사이가 좋아질 리가 없지.
근본적인 문제는 세이르의 염세주의 성향에 있다.
[세이르 뮨 엘레인의 상태 이상 : 염세주의(Lv.74)]
현재 세이르의 염세주의 레벨은 이렇다. 다소 낮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높다. 정말 끈질기고 지독한 상태 이상이다.
사실 염세주의가 건강에 지장을 끼치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면 내버려 둘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니키랑 비슷한 나이의 어린애가 세상 끝난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띠링!
그때, 눈앞에 상태창이 또 하나 떴다.
“에이, 뭐 이런 게 뜬담.”
처음에 나는 이렇게 투덜거리며 곧장 상태창을 끄려 했다. 얼핏 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잠깐, 잠깐만.”
“피이이……?”
좋아, 이거다. 이거면 되겠어.
나는 곧장 세이르의 방 문을 두드린 뒤 말했다.
“어이, 부하 1호, 일할 시간이다. 따라와.”
“그 이상한 말투 제발 좀 그만……. 뭐, 알았어.”
잠시 뒤.
“우후후후…….”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손에는 호미 두 자루를 든 채였다.
지금 세이르와 내가 있는 곳은 왕성의 틸라 밭이다. 수확을 전부 마쳐서 마침 밭은 빈 상태. 새로운 작물을 심기 위해서는 호미질로 밭을 갈아엎어야 한다.
내 계획이란 간단하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
때로는 생각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답이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사람은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파고든다. 이런 생각은 염세주의의 좋은 먹이였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생각의 연쇄를 끊어 낼 수 없다면? 바빠져야 한다. 몸이 바쁘면 어두운 생각을 할 틈도 없어지니까.
그래서 나는 세이르를 바쁘게 만들 생각이었다.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가다 보면 염세주의 레벨도 내려가지 않을까?
[<일일 퀘스트> 오늘의 데네브 왕국 퀘스트
착한 일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길지도?
(1) 틸라 밭에서 호미질 100회 완료하기 (0/100) (미달성)
장소 : 틸라 밭 / 보상 : 100 왕국 포인트
(2) ?????
장소 : 왕성 주방 / 보상 : 200 왕국 포인트
(3) ?????
장소 : 데네브 왕국 마을 잡화점 / 보상 : 300 왕국 포인트
※ 반드시 클리어하지 않아도 되지만, 클리어 시 다양한 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일일 퀘스트는 하루에 한 번만 진행 가능합니다.]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우게 된 계기는, 오늘 아침에 뜬 이 일일 퀘스트 상태창이다.
<마.왕.꾸>의 일일 퀘스트는 안 해도 게임 진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대신 클리어하면 여러 보상을 주었다.
보다시피 보상이 쩨쩨해서, <마.왕.꾸>를 플레이할 때는 굳이 클리어하지 않았다. 이걸 하느니 다른 일을 하는 게 이득이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딱 알맞은 퀘스트다.
이 퀘스트대로 세이르와 함께 왕성의 여러 곳에서 일을 해 보자. 그러면 세이르가 왕성 고용인들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굳이 이름 붙이자면, <왕국 발전을 위한 제안서 쉬어 가는 편~세이르의 왕성 적응기~>라고 할까.
“자, 여기서 저기까지 이 호미로 밭을 갈면 돼.”
“……알았어.”
세이르는 다소 어이없어했지만 가타부타 더 말을 얹지 않고 호미를 쥐었다. 나 역시 그의 옆에서 호미를 쥐면서 씩 웃었다.
‘후후후, 두고 봐.’
내게는 특성 ‘호미질의 강자(E)’가 있다. 그러니 다른 건 몰라도 호미질만큼은 내가 세이르보다 잘할 테다. 이 넓은 밭을 다 갈아엎으면 제아무리 세이르라도 지쳐 나가떨어지겠지. 그리고 결국 이렇게 말하는 거다.
“안젤리카는 정말 대단하구나. 못 당하겠어.”
후후후,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세이르가 꼭 나를 우러러보게 만들고 말겠다.
“좋아, 그럼 시작!”
나는 ‘호미질의 강자(E)’를 활성화한 채 한참 호미질에 열중했다. 그리고 슬슬 팔이 아파 올 무렵, 잠시 쉬려다가 깜짝 놀랐다.
“……응?”
세이르는 거의 내 두 배에 달하는 면적에 호미질을 끝낸 상태였다. 거기다 얼굴에는 조금도 힘든 기색이 없었다.
나도 질 수는 없지. 왕국 발전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라고는 하나 지니까 분한 마음이 든다. 나는 다시 자세를 잡고 힘차게 호미를 휘둘렀다.
‘호미질의 강자(E)를 무시하지 말라고……!’
그리고 얼마 뒤.
“헉, 허억…….”
결국 먼저 지쳐 나가떨어진 쪽은 나였다. 심지어 세이르는 부드럽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힘들면 그만 쉬어. 내가 할게.”
“아니, 아직이야. 누가 질 줄 알고……!”
“……이거 경쟁이었어?”
[<일일 퀘스트>
틸라 밭에서 호미질 100회 완료하기 (100/100) (달성)
보상으로 100 왕국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결국 나 홀로 경쟁의식을 불태우며 퀘스트를 끝낸 그때.
“안젤리카 님, 거기서 뭐 해?”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니키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