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60)화 (61/133)

60화

세이르는 물었다.

“이게 뭔데?”

“응? 뭐긴 뭐야. ‘완벽한 인질 생활을 위한 감옥 패키지’야!”

전혀 대답이 안 되었다. 세이르가 알아듣거나 말거나 안젤리카는 뿌듯한 표정으로 몇 마디를 덧붙였다.

“기껏 만들었는데 쓸 일이 없어져서 아쉬웠는데. 이렇게 쓰게 되네. 어때? 멋지지?”

기세에 밀려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안젤리카는 세이르를 의자에 앉히고 밧줄로 묶었다.

“됐다. 세이르, 지금 너는 내 인질이야.”

“……뭐?”

“특별히! 내가 정말 특별히 부하 1호로 삼아 줄 테니까 도망칠 생각은 마. 알아? 아무나 내 부하 1호가 될 수는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밧줄로 묶은 매듭이 허술했다. 살짝만 힘을 주어도 풀릴 정도다. 아마 일부러겠지.

“귀여우니까 얘 쓰다듬고 있어!”

안젤리카는 주머니에서 작은 박쥐를 꺼내 세이르의 품에 안겨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안젤리카는 완벽…… 어쩌고 패키지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세이르는 멀어지는 분홍빛 머리카락을 보며, 어제 오후 안젤리카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하 수로에서 탈출한 다음 날부터 안젤리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세이르는 니키라는 아이를 붙잡고 안젤리카에 대해 물어보았다. 아파서 쉬는 중이라고 했다.

대체 얼마나 아프길래 그 활달한 애가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할까.

세이르는 안젤리카가 몹시 신경 쓰였다. 하지만 자신이 안젤리카를 찾아가도 될지 알 수 없었다.

소공작이라고 불리기는 하나 허울 좋은 이름에 불과하다. 아무런 힘도 없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을 뿐인 어린애가 아닌가.

하지만 며칠째 안젤리카가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세이르는 더욱 초조해졌다.

어쩌지도 못하고 안젤리카의 방 주변을 서성이는데 시녀가 세이르를 발견했다. 움찔 놀란 세이르가 뒤로 돌아서려 했지만 시녀가 더 빨랐다.

“들어오세요. 아직 열이 있으시지만…… 오신 걸 알면 기뻐하실 거예요.”

시녀의 안내에 따라 세이르는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살짝 어두운 방. 안젤리카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안젤리카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많이 아픈지 그녀는 신음을 내다가 몸을 덜덜 떨기도 했다.

“으……. 쿨럭, 쿨럭! 사라, 물 좀…….”

시녀를 불러올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안젤리카가 너무 괴로워 보였다.

세이르는 잠시 고민한 끝에 침대맡에 놓여 있던 물 잔을 입에 대어 주었다. 안젤리카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물을 받아 마셨다.

물 한 잔을 다 마신 안젤리카가 도로 침대에 누웠다.

“추워…….”

계절에 맞지 않는 두꺼운 이불을 덮었는데도 안젤리카는 오한을 느꼈다. 열이 상당한 모양이다. 세이르는 침대맡에서 몸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잠간 기다려. 시녀를 불러올 테니까.”

그런데 작은 손이 세이르의 소매를 붙잡았다.

“가지 마…….”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는 불분명하다. 손을 뿌리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세이르는 지하 수로에서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달리던 소녀를 생각했다.

이렇게 작은 손이었나.

첫인상은 이상한 애였다. 자그마한 몸으로 별장의 창문을 타고 넘어올 때는 정말 기가 막혔다.

그다음으로는 똑똑한 애라는 인상이었다. 안젤리카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았다. 특히 지하 수로를 걸으면서 떠들어 댄 대륙법에 대한 지식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그러니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안젤리카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호기심에, 혹은 그저 동정심으로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 아님을.

그리고 지금 안젤리카를 볼 때 드는 기분은…….

“으, 세이르…….”

느닷없이 안젤리카가 세이르의 이름을 불렀다.

“왜?”

안젤리카는 눈을 꼭 감은 채였다. 자신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냥 잠꼬대였던 모양이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어깨에 힘을 푸는 그때, 뒷말이 귓가에 와 닿았다.

“……꼭 열여덟 살이 되어야 해. 알겠지, 세이르…….”

열여덟 살이라.

그런 먼 미래 따위는 상상해 보지 못했다. 하루, 일주일, 한 달을 살아 내기가 버거웠으니까. 내일조차도 모르는데 5년 후의 미래 따위 무서워서 상상할 수조차 없다.

어두운 엘레인 공작령의 저택에서 세이르는 그저 자신의 감정을 도려내는 데만 몰두했다.

아무것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게 되면 마음이 아플 일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로 마음이 아프지 않은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안다. 결국 알아 버린다.

사람이 사람인 이상, 아무것도 소중히 여기지 않기란 불가능하다는 걸.

세이르는 머지않아 기사단이 자신을 찾아오리란 걸 알고 있었다. 한때는 영광스러운 엘레인 공작가의 기사들이었지만 지금은 다프네 왕비의 수족에 불과했으니까.

그때가 오면 세이르는 저항하지 않고 공작령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다른 왕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이 호텔에 머물게 해 준 것은 고마웠지만, 여전히 다프네 왕비를 거스르는 것은 무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결국 안젤리카가 하자는 대로 하고 말았다.

창밖으로 소란스러운 풍경이 보였다. 세이르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는 기사단에게 알렉산드라가 불쾌함을 표시하면서 분위기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 사이로 분홍빛 머리의 소녀가 타박타박 걸어갔다.

“……?”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무슨 생각인지 묻는 것을 깜빡했다.

지금이라도 밧줄을 풀고 밖으로 나가야 하나 고민하는 그때. 안젤리카는 양손을 허리에 척 올리고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들어라! 세이르 뮨 엘레인은 대륙법 3조 66항에 따라 구금되었다!”

뭐?

그런 이야기 지금 처음 듣는데?

아니,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제껏 안젤리카가 납치 운운하는 이야기를 하기는 했다. 하지만 세이르는 그저 안젤리카가 모험 소설에 심취한 줄로만 알았다.

그게…… 진심이었다고?

“몸값은…… 얼마가 좋을까. 그래, 10억 골드! 10억 골드를 가져오지 않으면 세이르를 돌려보내지 않겠다!”

“그게 무슨 소리야? 소공작님 어디 있어?”

기사단의 우두머리가 당장 항의했지만, 안젤리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라, 기사 아저씨, 대륙법 3조 66항 몰라? 어른인데도 공부가 부족하구나.”

“나를 뭐로 보고……! 대륙법 3조는 65항까지밖에 없다!”

“아니, 틀렸어. 66항, 타국의 왕위 계승권자가 허락 없이 국경을 침입하면 구금할 수 있다는 내용이야.”

“뭐……!”

“정말 멋진 법이야. 얼마나 서로 싸워 댔으면 그만 침입하라고 이런 터프한 법을 만들어?”

어린아이가 생각지도 못한 법을 들먹거리니 기사는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곧 질 수 없다는 듯 반박했다.

“그, 그건 오래전에 사문화된 법이 아닌가……!”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엄연히 아직 삭제되지 않은 법이지. 그렇지 않나?”

크로셀이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었다.

크로셀의 지지를 얻은 안젤리카가 더욱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외쳤다.

“10억 골드를 가져오시던가! 음하하!”

처음에는 몹시 당황했지만.

‘……아. 그래서인가.’

당황이 가시고 나자 세이르는 곧 안젤리카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세이르는 현재 안젤리카가 가져온 상자형 마법 도구 ‘완벽한 ……어쩌고’ 안에 있다.

대륙법에 의하면, 마법 도구의 국적은 소유주의 국적을 따라간다. 즉, 세이르는 데네브 왕국의 국경을 침입한 셈이다.

법을 다소 편의적으로 해석하더라도 기사들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테다. 자기 보신만을 생각하는 자들이니까.

안젤리카가 무척 똑똑한 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과감한 방식을 떠올릴 줄은.

기사가 쿵쾅거리며 세이르가 있는 쪽으로 와 소리쳤다.

“소공작님, 얼른 나오십시오! 공작령으로 돌아갑시다!”

안젤리카가 열렬한 눈빛을 보냈다. 세이르는 그녀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나는 의자에 묶여 있는 상태라 나갈 수 없어.”

“에이잇, 저리 비켜! 이렇게 된 이상 무력으로라도……!”

“어엉? 이 방 안은 데네브 왕국의 영역인데요? 아저씨, 국경 침입할 생각?”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런 게 왜 국경이야!”

안젤리카는 어딘가 그늘진 분위기의 신관을 끌고 오더니 물었다.

“성지(聖地)에서는 신관이 재판 권한을 가지죠. 디드리크 신관님, 여기 금 넘으면 국경 침입이죠?”

신관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눈치를 보더니 곧 답을 내어놓았다.

“네, 어, 대륙법에 의하면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기사들은 길길이 날뛰었지만 안젤리카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말했다.

“몸값 10억 골드! 잊지 마!”

* * *

다소 성가신 공방이 길게 오가긴 했지만, 결국 기사단은 물러났다.

‘그럴 줄 알았어.’

저들의 권한 밖에 있는 일이 되면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다. 돈과 권력을 추종하고 보신주의에 빠진 기사단이니, 권한 밖의 일은 책임지고 싶지 않았겠지.

진짜 몸값으로 10억 골드를 받을 생각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일부러 저들이 절대 가져오지 못할 만한 금액을 불렀다. 그래야 세이르를 포기하고 돌아갈 테니까.

“우후후…….”

<마.왕.꾸> 위키를 통째로 수십 번 읽은 나를 이길 수는 없지. 정말 흑막의 외동딸다운 훌륭한 발상이었다.

앞으로의 일은 다프네 왕비가 어떻게 나오는지에 따라 생각하기로 하고, 그 전에.

부하 1호가 생겼으니 얼마간 어떻게 부려 먹을지 계획을 세워야겠다.

“부하 1호! 앞으로 내 밑에서 일하게 될 테니 각오해, 음하하!”

“……안젤리카.”

내 계획을 찬성하고 지지해 준 아빠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요즘은 집에 친구를 초대하는 걸 그런 식으로 말하나 보구나.”

아니, 전혀 그런 거 아닌데.

“아빠도 안젤리카처럼 요즘 유행어를 익혀 놔야겠다.”

아빠에게 약간 오해를 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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