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안젤리카…….”
“아빠, 흑, 아빠……!”
아빠의 얼굴을 보는 순간 긴장이 풀렸다.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정말로 끝났어.
아빠에게 뛰어들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아빠는 얼른 내게 다가와, 떨리는 손으로 나를 안았다.
“늦어서 미안하다. 미안, 안젤리카…….”
괜찮다고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나는 아빠의 품에 몸을 기댄 채 고개만 가로저었다.
안도감과 함께 눈물이 차올랐다. 아빠가 나를 달래며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음을 그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눈물이 점점 더 많이 흘러나왔다.
“흑, 으흑, 으아앙……!”
아빠는 양손으로 나를 꽉 껴안으면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미안, 우리 천사……. 미안하다. 이제 다시는 늦지 않으려 했는데. 아빠가, 늦어서…….”
아빠의 손이 차가웠다. 아빠는 나를 품에 안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몇 번이나 얼굴을 보고 뺨을 쓰다듬었다.
아.
아빠도 무서웠구나. 혹시라도 나를 잃을까 봐 무서웠던 거야.
나는 울음이 섞여 엉망진창이 된 발음으로 말했다.
“아빠가, 흑, 구해 줬으니까……. 안 늦었어요.”
“안젤리카…….”
“아빠는……. 흐윽, 한 번도, 늦은 적 없으니까……. 으흑…….”
* * *
왕성 식구들과 떠나온 휴가의 마지막 날.
나는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으, 사라, 나 물 좀 줘…….”
“안젤리카 님, 깨어났어? 여기!”
사라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대신 니키가 차가운 물을 가져다주었다. 물 한 잔을 다 들이켠 뒤에야 정신이 들었다.
“으으……. 지금 몇 시야?”
“점심 먹고 좀 지났으니까 1시쯤!”
“흐아암, 엄청 자 버렸네. 아빠랑 사라는 어디 갔어?”
“호텔 오너랑 얘기할 게 있다고 잠깐 호텔 정원 쪽에 갔어. 안젤리카 님, 더 쉬고 있어. 내가 얼른 불러올게!”
나는 당장 밖으로 나가려는 니키를 만류하고 말했다.
“아니야, 일어날래. 이제 괜찮은 것 같아.”
니키는 손으로 내 이마의 열을 재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랑 같이 갈래?”
“응!”
지하 수로에서 무사히 돌아온 그날.
나는 계속 함께 고생한 세이르, 그리고 사라와 트리스탄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그대로 앓아누웠다.
의사의 진찰 결과에 따르면 특별한 병은 아니고 심한 몸살감기였다. HP가 바닥을 칠 때까지 뛰고 구르느라 체력 소모가 심했던 데다, 긴장이 풀렸기 때문인가 보다.
근육통이 심하고 고열이 펄펄 끓어, 나는 꼼짝없이 호텔방에 누워 요양을 해야 했다.
정말이지 끔찍한 시간이었다.
온몸이 뜨거운데 추웠다. 오한이 나서 으슬으슬하면서 동시에 더웠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약은 엄청나게 썼다. 몸살감기 따위 정말 다시는 걸리고 싶지 않다.
사건도 사건인 데다, 내가 앓아누우니 주변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아빠와 사라는 거의 종일 내게 찰싹 붙어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 쉬라고 해도 아빠는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아빠를 쉬게 하는 것도 이 휴가의 목적 중 하나였는데……. 오히려 더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니키는 매일 아침 호텔 조식에 나오는 레몬쿠키와 마카롱을 가져다주었다. 열 때문인지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니키다운 행동이라 웃음이 나왔다.
트리스탄은 내 손을 놓쳐서 미안하다고 하며 땅을 팠다. 그러다 왕성을 그만두겠다고까지 말하는 통에, 얼른 다시 트리스탄에게 분장을 해 달라고 사라에게 부탁해야 했다.
그 밖에도 로디가 로코의 장난감을 여러 개 가져다주는 등, 누워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그리고 세이르는…….
몇 번 세이르가 방을 찾아왔던 것 같은데 자느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뭐, 계속 엘나스 호텔에 손님으로 머물고 있으니 이따 이야기하면 되겠지.
여담으로 이번에 처음 안 사실인데, 나는 아프니까 정신 연령이 육체를 따라간다. 정신력이 극도로 저하되어서 그런 모양이다.
나는 열이 올라 끙끙 앓으면서도 쓴 약이 먹기 싫다고 마구 투정을 부렸다. 그 때문에 아빠는 한참이나 나를 달래야 했다. 약을 다 먹으면 사탕을 준다고 해야 겨우 약을 먹었으니까.
잊어버리고 싶은데 칭얼거리던 내 모습이 너무도 기억에 선연하다.
‘아, 쪽팔려.’
고작 쓴 약 정도 가지고.
그럼 약이 쓰지 달아? 그걸 안 먹으면 어쩔 건데, 안젤리카야…….
돌아가자마자 체력을 길러야겠다. 체력은 국력이다. 데네브 왕국이 훌륭한 흑막 왕국이 될 날까지 이런 쪽팔린 경험을 두 번이나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병치레의 또 한 가지 안 좋은 점이라면…….
‘내 휴가, 내 축제!’
기껏 온 휴가가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홀라당 지나가 버렸다.
휴양 도시 엘나스의 명물, 새벽별 축제를 보고 싶었는데! 아빠의 끝내주는 이벤트 그래픽이 뜨는 축제란 말야!
세이르를 살리고 성검을 빌리겠다는 제1 목적은 달성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역시 이대로는 허전하다.
내일 아침이면 우리는 데네브 왕국으로 돌아간다.
남은 기회는 오늘 오후뿐.
“안젤리카 님, 이쪽이야!”
“응.”
이제 열도 내렸겠다, 아빠한테 축제를 구경하러 가자고 해야지.
그런 생각으로 나는 아빠를 찾아 니키와 함께 호텔 정원으로 나갔다. 그런데 아빠를 찾기 전, 장미가 만개한 정원에 앉아 있던 알렉산드라가 나를 보고 알은체를 했다.
“왕녀님, 깨어나셨군요.”
알렉산드라는 화려한 붉은색 드레스를 걸치고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몸에 두른 보석이 햇빛 아래에서 영롱하게 빛난다.
음, 역시 로디만 한 나이의 자녀가 있다고는 믿기지 않는 외모다.
“안녕하세요.”
나는 니키를 먼저 보내고 알렉산드라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녀가 내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에게 할 말이 있었다.
짧은 침묵 끝,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알렉산드라였다.
“왕녀님, 저희 못난 자식 놈을 도와줘서 고마워요.”
“네?”
“패트릭 일로 왕녀님이 로디를 많이 도와주었다고 들었어요.”
“……?”
패트릭이 누구더라. 그런 사람이 있었나?
“후후, 로디의 상회를 노린 사기꾼 말이에요.”
아, 로디에게 사기를 친 삼류 악당을 말하는 거구나.
알렉산드라의 말을 들으니 어째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로디는 우수한 상인 캐릭터다. 그러니 내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계기만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사기당한 일을 극복했을 테다.
그리고 내가 일방적으로 로디를 도와준 것도 아니다. 상회 계약이며 비밀 상점 이용이며 많은 이득을 보았다. 이 휴가만 해도 로디가 왕성 식구들까지 통째로 초대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그런 내 말을 듣고 알렉산드라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겸손하시군요, 왕녀님.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 또한 도움인 것을요.”
“하하……. 감사합니다.”
“세이르 소공작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호텔의 정식 손님으로 맞이하기로 했답니다.”
호텔 엘나스는 여명교에 의해 인정받은 성지(聖地)다. 그래서 이 호텔의 손님은 다른 왕국이 쉽사리 손을 댈 수 없었다.
“소공작은 원하는 만큼 이 호텔에 머무를 수 있고, 머무는 동안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지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안다는 듯 알렉산드라가 눈을 찡긋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다프네 왕비라고 해도 호텔 엘나스에 머무는 세이르를 괴롭힐 수 없을 테지.
나는 솔직하게 감사를 표현했다.
“감사합니다.”
“왕녀님도 제게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군요?”
“전에……. 내가 아빠는 닮지 않았다고 했었죠.”
알렉산드라를 처음 만난 날 이후로 계속 그녀에게 이 말에 대해 묻고 싶었다.
호텔 오너인 알렉산드라는 바빠서 만나기가 쉽지 않았고, 나는 나대로 세이르를 만나는 일을 우선하느라 뒤로 미뤄졌을 뿐.
알렉산드라가 곤란해하며 웃었다. 그녀는 단번에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질문이 무엇인지 짐작한 것 같았다.
“미안해요, 왕녀님. 저도 왕녀님의 어머니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한답니다.”
“…….”
그때 알렉산드라의 말은 정말 내가 아빠를 닮지 않았다는 단순한 감상이었을까. 나는 그녀의 말 속에 ‘당신은 엄마를 닮았다’는 속뜻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혹시 알렉산드라라면 엄마에 대해 알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는데.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알렉산드라는 그런 나를 보며 짤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10년 하고 조금 더 되었네요. 저는 원래 크로셀 님 밑에서 일하던 상인이었답니다.”
“정말요?”
그건 몰랐다. <마.왕.꾸> 시작 시점 이전의 이야기니까.
“그때는 젊어서, 여러 지저분한 일에도 손을 댔답니다. 암시장도 운영했었고요.”
가만, 알렉산드라의 말을 정리하면…….
대형 상회 가문과 결혼했으나 이혼, 한때는 데네브 왕국에서 일하면서 암시장도 운영했고, 현재는 은퇴 후 유명 호텔 경영자라는 이야기인가.
멋지다. 엄청나게 사연 있는 멋진 흑막 같잖아?
모자가 쌍으로 멋진 흑막 속성이라니 부럽다. 우리 아빠도 저렇게 멋진 흑막이 되어야 할 텐데.
‘헉, 아니야. 진정한 흑막은 우리 아빠야. 실로프 모자에게 질 줄 알고!’
내가 때아닌 경쟁의식에 가슴을 불태우는 사이 알렉산드라가 말을 이었다.
“후후, 이제는 다 지난 이야기예요. 사정이 있어서 10년도 더 전에 왕국을 떠났으니까요.”
“아, 역시…….”
“역시?”
무슨 뜻이냐는 듯 알렉산드라가 눈을 깜빡깜빡했다. 나는 내 합리적인 추측을 입에 올렸다.
“우리 아빠가 힘들게 한 거죠?”
“어머, 후후후…….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알렉산드라는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다. 한때 암시장도 운영했다니, 필시 흑막의 보좌에 어울리는 냉정하고 의뭉스러운 면이 있겠지.
그런데 우리 아빠는 너무 착하고 무르다. 특히 돈 문제는 단 한순간도 안심할 수 없다. 그러니 알렉산드라가 아빠 밑에서 일하면서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나만 해도 빙의 초기에는 사이다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고구마를 먹는 기분에 몇 번이나 괴로워했으니까.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득 담아 알렉산드라를 바라보았다.
“우리 아빠는 너무 착하니까……. 분명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겠죠.”
“어, 네, 네? 크로셀 님이…… 방금 뭐라고요?”
알렉산드라는 크게 당황하여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