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55)화 (56/133)

55화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둡고 습한 지하 수로의 바닥.

“에구구…….”

나는 온몸이 뻐근한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또 바닥을 굴렀다, 또. 이렇게 자주 넘어지다가 키 안 크면 어떡하지.

[추락 대미지! HP가 30 감소합니다. 현재 HP : 2/50]

눈앞에 이런 상태창이 떠 있었다. 조금만 더 대미지를 입었다면 여기서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중간에 설치된 천막이 충격을 줄여 줘서 다행이었다.

“흑막 엔딩이 아니라 배드 엔딩이 될 뻔했네…….”

“무슨 이야기야?”

옆에서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이르였다. 트리스탄이 아슬아슬하게 내 손을 놓친 그 순간 세이르도 같이 추락했던 모양이다.

“세이르, 다친 덴 없어?”

“……응, 괜찮아.”

세이르도 나랑 같이 바닥을 굴렀을 텐데 조금도 힘들지 않은 표정이었다. 나랑 HP가 달라서 그런가.

“피이잇! 피!”

언제 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건지, 로코가 고개를 내밀었다.

“로코, 너……! 다치면 어쩔 뻔했어! 위험한데 도망쳤어야지!”

“피이이…….”

“뭐? 그래도 나랑 같이 있고 싶었다고? 어휴, 참, 그럼 어쩔 수 없지.”

“피이이!”

트리스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추락할 때 헤어진 모양이다.

그래도 생각보다 상황은 나쁘지 않다.

이곳은 휴양 도시 엘나스의 배수 및 우수 처리를 위해 설계된 거대한 지하 수로다.

규모 자체도 어마어마한데, 오랜 세월 동안 조금씩 증·개축을 반복한 탓에 길이 복잡하기로도 유명했다. 한번 길을 잃으면 빠져나오기 힘들어 미궁이라고도 불린다.

뭐, 보통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길을 잃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내가 누구냐. 바로 <마.왕.꾸>의 슈퍼 플레이어가 아닌가. 이 지하 수로의 길은 통째로 머릿속에 들어 있다.

그러니 수로의 어디로 가야 호텔로 돌아갈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다.

‘냄새가 좀 나긴 하지만…….’

다행히 몬스터는 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 같다. 설령 뒤따라 들어온다고 해도, 이쪽은 길을 알고 있으니 탁 트인 바깥보다 안전할 수도 있다.

‘좋아, 괜찮아. 기운 내자!’

하지만 그 전에…….

“세이르, 조금만 쉬었다가 움직이자.”

나는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습하고 냄새 나는 지하 수로라 휴식을 취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HP가 많이 떨어진 상황이어서 출구까지 걸어가려면 조금이라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길 다 알아. 나만 믿어.”

혹시 세이르가 불안할까 봐 안심시켜 주는 말도 했는데, 세이르는 전혀 엉뚱한 대답을 했다.

“안젤리카, 여기서 헤어지자.”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서? 갑자기요?

한참 전부터 생각했던 걸까. 세이르는 엷은 미소를 띤 얼굴로 차분하게 말했다.

“너도 알고 있잖아. 저 몬스터의 목표는 나야. 그러니 함께 다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세이르의 말이 틀리지 않기는 했다.

암살자는 몬스터로 변한 이후에도 세이르만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저 몬스터를 다프네 왕비가 보냈으리라는 내 짐작이 맞는다면…….

현 시점에서 다프네 왕비가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죽일 이유는 별로 없다. 그러니 만약 세이르와 내가 따로 행동한다면 나는 안전하겠지.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실 관계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뿐. 결코 옳은 말은 아니다.

“여기서 따로 가면, 세이르 너는?”

“…….”

세이르는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내가 빤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마지못한 듯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건 내 사정이야. 안젤리카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

“애초에 나하고 원래 알던 사이도 아니잖아.”

“…….”

화가 났다.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화가 나서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뭐? 원래 알던 사이가 아니야?

내가 요 며칠 동안 매일 저를 찾아간 일은 그새 까먹은 건가?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해?

세이르의 말 자체에 화가 났다기보다는, 뭐랄까.

아는 사이든 모르는 사이든 누구라도 붙잡고 살려 달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저 어린애가, 자기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버릴 생각을 하는 것.

그리고 세이르를 저렇게 만든 환경에 화가 났다. 세이르 주변의 어른들은 다 어떻게 되어 먹은 걸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안젤리카, 나랑 떨어지기만 하면 너는 안전할 거야.”

“그리고 세이르 너는 죽을 생각이구나.”

“그건……. 그래도 네가 안전할 테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수긍하는 모습에 목이 바짝 탔다.

나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세이르, 잊어버렸어? 지금 넌 납치된 상태야. 인질을 혼자 두는 납치범이 어디 있어?”

“…….”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세이르가 일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차라리 저런 표정이 낫다. 공허하고 힘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것보다는.

“그리고 너, 나한테 성검 빌려주기로 했잖아.”

“성검? 아, 이거.”

세이르가 당장에라도 내게 검을 줄 기세였기 때문에,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지금 준다는 말은 하지 마. 나는 검을 쓸 줄도 모르는데 그걸 여기서 들고 가라는 거야?”

“그러면……?”

“이따가 빌려줘, 이따가. 안전한 곳으로 간 다음에.”

“…….”

[휴식으로 HP가 10 회복합니다. 현재 HP : 12/50]

그때 마침 HP가 회복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썩 많은 양은 아니지만 이 지하 수로를 탈출하는 데는 문제가 없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탁탁 턴 뒤 말했다.

“자, 이제 출발하자. 빨리 따라와, 인질.”

“……하하.”

세이르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더 이상 따로 떨어지자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고 나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 * *

세이르와 나, 그리고 로코는 지하 수로를 걸었다. 세이르가 두 걸음 앞서 걷고, 나와 로코가 그 뒤를 따르는 형태였다.

지하 수로는 퀴퀴한 냄새가 나고 습해서 오래 있고 싶은 곳은 아니지만, 특별한 위험은 없었다. 말없이 걷기가 지루해진 나는 세이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해서, 슬라임은 다섯 마리씩 데려오는 게 제일 좋아.”

주로 게임 내의 정보 이야기였다.

“피이이…….”

아니, 달리 할 만한 이야기도 없고, 내가 잘 아는 거라곤 <마.왕.꾸>밖에 없단 말야.

“잠깐만.”

“응?”

갑자기 세이르가 나를 붙잡더니 구석의 좁은 통로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왜 그래?”

“쉿, 조용히.”

세이르가 손가락을 입가에 대어 조용히 하라는 뜻을 전했다. 초록빛 눈이 아주 가까이에서 나를 바라본다.

잠시 뒤.

부스럭, 부스럭.

지하 수로 저편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울림 때문에 정확히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

“…….”

통로의 좁은 틈새. 나는 세이르의 말대로 숨을 죽이고 몸을 숨겼다. 세이르 역시 나와 바짝 붙어 등으로 나를 가리고 섰다.

긴장에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설마 그 몬스터가 여기까지 따라 들어온 건 아니겠지. 안 돼, 제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찍! 찍찍!”

통로 반대쪽에서 잿빛 쥐가 튀어나온 순간 나와 세이르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쥐는 우리에게 관심도 두지 않고 쪼르르 어디론가 가 버렸다.

바짝 다가서 있던 세이르가 몸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바깥을 살피고는 말했다.

“다행이야. 그냥 쥐였구나. 나가자.”

나는 그를 따라 곧장 통로 바깥으로 나가는 대신 불쑥 입을 열었다.

“세이르, 너 되게 예쁘게 생겼다.”

“……뭐?”

세이르는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내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도 예쁘다고는 생각했지만, 새삼 가까이에서 보니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벌꿀을 녹인 듯한 황금빛 머리카락, 싱그러운 초록빛 눈, 균형 잡힌 이목구비,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점이 귀여운 뺨……. 그야말로 정석적인 ‘왕자님 캐릭터’.

‘왕자는 아니고 소공작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게임상에서 써먹을 수 없는 신 포도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인기투표에서 크로셀 데네브의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었겠다.

아직 어린데도 이렇게 훌륭하니 성장하고 나면 더 멋지겠지.

하지만…….

세이르의 성장 버전에 대해서는 모른다. <마.왕.꾸> 게임 내에서 세이르는 어떤 루트를 타도 열일곱 살이 되기 전에 죽기 때문이다.

세이르는 현재 열세 살.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얼른 가기나 하자.”

“하지만 아직 부족해.”

“뭐?”

느닷없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은 세이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나는 염세주의 꼬맹이는 취향이 아니거든!”

“염세주의…… 부분은 그렇다 치고. 너는 꼬맹이 아니야?”

세이르의 시선이 내 머리통 위를 향했다. 나는 열 살치고도 체구가 작은 편이라 세이르와는 키 차이가 제법 났다.

“아이 참, 아무튼!”

“…….”

“내 생각에, 세이르는 열여덟 살쯤 되면 더 멋있을 거 같아.”

나는 진심으로 내가 플레이했던 지난 게임 내용들과 달리 세이르가 열여덟 살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아니, 그렇게 될 거다.

“세끼 잘 먹고, 하루에 여덟 시간 이상 자고, 운동도 해서 잘 크고 나면 우리 아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을 정도?”

“그……. 뭐, 그래.”

“물론 위협할 수 있다 뿐이지, 1위는 아니야. 알아 둬!”

“뭐? ……아하하하!”

갑자기 세이르가 웃음을 터뜨렸고, 그와 동시에 ‘띠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이르 뮨 엘레인의 상태 이상 ‘염세주의’의 레벨이 99 → 94로 하락합니다.]

와, 염세주의 레벨이 내려갔다!

호오, 세이르는 칭찬을 들으면 염세주의 레벨이 내려가는구나. 칭찬은 세이르도 춤추게 한다. 아니, 긍정적으로 만든다.

좋아, 다시 세이르의 염세주의 레벨을 낮춰 보자. 얘의 염세주의 레벨을 낮추기 위해서라면 칭찬쯤이야.

“세이르, 멋져! 훌륭해! 완벽해! 세계 최고의 귀염둥이!”

“제발……. 알겠으니까 제발 그만 좀 해…….”

세이르가 귀까지 빨개져서는 성큼 앞서 걸었다.

그의 뒤를 쫓아가면서 한참 칭찬을 늘어놓았지만 염세주의 레벨은 더 떨어지지 않았다.

에이, 아쉬워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