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53)화 (54/133)

53화

지금 내가 머무르고 있는 엘나스 호텔이 답이었다.

엘나스 호텔은 여명교 신전에서 인정한 성지(聖地)로, 일종의 중립 지대로 기능한다. 어느 왕국이든 호텔의 손님에게 손을 댈 수는 없다.

그러니 세이르를 엘나스 호텔까지만 데려가면 될 것이다. 적어도 세이르가 이 도시를 떠나기로 되어 있는 날까지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테다.

호텔 오너인 알렉산드라가 세이르를 받아 주어야 하지만, 그쯤은 내가 설득할 수 있다.

거기다 세이르를 학대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다프네 왕비 쪽도 곤란해진다. 그러니 설령 세이르를 데려간 것이 들키더라도, 크게 문제 삼지 못하리라는 계산도 있었다.

때로는 그냥 일을 저질러 버리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기도 하니까.

나는 세이르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시간 없어. 얼른 가자.”

세이르는 방금 자신이 빠져나온 별장을 돌아보았다. 초록빛 눈에 묘한 빛이 스친다.

그는 이미 별장 밖에 있고, 자신을 막는 족쇄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막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다.

“……알았어.”

이윽고 세이르가 천천히 내 손을 잡았다.

* * *

아빠와 왕성 식구들은 미리 해변의 가제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머, 안젤리카 님, 오셨군요.”

피크닉 바구니에서 간식거리와 음료를 꺼내고 있던 사라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그녀는 세이르를 보고 흐뭇하게 물었다.

“이쪽 분이 안젤리카 님의 친구분이신가요?”

“응? 친구 아닌데? 얘는 내 인질이야.”

“인질……이요?”

“응!”

사라는 내 말을 어딘가 오해한 듯 빙그레 웃으며 옆의 가제보를 가리켰다.

“후후, 친구분과 재미있는 놀이를 하시는 모양이군요. 자, 크로셀 님은 저쪽에 계세요.”

“……아빠!”

“안젤리카, 왔구나. 옆에 있는 소년이 안젤리카가 말한 초대 손님이니?”

“네, 얘는 세이르라고 해요!”

“세이르……?”

한순간이었지만 아빠의 아름다운 낯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세이르가 누구인지 알아본 것이 분명했다. 아빠가 생각에 잠기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거절이라고 생각했는지, 세이르가 내 손을 놓으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안젤리카, 역시 나는 돌아가는 편이…….”

그러나 아빠는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세이르를 맞이했다.

“안젤리카가 데려온 손님인데, 누구든 환영한단다. 어서 오렴.”

역시 아빠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흐트러진 금빛 머리카락, 허름한 옷, 낡은 검 한 자루, 그리고 지친 표정……. 현재 세이르의 모습은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던 사람이다.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다정한 우리 아빠라면 그런 아이를 모른 척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하는 데에 실패해서 좋은 점도 있달까.

“…….”

아, 아니, 그치만 곧 진짜 흑막이 될 거니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에게 보이는 자비는 멋진 흑막의 새로운 트렌드다. 비 오는 날 고양이를 줍는 건달 캐릭터 같은 거라고.

“아빠, 오늘 세이르도 호텔에서 자고 가라고 해도 돼요?”

“응? 무슨 일이 있니?”

세이르가 흠칫 어깨를 떠는 모습이 보였다. 끔찍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색이었다.

나는 세이르의 어깨를 살짝 토닥인 뒤, 아빠 곁으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사정을 밝혔다.

별장에서 시체를 발견한 뒤, 세이르를 데려오게 된 경위에 대해서.

내 말을 차분히 다 들은 아빠가 나직하게 말했다.

“많이 놀랐겠구나. 안젤리카, 무사해서 다행이다.”

“저는 괜찮아요.”

“모처럼 피크닉을 왔으니 즐겨야지.”

아빠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토닥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가 상황을 확인해 볼 테니 세이르와 놀고 있으렴. 금방 오마. 돌아오면 같이 호텔로 가자.”

“네, 알겠어요.”

착한 아빠가 세이르의 별장에 가 본다니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별장을 살피는 일은 어린애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른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르 군이 호텔에 묵는 것도 물론 괜찮단다. 하지만 먼저 호텔 측에 물어봐야겠구나.”

“괜찮아요……. 얼마든지 묵으세요…….”

그때 옆에서 로디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머니의 참견 덕분인가, 로디는 기운 없는 말투는 그대로였지만 다크서클이 옅어지고 얼굴이 조금 동그래졌다.

“어차피 쓸데없이 크기만 한 호텔……. 손님이 한 명쯤 더 묵는다고 티도 안 나는걸요.”

“고마워, 로디.”

“별말씀을요……. 호텔 엘나스는 절대 벌레가 나오지 않게 관리하고 있으니, 편안하게 잘 수 있을 거예요…….”

굳이 벌레가 나오지 않는다고 덧붙이는 투가, 로디는 내가 아빠에게 속삭인 사정을 얼추 짐작한 듯했다. 눈치 한번 빠르기도 하지.

그 이후로는 해변이 잘 보이는 가제보에 앉아 피크닉 도시락을 먹었다.

세이르도 주는 음식을 거부하지 않고 잘 먹었다.

배가 적당히 찬 다음에는 아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겸 세이르와 함께 모래사장에 앉아 모래성을 만들었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모래성을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조용한 곳에서 머리를 식히고 싶어서였다.

아빠가 돌아온 뒤 호텔로 바로 가면 세이르는 안전해지겠지. 아무리 다프네 왕비라도, 다른 곳도 아닌 엘나스 호텔에 암살자를 보낼 수는 없을 테니.

괜찮아, 잘되어 가고 있어.

“세이르, 너 참 잘 만든다.”

“그래?”

“여기, 이쪽에 드래곤 조각상도 만들어 줘. 역시 SSS급 흑막 왕국의 성이라면 드래곤 조각상이 있어야지.”

“그런 설정이었어……?”

나는 반쯤 완성된 모래성에 이것저것 주문 사항을 더하면서 세이르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상태 이상 : 염세주의(Lv.99)]

‘안 내려가네.’

겉으로 세이르는 무척 안정되어 보였다. 정말 우연히 초대받아 피크닉에 낀 손님 같았다.

그러나 도통 변하지 않는 염세주의 레벨을 보니 여전히 속은 엉망진창일 것이 분명했다.

‘그야 그런 일이 있었으니. 그런 일이…….’

“…….”

“왜 그래?”

내가 갑자기 입을 다물자 세이르가 걱정스레 물었다.

‘사람이 죽었어.’

세이르의 방 앞에 쓰러져 있던 시체.

괜찮은 척하려 했는데 자꾸만 떠올랐다. 흥건한 피 웅덩이, 이상하게 변형되어 있던 시체, 비릿한 냄새, 시종이 돌변해서 세이르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 그리고 죽음.

무섭다.

이 세계에 와서 많은 일이 있었지만, 시체를 본 것은 처음이다.

……무섭다.

안 돼, 정신 차리자. 지금 내가 겁먹은 티를 내면 안 돼. 내가 겁먹으면 세이르가 불안해할 거야.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어? 세이르, 여기 성벽 무너졌어. 빨리 다시 만들자.”

“뭐? 내 참.”

세이르가 어이없어하면서도 내 말대로 모래성을 보수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 세이르, 조심해!”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인영이 세이르에게 달려들었다.

* * *

“큭……!”

세이르는 민첩했다.

그는 내가 소리를 지르자마자 재빨리 검을 꺼내 들며 몸을 뒤로 물렸다. 습격자의 칼날은 만들다 만 모래성을 찔렀을 뿐이다.

습격자는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었다.

암살자? 세이르를 죽이려고 이런 곳까지 또다시 암살자를 보냈단 말야?

“……죽어라.”

“읏……! 누구 맘대로!”

세이르는 잘 맞섰다. 갖고 있던 성검을 빠르게 휘둘러 암살자의 공격을 막아 냈다.

그러나 암살자 또한 강했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자였다. 그런 자가 세이르를 죽일 마음으로 공격하니 버티기가 힘들어 보였다.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주변에 아무도 없다. 아무리 가제보와 떨어진 해변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아무도 없을 수는 없다.

‘설마, 차단 마법……!’

아무래도 암살자가 이 부근에 마법을 펼친 것 같았다.

공간을 왜곡하는 마법 장막을 펼쳐서 영역 안의 공간을 바깥과 단절시키는 마법이다. 거대 암살자 길드 소속의 암살자들이 주로 이 마법을 사용한다.

차단 마법의 장막이 어느새 주변을 감싼 상태였다. 그 때문에 주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는 아무리 힘껏 소리쳐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윽, 하아, 하아…….”

오래 지나지 않아 세이르의 호흡이 가빠지고 발이 뒤로 밀려났다. 등 뒤는 바다. 파도에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끝이다.

“아…… 안 돼!”

자세가 무너진 세이르에게 암살자가 무자비하게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였다.

“……어, 로코!”

파지직!

파열음이 나더니 차단 마법의 장막에 약간의 틈이 생겼다. 그 틈으로 주인을 닮아 천재적인 박쥐가 날아오더니, 날개를 파드닥거리며 암살자의 시야를 가렸다.

“피이이! 피잇!”

“크윽, 뭐야, 이거? 저리 가!”

비록 한순간이었지만, 아주 절묘한 한순간이었다. 나는 그 틈을 타 세이르에게 다가갔다.

“세이르, 괜찮아?!”

“안젤리카? 오지 마, 위험해.”

나는 세이르를 데리고 얼른 차단 마법의 영역 밖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피이잇! 피!”

“로코!”

암살자는 금방 로코를 잡아 던져 버리고, 다시 검을 겨누었다.

“귀찮게 하는군. 하지만 장난은 끝이오. 소공작님, 얌전히 운명을 받아들이시오.”

검이 공간을 가른다.

세이르는 이를 악물고 암살자의 공격을 받아 내었다. 이어 반격하는 몸놀림이 빠르고 날카롭다. 아직 어린데도 상당한 실력이었다.

그러나 암살자는 손쉽게 세이르의 검을 막아 냈다. 강하다. 세이르를 마구 몰아붙이고는, 검을 겨눈 채 말했다.

“크읏, 하아, 하아…….”

“소공작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시오.”

그리고 암살자가 무자비하게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챙!

날카로운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암살자의 공격을 막은 사람은…….

“……사라?!”

내 시녀, 사라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