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놀라운 일이다. 저 남자가 저렇게 부드러운 눈빛을 할 수 있다니.
‘뭐, 나도 마찬가진가.’
알렉산드라는 이제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과거를 떠올렸다.
한때는 크로셀의 강한 힘을 동경했다. 그래서 자처해서 그의 밑으로 가 많은 일을 했다.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그러다 죽어도 상관없었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데네브 왕국을 떠나 이곳으로 왔다.
그때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가족 때문이었다. 자신을 닮아도 너무 닮은 자식새끼를 오래 봐야겠다 싶어서.
알렉산드라는 짙게 웃으면서 물었다.
“그분의 딸인가요?”
“…….”
크로셀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아침부터 바쁘게 어딜 가던데. 그렇게 소중한 따님을 혼자 내보내시네요.”
“우리 천사는 아빠한테 비밀이 많으셔서. 아이의 비밀은 지켜 줘야지.”
“걱정되진 않으시고?”
“…….”
크로셀이 입을 다문 채 발코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에 알렉산드라는 흠칫하여 살짝 물러섰다.
“알겠어요. 그만 탐색할게요. 그냥 따님이 너무 귀엽길래 조금 호기심이 생겼을 뿐이에요.”
“확실히 안젤리카가 귀엽긴 하지.”
“그사이에 팔불출이 다 되셨네요.”
“……하하.”
크로셀은 알렉산드라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향했다.
“크로셀 님? 어디 가세요?”
“비밀이 많은 우리 딸을 데리러 갈 시간이라.”
알렉산드라는 방금까지 크로셀이 보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게 가꾼 호텔의 정원이 눈에 들어올 뿐, 분홍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크로셀은 안젤리카가 곧 도착할 것처럼 걸음을 서둘렀다.
“잠시만요, 크로셀 님!”
“…….”
대답 대신 무언의 시선이 돌아왔다.
“계속 그 작은 왕국의 왕성에만 계실 건가요? 크로셀 님이라면 대륙을 평정하는 것도 시간문제잖아요. 이제는…… 심연의 주인은 사용하지 않으시나요?”
“나는.”
“…….”
“이미 그 끝을 보았어.”
흠칫.
알렉산드라는 저도 모르게 놀라 몸을 떨었다.
예전의 크로셀을 떠올리게 하는 눈이었다. 아름다운 푸른 눈 안에는 극도의 허무만이 자리했다.
“그렇다면 이제 다른 길로 갈 수밖에.”
“……크로셀 님?”
돌아보지 않는다. 남자는 이미 자신의 딸을 마중하러 떠난 다음이었다.
* * *
신전을 나와 호텔 엘나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 아빠!”
“안젤리카, 이제 오는구나.”
가도의 반대편에 아빠가 서 있었다. 아빠는 나를 보고 빠른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빠, 여긴 어쩐 일이에요?”
“우리 천사 데리러 왔지.”
내가 늦으니까 걱정돼서 마중 나왔나 보다. 길이 엇갈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는 활짝 웃으면서 아빠를 반겼다.
“와아, 고마워요, 아빠!”
“친구한테 음식은 잘 가져다주었고?”
“친구 아닌데…….”
“하하, 그래, 그래.”
아빠가 나를 번쩍 안아 들고는 호텔 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보폭이 큰 아빠한테 안기니 주변 풍경이 확확 바뀐다.
나는 그 풍경을 보면서, 아빠한테 세이르의 이야기를 해도 좋을지,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중간쯤 갔을 때, 아빠가 나를 불렀다.
“안젤리카.”
“네?”
“기껏 여기까지 와서 호텔에만 있는 것도 아쉽지. 사라가 내일은 다 같이 해변으로 피크닉을 가는 건 어떠냐고 하던데, 안젤리카 생각은 어떠니?”
“피크닉이요? 우와, 좋아요!”
휴양 도시 엘나스의 해변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날씨도 따뜻하니 피크닉을 즐기기에 딱 좋을 것 같았다.
피크닉이라…….
이 도시의 아름다운 해변을 떠올리면서 나는 문득 세이르를 생각했다.
나는 그 소년을 그 좁은 방에서 꺼내 주지 못한다. 내 목적과도 배치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피크닉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루만 살짝 나가서 놀다가 돌아오는 거잖아. 고작 피크닉인데 ‘깊은 관여’에 해당 안 되는 거 아냐? 그렇지?
“아빠, 저 부탁이 있는데요.”
“그래? 우리 천사가 부탁이라니 뭘까? 말해 보렴.”
“내일 피크닉, 같이 가고 싶은 애가 있는데, 한 명 더 데리고 가도 돼요?”
“오늘 음식을 가져다준 친구?”
“친구 아닌데…….”
아빠는 별로 내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세이르를 데려와도 좋다고 했다.
내 계획은 이러하다.
적절한 외출과 운동, 햇볕을 쬐는 일은 건강의 기초다. 그걸 안 해서 게임 하다가 급사한 내가 하는 말이니까 믿어도 좋다.
피크닉을 가서 바람을 쐬면, 세이르한테 자신의 부당한 상황을 해결할 의지가 생길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세이르를 그 별장에서 끌어내서 햇볕에 태우자.
그래, 이건 세이르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깊이 관여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래도 이 정도쯤은…… 괜찮겠지.
* * *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얼른 데려올게요!”
“다녀오렴, 안젤리카.”
다음 날.
니키가 성심성의껏 골라 준, 식기 없이 손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 베스트 셀렉션을 챙겨서 세이르의 별장으로 간 나는 깜짝 놀랐다.
“세, 세, 세이르……?”
개구멍을 통해 별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지나치게 조용하던 것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방 안은 참혹한 모습이었다.
테이블과 바닥, 벽에 피가 흥건했다. 늘 잠겨 있던 방문은 열린 채였고, 문밖에는 시신이 놓여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신은 크게 훼손된 상태였다. 특히 등과 팔이 이상하게 부풀어 있어서 사람이라기보다는 꼭…… 몬스터의 시체 같았다.
세이르는 그 안에서 어딘가 지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품에 껴안은 성검에도 피가 묻어 있었기에, 그가 생명의 위협을 겪었음을 짐작 가능했다.
[이름 : 세이르 뮨 엘레인
직위 : 엘레인 소공작(A)
소속 : 리어 왕국엘레인 공작령
레벨 : 22
특성 : 성검의 주인(S)
상태 이상 : 염세주의(Lv.99)]
74까지 내려갔던 염세주의 레벨이 고작 하루 사이에 다시 최대치까지 올라 있었다.
나는 불안에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세이르,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 있었어……?”
“어젯밤, 암살 시도가 있었어.”
나한테 하는 대답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세이르의 말을 들었다.
“예전에도 이따금 암살자가 나타나기는 했었어. 진짜로 나를 죽일 생각은 없는 암살자. 그 여자는…… 나를 죽이지 않고 괴롭히고 싶어 하니까.”
“…….”
“그런데 어제는…….”
세이르는 입 속으로 작게 어떤 이름을 중얼거렸다.
“공작저에서 나를 따라온 시종이 있었어. 그 사람이 갑자기 돌변해서, 칼을…….”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들어가면서 심하게 떨렸다. 나는 급히 그를 제지했다.
“세이르, 됐어. 그만 이야기해.”
“나를, 죽이려고…….”
“……세이르.”
나는 천천히 세이르의 염세주의 레벨을 낮추겠다는 계획을 당장 폐기했다.
대체 얼마나 태평한 생각이었는지. 고작 하룻밤 사이에도 세이르는 목숨의 위협을 겪었는데.
젠장, 퀘스트 따위나 붙잡고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내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더 이상 이 꼴을 두고는 못 보겠다.
‘하자, 납치.’
애초에 나는 세이르를 납치할 마음이었다. 그래서 정성 들여 만든 ‘완벽한 인질 생활을 위한 감옥 패키지’도 챙겨 오지 않았던가.
세이르한테 ‘깊이 관여’하려는 건 아니다. 내 최우선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얘가 움직일 생각이 없으면 엉덩이를 걷어차서 움직이게 할 수는 있다. 설득이랑 대화는 무슨. 생각해 보니까 나는 원래 성격 급했다.
나는 세이르의 초록빛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세이르, 잘 들어.”
“…….”
세이르는 아무런 흥미도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부터 나는 너를 납치할 생각이야.”
“……?”
“따라와.”
나는 세이르의 손을 붙잡아 끌고 창문을 넘었다.
세이르는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기 때문인지, 문밖의 시신을 흘깃 쳐다본 다음 별 저항 없이 나를 따라왔다. 그러나 창문을 넘은 뒤 담벼락의 개구멍으로 나가려 했을 때는 머뭇거리다가 내 손을 놓았다.
“안젤리카, 데네브 왕국의 왕녀인 네가 이런 행동을 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어.”
기가 막혔다. 세이르가 지금 내 걱정이나 할 때인가. 자기 생각만 해도 모자랄 판에.
특성 ‘내 말을 들어!(E)’는 뻔뻔하고 자신감 있게 말해야 적용된다. 그래서 나는 태연한 투로 되물었다.
“응? 세이르, 너 나 알아?”
“뭐?”
세이르는 황당한 듯 초록빛 눈을 깜박거렸다.
“내가 내 입으로 데네브 왕국의 안젤리카 데네브라고 한 적 있어? 없지?”
“…….”
‘있잖아.’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확실히 전에 안젤리카 데네브가 맞다고 한 적이 있지만, 어차피 지난 일. 증거 없으니까 대충 넘어가자.
“나는 아빠와 함께 축제를 즐기러 휴양 도시 엘나스에 온 평범한 열 살 아이야. 그런데 우연히! 휴가지에서 또래를 만나 친해진 거지.”
“…….”
“그러다 모처럼 사귄 친구를 납치, 아니, 피크닉에 초대한 거야. 나는 이제껏 왕성 안에서만 생활해서 네가 세이르 소공작이라는 건 전혀! 몰랐거든.”
“그게 말이 돼……?”
어라? 이상하다. 특성 ‘내 말을 들어!(E)’가 안 통했나. 지금 엄청나게 설득력 있게 말했는데.
뭐…… 세이르가 망설이는 이유도 알 만했다.
타국 왕녀와 함께 별장을 빠져나갔다가 왕국 간의 문제로 번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걸 테지. 지금 당장 여기를 탈출해 봤자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것도 세이르를 저 안에 방치해 둘 만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리고…… 방법을 찾았어.’
이 방법대로면 적어도 세이르를 안전하게 이곳에서 빼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