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 일단은 제가 걔랑 더 이야기해 볼게요.”
“그렇게 할래?”
“만약에 도움이 필요해지면 그때 말할게요.”
“그래, 꼭 말해 주렴.”
아빠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거듭 강조한 뒤 화제를 돌렸다.
“안젤리카, 그러고 보니 호텔 옥상 정원이 아주 멋지더구나.”
“와아, 그래요?”
“이따가 같이 가 볼까? 도시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우리 천사의 마음에도 들 것 같네.”
“네, 좋아요!”
성검을 손에 넣는 목적은 물론 중요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휴양도 만끽해야지.
아빠는 오후에 데리러 올 테니 잠시 방에서 쉬라고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조용해진 방. 나는 방 한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침대로 갔다.
털썩!
그리고 침대에 옆으로 누워 생각에 잠겼다.
“으음.”
“피이?”
“으으음…….”
“피이이……?”
오늘 세이르의 별장에 다녀오고 나니 더더욱 확실히 알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이르의 상황은 정상적이지 않다.
허름한 건물, 밖에서 굳게 잠긴 문, 독이 든 식사, 감시인처럼 보이던 시종…….
솔직히 안타깝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에게 성검을 빌려야 하는 내 상황과 별개로, 그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세이르를 도울 수 있을까?’
아니, 정확히는…….
‘내가 세이르를 돕는 것이 옳은 일일까?’
내 제1 목표는 어디까지나 흑막 엔딩이다. 데네브 왕국을 SSS급 흑막 왕국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원작에서 안젤리카와 세이르의 약혼이 결정되기 전까지 데네브 왕국과 리어 왕국은 싸늘한 관계였다.
둘의 약혼으로 잠시 좋은 분위기가 되나 싶었지만, 약혼식이 비극적인 끝을 맞이한 다음에는 파국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리어 왕국과 우리는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관계. 데네브 왕국에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리어 왕국은 그 틈을 노리고 싶어 하겠지.
그리고 세이르는 리어 왕국의 왕위 계승권자이자 엘레인 소공작이다.
“…….”
이성이 곧장 답을 내었다.
‘더 이상 관여해서는 안 돼.’
세이르와 더 깊게 얽히면 진짜 외교 문제가 된다.
지금의 발전 단계에서 리어 왕국과 외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아직 ‘그 사람’과 부딪힐 수는 없으니까.’
그냥 퀘스트의 루트 2번대로, 세이르의 염세주의가 나아지도록 적당히 교류하다가, 적당한 돈을 주고 성검을 빌리는 것이 올바른 답이겠지.
돈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1만 골드쯤 부르면 넘어오지 않을까. 틸라 판매와 던전 운영으로 돈을 벌었으니, 그 정도는 융통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독이 든 수프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으려 하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내가 가져다준 음식을 먹으면서 지은 부드러운 미소도.
“으으…….”
세이르를 그 별장에서 탈출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나는 그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없다. 아니, 해결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도.”
“피이잇?”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 정도는 ‘깊은 관여’가 아니잖아. 그냥 성검을 빌린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손을 쓰는 겸, 밥 좀 나눠 먹는 것뿐이지.
“그렇지?!”
“피이잇?”
로코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날개를 파닥거렸다.
나는 침대 위에서 로코를 꼭 껴안으며 생각했다.
그래, 일단 내가 좋아하는 메뉴를 세이르에게 먹여 주자. 그 정도는 괜찮겠지.
* * *
“으으음……?”
나는 눈을 떴다.
로코를 껴안고 침대에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다. 눈앞의 풍경이 낯설었다.
아하, 꿈인가.
‘어라, 여기는 세이르의 별장인가?’
그런데 별장은 기억 속의 모습과 약간 달랐다. 가구의 형태나 배치가 조금씩 바뀌어 있었다. 꿈과 현실은 약간 차이가 있는 법인가 보다.
내 참. 잠들기 직전에 세이르 생각을 하다가 이런 꿈까지 꾸는 건가. 지나치게 실감 나는 자각몽이라 기분이 이상해졌다.
“윽…… 하아…….”
그때, 방 안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야가 움직인다. 세이르였다. 지금보다 조금 자란 모습의 세이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세이르, 정신 차려!’
세이르를 부축하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눈앞의 광경에 아무런 개입을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고작 꿈일 뿐, 현실이 아니다. 깨어나면 전부 없던 일이 된다.
그러나 이 꿈은 지나치게 실감 났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나는 지켜볼 수밖에 없다.
입술만 잘근 씹던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사람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오래되고 손상된 것처럼 얼굴 부분만 그림자가 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이르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다급히 벽장을 열고 어떤 물건을 꺼냈다.
‘저건, 세이르의 성검……?’
성검의 자루 끝, 파멀(pommel) 부분에는 작은 보석 장식이 달려 있었다. 그가 핀으로 보석 장식의 아래쪽을 꾹 찌르자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장식이 떨어져 나왔다.
장식의 뒷면에는 새끼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약병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는 세이르를 부축하고는 급히 약병의 내용물을 먹였다.
“으윽……. 쿨럭! 쿨럭!”
세이르가 고통스러워하며 기침을 터뜨렸다. 아.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미 늦었어.’
신음이 점점 더 격해지고, 팔에는 힘줄이 도드라진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던 세이르가 움직임을 멈추고, 쌕쌕거리는 숨만을 뱉는다. 그리고.
툭.
작은 손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혼란스러운 와중이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 꾸는 이 꿈, <마.왕.꾸>를 플레이할 때의 내용이다.
<마.왕.꾸>에서는 랜덤 이벤트가 어떻게 발생하느냐에 따라 세이르가 이곳, 휴양 도시 엘나스에서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세이르 뮨 엘레인이 휴양 도시 엘나스의 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이런 알림과 함께 달랑 줄글 몇 줄만 뜨고 지나가는, 게임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이벤트에 불과했지만.
나는 ‘아, 왜 또 죽었어.’, ‘역시 신 포도 캐릭터.’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텍스트 창을 끄고 게임을 진행하곤 했다.
시점만 조금씩 달라질 뿐, 게임을 어떻게 플레이해도 세이르는 성인이 되기 전에 죽으니까. 그런 게임이었으니까.
그때의 내 행동과 지금 이 꿈은 아무 상관이 없을 텐데도, 나는 그때의 일이 몹시 후회되었다. 줄글 몇 줄에는 다 담을 수 없는 고통이 눈앞에 있었다.
깨어날 때가 되었는지 눈앞이 깜빡깜빡했다. 흐린 시야 속, 해독제를 먹인 사람이 바닥을 치며 말했다.
“아, 안 돼. 또…… 늦었어. 여기서 네가 죽으면.”
울음이 섞여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의식이 멀어져 가는 와중, 말의 끝부분만이 귓가에 닿았다.
“……를 깨울 수 없어.”
나는 확 눈을 떴다. 푹신푹신한 침대 위였다. 갑자기 풍경이 변해 잠시 현실감이 돌아오지 않았다.
“으, 하암…….”
시계를 보니 얼추 한 시간 정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나른한 몸을 침대 위에서 일으켰다.
그나저나 꿈자리가 영 뒤숭숭했는데.
어째 로코가 옆에서 자면 꼭 이상한 꿈을 꾸는 것 같단 말이지.
내 품에 푹 파묻혀 낮잠을 즐기던 로코도 때마침 눈을 떴다. 나는 로코를 양손으로 꽉 붙잡고 물었다.
“로코, 너야?”
“피이이잇?”
로코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날개만 파닥거렸다.
“너지? 네가 나한테 이 꿈을 보여 준 거야?”
“피이잇? 피이잇? 피이잇?”
로코는 눈을 데구루루 굴리더니 날개를 한층 더 빠르게 파닥거렸다. 몇 번 더 추궁해 보았지만 ‘피이잇?’ 외의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으으음…….”
나는 로코를 품에 안은 채 잠시 생각했다.
꿈속에서 세이르가 죽는 모습이 너무 생생했다. 꿈은 꿈일 뿐, 현실이 아닐 테지만.
‘꿈이 너무 진짜 같아서 찝찝한데, 한번 가보기라도 할까.’
만약 꿈처럼 성검의 파멀에 해독제가 있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의심하려나.
그래도 모르는 척하기는 찜찜하다.
어차피 세이르에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케이크를 먹여 주기로 약속했으니, 내일은 별장에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래, 이 정도는 괜찮겠지. ‘깊이 관여’하는 거도 아니잖아.
그렇지?
* * *
다음 날.
“안녕, 세이르.”
창문을 타 넘고 방 안으로 침입하자, 세이르는 얼빠진 표정을 하고 나를 보았다. 저런. 세 번째 방문이니까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됐을 텐데.
“오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응, 들었지.”
“그런데?”
나는 세이르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턱을 괴고 씩 웃으면서 말했다.
“들었다고 꼭 그 말에 따라야 해? 세이르, 아무리 잘생겼다지만 너무 자신만만하지 않아?”
“하아, 무슨 말을……. 됐어, 말을 말자.”
“잘 생각했어.”
허락도 받았겠다, 나는 소중하게 챙겨 온 레몬케이크를 꺼내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자, 맛있겠지? 얼른 이거 먹어 봐.”
세이르는 아직 나를 약간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일단 케이크를 먹여서 그의 기분을 좋게 한 뒤 분위기를 봐서 꿈에서 본 해독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이 레몬케이크는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맛이다. 이걸 먹으면 이 염세주의 꼬맹이의 마음도 조금 누그러지겠지.
내 재촉에 세이르는 마지못한 척 포크를 손에 들었다. 나는 흥미진진하게 세이르가 포크로 레몬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큽, 쿨럭……!”
세이르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